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리틀 강주호? 리틀 강기호?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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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직전 장비를 차고 관중석을 훑어봤다.
관중 수가 늘어난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제 역전에 역전을 하는 명경기를 펼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 태반이 저 사람을 보러 왔을 것이다.
나갈 준비를 마친 허하준을 쳐다보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별거 아니에요. 컨디션은 어떠세요?”
“나야 항상 똑같지. 나보다 네 컨디션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첫 선발인데 어때?”
“저도 똑같아요. 어제랑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밝을 때 올라가서 좀 덥겠다는 것 정도?”
“그 정도면 괜찮네. 걱정하지 마, 네가 이 땡볕에 쭈그려 앉아 있을 시간은 별로 안 될 테니까.”
“선배가 땡볕에 있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고요?”
그도 그럴 것이 허하준의 피부는 운동선수답지 않게 하얬다.
“그런 것도 있고. 그래서 오늘 볼 배합은 어떻게 하려고?”
분명 분석팀과 같이 짠 볼 배합이 있는데 왜 물어보는 거지?
“아까 다 짰잖아요.”
“그래도 널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데 뭐라도 보여주면 더 좋아하지 않겠어?”
“네?”
허하준이 그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운영팀장. 과연 갔을까?”
“....”
그다지 반가운 말은 아니었다.
나는 야구선수고 구단 내부의 정치질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감독님 역시 정치질에 눌려서 날 선발로 뽑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마지막 내게 질문을 하면서 보여줬던 날카로운 눈빛.
그냥 그 눈빛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수호야. 이거 하나만 알아둬.”
“뭔데요?”
“억만장자에게 주는 돈은 뇌물이 아니다.”
“네?”
“넌 얼마 안돼서 선발이 될 운명이었어. 그게 조금 빨라졌다고 해서 운영팀장 덕이 아니란 거지. 이거만 명심하면 네가 갈 길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이 사람은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다.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부담스럽다기보단 오히려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짙어진다.
“준비 다 했어?”
“예. 가시죠.”
내 말에 허하준이 싱긋 웃더니 글러브를 챙기고 마운드로 향했다.
그늘에서 햇볕으로 들어가자 습하고 뜨거운 열기가 헬멧을 타고 흐른다.
1루수로 섰을 때와 확연히 다른 느낌.
포수란 포지션은 하면 할수록 단점만 느껴진다.
처음엔 투수를 신경 쓰면서 타자까지 신경을 건드리니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그 이후엔 주자가 신경을 건드린다.
이젠 날씨까지 포수를 저주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래도 장비가 주는 묘한 안정감이 좋았고, 타자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야생마 같은 투수를 길들이는 것도 재밌다.
너무 변태 같은가?
그래도 이런 쪽에서 즐거움을 찾아야지, 안 그러면 오래 할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니다.
모든 야수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박수 소리와 함께 장내 아나운서가 오늘의 선발 투수 이름을 외치자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들린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사이 돌핀스의 1번 타자 이규영이 심판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안녕하세요.”
“결국 선발까지 하는 거야? 대단하네.”
“감사합니다.”
“그래, 뭐. 잘 부탁해.”
어제 나한테 도루자를 당했지만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차라리 시비를 거는 타자라면 무시 하겠는데, 웃고 있으니 상대하는 게 더 까다로웠다.
다행히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심판이 허하준에게 사인을 줬고, 초구로 포심을 던지겠다는 사인을 받았다.
코스는 바깥쪽 보더라인 근처.
사인을 교환한 허하준은 특유의 편한 폼으로 공을 뿌렸다.
“스트라이크!”
약간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이규영 역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항의하지는 않았다.
공 반 개 정도 되는 너비였지만, 이 정도만 해도 경기 운영이 한층 쉬워진다.
2구는 다시 바깥쪽 포심.
“파울!”
이번에는 이규영의 방망이가 나왔다.
하지만 겨우 걷어내는 정도에 그쳤고 리그 최고의 교타자에게 0-2이라는 좋은 볼카운트를 가져가는 상황.
다음 사인을 확인하자 아리송해졌다.
‘이거에 속을까?’
하지만 확고한 허하준의 의지에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허하준이 이호민도 아니고,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족스러운 듯 허하준이 자세를 잡고 공을 뿌렸다.
치기 좋은 포심처럼 존 중앙 아래쪽에 날아드는 공.
하지만 홈 플레이트 주변에만 중력이 강한 듯, 공은 급격하게 꺾여서 홈 플레이트와 닿았다.
이미 공이 떨어질 때부터 땅에 닿아있던 무릎의 각도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정확하게 가랑이 사이에 있는 미트 속으로 공이 들어왔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공을 잡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규영의 엉덩이에 살포시 미트를 가져다 댔다.
“아웃!”
“... 잡았니?”
“예? 예.”
미트를 열어 공을 보여주자 처음으로 이규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좀 그런데.”
혼자 뭐라 중얼거리더니 돌핀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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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ㄷㄷ 허하준 스플리터 각 뭐냐?]
데뷔 이후 저 정도 스플리터 못 던지는 거 아니었음?
ㄴ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때 부상 때문에 욕 존나 했는데 이번에 부상 복귀하고 다시 감 찾은 듯?
ㄴ ㄴㄴ 저번 국대에서 던진 공이 저 정도 됨.
ㄴ ㄹㅇ? 근데 왜 안 던짐?
ㄴ 가설 1. 크보 타자 수준엔 저 정도 스플리터는 필요 없다.
가설 2. 저 공을 받았던 포수는 데뷔할 때 강기호, 국대 양준. 이걸 생각하면 저 둘이 아니면 못 던졌다. 근데 김수호가 존나 잘 잡아서 던질 마음이 생겼다.
ㄴ 아, 그럼 오늘 김수호 선발 나온 것도 이해가 되네.
ㄴ 개소리 ㄴ. 걍 곧 메이저 가니까 보여주는 거지. 오늘도 스카우터 왔더만.
ㄴ ㅋㅋㅋㅋ 솔직히 윗 댓 말이 맞는 듯? 지금까지 못 던진 걸 김수호 때문에 던질 수 있다? 걍 소설을 쓰셈.
ㄴ 근데 김수호 블로킹 존나 깔끔한데? 진짜 그런 거 아님?
ㄴ 운임.
현재 마린스 갤러리를 불태우는 주제.
허하준의 스플리터가 왜 더 좋아졌는가.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주된 의견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허하준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투수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지난 2028년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며 증명했다.
그리고 곧 다가올 2032년 올림픽.
허하준의 마지막 쇼케이스가 될 것으로 유력한 무대를 위한 일종의 스텝업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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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감독이 굳이 마린스 감독으로 온 이유를 말하자면 2가지였다.
첫 번째는 마린스.
전국구 인기 구단인 마린스는 독이 든 성배라 불리지만 감독으로서 한번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팀이다.
두 번째는 허하준.
이정훈 감독은 현재 마린스를 넘어 대한민국 에이스라 불리는 투수와 함께하고 싶었다.
투수 출신의 이정훈 감독은 국가대표에 투수 코치로 선출될 만큼 뛰어난 코치였다.
그리고 2028년 올림픽.
사춘기 남자애처럼 허하준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150km 중반에 육박하는 포심과 스플리터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투수.
특히 스플리터는 볼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궤적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마린스 감독이 되자 그 공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포수가 없다.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는 보통 전담 포수가 있거나 뛰어난 포수가 있어야만 던질 수 있다.
그만큼 변화가 심했고, 평범한 포수는 잡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허하준의 스플리터도 마찬가지였다.
‘허하준의 수준에 맞는 포수가 없다.’
스플리터는 필연적으로 블로킹을 수반한다.
하지만 고속으로, 그것도 엄청난 각도로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매번 성공적으로 블로킹할 만한 한국 포수는 현재 마린스 코치인 강기호와 국가대표 포수인 양준밖에 없다.
아니, 없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저걸 잡아내다니.’
세 타자 연속 삼진.
고작 11구 만에 이뤄낸 기록.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김수호의 블로킹 성공률이었다.
100%.
자신이 봤던 훈련 장면과 분석팀장이 준 정보가 정확했다는 증거이자,
운영팀장이 그의 속을 긁어놨음에도 오늘 경기에서 김수호를 선발로 내보낸 이유였다.
“강 코치.”
“예. 감독님.”
감독과 같이 감탄하고 있던 강기호가 감독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자네는 저 장면을 예상하고 김수호를 포수로 추천한 건가?”
“음···. 예. 맞습니다.”
명포수는 다르다는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강기호의 말에 감독은 소름이 돋았다.
“근데 저도 최소 1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까보고 나니 상상 이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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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기 첫 타석은 3회 말 2아웃 상황에 찾아왔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 우리 타자 중 한 명도 1루를 밟은 선수가 없다는 뜻.
그만큼 오늘 존 그레이의 공은 좋았다.
허하준과 다르게 변화가 심한 140km 중반의 투심과 체인지업 등을 사용하는 땅볼 형 투수.
하지만 이런 유형의 투수에겐 단점이 있는데, 바로 팀의 수비에 따라 기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돌핀스는 최소 실책 1위.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스트라이크!”
첫 번째 공은 그냥 흘려보냈다.
2군에서 봤던 투심과 수준이 다르다.
2구는 다시 존 안에 들어오길래 변화를 예측하고 휘둘렀다.
“파울!”
하지만 약간 빗맞았는지 우측으로 빠지는 파울.
순식간에 몰린 볼카운트.
“볼!”
“파울!”
“파울!”
경기 전 강주호가 해줬던 조언처럼 존 안에 오는 건 다 때리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아직 1군 투수들의 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존 안에 오면 죄다 휘둘러. 당장의 안타보다 너만의 존, 그리고 타이밍을 만드는 거야.’
그게 효과가 있는지 슬슬 눈에 익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 몰린 투심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따악!
방망이에서 반동이 느껴지고, 날카롭게 외야로 날아간 공이 그대로 우중간을 가를 듯 보였다.
1루 코치 역시 손을 계속 돌리는 상황.
공을 더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2루로 달렸다.
2루수 역시 외야를 바라보다가 공이 안 오는지 받을 준비조차 안 했다.
서서 2루에 도착하자 어이없는 말이 들려왔다.
“아웃!”
“네?”
“중견수가 공을 잡았어.”
심판의 말에 외야를 보자 중견수 이규영이 누워서 글러브를 들고 있었다.
완전히 가르는 타구였는데 그걸 잡았다고?
“이건 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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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초 돌핀스 공격은 1번 타자 이규영부터 시작이다.
허하준 역시 돌핀스 타선을 상대로 3이닝 퍼펙트.
이규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나를 보더니 웃음을 참았다.
“그 정도는 놓치는 게 매너 아닙니까?”
“너도 이번에 좋은 코스로 던져주면 다음엔 한 번 놓쳐줄게.”
“예. 좋은 공 드리겠습니다.”
허하준의 초구가 존 중앙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미트로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던진 스플리터에 이규영의 헛스윙을 이끌어냈다.
“이게 좋은 코스야?”
“예. 완벽하게 속으셨잖아요.”
“너 오늘 외야로 공 날릴 생각하지 마라.”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이규영의 성격이 좋아서 그렇지, 사실 20살 포수가 타자들과 이렇게 대화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다음 공을 준비했다.
‘높은 포심.’
허하준 역시 마음에 드는지 오랜만에 와인드업까지 하면서 투구를 했다.
“스트라이크!”
“하아.”
타자의 어깨보다 공 한 개 높은 포심이었지만, 이규영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이걸로 볼카운트 0-2.
볼카운트가 몰리자 이규영이 방망이를 짧게 잡는 것이 보였다.
“볼!”
“파울!”
“파울!”
“볼!”
1회와 다르게 스플리터 역시 골라낸 상황.
아직 카운트에 볼 하나의 여유가 있지만 이번 타석에서 공을 골라내는 걸 보면 다시 한번 볼을 던지기엔 망설여졌다.
허하준 역시 마찬가지인 듯 내가 보낸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세를 잡고 공을 기다렸다.
허하준의 손에서 빠져나온 공은 날카롭게 이규영의 몸 쪽을 파고들었다.
-딱!
방망이에 살짝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원래 오던 궤적에서 약간 휘면서 내게 날아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예?”
“파울팁이야.”
이규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심판에게 묻자 살포시 공이 들어있는 미트를 보여줬다.
미트를 낀 왼손이 본능적으로 공을 잡아냈다.
“하. 너 진짜 외야로 공 날릴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이규영을 시작으로 4회를 다시 한번 삼자범퇴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