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잡는 것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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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지명하겠습니다. 경남 고등학교 내야수 김수호.
2031년 신인 드래프트.
하위권 구단 팬들이 유일하게 상위권 구단 팬들에게 성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날.
나는 전년도 9등이자 현재 꼴찌인 부산 마린스에 3라운드 선수로 지명됐다.
총 11라운드 중에서 3라운드니 나쁘지 않게 뽑힌 편이다.
신인 드래프트가 끝나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은퇴를 앞둔 강주호를 대신 하고 싶다는 당찬 후배.]
[3라운드 지명 김수호, ‘강주호 선배님을 존경, 제2의 강주호 될 것.]
마린스의 심장, 마린스의 기둥, 마린스 영구결번 1순위, 국가대표 4번 타자 등 한 개도 갖기 힘든 타이틀을 수 많이 가진 타자가 강주호라는 선수다.
그런 선수를 이제 막 입단한 내가 따라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팬들이 당장 이 기사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른다.
포부가 좋다고 생각할 수도, 아니면 나중에 내 흑역사로 남을 수도 있다.
근데 왜 저런 말을 했냐고?
평범하게 인터뷰해서 몇 달 만에 팬들의 뇌리에서 잊히는 것보단 낫다.
저 말 덕분인지 생각보다 계약금도 많이 받았다.
어쨌든 신인 드래프트 이후로 축하도 많이 받고 내가 한 말에 반이라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프로 2군도 경쟁이 치열했다.
특히 마린스의 1루수는 2군에 3명이나 될 정도로 포화 상태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마린스는 강주호 때문에 1루수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강주호가 은퇴 의사를 밝히자, 마린스는 부랴부랴 드래프트에서 1루수를 고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보다 높은 순번에 뽑힌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타율 0.286 출루율 0.368 장타율 0.413
내가 프로 2군에서 두 달 동안 기록한 수치다.
나름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1루수 두 선수도 비슷했다.
우리 중 누구 하나 치고 나가지 못하자 기회를 균등하게 받았다.
사실 좋게 말해서 균등하게 받는 거고, 현실은 불규칙한 출장에 컨디션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6월이 됐고, 결국 먼저 입단한 다른 두 명에 비해 노하우가 없던 나의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성적이 내려갈수록 지난 3년간 동기에게 들었던 말이 날 계속 갉아먹었다.
‘너 같은 재능은 그냥 널리고 널렸어.’
개새끼.
하지만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놈은 전체 1순위로 입단하며 재능을 증명했고, 난 그놈에게 비하면 한참 뒷순위나 다름없었으니까.
괜히 그 놈을 떠올리자 기분만 나빠졌다.
“후. 그냥 빠르게 군대나 갔다 올까.”
“상무? 상무 지원하려면 아직 좀 남지 않았나?”
혼잣말이었지만 룸메이트인 동기 이주학이 내 말에 반응했다.
“현역이라도 갈까 봐.”
“왜 그래, 갑자기.”
“있다. 넌 모르는 거.”
나와 다르게 이주학은 거의 매 경기 출장 중이다.
이주학의 포지션이 주전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유격수라서 그렇다.
나보단 못하지만 유격수 치고 좋은 성적이기도 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유격수나 할걸.”
“뭐? 네가 펑고 귀신의 지옥 펑고를 받아봤냐? 진짜 토 나온다.”
“그것도 맞지.”
“아무튼, 내일 쉬는데 놀러 갈래? 서면?”
“서면은 개뿔, 이주학 넌 내일 나랑 펑고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조금 전 이주학이 말했던 펑고 귀신인 수비 코치님이 들어왔다.
“코, 코치님.”
수비 코치님을 보자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매일 같이 펑고를 받느라 까매진 이주학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코치님, 농담인 거 아시죠? 차도 없는 저희가 어떻게 서면을 가겠어요, 진짜 농담입니다.”
“코치님 안녕하세요.”
’수비 코치님이 왜 오신 거지?
이주학은 어떻게든 변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난 수비 코치님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방으로 찾아온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 이따 한 시간 뒤에 훈련장으로 다 집합해. 너희랑 크게 관련 있는 건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그럼 난 다른 애들한테 전달하러 간다.”
“저희가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됐다 임마. 전달도 하면서 너네가 어떻게 살고 있나 보러 온 거야. 저거 봐. 나한테 딱 걸렸잖아. 수호 넌 오늘 경기도 뛴 놈이 그냥 쉬다 나와. 그럼 고생해라.”
그렇게 말한 수비 코치님이 문을 닫고 나갔다.
“휴우.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맞다. 이주학이 너는 글러브 챙겨서 와라. 서면? 몸이 근질근질하지? 내가 내일 온종일 침대에 있게 만들어 줄게.”
“아, 코치님 제발요!”
하지만 문은 얄짤없이 다시 닫혔고, 이주학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나저나 갑자기 집합하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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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코치님이 말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어쩔 수 없는 한국 야구의 폐해랄까.
이런 일이 있으면 선배들보다 항상 일찍 와야 했다.
우리를 시작으로 족족 들어오는 타자 선배들에게 인사하다 보니 곧 감독, 코치님이 들어왔다.
“다들 쉬고 있는데 미안하다. 갑자기 팀에 급한 일이 생겨서 불렀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팀에 포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인 선수 중 포수들의 얼굴이 안 보였다.
감독님의 말에 다른 선수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둘러보며 웅성웅성했다.
그럴 만도 했다.
2군에서 1루수만큼 포화 상태인 포지션이 포수였으니까.
물론 나와 상황은 약간 달랐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1루수는 괜찮은 선수들만 구성돼서 고민이었다면, 포수는 딱히 특출 난 선수가 없었다.
선수들의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감독님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 놈은 군대, 두 놈은 부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놈은 방금 음주운전이 걸렸단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누구는 한 타석이라도 더 들어가기 위해서 매일 특타 하고 있는데, 경쟁자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 운 좋게 주전이 보장된 놈이 음주운전이라니.
한심하다.
그나저나 훈련실에 들어올 때부터 수비 코치님이 이주학을 노려보고 있는 게 이해가 됐다.
방금 그런 일이 터졌는데 서면에 가서 놀겠다고 얘기했으니 운도 없지.
이주학도 대충 상황을 이해했는지 체념한 표정이다.
“그래서 부상당한 포수가 돌아올 때까지 임시로 포수를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 고등학교 때 포수 해봤던 사람 거수.”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중학교.”
이번에도 아무도 없다.
“초등학교.”
그제야 몇 명이 손을 들었지만, 사실 그때 경험은 별로 의미 있는 경험은 아니다.
감독님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손 내려라. 그럼 자기가 포수에 지원하겠다는 사람 거수.”
선수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2군이라도 프로 선수의 공을 받는 일이다.
경험이 없는 선수가 포수라도 했다가 괜한 부상을 당하면 자기 손해다.
심지어 포지션 중 가장 힘들다는 포수다.
아무리 2군 경기라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포수를 세울 리 없으니 따로 훈련도 받아야 한다.
종합해보면 굳이 자원해서 얻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다다음주에 민수가 돌아올 때까지만 하면 된다. 정말 아무도 없어?”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자원이 없다면 이제 강제로 시킬 차례.
결국 감독님이 선수를 한명씩 쳐다보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고민 끝에 손을 들었다.
“감독님. 제가 하겠습니다.”
“김수호, 괜찮겠어?”
감독님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이걸로 점수 좀 땄을 거다.
물론 고작 점수 따겠다고 지원한 건 아니었다.
1루수를 로테이션 돌리는 팀 상황 상 난 다음 주 네 경기 중 선발 출장이 한 경기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최근 성적이 처지면서 출장이 불확실한 상황.
하지만 포수는 경쟁자가 없다.
즉, 다음 네 경기 전부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추가 훈련도 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부상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실전이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한 지금, 네 경기 선발은 소중하면서 중요한 기회였다.
“예! 괜찮습니다!”
“하아. 너넨 부끄럽지도 않냐? 이제 막 프로에 들어온 애가 저렇게 지원하는데. 됐다. 석규, 너도 포수 준비해. 만약을 위해서니까 사인이랑 포구 연습만 해놔. 주전은 수호로 간다. 다들 해산. 수호 넌 잠깐 남고.”
감독님의 말에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주학도 그 물결에 같이 사라지려 했지만, 결국 수비 코치님에게 잡혀서 어디론가 끌려갔다.
고생해라.
“수호야, 이리 와봐.”
“예!”
감독님을 따라 어디론가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더니, 이내 무언가가 정리된 종이를 내게 건넸다.
“고등학교 때 공부 좀 했니?”
“예.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습니다.”
아무리 야구 선수라 해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부모님 때문에 야구와 공부를 병행했었다.
“정말? 그럼 암기도 잘하겠네?”
“예.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거 내일 아침까지 전부 외울 수 있어?”
종이를 보자 우리 팀 투수들의 구종과 사인, 그리고 더그아웃과 주고받는 사인이 정리돼 있었다.
내가 잠시 멈칫하자, 감독님이 말을 이었다.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봐.”
“해보겠습니다.”
“정말?”
“예.”
어차피 잠깐 하는 역할에 필요한 것들이라 자세히 적혀있진 않았다.
이 정도라면 딱히 어렵지 않았다.
“그래.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내일까지 천천히 외워.”
그렇게 종이를 건네받고 내일 있을 훈련에 대해 들었다.
“내일 원래 계획했던 훈련에서 빠지고 배터리 코치랑 나랑 셋이서 계속 연습할 거야. 목표는 투수 공을 제대로 받을 때까지. 모레 선발인 하준이랑 호흡도 맞춰보고.”
“허하준 선배가 선발입니까?”
“어. 1군 복귀하기 전에 잠깐 몸 풀 겸 점검 차 던지는 거니까 3이닝 정도만 던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하준이 공이면 직구만 던져도 2군들은 못 치니까.”
나도 그 2군에 속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허하준.
명실상부한 마린스의 에이스.
저번 시즌에 부상을 당해 곧 복귀하는 건 알았지만, 그게 지금인 줄은 몰랐다.
첫 배터리 파트너가 허하준이라니,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무튼 수호야, 정말 고맙다. 솔직히 아무도 지원 안 할 줄 알았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감독님이 나중에 꼭 보답하마.”
혹자는 말한다.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스포츠다.
실력 차이가 비슷하면 결국 정든 놈, 이쁜 놈에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고작 2개월이었지만 감독님이 특별히 누군가를 총애한다거나 이런 걸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감독님의 말을 듣자 내 선택에 확신이 들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보자. 푹 쉬어라.”
“예. 내일 뵙겠습니다!”
감독님께 인사를 하고 훈련장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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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가자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이주학은 아직도 수비 코치님한테 잡혀있는 것 같다.
어수선할 것 같아서 나가서 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보자. 오랜만에 암기네.”
사인을 외우는 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2군 투수들 구종이라 해봤자 거기서 거기.
거기에 내가 사인을 낼 것도 아니라서 그다지 외울 건 없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흉내 내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포수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잘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마저도 손에 익자 그만두고 허하준의 구종에 대해 읽었다.
‘최고 구속 150km 중반의 빠른 포심으로 카운트를 잡고 결정구는 스플리터. 커브로 가끔 카운터를 잡으면서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도 즐겨 사용함.’
“그러니까 죄다 던진다는 거네?”
포심, 스플리터, 커브,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까지.
투수를 대표하는 구종의 이름들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사인을 보내는 것도 일이다.
거기에 150km가 넘는 포심이라.
타석에서 봐도 140km와 150km의 차이는 극심하다.
심지어 150km 중반이면 더 빠르게 느껴질 것이다.
과연 내가 이 공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하던 중, 방문이 열렸다.
“어? 주학이는?”
“수비 코치님한테 잡혀갔어. 어디 갔다 오냐?”
“노래방. 곧 밤인데 무슨 훈련이래.”
방을 열고 들어온 건 또 다른 룸메이트이자 드래프트 1차 2번 투수인 이호민이었다.
이호민은 이주학의 사정을 듣고 혀를 찼다.
“운 드럽게 없네. 야, 내일 뭐 하냐? 할 거 없으면 주학이랑 셋이서 부산 갔다 올래? 아빠가 고기 사준대.”
“안돼. 내일 훈련 있어. 주학이도 있을 거고.”
“아 진짜?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빠가 이번에 한우 1++라고 했는데.”
이호민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정육점을 운영하신다.
어렸을 때부터 고급 단백질을 매일 먹은 덕분일까?
이호민의 공은 투수 사이에서 꽤 묵직하기로 유명했다.
어?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너 포심 구속이 150km정도 나오지?”
“어 그쯤 나오지. 갑자기 왜?”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