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포수 데뷔 - 2
#
이제 고작 하루 된 포수가 리드까지 맡겠다니, 내가 꺼낸 말이었지만 허하준이 수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하준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잘 할 수 있겠어?”
“예. 맡겨 주시면 자신 있습니다.”
허언이 아니다.
내가 리드 할 투수는 포심만 던져도 삼진이 나오는 허하준이다.
내 부족한 부분을 메꾸다 못해 넘치게 만들어 줄 투수가 있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이번 이닝은 네가 리드하는 대로 던질게. 아까 말했던 거 기억하지?”
“예. 2회는 스플리터를 제외한 변화구로, 3회엔 스플리터 위주로 볼 배합 하는 거 말이죠?”
“그건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허하준의 허락이 떨어졌고, 동시에 타자가 삼진을 당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가볼까?”
#
내가 1루 주자를 저격한 후 허하준의 투구는 총알 같았다.
빠르기도 했지만 던지는 곳곳마다 타자에게 치명상이었다.
타자들은 위치를 숨긴 스나이퍼에게 쫓기는 것처럼 급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허하준은 그들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고 확실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런 총과 총알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총의 위력이 아무리 강력해도 결국 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맞추지 못하면 의미 없다.
이번 이닝에 사수는 나,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한 나였지만 정말 내 손에 총이 들어온 것처럼 손이 떨린다.
하지만 긴장이 아닌, 흥분으로 가득 찬 떨림이다.
허하준이 무슨 생각으로 포수로 치면 어린아이에 불과한 나한테 리드를 맡긴 줄 모른다.
하지만 허하준이라는 산타가 내게 선물을 준 이상, 원래 상상했던 구상대로 풀어볼 생각이다.
목표는 남은 2이닝 퍼펙트.
허하준의 연습 투구를 받으면서 목표를 되새기고 있을 때, 타자가 좌타석에 들어섰다.
‘이석기.’
상무의 4번 타자이자 원소속팀인 창원 돌핀스에서 정성 들여 키우고 있는 유망주 이석기.
이번 시즌 성적은 타율 3할 4푼에 5개의 홈런으로 준수했다.
이석기는 날 살짝 보더니, 타석에 바짝 붙었다.
‘역시 적극적인데.’
아무런 준비 없이 허하준에게 볼 배합을 하겠다고 한 게 아니다.
오늘 경기 전, 선발 선수들의 성향이나 핫콜드 존 정도는 외우고 들어왔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상무 타자들이 허하준을 만났다는 거다.
‘좋은 모습을 보이면 제대로 눈도장을 찍겠지.’
반대로 못난 모습을 보여도 문제 될 건 없다.
상대가 허하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용서가 된다.
마치 내가 포수를 못 봐도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의 상황.
1회 때처럼 타자들은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그걸 잘 받아먹는 게 이번 이닝의 목표다.
구심의 신호를 받고, 허하준에게 사인을 보냈다.
‘몸쪽 포심 깊숙이.’
내 사인에 허하준은 거절 한번 없이 와인드업을 이어갔다.
150km가 넘는 묵직한 포심이 내가 요구했던 것보다 더 몸쪽으로 더 붙어서 들어왔다.
“볼.”
“와 씨.”
이석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타자였어도 절로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투구였다.
두 발자국 정도 물러났던 이석기가 다시 타석에 붙었다.
하지만 다리가 아까보다 조금 떨어져 있었다.
몸 쪽으로 붙는 공을 의식한다는 의미.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
다음으로 요구한 공은 바깥쪽 꽉 찬 포심.
포심은 내가 요구한 곳 보다 약간 바깥쪽으로 들어왔지만, 큰 상관 없었다.
“스트라이크!”
맹렬하게 날아온 공은 그대로 방망이를 지나가며 미트에 꽂혔다.
타석에 바짝 붙었다는 건 바깥쪽 공까지 적극적으로 컨택 하겠다는 의미.
하지만 초구 몸쪽 공으로 타석에서 약간 떨어트린 덕분에 원하던 코스에 날아와도 컨택에 실패했다.
물론 그냥 구위에 눌려 못 친 걸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지식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거다.
볼 카운트 1-1.
볼 카운트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허하준에게 사인을 보냈다.
이번 코스는 저번 훈련 때 이주학에게 던졌던 몸쪽 하이패스트볼.
적극적인 타자에게 방망이를 끌어낼 수 있는 코스다.
이번에도 허하준은 곧바로 투구에 들어갔다.
공은 타자의 어깨높이로 들어왔지만, 방망이에 스치면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파울.”
이걸로 지금까지 13개 연속 포심을 던졌다.
이제 타자의 머릿속에 포심을 제외한 공은 없을 거다.
허하준의 시그니처는 포심과 스플리터지만, 그걸 잡는 사람은 바로 나.
처음엔 긴가민가했겠지.
‘정말 포심만 던질까?’
하지만 이 정도까지 왔으면 안 던지는 게 아니라 못 던진다는 결론을 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감독님도, 허하준도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허하준의 스플리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13개의 포심을 비료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고,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할 때다.
존 바로 밑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
허하준이 사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투구를 준비했다.
연습과 실전은 다르다.
처음 스플리터를 받을 땐 오직 허하준과 나만 있었다.
지금 내 옆엔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내는 타자가 있고, 뒤에선 심판의 시선이 느껴진다.
방망이는 내 눈을 가릴 거고, 내가 이 공을 놓치면 타자는 1루로 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잡아내야 한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근데 이상하다.
‘왜 심장이 떨리지?’
긴장이 아닌, 흥분으로 인한 떨림.
그리고 곧 나는 이 떨림의 이유를 알았다.
허하준의 손을 떠나 맹렬하게 존을 향해 날아오던 공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타자가 스플리터란 걸 눈치채고 자세가 무너지면서까지 컨택을 하려 했지만, 이미 방망이와 한참 차이 나는 공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이미 내 무릎은 땅에 붙어있었고, 바운드에 맞춰 글러브에 정확하게 포구했다.
그 공을 그대로 타자 주자에게 터치.
“아웃!”
“나이스!”
심장의 떨림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
“수비 코치님.”
“예. 감독님.”
둘만 있을 땐 선·후배 관계지만, 경기 중엔 서로에게 존칭을 쓰는 감독과 수비 코치는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코치님이 변화구 잡는 법을 알려주셨나요?”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허하준이 오늘 경기에서 본인이 사인을 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러려니 했다.
허하준에게 2군 경기는 승패가 중요한 경기가 아니다.
1군 복귀 전에 컨디션 점검을 위한 경기.
그걸 위해선 굳이 벤치에서 사인을 내는 것보다 본인이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지면서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1회,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보냈지만 후속 타자들을 전부 삼진으로 잡아내지 않았던가.
물론 중간에 김수호의 센스가 돋보이긴 했지만,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공이 바깥쪽으로 빠졌고, 그 시야에 1루 주자가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2회가 시작되고, 사인 없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의아했다.
저건 마치 포수 김수호가 사인을 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마저도 1회가 끝난 뒤, 뒤에서 둘이 무언가 짜고 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고작 하루 된 포수가 에이스 투수를 리드한다?
그게 가능할 리도 없고, 투수 자존심 상 그걸 허락할 리가 없다.
하지만 허하준이 사인을 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마지막에 스플리터를 던지고 그걸 완벽하게 포구한 김수호를 보자 감독과 수비 코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후 스플리터를 의식하기 시작한 타자들은 변칙적으로 들어오는 다른 변화구에 속수무책으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결국 세 타자 전부 삼진으로 이닝이 끝이 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게 허하준이 준비 한 볼 배합이구나.’
삼진 3개를 잡는 동안 던진 스플리터는 단 한 개.
나머진 전부 다른 변화구를 던지면서 아웃을 잡아냈다.
즉, 포심을 13개 연속으로 던지면서 타자의 방심을 유도한 뒤, 스플리터를 던지면서 의식하게 한다.
하지만 이후 결정구는 다른 변화구로 마무리.
웬만한 타자들은 의식하기 힘든 변칙적인 볼 배합이었다.
물론 중심은 여전히 스플리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닝이 끝나고 감독이 허하준과 김수호를 불렀을 때, 허하준의 대답은 감독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마저 자극했다.
“전 수호가 던지라는 대로 던졌을 뿐입니다.”
#
“... 김수호, 정말이야?”
허하준의 말에 감독님이 잠깐 침묵하더니 내게 물었다.
하긴, 나 같아도 못 믿는다.
“예. 허하준 선배가 허락해주셔서 이번 이닝은 제가 리드 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한 거라면···.”
“아니, 지금 잘잘못을 따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잘했으면 잘했지, 못 한 건 아니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네가 마스크를 낀 건 오늘 처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것만 명심하면 돼.”
“예. 감사합니다.”
“그래서 3회에도 수호가 리드하기로 한 거야?”
“네.”
“음. 알겠다. 오늘 리드는 3회까지 수호가 하고, 투수 교체한 이후엔 벤치에서 사인을 낼 거야. 불만 없지?”
“예. 괜찮습니다.”
사실 2회 때 기록한 3개의 삼진이 전부 내 리드 때문이라고 말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허하준과 2군 타자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골리앗 조종을 노움이 해도 체급에서 싸움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 그만두는 것도 좋다.
결국 감독님께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만족한다.
이 이상 내가 고집해봤자 더 좋을 게 없다.
“좋아. 그럼 수호는 가서 타격 준비하고, 하준이 너도 고생했다.”
감독의 축객령에 허하준과 자리로 돌아왔다.
선수들이 감독님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내 옆에 있는 허하준이 있어서인지 다가오지 못했다.
“수호야. 감독님 말 때문에 맘 상한 건 아니지?”
“예? 제가요?”
“어. 아니야?”
“전혀요. 솔직히 선배님 공을 2군 타자들이 어떻게 치겠어요. 그런 상황이니까 리드 했지, 다른 투수였으면 리드할 엄두가 안 났을 겁니다.”
“그래?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 재수 없으면서도 부러웠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면 저럴 수 있을까.
“그래도 네 리드 꽤 좋았어. 스플리터 하나 보여주고 다른 변화구로 승부하는 건 어떻게 생각한 거야?”
“제가 타자라면 선배님 공 중에 어떤 걸 노릴까 하다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솔직히 선배님 하면 포심하고 스플리터가 워낙 유명하니까, 그걸 역이용하면 타자들을 속이기 좋을 거 같더라고요. 근데 3회에 또 쓰기 어려울 것 같네요.”
“음.”
허하준이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생각하는 그런 자세 정말 좋은데? 이대로만 하면 다음에 나 만났을 땐 1군에 있겠다.”
“근데 저 임시 포수인데요?”
“아하하하. 맞다, 그랬지?”
저 웃음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더 할 말이 많았지만, 4번 타자가 출루에 성공하면서 슬슬 타석에 설 준비를 해야 했다.
“선배님 저 타격하고 오겠습니다.”
#
5번 타자는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6번 타자가 볼넷을 얻으면서 1사 주자 1 2루.
“못 치겠으면 괜히 병살당하지 말고 그냥 삼진당해. 희생 삼진 알지? 그럼 내가 안타 칠 테니까.”
방망이를 휘두르는 다음 타자 이주학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제 딴에는 긴장 풀라는 말을 매번 저렇게 돌려서 말한다.
이주학의 응원(?)을 받고 타석에 서자 아까 6번 타자로 나왔던 포수가 나를 쳐다봤다.
뻘쭘하게 계속 쳐다보길래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포수 잘 보던데?”
“감사합니다.”
포수들은 타자한테 말을 거는 걸 필수로 가지고 있는 걸까?
나도 다음 이닝에 타자한테 말을 걸어 볼까?
됐다. 무시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허하준 선배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투수 공 꽤 좋다. 긴장해.”
“예.”
그나마 이 포수는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날카로운 말은 없었다.
같은 포수의 애환, 이런 건가?
아니면 아까 허무하게 당한 삼진에 대한 복수심을 삼키고 말하는 거 일수도.
“조용히 하고 경기하자.”
심판의 경고를 듣자 이내 투수에게 집중했다.
키 183에 펀치력 있는 우타자.
이게 나에 대한 평가였다.
이런 타자에게 투수는 어떤 공을 던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