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송곳은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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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호가 기적 같은 동점 만루 홈런을 쳤을 때, 마린스 코치진은 기뻐하는 동시에 급하게 회의에 들어갔다.
대타로 나와서 홈런을 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아무리 강주호라도 홈런을 기대하기엔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상대 투수는 리그에서 제일 잘 던지는 마무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강주호는 자신이 왜 스타인지 증명했고, 무릎 꿇은 해병은 돌고래가 일으킨 파도를 딛고 몸을 일으키면서 어퍼컷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몸 상태가 엉망진창인 상황.
마지막까지 남은 생명력을 끌어다 썼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포수를 볼 수 있는 야수가 남아 있나?”
이정훈 감독의 물음에 배터리 코치, 강기호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독이 고민에 빠졌다.
“남은 야수 목록 줘봐.”
워낙 혈전이었던 터라 남은 야수 자원은 고작 둘 뿐.
강주호가 천천히 걸으면서 베이스를 도는 동안 여러 가지 방안을 짜낸 결론은 1루수 채지훈이 포수로 가고, 김수호가 1루수로 들어가는 거였다.
남은 한 명의 야수는 수비보다 대타를 위한 자원이었고, 강주호는 현재 수비 불가능인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남는 선수가 있는 1루수에게 포수를 맡길 수밖에.
‘그렇다고 오늘 처음 올라온 선수한테 포수를 맡길···.’
순간 감독의 머릿속에 김수호의 특이한 기록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지금 전달하겠···.”
“잠깐, 잠깐.”
급하게 수석 코치를 말리고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포수를 해본 야수가 있다.
이건 희소식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선수는 오늘 1군에 처음 올라왔고, 포수 경험은 고작 네 경기밖에 안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키에게 쏠릴 부담이 얼마나 심할지 가늠이 안 된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이민상이 허무하게 아웃되자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가서 김수호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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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석 코치님이 날 찾을 때부터 반쯤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감독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 하겠습니다.”
“... 정말 괜찮겠어?”
감독님의 머뭇거림에 어쩐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고작 한 달 전, 2군 감독님도 저렇게 물어보셨고, 그때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한결같다.
“예! 괜찮습니다!”
“... 그래. 고맙다. 기호야, 가서 장비 입는 것 좀 도와줘라.”
“알겠습니다. 수호야, 따라와.”
마린스의 레전드 포수인 강기호와 첫 만남이 이렇게 이뤄질 줄은 몰랐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급하게 따라가서 장비를 착용했다.
그 와중에 강기호가 정말 궁금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포수 경험이 있었니?”
“예. 한 달 전에 네 경기 임시로 출장했습니다.”
“네 경기···.”
내 말을 곱씹어보던 강기호가 뭔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바뀌었다.
“그, 하준이랑 호흡 맞춘 애가 너야?”
“예. 제가 말한 게 얘예요.”
그 말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허하준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내 생각엔 넌 결국 포수 해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1군 첫 경기부터 포수 출장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그러게요. 뭐,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죠.”
“가서 열심히 하고 와. 어차피 욕은 네가 아니라 감독님이랑 여기 계신 강기호 코치님이 먹을 테니까. 맞죠?”
그 말에 강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실수한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비는 다 착용했고, 이제 그라운드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근데 투수는 누구예요?”
내가 아는 1군 투수라곤 고작 둘 뿐.
생전 처음 보는 투수와 호흡을 맞추긴 쉽지 않았다.
“너랑 아주 잘 맞는 놈이 하나 있지.”
에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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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 난데!”
“진정 좀 해.”
연장전 돌입으로 얻은 마운드 방문 횟수를 바로 날려버렸지만, 공이 날아오는 꼬라지를 보니 당장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넌 1군에 2주나 있었으면서 왜 그러는데.”
“상황이 다르잖아! 지금까진 점수 차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만 던졌다고.”
이호민 역시 20살 신인.
아마 팀 차원에서 부담이 덜한 상황에만 올리면서 관리를 해준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이미 많은 불펜을 소모한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겠지.
그래도 우리 감독, 코치님들의 깡이 대단하긴 하다.
이런 경기에서 20살 루키 배터리라니.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던져. 오늘 경기 지면 뭐 어때, 강주호 선배 아니었으면 어차피 지는 경기였어.”
“... 하. 말이 쉽지. 나 오늘도 못 던지면 2군 갈 수도 있어.”
이호민의 말대로 지난 2주 동안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불펜 중에서 성적이 좋은 투수는 아무도 없다.
마무리 투수마저 대거 5실점을 하는 판국인데, 나머지 투수가 좋을 리가.
나 같으면 빈집이라고 좋아할 거 같은데.
아무튼 이런 말은 해봤자 지금 상황에 도움이 안 된다.
음, 오그라들지만 어쩔 수 없다.
“야, 나 봐봐.”
“... 뭐.”
“어제 약속한 거 기억나냐? 공 받아주겠다고 한 거?”
“어. 당연하지.”
“그거 지금 한다고 생각해.”
“뭐? 그거랑 이거랑 같냐?”
“다를 건 또 뭐야? 네가 말했잖아, 내가 받아주면 기운 난다고. 내가 기막히게 한 번 받아줄 테니까 그냥 눈 딱 감고 가운데 꽂아.”
물론 사인은 더그아웃에서 나온다.
하지만 실투인 척하면 괜찮지 않을까?
“... 하.”
“그게 싫으면 주학이 보러 가던가. 어제 전화로 선배 둘이랑 룸메 됐다고 징징거리던데.”
“... 미쳤냐 거길 가게.”
그치. 아무리 그래도 2군보단 1군이 좋지.
“가운데 꽂았다가 안타 맞기만 해봐.”
“그게 내 탓이냐, 그래도 안타 맞으면 내 타석 때 나도 하나 쳐줄게. 어때?”
“콜. 꼭 지켜라.”
“너나 잘 던지고 말해.”
괜히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내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고 긴장이 안 될 리 없다.
1군 데뷔가 1루수가 아니라 포수라니, 작년에 나한테 이 사실을 말해주면 아주 좋아 죽을 거다.
하지만 강기호와 감독님이 내가 욕먹는 일은 없다고 해주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오늘 경기가 진다고 날 욕하는 팬이 있을까?
그런 만큼, 생각보다 부담은 덜했다.
부디 내 동기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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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구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볼 카운트는 불리하게 시작했다.
더그아웃에서 나온 사인은 바깥쪽 포심.
하지만 아까 마운드에서 말했던 것처럼 한 가운데 포심을 요구했다.
이호민은 사인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결심이 섰는지 투구 시작했다.
-퍼억!
“스트라이크!”
이호민의 손을 떠난 포심은 묵직하게 미트에 들어왔다.
타자가 배트를 내지 못했다고 믿을 정도로 좋은 공이다.
그것보단 흔들리는 신인 투수를 상대로 굳이 휘두르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결과가 중요하다.
이호민한테 엄지 한 번 들어주고 공을 돌려줬다.
물론 방금 공을 본 투수 코치님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마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게 실투라고 생각하시나 보다.
하지만 다음 사인부터 정확하게 전달했고, 공은 나름 비슷한 곳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볼!”
“볼!”
하지만 타자는 공을 절대 치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받았는지, 투 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았음에도 이어지는 변화구에 방망이를 내지 않았다.
결국 풀카운트.
이호민도 나와 같은 신인이다.
허하준의 스플리터 같은 위닝샷은 커녕 변변찮은 변화구는 없는 상황.
남은 건 포심뿐이다.
하지만 더그아웃에서 나온 사인은 다시 한 번 변화구.
그걸 보고 살짝 고민했다.
이내 고민이 끝났고, 내 손가락은 오직 검지 하나만 펴졌다.
이호민이 그걸 보고 침을 꿀꺽 삼키고 투구에 들어갔다.
대놓고 긴장했다는 티가 나는데, 어쩔 수 없다.
이호민의 손을 떠난 공은 미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 들어왔고,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 타석에서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얻은 방망이는 허무하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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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민의 롤모델은 허하준이다.
예전에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대답이 꽤 강렬해서 기억이 난다.
‘투수는 당연히 포심이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포심.
허하준.
그리고 그를 롤모델로 삼은 이호민도 좋은 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중간에 안타 하나를 맞긴 했지만, 뜬공과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첫 타자 때 던진 포심에 대해 좋게 평가했는지, 아니면 변화구를 도저히 써먹을 수 없다고 평가했는지 몰라도 이후 볼 배합은 포심 위주로 구성됐다.
그리고 나는 긴장한 상태로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마음대로 볼 배합을 바꿨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안 걸리면 가장 좋겠지만, 과연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더그아웃 가장 앞에서 환한 미소로 날 기다리고 있는 감독님을 보자 안심이 됐다.
"잘 했다."
감독님을 뒤로 선배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끝에 무릎에 붕대를 감은 강주호가 앉아 있었다.
“고생했다.”
“선배님, 홈런 정말 멋졌습니다. 아깐 포수 준비 때문에 정신없어서 축하를 못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일로 와서 앉아.”
그 말에 가서 앉으려고 했는데, 내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강주호 선수님, 죄송한데 제가 좀 빌려 가겠습니다. 포수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요.”
“언제는 허락받고 그랬냐.”
옆을 보니 강기호가 웃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입만 웃고 있었다.
“우리 할 얘기가 많지?”
“... 예.”
내 어깨를 붙잡고 끌고 간 강기호가 내 장비를 살짝 풀어줬다.
“타석에 들어서려면 멀었지? 그럴 땐 이렇게 있는 거야.”
직전 이닝은 9번 타자 이민상에서 끝이 났다.
이제 1점만 나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
8번 타석에 들어간 내가 이번 이닝에 나올 확률은 없다.
“감사합니다.”
“자, 너무 긴장 하지마. 이제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
꿀꺽.
찔리는 나로서는 절로 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예. 코치님.”
“첫 타자 마지막 공, 왜 변화구가 아니라 포심 사인을 준 거야?”
걸렸다.
한 가운데 던진 거야 투수의 실투로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 공은 코스도, 구종도 바뀌었으니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내겐 아주 좋은 방패가 있다.
“호민이가 사인을 잘못 봤나 봐요.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긴장 된....”
“아, 코치님! 마지막에 제 포심 진짜 좋았죠? 역시 코치님은 제 포심을 믿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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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인 줄 알았던 놈은 그대로 내 발등을 찍어버리고 도망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기호가 그렇게 화나 보이지 않았다.
“수호야.”
“옙!”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오늘 호민이가 긴장 많이 했더라고요. 그래서 변화구 제구가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타자도 변화구에 아예 반응도 안 했고요. 차라리 제구 안 되는 변화구보다 포심을 던지는 게 이닝 전체에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만약 홈런을 맞았으면?”
야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강주호도 오늘 말도 안 되는 홈런을 친 걸 보면 만약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야구다.
“... 그래도 볼넷보단 나았을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시작부터 자신감이 없던 놈이다.
한 번 볼넷을 내주면 끝도 없이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
“음. 그래.”
강기호가 잠깐 고민하더니 내 머리를 강하게 쥐었다.
“으억! 코, 코치님 잠시만요!”
“이제 포수로 고작 다섯 경기 나온 놈이 누구 앞에서 큰소리야.”
은퇴한 지 4년이 지난 양반이 왜 이렇게 악력이 좋은 거야.
아무튼 고통은 지나갔고, 띵한 머리를 붙잡고 있을 때 강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은 이제 됐고, 잘했다.”
“예?”
“잘했다고.”
어···. 칭찬 받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수호야. 포수가 가장 잘해야 하는 게 뭘까?”
“음. 글쎄요? 블로킹이요?”
2군 감독님의 열정적인 지론에 의하면 그렇다.
“맞아. 그것도 중요하지. 포수한테 블로킹은 투수한테 삼진 같은 거니까.”
하지만 이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건 수비 할 때 중요한 거고. 포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손끝의 감각이야.”
“손끝이요?”
“그래. 내가 오늘 공을 받을 투수, 그 투수의 공을 느끼는 거지.”
“... 예?”
“네가 오늘 했던 것처럼 이 투수는 오늘 포심이 좋구나, 변화구는 별론데? 같은 걸 느껴야 해. 결국 더그아웃에선 그걸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거든.”
그 말을 하는 강기호는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투수는 더그아웃에서 불펜으로 갈 때, 또 불펜에서 마운드로 갈 때 전부 달라지는 생물체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물론 하준이 같이 일정한 놈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확실히 이호민만 해도 그랬다.
불펜에서의 모습은 모르지만 아까 마운드에서 못 하겠다고 말하는 모습과 평소 모습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오민기도 그랬고.
“그런 투수들의 상태를 느끼고 이끌어 주는 것. 그래서 투수한테 가장 좋은 공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난 그게 포수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
“아···. 예.”
“뭔가 추상적이지?”
“어···.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이거에 대한 건 차차 얘기하고.”
강기호가 더그아웃 너머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슬슬 우리 공격이 끝나가는 것 같다.
“이번 경기, 네가 볼 배합을 짜야 하면 어떻게 하고 싶어?”
“... 예?”
“부담 없이 말해봐.”
살짝 머뭇거렸지만, 내 머릿속에만 있던 얘기를 강기호에게 꺼냈다.
"... 좋아. 좋은데 조금 부족해."
"역시 그렇죠?"
"응. 근데 이 정도면 쓸만한 정도는 되네."
"예?"
"오늘 남은 이닝, 네가 생각한 대로 하자."
그 말을 들은 내 심장은 오늘 경기 중 가장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