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털고 또 털어도 (5)
“…착각도 그 정도면 능력이라.”
데스브링거가 제기한 의문에 내 상념이 절망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으려 들 무렵. 멀리 떨어진 이가 입술을 떼었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어처구니없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오만의 수족들이 다른 악마들에 비해 마법의 조예가 높은 것은 맞으나, 나와 같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자는 오만뿐이 없다. 하니 쓸데없는 근심으로 화를 사지 말라.”
그건… 당장 듣기엔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그녀가 오만만큼의 지식을 가진 존재라면 그녀는 왜 버림 패 내지 소모품 정도의 잡졸 위치를 가지고 있던 거지?
“…아무래도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하겠군. 계명, 그대도 이쪽으로 합류해라.”
“글쎄, 나를 믿나?”
“많은 기회가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믿지 못할 이유 없지.”
자기가 나쁘고 위험한 사람이란 걸 인정받고 싶은 거야, 뭐야. 네가 저지른 악행은 안 잊고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시험 말고 오기나 하지?
나는 그런 심보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대답을 내놓았다.
“…어.”
“저, 나리. 그게 무슨 뜻…….”
동료들의 어리벙벙한 얼굴이 대가랍시고 돌아왔다.
다들 나사가 하나씩 풀린 듯한 게, 무언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공격하지 않을 걸 어찌 믿느냐 물은 것이고, 나는 그녀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었다면 진즉 그리했을 것이라 판단하여 대답했다. 그뿐이다.”
그러니까… 이거 맞겠지? 다들 이 부분을 몰라서 질문한 거겠지? 내가 모르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어서 그 부분을 꿰뚫어 보고 질문한 거 아니지?
“역시 모험가님……!”
“아, 그런 겁니까요. 하긴, 이제 와서 내외하긴 너무 멀리 왔죠. 지금까지 거리를 내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확실히, 저희를 노릴 기회가 많긴 했습니다. 당장 늑대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굳이 무언갈 하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는 것 하나만으로 저희는 죽음과 가까워졌을 테니 말입니다.”
다행히 그들이 몰랐던 부분이 이게 맞나 보다.
나는 납득하는 얼굴들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한 게 그렇지 않을 때면 좀 당황스럽다.
“수준에 맞지 않는 자들을 동료랍시고 들였구나.”
마침 우리 쪽으로 다가온 계명이 조소했다. 가슴 한편이 뜨끔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다.”
그, 그래도 말이야.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말은 좀 너무한 거 아닐까? 그냥 우리가 띄엄띄엄 말하는 데 익숙할 뿐인 걸지도 모르잖아.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과 책을 자주 읽는 사람의 독서 속도가 차이 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과연 그럴지.”
하나 그녀는 내 심정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의뭉스러운 한마디를 남겼다. 내 시선이 결국 땀방울 하나를 매달았다.
“그래서, 오만과 동급의 지식을 가진 게 너뿐이란 건 뭔 소리냐?”
다행히 그런 나를 구해 준 건 베르세르크였다.
그녀의 심드렁한 표정 이면에선 계명이 누구든, 어떤 놈이든, 얼마나 가까이 있든, 기습에 당하지 않고 역으로 죽여 버릴 수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계명의 정체를 알고도 시원시원하게 굴 수 있는 이유의 토대 그 자체다.
“…말 그대로다.”
한데 계명은 많고 많은 자리 중 그런 베르세르크의 옆자리에 딱 주저앉았다. 그녀가 베르세르크의 성격을 알고 그런 것인지, 단순히 우연일 뿐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부서졌지만 여전히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리는 가면이 계명의 표정을 영 보여 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나는 오만이 그 스스로를 표본 삼아 만들어 낸 존재다.”
우리는 그렇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오는 말마다 충격적이어서 그 분위기가 오래가진 않았다.
“그 과정에서 능력은 받지 못하였으나 기억은 물려받았다. 하므로 나의 지식은 오만과 동격일 수밖에 없다.”
“…잠깐, 뭐라고요?”
“무슨…….”
[…악마들도 정말 별짓을 다 했구나.]
이, 뭔. 오만이 스스로를 표본 삼아 만든 존재라고? 그게 말이 돼? 아니, 말이 되니까 저이가 존재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새롭게 생겨난 의문이 많으나, 하나씩 묻도록 하지.”
나는 벌써부터 머리 아픈 문제를 두고 모퉁이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기로 했다. 당혹스럽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질문했다간 오히려 골 때려진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계명, 오만은 왜 그대를 만들었지?”
“…아마도, 변덕이었을 것이다.”
“……?”
“특별한 무언가가 없더라도 그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이 소모된다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그의 생은 끝이 없으며 감히 그를 끝낼 수 있는 존재도 없으므로.”
내가 차근차근 접근하리란 걸 알았는지, 계명도 그에 맞춰 답을 주었다. [끝나지 않는 시간이 뭐가 좋다고…….] 주작의 투덜거림이 잠깐 배경음처럼 지나갔다.
“하나 지루함은 다르다. 죽음은 막을 수 있어도 지루함이 부르는 권태는 그 누구 하나 막을 수 없음이니.”
아무튼, 주제가 주제인지라 계명의 굳은 입매에는 불쾌감이 연지처럼 얕게 발렸다. 그녀의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상황을 뒤집는 패가 된다면 좋다. 하나 그러지 못해도 큰 상관은 없다. 마침 흥미로운 인간의 접선 시도도 있으니 그를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를 만들기로 했다.”
“잠깐, 인간의… 접선 시도라는 말은.”
다니엘의 물음에 계명은 답하지 않았다. 뒤로 미루라는 말 대신 올라온 것은 그녀의 손이다.
선명한 신호에 다니엘이 멈칫거렸다.
“다만 그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인간에겐 인간으로, 악마에겐 악마로 보이는 존재라.”
[엥.]
“무슨…….”
“당연히,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만도 그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불가능함을 알면서 시도했다는 건가?”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권태의 희석이었으니까.”
“…….”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불가능한 시도임을 알면서 시도한 자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
필요했다곤 하나 조금은 가혹한 질문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얄팍한 노림수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예상을 뚫고 성공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의 이득이 발생할 터이니.”
[당연하지. 그런 게 정말 존재하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 스스로가 연구하지 않고 인간에게 떠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큰 연구를 스스로가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되, 인간 특유의 의외성에 무언가를 맡겨 보는 건 손해가 없다. 실패해도 낭비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지 그의 시간이 아니므로.”
“…하면, 권태를 희석시키는데도 효율을 챙기는 존재가 스스로를 표본 삼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실패할 연구라면, 자기 자신을 표본 삼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접선한 인간에 대한 질문은 좀 미루기로 했나 보다. 다니엘이 그런 의문을 던졌다. 제법 예리한 지적이기도 했다.
오만이란 대악마가 진정 효율을 챙기고 본인의 권위를 내세우는 존재라면, 그는 도리어 자신을 표본 삼지 않는 게 맞다.
적어도 다니엘이나 내 편견에서는 그랬다. 오만하다면 그만큼 스스로를 귀중하게 여길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히 실패할 연구에 스스로를 써먹진 않을 테니까.
“그것은 그가 오만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만이란 건, 감정이란 건 사람마다 그 잣대와 발로의 형상이 다르기 마련이라.
“모든 피조물은 그의 피와 살을 받아 탄생된 것이어야 한다. 오직 그에게서만 생이 비롯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그의 권위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치솟는 것이다.”
나는 계명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오만의 대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얼추 이해 갔다.
“그는 창조신이라도 되고 싶은가 보지.”
아무렴, 피조물 모두가 자기한테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건, 결국 그 존재들에게 있어 부모이자 주인,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와 다르지 않다.
즉, 그것의 오만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가장 위에 서는 데 있었다.
“우습군.”
[그러게. 네 말대로 진짜 우습네.]
이건 뭐,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도 아니고. 정말 가지가지 한다, 진짜. 이래서 오만인 건가? 이름값을 잘해도 너무 잘하는데.
“…제법, 경이롭구나. 그대는 행간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는 데 재능이 있다.”
아니, 이건 딱히 내 재능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냥 걔가 뻔한 군상일 뿐인 거지.
“창조신…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피조물을 소모품으로 쓰는 주제에 신이 되고 싶어 하다니.”
“가히 오만이란 말에 걸맞은 악마입니다. 역겹기 그지없군요.”
[그러니까아. 신이 되고 싶으면 좀 더 피조물을 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와중에 사제 출신 둘과 주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 입장에선 그놈이나 저놈이나 싶었던지라 별로 공감은 안 갔다.
이곳의 신이야 피조물을 소모품으로 쓰진 않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당한 게 너무 많은걸.
그것 모두가 신의 탓은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이 향하는 앙금만 따져도 오십보백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아까 접선한다는 인간은 뭔 소리입니까요?”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데스브링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이것도 짚고 넘어갔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걸 묻는가?”
“왜요. 저는 질문하면 안 됩니까요?”
“…아니, 대답해 주지.”
데스브링거가 불량하게 톡 쏘는 말을 뱉자 계명은 조금 길게 숨을 뱉었다. 근데 어째 말하는 투가 애매한 게, 그녀가 그리 반문한 사유는 질문의 주체가 꼭 데스브링거여서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마치 ‘알면서 왜 묻냐’는 쪽에 더─
“하얀까마귀다.”
가까운……? 잠깐, 진짜로?
“그 무슨─!”
[…돌겠네.]
“왜 그리들 놀라지?”
퐁 뛰어오르는 인퀴지터나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다니엘, 귀를 바짝 세운 데스브링거. 그 셋을 보며 계명이 개탄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우리가 이걸 예상했을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하긴, 여지가 있다면 확실히 그 사람이긴 하지. 계명을 소개해 준 사람이 계명의 정체를 몰랐을 것 같지도 않고, 오만을 대행해 실험을 진행할 실력자가 세상에 흔하지도 않을 테니.
특히 생명을 가지고 실험하려면 그쪽 분야에 특화되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치면 확실히 추측 범위는 정해져 있었네.
“저… 대전사. 흰까마귀가 누구예요?”
“나도 모른다.”
[…마탑의 주인 중 하나야. 문제가 많다는 건 알았는데, 설마 악마랑 내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근데… 지금 거기에 우리 아크메이지님 계시지 않냐? 조졌네 이거.
[대체 정보가 어디까지 빠져나갔을지…….]
“착각하는 듯하여 말하지만. 하얀까마귀가 오만과 내통한 건 사실이나, 일방적으로 정보를 밀고한 적은 없다.”
“그분을 감싸는 겁니까?”
내가 아크메이지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이, 다니엘이 뾰족하게 외쳤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흰까마귀가 계명을 소개해 줬으니 아마 둘 사이에 뭔가의 커넥션이 있는건 아닌가 의심된 거겠지. 그래서 감싸 주는 거냐고 한 거고.
“내가, 그를?”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 두 사람을 오래 본 것도,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를 감싸 줄 정도의 유대는 역시 없을 것 같은데. 완전히 비즈니스 관계쯤이면 몰라.
“진정해라.”
“…경.”
나는 그런 내 편견 어린 추측을 기반 삼아, 일단 다니엘을 제지했다. 인퀴지터도 씨근거리고 있었기에 그쪽도 손등을 톡톡 쳐 신호를 주었다.
인퀴지터의 색색거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내통은 했으나 밀고하진 않았다. 그것이 믿기 어려운 말임은 알겠지.”
“판단은 그대들의 몫이다.”
“난 그대의 말을 믿는다. 하나 다른 이들에겐 최소한 근거 정도는 내주었으면 하는데.”
나야 두 사람이 비즈니스 관계일 거라 예상하지만, 누누이 말했다시피 이런 문제는 예상만으로 퉁치고 넘어가면 안 된다. 나는 일을 정확히 하기 위해 설득될 만한 증거를 요구했다.
“…흰까마귀가 오만과 내통한 이유는 지식 욕구 때문이다. 다만 나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모든 거래를 마쳤다. 최소한 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 말은즉, 흰까마귀는 오만의 수하가 아니라 대등한 존재로서 거래했단 의미인가?”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오만과 견줄 수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오만은 자신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자에게 진헌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고, 하얀까마귀는 자신이 손해 보는 행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으으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건 배신보다는 지식욕에 미친 마법사 하나가 일탈한 것에 가깝겠네. 물론 이것도 어떤 면에선 배신이긴 하지만.
“이후 거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완성되었으나 실패작으로 낙인찍힌 후, 나는 곧장 뮌문트에 파견됐으니.”
“…하면 다시 만났을 때, 그와 함께 있던 이유는?”
“목적 달성의 여부와 별개로, 그는 나의 탄생에 관여한 자이자 내 육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존재다. 관련하여, 내 능력을 개량할 수 있는 존재는 오만 외에 그뿐이 없으리라.”
“…그래.”
부활한 후 힘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육체 개조를 위해 흰까마귀를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와 만났다. 아귀는 잘 맞는다.
이쯤 되니, 우리의 정체를 알고도 그녀가 왜 합류를 택했는지는 궁금해지지만.
“거래도 배신입니다. 돌아가는 즉시 저는 그를 문책할 것입니다.”
아무튼 진정하는 동안 나와 계명의 이야기를 들은 인퀴지터가 이를 빠드득 갈며 선언했다. 다니엘도 고개를 무겁게 주억이는 것이 그녀의 의견에 매우 동의하는 듯했다.
[나도 도울게. 의도가 어찌 되었건, 금지된 존재와 거래한 것을 결코 두고 볼 생각 없으니.]
거기에 주작까지 합세했다. 아무래도 돌아가게 되면 흰까마귀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듯하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