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17화 (17/203)

17화 리틀 강주호? 리틀 강기호? - 4

#

마린스의 감독실.

감독이 들고 있는 종이 상단에 선발 라인업이라고 적혀있다.

금일 경기 선발 라인업은 일찌감치 결정됐다.

선발 투수를 제외하면 어제 경기와 변동은 없다.

이정훈 감독은 김수호를 당장 주전으로 쓰기보다 백업으로 경험을 쌓기를 원했고, 김수호도 자기 말을 이해하고 따라줬다.

방금까지는.

-똑똑.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아, 운영팀장님.”

말로는 반겨주긴 했지만 그다지 달가운 상대가 아니었다.

전임 단장이 성적을 이유로 자진 사퇴를 한 작년, 이정훈 감독은 현 단장과 함께 부임했다.

하지만 성적이 워낙 안 좋은 탓에 구단주의 관심이 서서히 사라지자, 단장 자리를 노리고 있던 운영팀장이 사장에게 붙어 골치를 썩이고 있다.

몇 년째 가을 야구도 못하고 있는 팀이 하나 돼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정치질이나 하고 있으니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별거 아닙니다. 그, 김수호 선수 있지 않습니까?”

또 김수호.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는지 오늘 오는 사람마다 입에 그 이름을 담고 있다.

“사실 사장님께서 꽤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하. 피닉스 황인재와 동기였다면서요? 심지어 부산 출신에 외모도 잘 생겼고. 재능도 충분한 거 같은데 이렇게 된 거 프랜차이즈 스타로 제대로 키워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현장엔 손 안 대기로 합의한 거 잊으셨습니까?”

“이게 왜 손을 댄 거죠? 전 단지 사장님이 관심을 보인다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후. 이제 고작 한 경기 나온 선수입니다. 쓸데없는 관심은 부담만 주는 꼴이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가시죠?”

“여기까지 온 김에 선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겠습니다. 김수호 선수는 어디 있죠?”

“운영팀장님.”

“예. 감독님.”

굳은 표정의 감독과 미소를 짓고 있는 운영팀장.

둘의 대치는 누군가의 방문으로 끝이 났다.

“감독님, 잠시 시간 괜···.”

“뭔데!?”

“그···.”

분석팀 직원이 운영팀장을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김수호 선수가 허하준 선수 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분석팀장님이 오셔서 같이 보시는 건 어떻겠냐고 하셔서요.”

그 말을 듣자 운영팀장이 방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마침 잘됐네요. 같이 가시죠.”

“... 후. 먼저 가 있어.”

“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직원이 사라지고 감독이 운영팀장을 노려봤다.

“아직 어린앱니다. 이상한 헛바람 넣을 거면 바로 쫓아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얼른 가시죠.”

#

“반갑습니다. 마린스 운영팀장 이정민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인사를 하긴 했지만, 운영팀장이 여긴 왜 온 거지?

운영팀장이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 올 일이 있나?

“하하. 저희 마린스에 이렇게 좋은 선수들이 있으니 참 든든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뒤이어 감독님도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운영팀장님. 바쁘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만 가시죠.”

“이거 참, 제가 감독님의 고민할 시간을 뺏은 게 아닌가 걱정이네요. 감독님도 고민이 많으시겠네요. 허하준 선수의 공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포수가 갑자기 등장하니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분명 운영팀장이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분위기는 서늘했다.

“운영팀장님. 그만 하시죠.”

결국 감독님의 마지막 말에 운영팀장은 나를 보더니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김수호 선수. 이대로만 하시면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럼 감독님, 전 이만 가겠습니다. 오늘 경기, 꼭 이기시길 바랍니다.”

운영팀장이 사라져도 감독님의 굳은 표정은 사라질 줄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얼어붙은 줄 알았던 감독님의 입이 열렸다.

“분석팀장, 그리고 너희 둘. 따라와.”

“예!”

분명 7월이었지만 감독실로 가는 길 내내 에어컨이라도 튼 듯 서늘함을 느끼며 걸었다.

중간에 허하준에게 눈짓을 해봐도 허하준 역시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감독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앉아.”

오늘만 벌써 2번째 방문.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마른 입으로 감독님의 말을 기다렸다.

“갑자기 하준이 공을 왜 수호가 잡게 된 거야.”

“아,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경기 볼 배합 얘기를 하던 중에 김수호 선수가 허하준 선수의 스플리터를 잡아본 적이 있다고 해서 테스트를 한 번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분석팀장이 종이를 건넸다.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볼을 빠트린 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김수호 선수가 전문 포수가 아니다보니 프레이밍 능력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공을 그 자리에 잡아 놓는 능력이 좋습니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통합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를 냉정히 평가한 분석팀장의 말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감독님은 충분한 시간에 거쳐 종이를 보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김수호, 자신 있나?”

“예! 자신 있습니다!”

“허하준 너는 김수호가 포수 봐도 상관없고?”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인데요. 좋습니다. 저는.”

“후. 알겠다. 일단 다 나가봐.”

“예!”

결과가 어떻게 나올 진 모르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으신가요?”

“누구? 감독님이랑 운영팀장?”

“예.”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허하준에게 아까 있었던 일에 관해 물었다.

“흠. 나도 내부 일은 관심이 없어서 잘 몰라. 궁금해?”

“음···. 그냥 꺼림칙해서요.”

“그래? 그럼 해결해야지.”

허하준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어디냐? 그래? 여기로 잠깐 와줄 수 있어? 어어. 오케이.”

“누구예요?”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알 거야.”

허하준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우리에게 걸어왔다.

“야. 무슨 일인데. 어? 너도 있었네. 수호 맞지?”

“안녕하세요. 선배님.”

허하준이 부른 사람은 허하준의 동기이자 마린스의 4선발을 담당하고 있는 김호기였다.

“자. 앞으로 구단 내부 일에 궁금한 게 있으면 얘한테 물어보면 돼. 모르는 게 없거든.”

“뭐? 내가 네 정보통이냐?”

허하준에겐 툴툴거리면서도 나에겐 친절하게 말했다.

“쓸모없는 이놈이랑 다르게 우리 후배님은 내가 선발일 때 홈런 쳐준다고 약속하면 내가 다 말해줄 수 있지.”

“자 봤지?”

질문 값이 홈런 한 개? 생각보다 비싸다.

하지만 어차피 공수표인데 남발하기로 했다.

아까 감독님과 운영팀장 사이에 있던 일을 말하자 김호기의 표정이 흥미로워졌다.

“재밌네. 자, 이걸 알려면 먼저 우리 구단의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작년에 전 단장이랑 전 감독이 짤리고 지금 단장님이랑 감독님이 새로 온 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근데 두 분 다 외부 인사란 말이야? 원래 구단 계획은 구단 내부에서 끌어 올리는 거였는데 팬들이 반발해서 계획대로 안 된 거지. 그럼 어떻게 되겠어?”

“음. 파벌이 생기겠네요?”

“정답. 원래 내정자였던 운영팀장 라인이랑 단장님, 감독님 라인이랑 찢어 진 거지. 뭐, 소문에 의하면 사장님이 운영팀장 쪽에 힘을 실어주곤 있다고 하는데, 대체로 중립이래.”

아···. 그래서 아까 그렇게 대립각을 세운 거구나.

“근데 저한텐 왜 그런 거죠?”

“왜?”

운영팀장이 나한테 와서 했던 말을 전해줬다.

“음. 아무래도 운영팀장이 널 찍은 거 같은데?”

“예?”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감독님한테 쓰라고 압박 주고, 심지어 잘하면 상까지 주겠다는 건 내 픽이라는 뜻이지.”

“어···. 그런가요?”

“뭐, 감독님 성격상 이런 거에 연연하시는 분은 아닌데, 막 너한테 좋은 얘기는 아닐 거야. 사람 마음이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걸로 김호기의 얘기는 끝났다.

김호기 말에 의하면 결국 내 오늘 선발은 물 건너갔다고 보면 됐다.

감독님의 마지막 물음에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하지만 내 능력이 아닌, 누군가의 협박 비스무리한 걸로 얻는 기회는 나도 사절이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뭘, 다음에 궁금한 거 있으면 또 물어봐. 대신 다음엔 정말 홈런 하나 받을 거다.”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됐지? 나 간다?”

“어. 고맙다.”

김호기가 떠나고 허하준이 내 어깨를 쳤다.

“오늘 선발로 못 나간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 네 잘못도 아니고, 얼마 안 가서 선발로 나갈 거야.”

“괜찮습니다.”

허하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이 가장 적극적으로 날 도와줬다.

나보다 아쉬웠으면 아쉬웠지, 괜찮진 않을 거다.

그래도 마냥 야구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

보통 라인업은 주전이 정해져 있어서 변동이 있는 경우에만 선수에게 미리 말을 해준다.

물론 포수처럼 주전이 정해지지 않은 라인은 투수가 누구냐에 따라, 또 당일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서 말을 해주기 전까지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 역시 선발 포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독님이 선수단을 모았다.

“어제 우리는 불리한 싸움에서 결국 승리했다. 감독이 원했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기쁘다. 오늘 경기도 충분히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한다! 알겠나!?”

“예!”

“지금부터 오늘 선발 라인업을 발표하겠다. 선발 투수 허하준.”

“예!”

“1번 타자 중견수 박은성.”

“넵!”

“2번 타자 2루수 최치호.”

...

“8번 타자 유격수 이오준.”

“예!”

7번 타자까지는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9번 타자로 출전했던 이오준이 한 타석 앞당겨졌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포수뿐.

“마지막으로 9번 타자 포수···.”

감독님이 한 턴 쉬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포수 김수호.”

“...예!”

조금 당황하는 바람에 답이 늦었지만, 내 이름이 확실했고 다른 선수들도 놀란 눈치였다.

“다들 경기 직전까지 컨디션 관리를 잘하길 바란다. 이상.”

그 말을 끝으로 감독님은 사라지셨다.

“오, 아까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줬길래 선발이야?”

김호기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행히 좋게 봐주셨나 봐요.”

“그래? 어제 일이 운은 아니었나 봐? 기대되는데?”

“감사합니다.”

운영팀장 일이 있었지만, 선발이 됐다.

감독님이 무슨 생각으로 결정하신 건 지 궁금했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시 스카우팅 리포트를 읽어야 할 판이다.

내가 분석한 건 불펜 투수.

경기 중 교체 당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만, 당장 상대해야 하는 선발 투수의 정보를 모른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선배님, 저 잠시 준비 좀 하러 가겠습니다.”

“어, 그래. 준비 잘하고. 고생해.”

김호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스카우팅 리포트를 꺼냈다.

정신없이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 넣고 있는데, 종이를 비추는 햇빛이 그늘에 가려졌다.

“선배님?”

내 앞에 온 건 강주호였다.

“표정이 좋다? 별명이 리틀 강주혼데 선발까지 포수를 해? 그냥 별명 바꾸지 그러냐?”

“하하···. 저야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죠···. 죄송합니다.”

“으차. 됐다 임마.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걸 보여주는 게 아니었는데.”

강주호는 힘겹게 내 옆에 앉았다.

“무릎 더 안 좋아지신 거 아니에요? 어제보다 불편해 보이시는데.”

“어제 홈런치고 쑤시더니 더 무리하지 말란다. 후, 나이를 먹으니까 부상이 오래가네.”

언제까지나 마린스의 전성기를 이끌 것 같았던 선수 강주호.

하지만 그도 결국 사람이었다.

세월의 무게는 선수에게 그 무엇보다 무거운 것이다.

“그보다 급하게 뭘 보는 거야?”

“아, 이거 상대 선발 투수 정보입니다. 제가 대타로 나올 줄 알고 불펜 투수 위주로 준비해서 급하게 보고 있습니다.”

경기가 시작하려면 한 시간 남짓 한 시간이 남았다.

빠듯하지만 9번 타자인 걸 감안하면 괜찮았다.

“내놔봐.”

“예.”

종이를 뺏어간 강주호가 대충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구만.”

그러면서 품 안에서 어제 봤던 종이를 꺼냈다.

오늘도 나타난 일일 족집게 선생님.

KBO 1타 강사와 함께 한 시간은 내 자신감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포수 마스크를 낀 채로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