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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87화 (387/389)

387화 털고 또 털어도 (6)

“그런데, 네가 소모품으로 쓰인 이유는 그래서 뭐인 거냐? 단순히 실패작이라서 그렇게 된 거냐?”

그때 품에 기댄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베르세르크가 물었다. 심드렁한 얼굴은 지금까지 오가던 주제에 영 관심이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뭐어, 그 덕에 우리가 놓칠 수 있던 무언가를 다시 잡아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가 그의 기억을 물려받게 된 것은 오만으로서도 제법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주제에 조금의 힘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 역시.”

조금 생각하던 눈치의 계명이 조용히 답을 뇌까렸다. 그녀가 진정 오만의 기억을 물려받았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맞아떨어질 추론이었다.

“당장 죽일 것까진 없으나, 등용할 이유도 없다. 내가 가진 지식은 그에게도 있으며, 내 수준의 무력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

그를 통해 오만의 대악마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건 좋으나, 계명 당사자에 한해서는 과연 괜찮은 일일지. 나는 그녀의 성정이 꼭 기억을 받았기 때문일까 라는 고민을 잠깐 해 보았다.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하므로 나는 뮌문트에 보내졌다. 당시의 내가 가장 좋은 패로 쓰일 수 있는 곳이 오직 그곳뿐이었으므로.”

뭐, 본인도 동정을 바라지 않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무례겠지.

나는 아까부터 계속 공감으로 빠지려는 감정을 바로잡았다.

내가 피해자가 아닐지언정 저쪽도 어지간한 살인자다. 그것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금은 서늘해지며 약간의 거북함이 생겨났다.

딱 좋은 거리감이고 앞으로 유지해야 할 감각이었다.

“그런가.”

근데 오만 그 악마도 좀 웃기네. 본인의 지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걸 그냥 소모품으로 써먹어?

계명에게 마법을 쓸 마력이 없다 해도 판단은 동일하다. 이번 케이스를 보았을 때, 계명은 스스로 쓰진 못해도 남에게 대행시킬 순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만도 어리석군. 그대의 가치는 꼭 지식에만 있지 않은데.”

만일 그걸 다 제쳐 두더라도 계명에겐 몸을 쓰는 능력과 뛰어난 검술이 남아 있다. 인간 측 수석 기사를 둘이나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그녀에겐 있단 소리다.

그러니 이런데 써먹는 것보단 좀 더 나은 사용법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면, 규격 외의 능력이 아니면 전쟁에선 의미 없다 이거야? 그래서 도시 하나를 무너트릴 비수로써만 꽂아 둔 거고?

“…우리 쪽으로선 그저 다행인 일인가. 여전히 그대의 행위를 옹호하진 않으나, 그대를 적으로 만나는 건 더더욱 싫으니.”

생각해 보니까 오만은 오만대로 최대한 써먹은 것 같긴 하다. 계명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준이냐면 그건 또 아니니까.

게임으로 이유하자면 엘리트 몹 정도? 그런 걸 병졸로 써먹을 바에야 적의 심부에 박아 놓고 필요할 때 비수로 써먹는 게 좀 더 효율적이긴 하지. 본래라면 교환비가 안 되는 게 특수 상황으로 인해 가능해질 수도 있으니까.

다만 아벨의 안배로 인해 상황이 틀어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오만으로선 지극히 뼈아픈 일이고 우리로선 기가 막힌 행운이었다.

“…근데 다들 왜 그렇게 보지?”

“아뇨… 친하신가 해서.”

친해? 내가? 쟤랑? 왜?

“…쓸데없는 말을.”

내가 데스브링거의 말에 얼떨떨해하는 사이, 계명도 부정에 나섰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게 제법 기분이 나빠 보였다. 역시 친하다는 말에 발끈한 게 분명했다.

“아, 그렇지.”

이럴 땐 역시 주제를 돌리는 게 짱이다. 마침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했던 것도 생각났고.

“계명, 오만이 지금 상황에서 시도할 만한 마법진에 대해 가늠되는 것이 있나?”

“정확히.”

“신이 내게 경고했다. 오만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고.”

“예에?!”

“저, 정말입니까?”

“신이 경고할 정도면 필시 보통의 것이 아닐 테지. 하니 예상 가는 게 있다면 말해 줄 수 있나.”

나는 그녀에게 ‘오만의 마법진’을 물었다. 계명이 손을 들어 본인의 턱 끝에 살짝 대었다. 이건 그녀에게도 꽤 고민되는 질문인가 했다.

“예상 가는 것이 제법 있지만, 무엇 하나 정확히 맞아들진 않는다.”

“그런가?”

“하나… 그가 마법을 새로 개발하여 진행한 것이라면, 그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마법을 개발해?”

“그는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존재이니. 이곳의 인간들이 마법을 다루게 된 것도 악마를 모방하기 시작한 게 최초임을 잊었는가?”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한국 역사도 지엽적으로 외우기만 했다고.

“…놀랍긴 하지만 지금 파고들 부분은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추측은?”

“대륙 전체에 걸쳐 그려 낸 인신 공양의 마법진.”

하나 내 투덜거림이 길어지기도 전, 계명은 충격적인 말을 내놓았다.

“최근 대신전을 무리해서 공격한 걸 고려하면 오만이 쓸 만한 노림수는 그것밖에 없으리라.”

* * *

호수가 바닥을 대신하고 샹들리에가 은하수를 대신하는 옥좌의 방. 아벨은 부름에 맞춰 그곳에 섰다.

며칠 전에 갓 완성된 마법진의 정수는 옥좌의 홀 한가운데서 마지막 영창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나의 하늘이시여, 번제를 준비하면 되겠나이까?]

그의 주인이 그를 부를 때는 오직 공양이 필요한 순간밖에 없다. 그를 고려하여 아벨은 의무적인 존문만을 뱉은 채 자연스럽게 불공을 준비했다.

가슴을 가르는 데 쓰이는 허리춤의 단검이 그의 빈손에 잡혔다.

[번제하기에는 오늘 날이 좋지 않다. 관두거라.]

[그렇나이까.]

하나 더없이 오만한 지고의 존재가 그를 만류했다. 번제가 익숙하다 하여 죽음이 달가운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아벨은 순순히 검을 납도했다.

[하면 높으신 분이여,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이까?]

[진정한 죽음을 준비하라.]

그러다 잠깐. 주인의 말에 그의 입술이 살풋 떨렸다. 이해를 못 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진정한 죽음. 아벨의 주먹이 오그라들었다.

[진정한… 죽음입니까.]

[그래.]

[감히…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죽음. 그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것.

아벨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무언가의 감정과 상념들로 가득 찼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책은 그의 공허를 어느 정도 메워 줄지언정 정말 필요할 때는 정답을 알려 주지는 못했으므로.

[이곳의 신이 다시 개입하기 시작했다.]

[무슨… 아, 혹시 제약이 풀려난 것입니까?]

[북쪽의 용이 해방되었다.]

다만 그 이름 모를 것들은 주인의 목소리 앞에서 감히 기지개를 켤 수 없었다. 아벨은 다시 주인에게 집중했다.

[북쪽의 용이라면… 아, 그 전사군요.]

용사로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재능을 타고난 주제에 유난히 강함을 탐내던 인간. 악마와 거래하진 않았으나, 위장한 모습 한 번으로 등 떠밀어 주니 악마와의 계약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그 인간.

[영원히 몰랐어도 좋았을 것을, 이번 대 용사는 너무도 활발하게 움직이는구나.]

아벨은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공연히 심장께를 매만졌다. 위장한 모습일지언정 그 전사와 마주쳤던 것이 본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당시 겪었던 일들이 촤르륵 지나갔다.

『용의 심장을 먹으면 강해질 수 있다고? 하! 그 말이 정말이라면 시도하고 싶긴 하군. 내가 용을 죽일 정도로 강했다면 말이야!』

하나 그 순간이 유독 아득하면서도 선명하게 각인된 것에는 역시나 그의 죽음이 껴 있기 때문이리라.

『용을 죽일 수 있는 축복을 걸어 주겠다고? 네가? 어떻게?』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이 정도면, 용을 죽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너, 너 어떻게 한 거냐? 무슨 수를 쓴 거지?』

가슴을 갈라 심장을 번제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지.

아벨은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용의 심장을 강탈한 후에도, 그 인간이 ‘축복’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며 시시각각 달라붙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떠나려고 해도 붙잡고 놔주질 않는 통에 정말 한참을 잡혀 있어야 했지. 결국은 혼자 탈출하는 것에 실패하여 하와를 불러와야 했었지만.

[…그렇군요. 용사가 또 해결한 거로군요.]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가 했던 고생의 무게를 주인은 알지 못하리라. 그의 주인은 하잘것없는 것들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지배자이고, 세상 만물을 제 소유로 두는 절대자이며, 그들의 숭상을 받아야 마땅할 지고의 존재이니.

[해서, 저의 죽음이 필요해지셨나이까?]

그러니, 그들의 희생은 아주 당연한 것이며 이런 봉사는 지극히 영광된 일일 뿐이다. 마땅히, 기쁜 마음으로 따라야 할 행동들이란 말이다.

[그래, 나의 양치기야. 용사가 이곳에 발을 딛는 날, 너는 너의 목숨으로 나를 기쁘게 하라.]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벨은 문득, 이름 없는 형제가 떠올랐다. 더는 주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그 자유를 좇아 움직일 그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

[응당 그리하겠나이다. 나의 하늘이시여.]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좆됐다…….’

계명에게 들은 것이 너무 경악스럽던 나머지, 나는 파우스트에게 들릴 만치 강하게 욕설을 지껄였다.

하나 평상시 같았다면 맞장구 쳐 주었을 소년은 오늘따라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나를 배려한 것인지, 본인의 고뇌에 잠긴 것인지는 달리 알 도리가 없다.

‘진짜 좆됐다…….’

마찬가지로, 분노 역시 더 이상 가볍디가벼운 아가리를 벌리지 않았다.

어떤 일인지는 글쎄. 본인이 그리던 그림이 다 망가지며 패닉이라도 왔나 보지.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신경 껐다. 그 새낀 좀 더 좆돼도 됐다.

“후우.”

그렇지만 나는 아니야.

대륙급 인신 공양 마법진을 등에 업은 오만을 상대하라니. 이건 에바잖냐. 진짜 에바잖냐……! 완전 삼진에바로 기각이잖냐……!!

[뭘 그렇게 한숨 쉬어.]

차마 애들 앞에서 궁상 떨 순 없어, 아침… 새벽 산책을 빌미로 어두운 설원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까.

한쪽에서 날아온 주작이 내 주위를 맴돌며 물었다. 솔직히 그걸 물어봐야 알겠냐고 대답하고 싶어지는 질문이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지 궁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답변은 역시 좀 아니지?

나는 애타는 속으로 말을 가다듬었다. ‘얘들아, 우리 좆됐어.’를 어떻게든 순화한 말이 하얀 입김과 함께 토해졌다.

밤에 의해 잿빛 연기로 화한 것이 하늘하늘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

[하긴, 너는 용사의 동료였지… 그런 고민도 어쩔 수 없나.]

저거 보니까 담배 땡기네. 나는 차마 피워선 안 될 것을 떠올리며 다시금 숨만 뱉었다. 니코틴은 없지만, 잿빛 연기를 뿜으니 담배를 태우는 것과 비슷한 기분은 났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너무 근심하는 것도 안 좋아.]

“그건 안다만…….”

그래, 내가 이걸 두고 머리를 끙끙 싸매 봤자 달라지는 건 없긴 하지. 없긴 한데.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해. 최종 보스에게 가지도 못하고 그 직전 보스에게 컷당하는 건 슬프잖아.

“난 그저, 내 앞에 있는 아이를 구하고 싶을 뿐이다.”

차라리 9년을 보내는 것이 더 나았을까. 그렇지만 그건 처음부터 허상이었단 게 밝혀졌다.

내 눈꺼풀이 다물리고 입이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세상 사는 건 정말이지 녹록지가 않군…….”

[인정하는 바야. 세상 참 고달프지.]

와중에 주작, 계속 위로해 주네. 나는 어떻게든 호응하는 것으로 위안을 전하는 존재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누천 년간 싸워 왔을 그대에게 할 말은 아니군.”

[뭐 어때. 기나 짧으나 각박한 인생이 많다는 건 사실인걸.]

“하나 그대만큼 헌신하는 자도 드물겠지.”

[헌신, 헌신이라… 나는 그냥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지. 아무렴, 세상이 망하면 나도 살 곳이 없어지는걸?]

“글쎄. 단순히 살 터전을 위해 싸우는 것치고 다른 생명체를 위하는 마음이 크지 않나 싶군.”

[나보다 약한 애들을 돕는 건 당연하잖아?]

“내 안의 악마는 그것에 조소했으니, 당연한 건 아닌 듯하다.”

나는 라텔에 마력을 살짝 불어넣어, 지팡이 비슷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끄트머리가 T자로 갈라져 있어, 주작이 딱 앉기 좋은 형태였다.

[이거 괜찮네.]

“편하다면, 됐다.”

나는 주작이 지팡이에 앉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가 과하게 흔들려서야 주작이 불편할 것이므로 그 부분은 당연히 유의했다.

땅을 짚는 데 쓰이지 않는, 오롯이 주작의 쉼터로만 쓰이는 막대가 내 손에 들린 채 허공을 유영했다.

“주작.”

그러다 잠깐. 나는 내 옆에 있는 검은 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전해 듣기로는 저게 노르다인에게 향하는 저주의 증거랬는데.

“저것은 언젠가 사라지나?”

용이 아직 거두지 않은 것인지, 혹은 거두지 못한 것인지. 저것은 여즉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다. 언제 사라질지도 알 수 없었다. 저주를 건 자는 아직 잠든 상태니까.

[저주 말하는 거지?]

“그래.”

다만 저주가 사라지지 못한 이유가 거두는 걸 깜빡해서가 아닌, 거둘 수 없는 쪽이라면 어떨까. 노르다인들은 그럼 선조의 잘못을 진 채 영원히 저주를 짊어져야만 하는 건가?

내 물음에 주작이 붉은 날개를 한차례 펄럭였다.

[그럼. 이 저주도 언젠간 걷힐 거야. 용은 반드시 깨어날 테고, 세상의 위험이 하나 사라졌으며, 신은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으니까.]

불꽃으로 이뤄진 날개에서 흘러나온 불티는 마치 보석 조각과 같다. 반딧불이처럼 아련하고 풍등처럼 은은한 빛이 내 시야 일부를 가리며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순백의 지평선 저 너머, 그 먼 곳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네가 해내지 못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고, 나빠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좋아질 거야.]

어둠을 내쫓고 백색에 희망의 주홍을 더하여 세상을 비추는 빛이었다.

[증거도 있어. 내가 살면서 봐 온바, 너처럼 선하고 강인한 사람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반드시 한 명쯤은 나타나서 세상을 바꿔 왔거든.]

아, 아침이다.

[그러니 이 세상도 언젠가는 구원받을 거야. 네가 해 온 것에 힘입어 누군가는 다시 힘내 줄 테니까.]

눈부시도록 찬란한 아침이었다.

나는 주작과 함께 한동안 그 아침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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