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송곳은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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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지 않았던 선수 시절.
현재 마린스 2군 감독의 선수 생활을 한 줄로 표현하라면 이 글귀가 가장 어울릴 것이다.
그런 선수의 끝은 대부분 초라한 은퇴가 기다리고 있다.
감독 역시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찌감치 주제 파악을 하고 감독의 길을 걸었다는 거였다.
그러던 와중 짧은 감독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을 맞이했다.
포수가 없다.
앞에 쓸만한, 괜찮은 같은 수식어가 붙은 것도 아니고 정말 팀에 포수가 없었다.
감독 입장에선 억울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억울하다고 해서 상황이 저절로 나아지는 게 아니다.
당장 경기가 코앞이라 급하게 대책을 강구 해야 했고, 다행히 지원자가 한 명 나왔다.
김수호.
이제 막 프로에 데뷔한 루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고생뿐인 길에 혼자 지원한 루키에게 정이 가는 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거기에 재능까지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봐왔던 사람 중 가장 사람 보는 눈이 깐깐했던 수비 코치가 공인한 재능.
심지어 하루 만에 출전한 경기에서 안정성은 물론, 중간중간 송곳 같은 플레이를 보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이 가다 못해 딸이 10살인 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경기가 끝난 후, 김수호가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을 때 무슨 칭찬을 할지 수비 코치와 함께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수호의 말 한마디에 화목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크흠. 수호야, 좀 진정하고 얘기하자.”
수비 코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김수호였고 수비 코치와 감독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낸 결론입니다.”
“... 그래. 네가 고민 끝에 낸 결론이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우리가 이유는 들어볼 수 있지 않겠니? 일단 앉거라.”
“예.”
김수호가 자리에 앉았고, 수비 코치가 차를 타준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끌었다.
수비 코치가 벌어준 시간 동안 감독은 김수호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에 대해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훈련을 힘들어했는가? 먼저 나서서 훈련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경기에서 실책을 했는가? 오히려 1군 경기였으면 김수호가 MOM이었을 것이다.
실책도 없었고 공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둘 뿐 아니라 허하준도 인정할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고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음. 감독 생각에 오늘 경기에서 네가 좋은 모습도 보여줬고, 너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 같은데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뭐니?”
결국 답을 찾지 못한 감독이 김수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포수에 재능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오늘 온종일 재능이란 이런 거라는 모습을 보여 줘놓고 뭐?
순간 선수 시절 열등감이 되살아날 뻔한 감독이 겨우 진정했다.
“...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겠니?”
하지만 김수호의 얘기를 듣자, 감독과 수비 코치의 표정이 서로 다른 의미로 굳었다.
“오민기 선배와 호흡을 맞춰보니까 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민기? 8회 때 말하는 거야?”
“예. 맞습니다.”
“그때 네가 잘못한 게 있다고?”
가만히 듣고 있는 감독 대신 수비 코치가 대신 물었다.
수비 코치의 기억엔 오히려 2루수의 어려운 송구를 완벽하게 포구해서 실점을 막은 기억밖에 없다.
이후 실점을 한 건 투수의 실투 때문이었다.
“예. 제가 공을 더 잘 잡았으면 볼 카운트도 유리하게 갔을 거고, 그러면 안타도 안 맞았을 겁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포구를 잘못했으면 8회 전에 말이 나왔겠지! 딱 보니까 네 생각은 아닌 것 같고, 누구야, 그런 헛소리 한 놈이.”
애초에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어이없다.
아니, 팀을 위해 희생을 자처한 김수호한테 위로나 격려를 못 할망정, 오히려 제 잘못을 김수호한테 덮어씌운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수비 코치가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김수호도 이 정도로 화낼 거라 생각은 못 했는지 당황했다.
말려달라는 눈빛으로 감독을 쳐다봤지만, 감독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굳어있었다.
“수호야. 민기가 너한테 뭐라고 했니?”
“그게···.”
사실 범인을 찾기 위해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다.
8회, 그것만 들어도 답이 나왔다.
김수호가 살짝 머뭇거리자 감독이 김수호의 손 위에 본인의 손을 얹었다.
“네가 왜 머뭇거리는지 안다. 감독도 네 말만 듣고 판단하진 않을 거야. 다른 투수, 포수들에게도 물어보고 그 과정에서 네 이름이 나오지 않게 주의하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보렴.”
그 말을 듣고 김수호가 고민하더니 8회에 있던 일을 전부 말했다.
안 그래도 굳어있던 감독과 수비 코치의 얼굴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 하아. 그래, 용기 내 줘서 고맙다.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거 같구나.”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선배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면 누구든 김수호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거라. 그리고 수호야, 어제도 말했듯이 이제 네가 원한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거에 관한 얘기는 이번 주 경기가 전부 끝나고 나서 하자.”
“예. 알겠습니다.”
당장 포수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던 김수호는 원하는 답을 듣고 조용히 감독실을 빠져나왔다.
“박감독, 괜찮나?”
“선배님,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수비 코치는 고개를 저었고, 감독은 양해를 구한 뒤 담배를 물었다.
감독의 입은 담배를 빨아들이기만 할 뿐, 전부 타기 전까지 열리지 않았다.
결국 담배의 필터까지 불이 올라오고, 감독은 입에서 담배를 떼어냈다.
“선배님, 저는 감독 할 재량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허, 갑자기 무슨 소린가. 자네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팀이 제대로 굴러가기나 했을까? 갑자기 이상한 소리 말게.”
“선수 관리도 못 해서 어린 선수 고생하게 만들고, 심지어 고참이란 놈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몰랐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박감독! 진정하고 뭘 생각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선수들에게 들어보고 하게나.”
“... 알겠습니다. 저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수비 코치는 그저 터덜터덜 감독실 밖으로 나가는 감독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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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없이 부산 가신 줄 알았습니다.”
“대답은 듣고 가야지.”
다음 날.
경기 전 몸을 풀기 위해 출근한 구장에서 허하준과 만났다.
“그래서 나한테 네가 어떤 타자인지 설명할 수 있겠어?”
허하준의 말에 나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긴 합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볼 땐 말해줄 수 있겠네?”
다음.
허하준이 2군에 다시 내려올 일은 없으니 내가 1군에 가는 날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어제 저지른 일도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김성준의 말에 의하면 오민기의 만행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언젠간 말해야 하는 일이었고, 단지 말할 기회가 생겨 말한 것뿐이었다.
“예.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하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허하준은 부산으로 떠났다.
함께한 날은 고작 이틀뿐.
하지만 왠지 허전함이 느껴졌다.
당장 오민기라는 배울 점 없는 사람과 비교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래도 허전함은 경기 시간이 다가오면서 점점 사라졌다.
경기 시작이 가까워지면서 분주한 더그아웃이었지만, 어쩐지 감독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민기도.
어제 감독실에 찾아간 효과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여파는 내 상상보다 거대했다.
“주목.”
수비 코치님의 말에 모든 선수단이 쳐다봤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경기에 감독님은 결장이다. 내가 하루 대행을 할 테니 모두 당황하지 말고 경기에 집중하도록. 이상.”
갑작스러운 감독님의 이탈.
수비 코치님은 이유에 대해 함구했지만, 어쩐지 어제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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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지휘봉을 잡은 사람이 달라졌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상무와 경기가 시작했다.
어제 아쉬운 패배로 칼을 갈고 나온 상무 선수들은 눈빛부터 매서웠다.
결국 경기는 어제처럼 팽팽하게 진행됐다.
8회 말 스코어 2 대 1.
아슬아슬한 1점 차 리드.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서로의 점수 앞에 1이 하나씩 더 붙어 있었다는 것 정도?
아, 한 가지 더.
8회 초 1점 차 아슬아슬한 리드였지만 오늘은 오민기 대신 다른 투수가 등판했다.
다행히 8회 초는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8회 말 우리의 공격.
마린스를 턱 끝까지 추격한 상무였지만, 마린스 타자들의 기세 역시 오를 대로 오른 상황.
그리고 내 앞에 주자들이 가득 찼다.
오늘만 벌써 5번째 타석이다.
4타수 2안타 1볼넷 3타점의 좋은 성적.
하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했다.
수비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고, 체크 해야 할 상황은 늘어만 갔다.
그래도 내가 흔들리면 투수도 흔들린다는 생각 하나로 버텨왔고, 이제 9회만 막으면 됐다.
하지만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무 타선을 9회 초 무실점으로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
그렇기에 지금 이 타석은 아주 중요했다.
“...”
어제 살갑게 말을 걸었던 김성준도 지금 이 상황이 긴장되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2사지만 만루다.
안타 하나면 2점, 장타면 3점이 들어오는 상황.
사인을 주고받은 투수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볼.”
초구는 바깥쪽으로 약간 빠진 볼.
“볼.”
2구 역시 비슷한 코스로 빠졌다.
2-0의 유리한 카운트.
더그아웃에선 하나 지켜보라는 사인이 나왔다.
“볼.”
이번엔 아예 바운드가 되면서 공이 튀었다.
공이 옆으로 흐르긴 했지만, 김성준이 힘을 죽여 그리 멀리 튀지 않았다.
3루 주자에게 사인을 멈추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걸로 3-0.
타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카운트다.
하지만 더그아웃에선 지켜보라는 사인이 나왔다.
“스트라이크!”
한 가운데로 꽂히는 포심.
딱 치기 좋게 들어온 포심을 놓친 게 아쉽지만, 지금은 지켜보는 게 맞았다.
이어서 나온 사인은 내 마음대로 하라는 사인.
흔들리고 있는 투수.
그런 투수라면 몸쪽을 던질 수 없다.
바깥쪽으로 빼기엔 초구, 이구 연속으로 빠진 게 생각날 터.
그렇다면.
-따아아악!
내가 예측한 곳에 정확히 들어온 공을 완벽하게 맞혔다.
잠시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다 1루 베이스를 향해 뛰었다.
프로 와서 처음 느껴 본 손맛.
관객은 없지만, 언젠가 내 스윙에 환호할 관객들을 상상하며 베이스를 돌았다.
“이야! 나이스!”
“미친놈. 제대로 돌렸네?!”
“우와아아아! 김수호! 미쳤다! 뭐야, 그 스윙!”
그렇게 경기는 다섯 점 차이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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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언제나 달콤하다.
하지만 팀의 승리만큼 중요한 게 개인 성적이다.
결국, 말이 아닌 성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게 프로 선수였다.
경기가 끝난 뒤 스쳐 지나가며 본 오민기의 얼굴은 심각하리만큼 굳어있었다.
아마 오늘 같은 승부처에 선택을 못 받았다는 건 자존심에 꽤 스크레치가 났을 거다.
라고 표정이 굳은 이유를 예상했지만, 내 생각은 새 발의 피였다.
“야, 이거 봐봐.”
바닥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이주학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핸드폰을 보여줬다.
[마린스 2군 투수 오민기 방출]
설마 이런 식으로 대응할 줄이야.
심지어 기사에는 그간 오민기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다.
오늘 감독님이 빠진 이유가 설마....
“와, 오민기 선배 진짜 사이코였네.”
“그러게.”
지금까지 저지른 일과 실력을 저울에 놓고 비교해 본다면 어느 팀에서도 그를 데려가지 않을 거다.
그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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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감독님은 다음 경기부터 다시 합류했고, 오민기의 빈자리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잔인한 얘기지만 황인재가 했던 말처럼 오민기 정도 되는 재능을 가진 젊은 투수는 많았다.
나는 포수로서 네 경기를 전부 치르고 주전 포수에게 미트를 양보했다.
4경기 4승 무패.
공격과 수비, 어디 한 곳에서 모난 곳 없이 잘 해냈다고 자신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도 펼쳐졌고.
“정말 그만둘 거니?”
“예.”
감독님과 수비 코치, 그리고 배터리 코치가 설득하긴 했지만 잠시 포수 미트를 놓기로 했다.
영영 놓는 것은 아니다.
포수에 대한 도전은 내년부터.
시즌 중에 애매하게 접할 바에 시즌이 끝나고 제대로 배우기로 했다.
그래도 포수의 경험 덕분일까?
일주일 만에 선 1루 수비는 안정감이 올라갔다는 평가를 받았고, 공격 역시 그때의 타격감을 유지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지나자, 1루의 주인은 내가 됐다.
마냥 1루 주전이 되면 기쁠 것 같았지만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아직 올라갈 곳은 한참 남아있다.
그렇게 주전이 된 지 이주가 더 지나고, 다음 경기를 위해 짐을 싸던 중 감독님이 방으로 찾아왔다.
“코... 코치님.”
“이주학, 너 요즘 수비 코치님이 터치 안 하니까 살만 하나 보다? 안 되겠다. 내일 따로 말씀드려야지!”
오늘도 농땡이를 부리다 걸린 이주학을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수호야. 짐 싸라. 아니, 짐은 싸고 있구나.”
“예?”
“짐 챙겨. 부산으로 가자.”
나는 1루수로서 1군으로 향했다.
근데 왜 1군 첫 출장 경기에 1루 미트가 아닌 포수 미트를 끼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