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순금처럼 깨끗한 (1)
[오만이 그리 말했습니까?]
촛불로만 어둠을 밝혀 내어 아늑하고도 침침한 공간. 그 중심에 선 이가 핏기 없는 입술을 살금 떼내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이의 실루엣은 마치 로브로 몸을 꽁꽁 가린 여인과 닮아 있으니.
그 존재는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처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주었다. “으음.” 그때마다 자그만 잠꼬대가 처녀의 입새로 새어 나왔다.
[벨페고르를 불러오세요. 그와 대책을 상의해야겠으니.]
그리고 끝내 처녀의 눈에 뜨이려 할 때. 짙은 피부색의 손이 움직여 처녀의 눈가를 가렸다.
로브 속 실루엣이 한순간 변하며 금발을 흐드러지도록 피워 낸 미인이 후드 아래로 고개를 드러냈다.
“…사라?”
[네, 당신의 사라는 아직 여기 있어요.]
“지금 몇 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았어요. 더 자도 돼요.]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
[오늘은 저와 오래 있어 준다고 하셨잖아요.]
“아… 오늘, 휴일이었던가?”
[네에. 적어도 사라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는 처녀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처녀의 눈가를 가려, 거짓된 밤을 선사하는 중이다.
[해가 뜨면 깨워 줄 테니 걱정 말고 더 주무세요, 저의 아스포델.]
“으응…….”
결국 그 공세에 이겨 내지 못한 처녀가 다시 잠들었을 때, 그는 길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후드가 손짓에 따라 같이 넘어가며 그의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사랑을 빼앗긴 자들이 나태마저 빼앗기면 어찌 될지… 궁금하네요.]
텅 비어 존재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 * *
“늦었잖아.”
드디어 주작이 우릴 데리고 날 정도의 힘을 회복했다.
“사고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마이스터와 세 떨거지를 버려 두고 온 그곳이다. 펄럭이는 소리를 듣고 나온 네 사람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주작이 작아진 거랑 관련 있는 거냐?”
“그래.”
나는 오두막 현관에 기댄 이에게 고개를 주억여 주었다. 그러자 마이스터의 몸이 똑바로 서며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로 가는 거 맞지?”
“그렇게 되겠지.”
가뜩이나 전선의 빈자리에 대해 걱정하던 주작이다. 예기치 않게 사흘이나 더 늦어진 지금, 그 속마음이 어떤 색일지는 아무도 모를 터.
무리해서라도 걸음을 재촉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거고?”
“그래.”
다행히 인퀴지터와 다니엘이 사흘 내내 달라붙은 덕분에 용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했다. 조각의 빈자리까진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금이 간 부분은 완전히 메워진 것이다.
그에 따라 용의 정신도 어느 정도는 깨어났다. 주작의 표현에 따른다면 ‘기절’에서 ‘선잠’ 정도로는 바뀐 것이다.
그리고 용은 본디 선잠을 자며 세상을 관조하고 보호하는 것이 일상이니. 적어도 주작은 그리 주장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아무렴, 용이 제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곳에 있을 필요는 더 없었다.
“…잘도 살아서 왔네, 저 둘은.”
“음?”
그때 마이스터의 시선이 내 뒤쪽, 주작의 등에서 내리지 않은 소녀와 투사에게로 향했다. 내 시선이 애매해졌다.
“…난 너야말로 잘도 살아 있다 생각했다마는.”
“뭐야. 내가 고작 며칠을 못 살아 있을 등신으로 보였냐?”
“그쪽을 말한 게 아니다.”
내가 설마 생활력 문제로 말을 했겠냐고.
“베르세르크에겐 나중에 사과해 줄 수 있나.”
“내가 왜?”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아, 너 설마. 쟤가 날 죽였을 거라 생각했냐?”
“그럼 아니 그렇겠나?”
저 새낀 저 싸가지와 성질머리, 뻔뻔함 때문에 언젠가 지옥 한 번쯤은 볼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마이스터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새끼 저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지. 아니, 뭘 어쩌긴 어째. 전부 지 업본데. 대충 그런 걱정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글쎄. 그게 네 의견이라면 나도 할 말은 없다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거기다 말을 얹어 봐야 뭐 하리오.
나는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장화랑 닮긴 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선 다르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내 마음을 적적하게 만드는 중이다.
“뭐야, 그 말투?”
“강요하지 않겠단 의미였다. 신경 쓰지 마라.”
뭐, 마이스터에게 장화를 비춰 보던 것도 아니니, 서로 다르다 해서 실망할 건 따로 없지만…….
그래도 장화만큼은 친해지기 어렵겠네. 나는 막연히 그런 판단을 내렸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거나,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모든 게 없었어도, 나와 마이스터는 일정 이상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짐이나 빨리 챙겨라. 아니면 내가 도울 게 있는 건가?”
꼭 내가 그와 친해지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단지, 오랜 경험이 알려 준 바, 인간적인 부분에서 안 맞으면 원치 않아도 대부분 그렇게 됐다.
“…딱히 없어. 정 할 거 없으면 공구만 챙겨 주고.”
“그러지.”
하여 나는 겪어 본 것에서 비롯된 판단으로 그와 나의 거리를 정리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이 거리는 아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공간 팔찌에 넣어 두겠다.”
“그래.”
데브에게서 팔찌를 돌려받았겠다, 팔찌에 공간도 났겠다.
나는 그 안으로 공구를 슉슉 넣었다. 끌이나 망치, 칼 정도가 다라서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내 눈이 너저분한 거실로 향했다.
“이것들도 챙겨야 하나.”
이게 다 뭐람. 나는 바닥에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는 ㄱ자 형태의 물건들을 살폈다.
투박하긴 하지만 방아쇠와 방아쇠울이 있는 걸 보니 어째 총 같은데… 잠깐.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가 얘한테 테이저 건 얘기를 해 주지 않았나?
내 눈이 떨떠름함을 저도 모르게 머금었다. 이 자식, 설마 진짜로 만들어 본 건가?
“이것들만 챙겨. 나머진 필요 없어.”
“그러지… 근데 정말 만든 건가?”
내가 테이저 건에 대해 말해 주게 된 원인은 별 거 없다. 마이스터가 준비 없이 푸른열망의 파미르 일행을 마주치는 일이 발행한 후, 그에게도 무언가의 호신 용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총이 아니라 테이저 건이었던 이유는 이번처럼 적이 적이 아니었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고.
“어.”
“제법 그럴싸하군…….”
그런데 설마 말해 준 지 얼마 안 돼서 벌써 제작에 들어갔을 줄이야.
하여간 명장은 명장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 조악한 그림 몇 장과 설명만을 듣고 그럴듯한 형상을 만들어 내다니.
“그거 쏠 수도 있어.”
“…뭐?”
“쇠가 부족해서 나무 막대만 달아 둔 상태지만. 일단 발사는 가능한 상태야.”
미친, 미친놈. 이걸 해내네.
나는 깜짝 놀라 막 쥐어 들었던 작품 중 하나를 떨어트렸다. 추락하기 전에 간신히 잡아 내긴 했지만, 역시 충격적이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프로토타입도 돌려받아야 하는데.”
“프로토타입?”
“저 여자애가 빌려 달랬거든.”
소녀가 테이저 건을 빌려 갔었다고? 들고 있는 건 딱히 못 봤는데.
“그 이전에, 정말 빌려준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이스터가? 네가? 진짜로?
“눈빛이 불손하다, 새끼야?”
“그래… 너도 아이에겐 관대한 어른이었군.”
“뭐라는 거야, 염병.”
“잘했다. 어른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시발, 진짜 뭐라는 거냐고.”
성격이 절구로 빻은 들깨 가루처럼 으깨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이에겐 선의를 베풀 줄 알았구나.
나는 마이스터의 의외의 면에 감동하며 슬슬 건물을 나갈 준비를 했다. 물건을 다 챙겼으니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너는 진짜…….”
그런 내 뒤로 마이스터가 천천히 따라왔다. “어휴 추워.” 온갖 욕과 불평불만이 토해졌지만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인퀴지터랑 애 앞에서까지만 안 하면 된다.
“후와. 드디어 남쪽으로 가는군요.”
“그런데 불새, 왜 작아진 거냐?”
“입 다물고 그냥 타라.”
주작의 면적이 줄어든 까닭에 말들과 꼭 붙어 타게 생겼지만, 이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리라.
나는 한마디로 노르다인 셋의 기강을 잡는 베르세르크를 보며 손짓을 했다. 약속한 게 있었기에, 그녀가 변두리를 밟으며 손을 까딱였다.
휘익!
밧줄의 형태로 날아간 라텔이 베르세르크의 손에 들어간 순간, 내 몸이 낚시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위로 당겨졌다.
“또 신세 지는군.”
“별말씀을.”
위로 솟구친 몸은 중력에 따라 다시 추락했고, 그대로 베르세르크가 붙잡아 줬다. 힘이 얼마나 센지, 한손에 내 몸이 온전히 받쳐졌다.
펄럭.
심지어 붕 떴다 가라앉는 망토가 뒤로 묵직하게 내려섰으나, 우뚝 선 그녀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안정감이었다.
“제, 제가 업어 드려도 됐는데.”
“매번 너만 고생시킬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
나는 베르세르크에게 들린 그 상태 그대로, 바구니까지 안전히 이송되었다. 예전에는 인퀴지터가 바구니째로 들어 옮겨 줬던 그 자리였다.
“넌 아직도 바구니 타냐?”
“안타깝게도, 북쪽 한 번 다녀온 걸로는 체질이 바뀌지가 않더군.”
그사이, 다니엘과 데스브링거의 도움을 받아 총총 올라온 마이스터가 나를 비웃었다. 문득, 베르세르크와 그의 시선이 얽힌 듯했다.
“어이, 꼬맹이. 너, 나한테 반납할 게 있지 않냐?”
하나 마이스터는 끝내 베르세르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기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소녀에게로 발길을 트는 걸 구경했다.
“아… 죄송해요.”
“뭐야, 너 설마 두고 왔냐?”
“두고 온 건 아니에요! 단지 깨어나 보니까…….”
마이스터가 소녀한테 너무 모질게 굴면 바로 개입해야지.
나는 주절주절 이어지는 상황 설명과 그걸 듣는 마이스터의 안색을 섬세하게 살폈다.
[다 됐다면 출발하겠다.]
주작의 비행이 시작되며 주변을 맴도는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랬단 말이지.”
“죄송해요…….”
“아니, 됐어. 돌려받을 건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잃어버렸다는 소녀의 말에 마이스터는 순순히 수긍했다. 뭐야, 걱정할 필요도 없었잖아. 내 마음이 의외의 긍정적인 상황에 안도했다. 역시 마이스터도 아이에겐 약한 게 분명하다.
“대신 네가 쓰면서 느낀 감상은 토해 내라.”
“네… 네!”
그럼 이제 더 신경 쓸 건 없나.
나는 마이스터가 소녀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베르세르크가 한 걸음 떨어진 자리서 지켜보는 모습을 뒤로한 채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목적은 하나. 예기치 않게 보게 된 얼굴들을 잊기 전 그려 내는 것이다.
“그런 단점들이 있단 말이지…….”
“도, 도움이 됐을까요?”
“빌려준 값만큼은, 충분히.”
물론 지난 사흘간 그려 둔 것도 꽤 있다. 하나 그래도 기억을 연상시켜 줄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단 말이지.
“…네가 무기를 빌려준 거냐.”
“그런데?”
“…감사를 전하지.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이 애는 거기서 죽었을 테니까.”
나는 몸이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얼떨결에 보게 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펜을 움직였다.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데스브링거가 제법 궁금한 사람의 얼굴을 했다.
“애가 잘 써먹어서 산 거고, 네 감사 받을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싫다면 말아라.”
“…뭐어, 네가 정 감사하면 못 받아 줄 것도 없고.”
정 궁금하면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이젠 말해도 궁지로 몰릴 일 없으니까.
“…….”
“…….”
“아, 진짜.”
나는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이 누군지 알려 주었다.
얘는 선림이, 내가 항상 많은 걸 배워 가는 친구. 얘는 장화, 까불거리지만 잔정이 많은 놈. 얘는 정희, 분위기 메이커 겸 주도적으로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애. 마지막으로 태균이, 내가 차를 좋아하게 된 원인.
“거 뭐냐.”
그러고 보니 여름 되면 다 같이 봉사 가기로 했는데, 나 때문에 취소됐겠네.
내 중얼거림에 데브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리 친구들은 다 나리랑 비슷한가 보네요.” 가끔 듣는 이야기였다.
“아, 씨.”
하나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애들만 진짜 친구로 남겨 두는 편이었고, 그런 사람이 아닌 이들은 애초에 내 곁에 남으려 들지도 않았다.
뭐, 최종적으로 내 옆에 남은 건 이 넷뿐이지만.
“미안하게 됐다.”
한데 그쯤 되니, 귀에 낯익지만 낯선 말이 들려왔다.
“……?”
“그때 미안하게 됐다고.”
…마이스터, 사과도 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럴 가능성을 짐작 못 한 건 아니지만, 딱히 속이려 했던 것도 아니야.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네.”
물론 저게 제대로 된 사과인가? 물으면 그건 별개의 문제지만. 그래도 사과는 했다. 영영 안 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래.”
베르세르크도 이 상황만은 예상 못 했는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호박색 눈이 새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유달리 선명하게 보였다.
“그 사과, 받아 주지.”
이 정도면… 그래도 평타라 볼 수 있는 걸까? 나는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분위기를 보며 바구니에 등을 기댔다.
“어어어!”
쿠당!
“……!”
“아이고, 나리!”
“와아악!”
…바구니가 몸의 무게를 못 버틴다는 걸 깜빡했다. 내 등이 정화의 불길에 화르륵 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