23화 우승을 바라는 사람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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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기의 결과가 마린스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한 시즌은 144경기나 됐고, 아마 어제 경기는 시즌이 끝나고 운이 좋았던 경기, 재밌었던 경기 정도로 회상 되는 게 다일 거다.
하지만 나한테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줬다.
난생 처음으로 종교를 가졌다, 뭐 이런 건 아니고.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여러 1군 투수와 호흡을 맞춘 경기였다.
첫 경기엔 연장에 나와 이호민과 2이닝, 그리고 두 번째 경기엔 선발 출장해 허하준의 공만 받았다.
경기 외적으로 웰릭스의 공을 받긴 했지만 그 외에 다른 투수들과 교류는 없었다.
먼저 다가갈 수도 있었다.
근데 비는 시간마다 허하준, 강기호, 강주호 등이 찾아와 얘기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1군에 온 지 며칠 안 되기도 했고.
그러다 어제 하스가 내려간 이후 이호민을 거쳐 8회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인 박상훈과 셋업맨 정태석.
9회엔 마무리 투수 이용기와 배터리를 이뤘다.
사실 셋 다 좋은 불펜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필승조 불펜의 방어율이 전부 5점이 넘었고, 리그 중반이 돼가도록 홀드와 세이브는 각 10개를 넘지 못했다.
특히 이용기는 내가 콜업 된 첫날, 9회에 대거 5실점을 하면서 무너졌던 기억이 있으니 2점 차의 리드에도 솔직히 약간 불안했다.
그래도 처음 이용기의 공을 받은 소감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 다르게 깔끔한 피칭으로 마무리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한테만 좋게 남지 않았다.
“수호야. 공 좀 받아줄래?”
오늘 선발인 김호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훈련하러 가는지 편한 복장의 이용기를 우연히 만나자 대뜸 공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경기 후반,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특히 마무리 투수가 올라오는 경기 특성 상 타격보다 수비가 좋은 포수로 교체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물론 내가 다른 두 포수와 비교해서 떨어진다는 건 아니었지만, 이용기가 날 편하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니까.
간단하게 같이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공을 받았다.
결과는 이용기의 웃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특히 요즘 연습 중이라는 포크볼을 정확히 블로킹했을 때 보인 잇몸이 인상 깊었다.
“고생했다 수호야. 다음에도 부탁할게?”
“예.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끝났냐? 나도 한 번만 받아줘라.”
어쩌다 보니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다른 투수들의 공을 받게 됐다.
이건 김호기가 훈련장에 올 때까지 반복됐다.
김호기의 경력이 긴 편은 아니지만, 가장 우선순위는 오늘 선발투수였다.
자신의 앞에서 매진됐다는 걸 들은 손님처럼 아쉬워하면서 투수들이 떠나가자 김호기가 어리둥절하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오셨어요? 투수들이 공 좀 받아 달라 해서요.”
“그래? 벌써 인기가 많네. 다행이다. 저점일 때 매수해둬서.”
“매수요?”
“저번에 얘기해준 값, 안 잊었지?”
김호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근데 내 기억이랑 조금 다른데?
“저번에 그건 서비스 아니었어요?”
“맞아. 근데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는데 어때, 살래?”
“좋아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값이라곤 홈런 1개를 치겠다는 약속 뿐.
실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마 홈런 못 쳤다고 구박할 사람으론 안 보였다.
그냥 이런 걸 좋아하는 거 아닐까?
“오케이. 접수. 그럼 오늘 경기 최소 1 대 0이네? 좋아.”
음. 설마 진심이었나?
아무튼 김호기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흥미로웠다.
“운영팀장, 그만뒀어.”
“예?”
“말 그대로야. 오늘 사표 내고 나갔대.”
내가 직장을 안 다녀서 그런데, 그만두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정확히 말하면 사장님이 단장님하고 감독님한테 힘을 실어 준거지.”
“왜요?”
“글쎄?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다.”
살짝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괜히 신경 쓰는 것보단 나았다.
허하준의 조언 이후 운영팀장에 대한 생각은 이빨에 낀 고춧가루 정도였으니 크게 신경 쓴 건 아니지만, 가끔 생각나면 걸리적거렸다.
“어때? 이 정도면 홈런 하나 값은 하지?”
“아뇨. 이유를 모르잖아요. 오늘은 홈런 대신 안타로 할게요.”
그 이후 김호기와 본격적으로 훈련하면서 운영팀장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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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영팀장이 팀을 떠난 이유는 김수호의 공이 컸다.
정확히 말하면 공이라기 보단, 우연의 산물이다.
허하준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그날, 구단주가 사장과 단장을 대동한 채로 그 경기를 봤다.
“허, 우리 팀에 저런 선수가 있었나?”
날카롭게 떨어지는 허하준의 스플리터와 그걸 안정적으로 잡아내는 김수호.
그걸 보고 감탄하는 구단주의 말에 사장이 단장에게 눈짓했지만, 단장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강주호 부상 이후, 이정훈 감독의 부탁을 받아 콜업을 한 것까지는 단장 본인이 한 일이 맞았다.
어제 포수를 본 것까진 알고 있다.
근데 선발로 출전?
그것도 허하준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고?
하지만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모른다고 아무 말 못 하는 사람이었으면 단장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다.
“크흠. 저희 2군에서 성심을 쏟아 키운 유망주입니다. 별명이 리틀 강주호일 정도로 아주 유망한 선수입니다. 어제 경기에서도 첫 타석에 끝내기 홈런을 쳤습니다.”
“리틀 강주호라···. 좋군. 근데 하는 걸 보면 리틀 강기호가 더 맞겠는데?”
구단주가 마음에 드는 듯 내뱉은 말을 안주 삼아 잔을 비웠다.
“피닉스의 황인재 선수 있지 않습니까?”
“음? 알지.”
사장의 입에서 나온 황인재의 이름을 들은 구단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부산 출신의 유망주.
마린스의 성적이 부진해 쓰린 속을 달래주던 유일한 동지 피닉스.
그 구단이 앞서가는 이유가 한 명의 선수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속이 쓰리던지.
그놈의 전면 드래프트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마린스에서 활약했을 선수 아닌가.
“그 선수와 동기입니다.”
“그래? 그럼 부산 출신이겠구먼.”
다행히 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나마 좋은 소식이었다.
[삼진 아웃!]
때마침 완벽하게 타자를 속이고 땅에 닿은 공을 바운드를 맞추며 잡아내는 김수호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렇지!”
-짝!
그 모습을 보며 잔을 내려놓고 손뼉까지 치는 모습에 단장과 사장의 머릿속에 김수호라는 이름이 각인됐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8회 터진 김수호의 적시타와 마지막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걸 보면서 극에 달했다.
“허허. 자네들 엄살이 심하군.”
“예?”
“얼마 전까지 허하준이 공을 잡을 포수가 없다고 사달라 하지 않았나.”
안 그래도 술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사장과 단장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구단주가 말한 게 맞았다.
“저렇게 잘 잡는 포수가 있는데 굳이 헛돈 쓸 필요 없지.”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단장의 눈이 아득해졌다.
‘설마 투자를 안 하겠다는 소린가?’
김수호가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번 경기에서 잘한 선수가 당장 내일 부진을 겪는 게 야구였고, 심지어 신인 선수는 언제 부진에 빠질지 몰랐다.
단장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오늘 김수호 선수가 좋은 모습···.”
“잠깐. 인터뷰하는 거 들어보자고.”
구단주는 인터뷰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 아주 마음에 들어. 효심도 좋고, 감독도 잘 따르는 걸 보니 인성도 좋고.”
‘하지만 오늘 데뷔한 신인입니다!’
단장 마음속의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단주는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사달라던 포수가 얼마라고?”
“4년 90억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리는 인천 스타즈의 포수 최필주.
겨우 확답을 받아낸 90억은 그를 위한 돈이었다.
“90억···. 좋아. 60억 더 얹어 줄 테니 포수 말고 다른 포지션도 보충해보게. 포수는 저 친구면 되겠어.”
“예?”
“왜? 싫나?”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서 단장이 90도로 인사를 건넸다.
“됐네. 감사는 저 친구한테 해야지. 나머지는 실무자들이 얘기하고, 쩐주는 이만 가보겠네.”
구단주가 핸드폰을 들어 비서를 호출했다.
비서가 오는 동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감독한테 저 친구를 쓰라는 압박을 주란 소리가 아니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예.”
“그래.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그 말에 곧장 문 앞까지 배웅한 단장과 사장이 자리로 돌아왔다.
“저 선수 뭡니까?”
어제 경기, 극적인 무승부 끝에 연장에 임시 포수로 나와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 정돈 사장도 알고 있다.
야구에 잘하는 선수는 많다.
하지만 스토리까지 완벽한 잘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린스는 축복받은 구단이다.
강주호가 그랬고, 강기호가 그랬고, 허하준이 그랬다.
그래서 운영팀장에게 김수호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정보를 조합해본 결과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차기 프렌차이즈 스타로 생각 중이라는 말까지 흘렸다.
근데 허하준과 노히트를 합작한 건 다른 얘기다.
심지어 경기의 들러리가 되지 않았다.
결승타를 때려낸 건 김수호였으니.
“단장님도 참, 저런 선수가 있었다면 미리 언질 좀 해주시지. 약간 서운할 뻔했습니다.”
“흐흐흐. 원래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제일 좋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한잔하시죠.”
뜨거운 액체가 목을 넘어가는 걸 느끼며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기회, 흔치 않을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구단주 입에서 나온 150억.
구단주가 이 정도의 투자를 결정한 건 강주호와 강기호의 복귀 시기까지 가야 한다.
강기호가 부상으로 은퇴하고 팀이 부진하자 구단주는 야구에 관한 관심을 끊었다.
오늘 자리도 겨우 허하준이라는 이름으로 꾀어낸 자리였다.
결과가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만약 김수호만 제 몫을 해준다면 최상의 결과였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상상하기도 싫다.
잠시 정적 이후, 사장이 핸드폰을 꺼내 무언갈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
“선수가 감독을 믿고 따르는 것 같습니다.”
“이정훈 감독이야, 워낙 좋은 코치로 유명했으니까요.”
“그렇죠.”
이제 선택할 시간이 됐다.
새로 부임한 단장과 감독에 힘을 실어주느냐, 혹은 계속해서 운영팀장에게 힘을 실어주느냐.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하겠지만, 선택은 어려울 것 같진 않다.
“이거까지만 드시고 일어나시죠. 150억으로 구상하려면 시간이 생각보다 빠듯할 겁니다.”
“좋습니다.”
단장의 술잔에 담긴 술은 화려한 불빛이 반사되면서 찰랑거렸고, 사장의 핸드폰에 켜있던 화면은 곧 제 미래를 암시하듯 암전됐다.
[운영팀장 : 김수호 제가 꽂았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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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정해진 시간 없이 27개의 아웃카운트를 다 잡은 시점에서 점수가 높은 팀이 승리하는 스포츠다.
시간제한이 없다는 건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어제 삼중살처럼 허무하게 아웃카운트 3개를 헌납하기도 하고,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큰 점수 차이가 나도 동점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 경기도 그랬다.
김호기와의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우완 사이드암 투수의 공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연습 과정에서 큰 문제는 없었고, 경기 상황도 좋았다.
4회까지 1실점.
타선은 힘을 내지 못해서 1 대 0으로 끌려가는 중이었지만, 상대 투수 역시 4선발.
이 점수 차이만 유지한다면 충분히 역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5회가 시작되고, 선두 타자의 평범한 타구를 유격수 이오준이 더듬고 말았다.
어제 경기에 이어 이번 경기에서도 실책을 범한 이오준은 결국 이닝이 끝나기 전에 이민상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교체가 됐다고 실책으로 나간 주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사 주자 1루.
하필이면 발 빠른 주자가 루상에 나가버렸다.
“볼!”
공을 받아보자 확실히 김호기가 1루 주자를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아까까지 제구가 잡히던 투심이 완전히 빠졌다.
1루 주자가 뛰진 않았지만, 차라리 맘 편하게 뛰는 게 나을 뻔했다.
“볼!”
주자가 절묘하게 리드폭을 조절하며 계속 김호기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탓에 투심 제구가 완전히 엉키면서 다시 한번 볼.
“잠깐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결국 심판에게 말을 하고 마운드로 향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하. 쪽팔리네.”
김호기가 애꿎은 땅만 발로 찼다.
“주자가 신경 쓰이세요?”
“쓰읍. 무시하기가 쉽지 않네.”
김호기의 성적을 보면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가장 볼넷이 많았다.
도루 허용도 80% 이상 될 정도로 높았고.
“그럼 이렇게 할까요?”
“뭔데?”
“2루로 보내고 타자랑 승부하죠.”
“어?”
“어차피 주자 들어와도 1점 찬데 볼넷 내주는 것보단 낫잖아요.”
“뭐라는 거야. 지금 1대0이야. 상대가 1.”
김호기가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네? 1대0이요?”
“집중 안 해?”
“아뇨. 제 말은 오늘 1대0으로 시작했는데 왜 1대0이냐는 거죠.”
내 말에 잠깐 생각하던 김호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미친놈아. 그건 홈런부터 치고 말해.”
“오늘 안이니까 아직 4이닝 남았어요. 아무튼 주자 들어와도 1점인데, 그냥 2루 보내고 타자 상대하죠.”
“어떻게 2루에 보내게?”
“글쎄요? 가운데 꽂으면 알아서 뛰지 않을까요?”
내 말에 주자를 살짝 쳐다보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강주호 선배한테 얘, 걔 아니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때 미친놈이라고 한 게 선배님이었어요?”
“그래 임마.”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
“그래. 그냥 2루 보내자. 가운데 꽂을게. 잘 잡아라.”
“옙. 그럼 전 돌아가겠습니다.”
자리에 돌아와서 존 약간 바깥쪽에 미트를 올렸다.
그걸 본 김호기가 심호흡하고 곧바로 투구를 시작했다.
“2루!”
김호기가 공을 던질 때 더그아웃에서 콜이 나왔고, 공은 정확하게 미트 안으로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아, 근데 김호기에게 한 가지 말을 안 한 게 있다.
-탁!
“아웃!”
나는 주자가 2루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