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21화 (21/203)

21화 우승을 바라는 사람들 - 2

#

키가 큰 투수가 던지는 공은 마치 아파트 2층에서 날아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실제로 아파트 2층에서 던지는 공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웰릭스의 투구를 보자 그 말이 이해됐다.

역동적인 투구폼에서 날아오는 공은 그야말로 내려 꽂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공은 미트가 있는 정중앙이 아니라 우타자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졌다.

이거 딴생각하다가 다치기 딱 좋겠는데?

무리 없이 잡긴 했지만, 초구부터 이러면 곤란하다.

“미안 미안.”

웰릭스가 손을 흔들고 공을 다시 던져 달라는 듯 글러브를 벌렸다.

자세를 잡고 있자 다시 공을 던졌다.

“나이스 볼!”

이번엔 미트에 비슷하게 들어왔다.

이후로 10구 정도 공을 받았는데 확실히 제구가 들쭉날쭉했다.

하지만 미트에 꽂힐 때 느껴지는 구위는 묵직했다.

허하준과 이호민의 중간 정도일까?

포심은 제구가 흔들려도 잡을 정도는 됐다.

하지만 커브가 문제였다.

웰릭스가 구사하는 커브는 12 to 6라 불리는 커브.

그 커브를 처음 잡아보는 것도 있지만 제구가 워낙 제멋대로였다.

“나이스!”

어떨 때는 알아도 치기 힘든 곳으로 들어오더니, 그다음엔 바로 정중앙에 꽂힌다.

종잡을 수 없는 투수.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랬다.

“어때? 노히트노런 가능하겠어?”

“글쎄요. 하나 확실한 건 웰은 제가 잡아본 투수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들어요.”

참고로 내가 공을 받아본 투수는 허하준, 이호민, 웰릭스를 제외하면 전부 2군에 있다.

“그래?”

내 말을 듣고 기분 좋은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도 내 공을 잡아본 포수 중 세 손가락에 들어, 루키.”

마운드에서도 이렇게 단순하면 좋겠는데.

#

아쉽게도 웰릭스는 마운드에서 상당히 예민한 모습이었다.

내가 직접 공을 받으면서 알아낸 건 아니고, 더그아웃에서 투구하는 걸 보고 있으니 보였다.

0 대 0으로 팽팽한 3회 초.

선발로 나온 주동훈의 리드에 계속 고개를 젓더니 결국 안타를 허용하고 화를 냈다.

심지어 이닝을 끝낼 수 있는 타이밍에 3루수의 실책까지 더해지자 안 그래도 흔들리던 제구가 완전히 망가졌고, 결국 대거 4실점을 허용하고 겨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더그아웃에 돌아온 웰릭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주동훈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3회에 4점.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점수차였지만,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배터리가 어제 노히트노런으로 패배해 잔뜩 달아오른 돌핀스 타선을 4점으로 막을 수 있을까?

#

[마린스 3 : 15 돌핀스]

[어제와 다른 모습의 배터리, 진짜는 누구?]

[돌핀스, 어제의 패배를 설욕하듯 대폭발한 타격!]

[타격감 최고조! 김수호, 대타로 나와 1타점 적시타!]

[이규영, ‘우리는 마린스에게 진 게 아니라 허하준과 김수호에게 진 것’]

#

[그래서 오늘 김수호 왜 선발로 안 나옴?]

감독아 제발 이상한 자존심 내려놓고 그냥 수호 쓰자.

ㄴ ㄹㅇ 이재익, 주동훈이랑 타격부터 다른데 왜 안 쓰는 거냐?

ㄴ 오늘 웰릭스 얼굴 보니까 홍익인간인 줄 ㅋㅋ

ㄴ 그래도 돌핀스 상대로 위닝 했으니 만족.

ㄴ 그 위닝 따낸 경기 mvp가 누구?

ㄴ 그 mvp를 안 쓰는 감독이 누구?

#

마린스의 올 시즌 운명을 결정지을 3연전은 다행히 2승을 먼저 거두면서 위닝시리즈를 확정했다.

마지막 경기가 대패로 끝나긴 했지만, 어쨌든 1등 돌핀스를 상대로 거둔 귀중한 위닝시리즈였다.

나도 마지막 경기에 대타로 나와서 타점을 올렸다.

3경기 연속 타점.

하지만 경기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희망을 살린 홈 3연전이 끝났고, 이제 고난 시작이다.

당장 내일부터 펼쳐질 서울 챌린저스와의 주말 원정경기, 다음 주 수원 나이트와 광주 울프즈 원정경기까지.

기나긴 원정 9연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디 하나 만만한 팀이 없다.

물론 상대 팀은 마린스를 만날 생각에 싱글벙글하겠지만.

첫 1군 원정경기.

서울까지 버스로 장시간 이동하는 동안 내 옆에 앉은 사람은 강기호였다.

가는 동안 계속 이론적인 부분을 공부하면서 가자 시간은 금방 흘렀고, 한동안 머물 숙소에 도착했다.

“킴.”

타자조 중 가장 막내라 열심히 짐을 빼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피부에 인상적인 문신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하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영어로 말을 걸었지만 다행히 하스 옆엔 통역이 있었다.

“예. 잠시만요. 하던 거만 하고 찾아갈게요.”

어제 웰의 공을 받을 때 별말 없더니 무슨 일이지?

내 짐을 찾고 숙소에 둔 뒤, 하스를 찾아갔다.

버스에선 나란히 앉았던 것과 다르게 다행히 방은 1인 1실이었다.

“들어와.”

“무슨 일이에요?”

숙소 안 의자에 앉자 하스와 통역 역시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잠깐 손 좀 주겠어?”

“예 뭐.”

손을 탁자 위에 올리자 하스가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통역에게 눈짓으로 물어봤지만, 그저 괜찮다는 말만 돌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 됐다. 고마워.”

“뭘 한 거예요?”

“레타쿠에게 너에 대해 물어봤다.”

“레타쿠는 하스의 고향에서 믿는 조상신이에요.”

음.

뭐라는 거지?

통역이 설명해 주긴 했지만 얼떨떨하다.

근데 몸에 새긴 문신이나 진지한 눈빛을 보면 진심으로 하는 말 같긴 한데.

내가 종교를 안 믿어서 이 행위에 대해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걸 계기로 친해지면 나쁠 건 없으니 그 레카쿠라는 신에 대해 물어봤다.

“레카쿠 신이 뭐래요?”

“레타쿠.”

“아, 죄송해요.”

이런 실수.

“레타쿠가 말하길, 김수호 너는 거대한 방패를 들고 적을 막아주는 가디언과 같다.”

“가디언이요?”

가디언 뜻이 수호자였나?

어? 수호?

“그래. 네 운명이지.”

“아···. 예. 고마워요.”

“그래서 김수호, 네게 제안할 게 있다.”

“뭔데요?”

종교 권유는 좀 그런데.

“내일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겠나?”

“호흡이라면 배터리요?”

“그래.”

“저야 환영이죠.”

방에 들어올 때부터 혹시 했던 말이 하스의 입에서 나왔다.

정작 공을 받아본 웰은 다른 포수와 호흡을 맞추고 제대로 얘기 한 번 못해본 하스가 먼저 제안할 줄은 몰랐지만.

물론 하스의 제안으로 결정하기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근데 그게 저희 맘대로 될까요?”

“걱정하지 마라.”

오늘 경기엔 대타와 1루 수비를 한 만큼 감독님은 아직 나를 선발로 쓰기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아무리 외국인 투수라도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지 않을까?

"네 의견만 괜찮다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겠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하스는 자신에게 맡기라며 큰소리쳤고, 내일을 기약하며 통역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놀라셨죠?”

“예. 조금요.”

“자주 저러는 친구가 아닌데, 수호 선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런가요?”

“예. 그리고 내일 선발로 나가는 건 아마 될 거예요.”

이 사람은 무슨 근거로 확신을 하는 거지?

“하스가 지금 몇 승인지 아세요?”

“아니요?”

팀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투수 개개인의 승까진 알지는 못한다.

“하스 방어율이 4점대인데 벌써 8승이에요.”

“8승? 진짜요?”

꼴찌팀 투수가, 그것도 3선발이 4점대에 8승이라고?

운이 얼마나 좋은 거야?

“놀랍죠? 근데 더 놀라운 건 8승이 전부 자신이 원하는 포수랑 할 때 나왔어요.”

“그 정도면 야구 선수가 아니라 점집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아무튼 감독님도 최대한 하스에게 맞춰주려고 하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감독님이 그런 초월적인 걸 믿는 분이셨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통역이 말을 이어갔다.

“정말 레타쿠 신이 있다고 믿기보단, 하스 스스로가 마운드에서 레타쿠가 점지해준 포수와 합을 맞춘다는 거에서 자신감을 얻는다고 판단 한 거거든요. 아무래도 투수는 마운드에서 자신감이 중요하니까요.”

이 사람도 하스랑 붙어있다보니 신기가 들렸나?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지?

아무튼 이해가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웰릭스는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해도 될 만큼 최악이었으니까.

그리고 일종의 징크스나 루틴 같은 거로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아, 그리고 가디언 얘기는 제가 미리 수호 선수 이름 뜻을 설명해줘서 나온 거예요. 큰 의미 두지 마세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했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다.

그럼 의문도 풀렸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레타쿠를 믿는 하스를 믿고 매번 했던 것처럼 챌린저스 타자들과 선발 투수의 스카우팅 리포트를 읽는 것 뿐이었다.

#

이정훈 감독이 내린 선택, 허하준과 김수호 배터리.

그건 한국 야구 역사상 획을 긋는 기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 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이유에 운영팀장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수호의 인터뷰를 듣고 하루 동안 고심을 한 결과, 감독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제 통역이 내비친 자신감처럼 훈련 시작 전, 김수호는 이정훈 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앉아라.”

“예.”

김수호가 들어오자 감독이 고민했던 얘기를 꺼냈다.

“수호야. 인터뷰에서 네가 한 얘기 다 들었다.”

“넵.”

김수호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킬 만큼 긴장되는 말이었다.

“미안하구나.”

“예?”

“후. 그놈의 자리가 뭔지, 야구를 하려고 온 너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였어.”

설마 감독이 사과할 거라고 생각 못한 김수호가 당황해했다.

하지만 감독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마린스에 온 이유.

마린스의 우승과 허하준이라는 투수를 제대로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자리가 주는 안정감에 연연하고자 했다면 국가대표 코치를 포기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해줄 선수가 앞에 있는데 고작 정치질 때문에 고심한 것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닙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구나.”

때마침 그의 결정을 도와주는 제안이 있었으니 고민은 짧고 결정은 빨랐다.

“하스가 먼저 너한테 포수를 제안했다고?”

“예. 맞습니다.”

“흐음. 하스에 대해선 들었고?”

“어제 같이 간 통역분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만약 부담스러···. 허, 네 표정을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구나.”

괜한 걱정임을 깨달은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포수로서 공을 받을 때나 인터뷰할 때 워낙 담담한 모습을 보여서 제 나이 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흥분한 모습을 보이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오늘 네가 선발 포수다. 좋은 모습 기대하마.”

만약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내일도.

뒷말은 삼킨 채 감독은 흥분한 김수호를 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

사실 선발이 확정됐다고 해서 경기 전 일과가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하스와 호흡을 맞추는 건 처음이기 때문에 경기 전에 잠깐 만나기로 했다.

“내 구종은 포심, 투심, 커터, 그리고 슬라이더다.”

세 가지 패스트볼 계열과 낙차 큰 커브.

그 외에도 체인지업을 던질 순 있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

좌완 답게 슬라이더를 활용해 좌타자는 꽤 잘 잡아내는 편이었지만, 우타자에게 깨나 고생한다.

“평소에 우타자는 어떻게 상대했어요?”

“레타쿠께서 처리해주신다.”

하스와 계속 대화하다 보니 레타쿠를 어떨 때 쓰는지 알겠다.

레타쿠라는 말이 나오면 대체로 운이 필요할 때였고, 실제로 그의 바빕(BABIP) 기록은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일까?

하스는 삼진 보다 맞춰 잡는 걸 선호했다.

돌핀스의 존 그레이 같은 경우 팀의 수비가 워낙 좋다 보니 그게 잘 어울렸지만, 우리 팀은 수비가 좋은 팀이 아니다.

근데 어떻게 8승이나 거둔 걸까?

#

오늘 내 타순은 7번.

높은 확률로 1회 때 타석에 들어설 일이 없다.

하지만 하스가 선발인 탓일까?

상대 선발의 제구 난조가 이어졌고, 대거 2득점을 한 상태로 내 앞에 주자가 가득 차 있다.

1사 만루 상황.

-따악!

바깥쪽 높게 오는 공을 건드려 외야로 타구를 보냈다.

“아웃!”

희생 플라이로 1타점을 올리고, 8번 타자 이준의 땅볼로 이닝이 끝났다.

3점의 리드를 얻은 하스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돔구장은 처음이었지만 공을 받는 건 별문제 없었다.

오히려 여름답지 않게 시원하고 쾌적해서 공 받을 맛이 났다.

하지만 그건 내 얘기였지, 인플레이 타구를 처리해야 하는 야수들과는 달랐다.

1회 초엔 상대 투수의 제구 난조가 우리를 도와줬다면, 1회 말엔 천연 잔디로 된 구장이 홈 팀을 도와줬다.

“세이프!”

실책과 안타, 그리고 다시 실책.

1회부터 2실책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 무사 만루.

하스의 상태를 확인하러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멀쩡했다.

레타쿠가 우릴 안내할 거다, 레타쿠가 내린 시련이다, 레타쿠가···.

이런 얘기만 잔뜩 나누고 다시 돌아왔다.

웰릭스처럼 화내는 것보단 나았지만, 너무 여유로운 것도 무서울 지경이다.

근데,

“아웃!”

“아웃!”

“아웃!”

4번 타자의 타구가 순식간에 3루수 글러브 속으로 사라지고 그대로 2루, 그리고 1루에 송구하면서 올 시즌 첫 삼중살을 기록하자 하스가 달라 보였다.

나도 레타쿠 믿을 수 있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