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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85화 (385/389)

385화 털고 또 털어도 (4)

“따라오지 마라.”

베르세르크는 마법사와 떠나는 모험가를 슬 보다가, 따라가려는 어린 사냥꾼을 말렸다. 꼭 모험가를 배려해서만은 아니었다. 마침 그녀도 어린 사냥꾼에게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

그는 모험가가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즈음 툭 하고 뇌까렸다. 주어가 없었기에 소녀와 어린 사냥꾼이 순간적으로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저게 누군가를 향한 사과인지 재어 보느라 한참이다.

“팔은, 다 나았나.”

하나 뒷말이 이어졌을 때 둘의 표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소녀는 ‘아, 나 아니구나.’ 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당사자임을 확언받은 이는 귀를 바짝 세우며 놀람을 표한 것이다.

“다, 다 나았습니다.”

“그런가…….”

물론 베르세르크도 인퀴지터의 힘은 잘 알고 있다. 몇 번 직접 경험해 보기도 했으니 당연하다. 인퀴지터가 나섰던 이상, 데스브링거의 팔은 분명히 잘 붙었을 것이다. 그 누가 치료한 것보다도 멀끔하게, 마치 시간을 돌려 버린 것처럼.

“미안하다.”

그러나 아무리 멀끔하게 돌려 낸단들 그것이 부러졌단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기억하는 이상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사과, 하지 마십쇼.”

그러므로 베르세르크는 사죄했고, 데스브링거는 막힌 목으로 거부했다. 눈물 흘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건, 오히려 제가 할 말이라고요.”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자들의 메아리가 빈 동공에 울리기 시작했다.

“너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런 투사 나리는 아닌 것 같습니까요?”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을 위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저 같아도 투사 나리처럼 했을 겁니다.”

“…….”

“그러니, 그 행위만은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저도 그 부분은 미안해하지 않을 겁니다요.”

“…….”

“딱, 딱 나리의 누님분에게만 죄송해할 겁니다. 후회는 절대 안 합니다.”

다만 그 메아리는 보통의 것처럼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산골짜기로 흘러간 소리가 그곳에 서 있던 사람에게 닿듯, 그들의 말은 서로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베르세르크는 결국 울지 못해 웃었다.

“나도 후회하지 않으마.”

괴로운 것인지 후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를 한차례 훑었다. 한 번도 찹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공기를 차갑게 느끼도록 만드는 공허함이었다.

“후회하지 않고, 부러진 네 팔에 미안해하는 마음만 갖겠다.”

“…그러든가요.”

만일 이 공허함이 오래도록 지속된다면 그녀는 온전히 얼어 버리겠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게 그저 꽝꽝 굳은 사람이 되어 버리겠지.

“대전사…….”

하나 그 모든 차가움은 옆에서 닿아 오는 아이의 온기 하나에 모두 잊혔다.

베르세르크는 말없이 팔을 뻗어 소녀를 다리 위에 얹었다. 당황한 소녀가 붙잡힌 토끼처럼 몸을 바짝 굳혔지만 그마저도 곧 풀렸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그들을 둘러싼 추위를 몰아냈다. 과거의 인간들이 이 얼어붙은 땅의 혹독함을 이겨 내고자 그리했듯이,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더욱 치열해졌듯이. 그렇게 숨을 죽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의 심장을 노리던 동장군이 결국 단념을 외치며 물러갔다. 그들의 승리였다.

“…남쪽으로 가면, 언니의 장례를 치를 거다. 참석해 주겠나?”

“그으… 제가 가면 언니분이 화내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가 한 게 있는데…….”

“비드르는 스스로를 바쳐 누군가를 구하는 것에 만족해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화내지 않을 거다.”

“그렇습니까요. 그럼 뭐… 저야 영광입죠. 반드시 가겠습니다요.”

다만 떠나간 동장군은 정말 완전히 물러갔을까. 아직도 근처를 배회하며 그들의 심장을 노리는 건 아닐까.

베르세르크는 그런 상념을 잠시 했다가, 제 품의 작은 체온과 떨어진 곳의 열기를 보며 눈꺼풀을 내렸다.

설사 그녀가 그 괴물의 표적이 되었대도, 이 온기가 주변에 머무르는 한 그 괴물은 얼씬도 못 할 것이다.

“그래. 고맙다.”

이 작디작은 것들이 그녀를 살게 할 것이다.

감은 눈 사이로 낙루가 잠시 떨어졌다.

“흐아아앗!”

“……?!”

그렇게 둘만의 문제가 일단락되었을까. 용의 심장을 복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두 사람 측에서 커다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맑으면서도 앳된 목소리. 분명 인퀴지터의 것이었다.

“샌님?”

“푸하!”

그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면 바닥에 대자로 퍼진 인퀴지터와 옛저녁에 기절한 듯한 다니엘을 볼 수 있다. 주변의 찬 공기가 무색하게 그들의 뺨은 발그라니 열로 달아올라 김을 푸쉬시 내뿜고 있는 상태다.

“괜찮… 습니까요?”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운 청년이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마땅하게도 먼저 상태를 살피는 건 다니엘이 아니라 인퀴지터다.

기절한 듯 눈 감고 있던 사내가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기대도 안 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철푸덕. 힘을 완전히 뺐는지, 그의 몸이 아까보다 더 눅진눅진하게 바닥으로 녹아들었다.

“괘, 괜찮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뿐이다.”

“땀 좀 봐. 이러다 감기 걸리는 거 아닙니까?”

“그러진 않을 거다. 힘만 회복되면 병마가 전부 달아날 터이니.”

“너무 자신해서 불안한뎁쇼…….”

그래도 끝까지 무시할 건 아닌가 보다. 인퀴지터가 멀쩡하다는 걸 깨달은 이가 다니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아 있습니까요?”

“…살아 있습니다.”

“완전 녹초가 됐네.”

신성력이 넘쳐 나는 인퀴지터야 찬바닥에 좀 냅둔다고 죽진 않는다. 그러나 다니엘은 인퀴지터처럼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신성력이 얼마 없는 보통의 사람이다.

“더, 럽게 무겁네……!”

그것을 아는 데스브링거가 다니엘을 부축하여 일으키기 시작했다. 덩치 차로 인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가, 나중에 알아서 가겠습니다.”

“됐어요. 감기 걸렸다 치료할 신성력도 부족한 판인 거 모릅니까?”

그래도 어떻게 등에 업는 데 성공한─비록 발이 끌리긴 했지만─이가 끙끙대며 이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냉골에 내버려 두느니 화톳불이라도 있는 자리에 옮길 요량인가 했다.

“어린 사냥꾼아, 도움이 필요한가?”

“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요…….”

“그래.”

다만 지금의 다니엘은 본래의 몸에 가죽옷까지 수십 kg가 더해진 상태다. 평상시였다면 몰라 가죽 무게까지는 감당할 수 없던 데스브링거가 끝내 도움을 청했다.

“잠깐 나와 있어라.”

“네에.”

베르세르크는 소녀를 바닥에 내려 두었다. 당연히 맨바닥에는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험가의 침낭이 소녀의 엉덩이를 다시 받치기 시작했다.

“침낭을 더 꺼내 두는 게 낫겠군.”

“어, 잠시만요.”

힘겹게 한 팔을 내려 무언갈 뒤적거리던 데스브링거가 곧 사슬 같은 것을 꺼내었다. 반짝. 빛과 함께 물건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전부 담요나 침낭용 깔개 따위였다.

“나리한테 돌려주는 걸 깜빡한 게 다행이네요.”

꺼내 쓰는 물건 자체야 원래 그들의 것이니─들고 다닐 수 없다 보니 전부 모험가가 맡았다─그 부분에 대해선 죄책감이 없다. 단지 돌려주는 걸 깜빡했다는 것에 미안함이 들 뿐.

“별개로 진즉 꺼낼 걸 그랬습니다요.”

“으으.”

“모두가 잊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모험가가 깨어난 뒤에는 바로 밥을 먹느라, 그 뒤에는 심각한 대화를 하느라 이런 깔개가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데스브링거와 베르세르크는 그런 담소를 나누며 깔개 위로 다니엘과 인퀴지터를 곱게 누였다.

“읏차!”

누운 그들 위로 담요를 덮어 주는 건 소녀의 몫이다.

“다들 모여 있군.”

다만 그쯤 되니, 모험가와 마법사가 슬 돌아왔다. 오랫동안 바깥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답게 그들에게선 냉랭한 공기가 살살 흘러나오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동상을 호소하며 치료를 외쳤을 그런 한기였다.

“안, 안 추우십니까?”

“괜찮다.”

옷에 달라붙어 있는 추위만 보아도 그들의 체온이 시체처럼 떨어졌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라니.

베르세르크는 오랜만에 제법 감탄했다. 원래부터 강인했던 모험가는 그렇다 쳐도 약해 보이기만 하던 마법사의 의외성을 염두에 둔 감탄이었다.

“저 추위에서 잘도 버텼군.”

영관의 산맥보다 더 추운 이곳은 아무리 그녀래도 오래 버틸 자신이 없는데. 역시 마법사에겐 무언가 수가 있나 보다.

그런 생각으로 말을 하자, 마법사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가면에 가려져 있으나 그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

그러나 무언갈 말하려는 듯했던 마법사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과묵한 마법사의 몸이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둘도 깨어 있나? 모두에게 할 말이 있는데.”

“깨 있습니다…….”

“에, 예? 말하셨습니까?”

“…깨워서 미안하군.”

말을 아끼는 자에게 억지로 말을 거는 취미는 없다. 베르세르크는 마법사가 물러나는 걸 존중해 주며 모험가에게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그는 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졸음에서 퍼드득 깨어난 인퀴지터를 측은하게 보는 중이다.

“더 자도 된다. 급한 사항은 아니니.”

“아,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물론 인퀴지터는 자신의 멀쩡함을 강조하려 했다. 하나 열이 통통 오른 얼굴로 말해 봐야 모험가가 과연 듣겠나.

그녀는 결국 모험가의 손길에 의해 다시 누워, 그대로 낮잠을 자게 됐다. 대화가 저녁 때로 미뤄지는 순간이었다.

* * *

“이만큼 요리할 땐 소금을 이 정도 넣으면 좋습니다요.”

다니엘과 인퀴지터가 낮잠으로 체력을 채우는 동안,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데스브링거에게 레시피 전수를 받은 건 덤이었다.

“이러면 싱겁지 않겠나?”

“육포가 간이 세서 괜찮습니다요.”

다만 이렇게 배운 레시피가 진짜로 쓰일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겠다. 이들과 함께하는 동안엔 데스브링거가 국자를 잡으려 할 테고, 지구로 돌아간 후에는 재료가 달라져서 시도를 못 할 게 분명한 까닭이다.

아무렴, 한 달 넘게 소금에 절여 둔 육포를 시중 어디서 구하겠나. 진정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물품도 아님은 자명하다.

즉,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추억이다.

“자, 진짜죠?”

“진짜 딱 맞군…….”

함에도 나는 무용지물이 될 레시피를 꾸역꾸역 외웠다. 신난 데스브링거의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거니와,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할 추억은 최대한 기억에 박아 두는 것이 맞는 탓이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시려던 건 무엇이었습니까요?”

“음? 아.”

나는 기웃거리는 소녀에게 맛보기용 그릇─내용물이 남아 있었다─을 넘겨주며 뒷목을 가볍게 긁었다.

[나도, 나도 맛볼래.]

“앗, 잠시만요.”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는 주작과 소녀의 목소리가 배경처럼 지나갔다.

“밥 먹으면서 말해 주겠다. 모두가 다 듣는 게 좋을 내용이니.”

“앗, 알겠습니다요.”

임시 일행인 마법사의 전적 문제니까, 역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게 좋겠지. 나는 그렇게 대화를 미뤄 두었다.

“그 무슨!”

그리고 모두가 깨어나 식사를 이어 나갈 때, 내가 들은 모든 걸 설명해 주었다. 예상했지만, 인퀴지터는 모든 말을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뿅 튀어오르고 있다.

“이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지친 기색으로 수프를 퍼먹던 다니엘의 반응도 비슷했다. 표정이 실로 심란하기 그지없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번 사태는…….”

“그, 그건.”

죄를 안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 묻기도 난해하다. 마법사가 활약을 했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결국 인퀴지터와 다니엘의 얼굴이 고민으로 꾸깃꾸깃해졌다.

“헤어진 기간이 오래됐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그동안 잘도 이런 일들을 겪었군.”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으음. 난 모르겠네… 이 부분은 인간들 문제니까 인간끼리 알아서 결정하지 않을래?]

와중에 베르세르크와 소녀, 주작은 각자만의 핑계를 대며 이 난제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좀 부럽다. 나는 당시에 거기 있던 사람이라서 ‘너도 말해’를 당하면 그땐 못 피하는데.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요.”

다만 우리가 그렇게 치열한 고민을 이어 나갈 때. 데스브링거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 저 마법사가 그 뭐냐. 하늘에 거대한 검은 구멍을 뚫는 것으로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했잖습니까요.”

“그랬다만.”

“그리고 저 마법사는 오만의 꼭두각시인 거고요? 그것도 소모품으로 써도 되는 수준의… 가치 없는 꼭두각시?”

“…노골적이긴 하지만 그렇게도 볼 수는 있겠지.”

듣는 계명은 엄청 기분 나쁘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나는 동굴 입구 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계명을 일별하면서도 약간의 긍정을 표했다. 솔직히, 너무 맞는 말이라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럼… 오만이란 대악마의 부하들은 소모품으로 쓰이는 잡졸마저 이렇게 짱짱 센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겁니까……?”

“…어?”

“…우리 이길 수 있는 거 맞습니까?”

뭐어, 그래서 지금 더 큰일 나게 생겨 버렸지만 말이다.

젠장, 우리 진짜 이길 수 있는 거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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