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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84화 (384/389)

384화 털고 또 털어도 (3)

베르세르크와 소녀의 좌충우돌 대환장 도박 여정기를 듣고 난 후, 나는 시름에 잠겼다. 이 인간을 정녕 데려가는 게 맞는가. 이 애는 이런 깡다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추방 위기에 시달렸던 것인가. 정말 깊은 시름이었다.

“거기서 마력을 더 넣으면 진이 터질 거다.”

“…음? 아.”

심란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마력을 때려 붓고 있었네. 나는 주입하던 마력을 빠르게 회수한 뒤, 내게 말을 건 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마법사, 에루탤크. 혹은 청록의 배신자. 이쪽도 고민이긴 매한가지였다.

“…슬슬 미뤄 둔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군.”

밥 먹고 설거지하느라, 또 설거지하던 도중 소녀가 끼어드는 바람에 미뤄졌지만, 본래는 이 존재와도 대화를 했어야 했다. 내 몸이 화톳불을 두고 일어섰다.

“나리?”

“잠깐 다녀오겠다. 따라오지 마라.”

인퀴지터랑 다니엘은 신성력이 회복되는 즉각 즉각 용에게 때려 붓느라 여념이 없고, 주작은 회복을 위해 자고 있다. 나머진 내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길 하고 있던 중이고.

그러니 이들만 제한하면 따라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고려하여 말을 남겼다.

“하, 하지만…….”

“가만히 있어라, 어린 사냥꾼아.”

다행히 베르세르크는 나와 마법사 사이에 낄 생각이 없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묵례하곤 마법사보다 먼저 밖으로 나섰다. 소리 없는 걸음이 내 뒤를 따랐다.

“여기면 절대로 들리지 않을 테지.”

그리고 동굴이 아득하게 보일 때쯤, 나는 멈춰 섰다. 내가 여기서 멈출 걸 알았는지 상대의 걸음도 딱 맞게 정지한 상태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딱 서로의 간격을 벗어난 형태로 머물렀다.

“할 말이 있다면 해라.”

“글쎄, 설명에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를 두둔하기만 한다면 의미는 없을 테지. 하나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내가 한 짓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딱히 듣는 행위가 용서와 동일한 의미인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거기에 엄밀히 따져 보거든 에루탤크는 나에게 있어 죄인도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죽인 사람을 생각하면 내게도 악인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한테 피해를 입힌 건 또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녀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그저 그녀의 악행을 목격한 사람이자 거래를 통해 그녀를 막아선 제3자일 뿐.

심지어 이번엔 그녀의 지식 덕에 목숨도 건졌다. 악인이랍시고 적대하기엔 어딘가 미묘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거다.

“그러니 말하라. 내가 듣겠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자체를 두고 왈가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뮌문트에서 지독한 배신을 저질렀다고 해서 다짜고짜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다.

「…….」

파우스트랑 소성주에겐 진짜로 미안하게 되긴 했지만.

“…나는 오만을 죽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이런 발언은 좀 당황스러운데요. 당신, 악마 진영이었던 거 아니었어?

나는 체온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주변에 불을 두르다가, 그대로 깜짝 놀랐다. 다행히 그 동요로 인해 불길이 튀지는 않았다. 안도한 마음이 예정대로 주변에 동그란 불들을 피웠다.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었나?”

“하!”

한편, 내 말에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소는 가히 연기로 따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혹감이 내 목 줄기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악마 진영에 속한 것처럼 모두를 배신했으면서 정작 악마에게 저런 반응을 보인단 건… 잠깐, 설마?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저주스러운 모욕을 감히 부정할 수 없음이.”

나는 벌써부터 예상되는 답변에 손끝을 꿈틀거렸다.

“하나 그대의 말은 정확하다. 나는 오만의 하수인이자 꼭두각시였다.”

역시나, ‘배신당했음’ 내지 ‘선택지가 없었음’ 둘 중 하나에 속한 답이 튀어나왔다. 모 게임의 군단장도 아니고 이게 뭔 일인가 싶다.

“…꼭두각시라 함은.”

“단어의 함의는 모두의 정의와 어긋나지 않음이라. 아니면 괴뢰라고 다시 말해 주길 바라는가?”

“…그럼 뮌문트의 그것도 강제된 일이었나?”

“변명 삼진 않을 것이다.”

“부정하지도 않을 거란 소리군.”

“부디 경고하건대, 나를 가엽게 여기지 말라. 강제된 삶조차 나의 것임이니.”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마법사는 딱 잘라 말했다. 과연 내가 보았던 오만한 성정은 어디 안 갔다 싶다. 억지를 부린다면 변명의 구실로 삼을 수 있을 것임에도 동정받기 싫단 이유로 시원히 인정해 버리는 게.

「…뭔.」

다만 그 태도가 도리어 파우스트를 괴롭힌 모양이다. 적의 쓸데없는 사정을 알아 버리게 된 소년이 침음을 삼켰다. 용서하기는 싫은데 마냥 탓할 수만도 없게 돼 버린 자의 탄식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강제에서 풀려났나?”

“덕분에.”

덕분에… 라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죽인 게─혹은 죽음에 준하도록 한 게─유효했던 모양이지. 그녀가 그런 부상을 입고도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살아난 건 어떻게 가능했던 거지?”

뭐, 의아한 부분이 있다면 물어보면 그만이다. 어차피 유리한 건 나였고 그녀는 답할 수밖에 없는 처지므로.

“…오만을 상징하는 피조물이 넷 있다.”

“……?”

뜬금없이 오만에 대한 정보 누설? 나야 어느 쪽이든 이득이니 상관없긴 한데.

“얼어붙는 아담, 부패하는 하와, 가라앉은 카인, 마지막으로 공양되는 아벨.”

“…어.”

어째 내가 아는 모 종교에서 많이 나오던 이름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중 아벨은 하나의 인격을 틀 삼아, 수십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 그는 원할 때마다 그 영혼 중 하나를 번제 하여 기적을 부른다.”

와중에 고함 좀 지르고 싶어지는 특성의 적도 나왔다. 뭐, 영혼이 수십 개? 필요할 때마다 번제 하여 기적을 불러? 장난 까냐?!

“하니 나의 부활도 아마 그와 연관이 있으리라.”

심지어 얘가 부활한 사유가 정녕 그 녀석의 짓이라면 걔는 힐러란 뜻이잖아! 특별히 직접 공격하는 일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희생하여 아군을 회생시키는 것으로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단 거잖아!

진짜 장난 까냐?! 이걸 진짜 깨라고 만든 거냐고!!!

“…그가 너를 부활시킨 이유는?”

나는 뒷골 당기는 느낌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질문했다. 그녀가 아벨로 인해 살아난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그녀가 자유를 되찾은 부분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까닭이다.

아무렴, 아벨은 오만의 하수인이고, 오만의 하수인 되는 입장에선 구태여 에루탤크에게 자유를 줄 이유가 없다. 에루탤크가 속박에서만 벗어나면 검을 거꾸로 들 인물임에서 더 그렇다.

그가 오만을 진정 위했다면, 그는 속박을 유지한 채 살리거나 아예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오해받을 수 있다는 건 너도 알 텐데.”

그러나 내 물음에 에루탤크가 처음으로 답을 주저했다. 무엇의 주저인가. 내 마음속에 잠시 의혹이 세워졌다.

“…모른다.”

다만 한참 만에 대답이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모른다’라는 세 음절에서 명백한 무지가 느껴진 까닭이다.

“그런가.”

만일 이게 위장이라면,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기보다 지구에서 손수 오스카상을 가져와 배달하기를 택하리라. 나는 그렇게 그녀의 답을 납득했다.

“예상 가는 것도 없나?”

속으로만 그랬다. 감성으로 이해하고 넘기기에는 해당 사안의 중요성이 너무 컸다. 에루탤크가 다시 한참을 침묵했다.

“…한 가지, 이유로 추측되는 것은 있다.”

그리고 얼음바람이 우리의 다리에 하얀 눈을 묻혔을 때, 그녀는 기어이 입술을 떼었다.

“나는 오만의 꼭두각시이자 소모품인 존재였으니. 그는 그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일한 자였다.”

“음. 그래서 그가 오만을 저버리면서까지 네게 자유를 주었다?”

“…아마도. 그것 외엔 가늠되는 이유가 없으니.”

“제법 친했나 보지.”

“우스운 말이다.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인형 따위가, 오만의 자식이라 불릴 정도로 드높은 권위의 권속과 감히 어울렸겠나?”

아, 그래. 네 입장에선 별로 안 친하다 생각한다고. 알았다아.

“…다만 그래. 얼마 없는 만남에서조차 그는 기이할 정도로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가 명령에 따라 뮌문트로 향할 때엔 검을 빚어 주기까지 했지.”

“검?”

“그대도 보았을 테다.”

내가 속으로 무슨 말을 지껄이던, 에루탤크는 본인의 두터운 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검신이 사라져 칼자루밖에 남지 않은, 눈에 썩 익은 디자인의 물건이었다.

“내가 죽음에서 일어섰을 때, 이것의 날은 사라진 후였다. 하니 나의 부활에 아벨이 관여한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그가 무언가의 장치를 해 둔 곳은 이것의 칼날이었으리라.”

일단, 앞뒷 말은 썩 맞아떨어진다. 이 모든 게 날조된 거짓일 수도 있는 만큼, 신뢰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겠지만서도.

“그렇군.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다. 오만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는?”

“나는 그의 꼭두각시로 태어났고, 그렇게 버려졌다. 이 정도면 사유로썬 충분하다고 보는데.”

“확실한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하나 적어도 나는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들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우릴 도와줄 리 없었다.

제약 때문에 온갖 행위를 강제당하다가, 제약에서 해방되지마자 칼을 거꾸로 드는 것도 뭐… 저 성격이면 충분히 이해되는 판이고.

근데 에루탤크는 그렇다 쳐도, 아벨인지 뭔지는 정말 맞는 거냐? 목숨 수십 코인을 가진 보스몹을 상대해야 하는 게 정말 맞는 거냐고.

[하, 이번에도 봐주는 거야? 그레트헨, 그대. 마음이 너무 넓은 거 아니야?]

나는 벌써부터 닥쳐 오는 피곤함에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 앞에 있는 마법사에 대한 문제도 골치 아프긴 매한가지였기에, 지압은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진다.

‘넌 여물어.’

누가 봐준다는 거야… 그 이전에 나한테 그런 자격이 있을 것 같냐? 정말 어이가 없어선.

“…후. 일단, 나는 당장 너의 처우를 결정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용서할 자격이 내게 없는 것처럼 처벌을 강행할 자격도 내게 없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 이유는 네 가지다. 첫 번째는 내가 너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자가 아니라는 것. 두 번째는 너에게 비난을 가해도 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 세 번째는 네 지식 덕에 모두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 마지막 네 번째는 네가 계속해서 협조적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알아들었나?”

“이해했다.”

정말이지, 어렵네. 크게 보면 에루탤크나 파우스트나 비슷한 처지 같은데, 한쪽은 그 죄까지 제 인생이라며 당당히 지고 있고, 한쪽은 반성하며 죄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 가고 있어서…….

거기에 내가 당사자냐 제3자냐의 차이도 있다. 역시, 어렵다.

“…새삼 느끼지만, 물러 터졌군.”

그런데 넌 또 뭐라는 거냐. 혹시 내가 널 완전히 봐주려는 걸로 이해한 거냐? 난 처벌을 미룬댔지 안 한다곤 안 했는데.

“내 무름 덕에 목숨을 건진 자가 할 말은 아닌 듯하군.”

그리고 너 말이야, 지금 내 심상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가능만 하다면 네 모가지를 썰어 버릴 애가 지금도 이 대화를 듣고 있는 중이거든?

「저는… 까득, 신경 쓰지 마세요. 좀 더 중요한 건… 이용당한 자의 처벌이 아니라 악마들을 죽이는 일이니까요.」

봐라 봐. 지금도 괜찮다면서 이를 갈고 있잖아…….

‘미안하다…….’

화를 꽉꽉 눌러 담은 목소리에 나는 공연히 불편해졌다. 내 잘못은 아니긴 한데 뭔가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불편함이었다.

아마 가시방석도 이보단 편할 것이다.

「아니에요. 저한텐 그녀를 비난할 자격도, 처벌을 강요할 권리도 없는걸요. 물론 저 배라먹을 자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가정하에서지만…….」

그렇다고 에루탤크를 속 시원히 처벌할 수도 없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용당한 사람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에루탤크의 지식은 정말 유용했으니까.

‘…모든 일이 끝나면 그녀는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될 거다.’

그래도 그녀의 죄는 명명백백하므로 언젠가는 죄의 대가를 돌려받게 될 것이다. 아무리 이용당한 것이래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은 있으니까.

「네…….」

물론 그렇게 되거든 파우스트도 똑같이 처벌을 받게 되긴 할 텐데… 그건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질서와 법이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미리 말하건대, 나는 동굴로 돌아가거든 모두에게 너의 정체를 밝힐 것이다.”

“…….”

“그 과정에서 나는 너의 목숨을 변호하겠지만, 구금 따위의 의견까진 막지 않을 것이다. 이해했나?”

“바라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하도록.”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머리 아픈 문제를 아예 내던지기로 했다.

뭐, 분위기 해치니까 나중에 말해? 나는 부활기 수십 개를 가진 힐러와 그런 힐러를 달고 나올 적의 존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 이미 한계다. 이쪽 고민은 거기로 다 밀어 버리겠다.

“아,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

“그래서, 그대의 진짜 이름은 뭐지? 에루탤크 그대로인가?”

“…그건 왜 묻는 거지.”

“이름을 묻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당위성이 필요하긴 하지. 이름만 알면 저주를 걸 수 있는 세계니까. 내가 아직도 애들 이름을 모르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고.

아무렴, 물어봤다가 분노가 저주라도 걸어 버리면 어떡해? 분노는 죽여서 없애는 것도 불가능한데.

그렇지만 에루탤크의 경우는 진짜 이름을 안다 해서 분노가 저주 걸 것 같지도 않고, 솔직히 진짜 건대도 내 알 바는 아니라서.

거기에 아까 들은 말이 진실이라면 그녀는 악마의 하수인 짓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다. 이름이 존재의 시작이나 다름없음을 고려하면, 그녀는 생명체로서의 존립조차 허락받지 못했단 소리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너무하다 싶어. 악인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녀가 악행이 강요된 입장임을 고려하면, 존재한다는 최소한의 증명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거 아닐까?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뭐어, 본인이 싫다고 하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지만.

“…계명이다.”

“샛별인가? 어울리는 이름이군.”

그래도 마법사는, 계명은 본인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지구에서 본 금성이 청록색으로 빛난다는 걸 생각하면 꽤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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