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털고 또 털어도 (2)
“…왜?”
아니, 진짜 왜? 왜 괜찮다는 답이 나오는 건데?!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 밖으로 반문을 뱉고 말았다. 다행히 그런 나의 태도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전사가 행하시는 일을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도리어 소녀는 내게 고개를 돌린 채 또박또박 답변을 주었다. 기가 막힌 답이었다.
“…친한, 사이 아니었나?”
“남쪽에선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이를 친하다고 표현하나요?”
그건 아니긴 한데. 그보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이면 더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사지로 간다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탄을 죽이는 것이다. 이 설원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강대한 악마를 상대할 예정이란 거다.”
“네.”
“당연하지만 해당 행위에 대한 위험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녀는 장담할 수 없다고만 말했으나, 실질적으론 죽어 돌아올 가능성이 더 클 정도로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겁을 주려는 의도와 별개로 너무 저주하듯 말해 버렸나.
아니야. 이번 늑대조차 쩔쩔매며 상대한 우리다. 사탄이 늑대보다 강한지 약한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존재이긴 할 터. 그걸 고려하면 이 말조차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해당 발언을 철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도 너는 정녕 괜찮다 말할 건가?”
아무튼 이 정도면 소녀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나. 최소한 망설이는 기색이라도 생기면 내가 반대할 수 있게 될 텐데.
내가 속으로 기대하는 사이, 소녀가 조그만 입을 벌렸다.
“그게 대전사님의 선택이라면.”
글렀다. 내 머릿속이 환장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안으로 들어가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도 찬성하는 바다만, 이야기 자체는 결정된 거 아닌가?”
내 말에 베르세르크가 딴죽을 걸었다. 소녀가 허락했으니 본인의 합류는 결정된 거 아니냐는 요지의 말이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가슴은 아직 인정 못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자, 앉아라.”
나는 에루탤크가 마법진을 바닥에 새기고, 내가 중간중간 마력을 보충해 주기만 하면 불꽃이 끝없이 나오는 화톳불 앞에 앉았다. 물론 불이 있더래도 그냥 앉으면 추울 것이므로 소녀의 자리에는 내 침낭을 깔아 주었다.
소녀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데스브링거와 베르세르크의 등 떠미는 말에 기어이 W자로 앉았다. 저거 고관절에 안 좋은데. 내 시선이 잠깐 소녀의 앉기 방식에 닿았다가, 나중에 일러 줄 것을 다짐했다.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하는 거지만…….”
“알아요. 빙하의 시련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정말 위험한 곳이라는 것. 대전사님조차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면 아마 이 땅보다 배는 치열하고 혹독한 곳이겠죠.”
“…그래.”
모르는 게 아니었구나. 그래,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괜찮다고 한 거구나. 나는 내 마지막 희망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마지막 발악의 문장을 토해 냈다.
“너는, 대전사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나?”
대전사가 좋아서 여기까지 따라올 정돈데 왜 헤어지는 걸 허락하는 거야. 응?
“맞아요. 저는 대전사님과 헤어지는 게 슬퍼요.”
“그럼…….”
“그렇지만 저 때문에 대전사님이 멈추는 건 더 슬퍼요.”
아니,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애기야!!
“저, 들었어요. 저 때문에 대전사님이 가족분의… 그걸 포기하신 거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가 속으로 펄쩍 뛰며 머리를 쥐어 싸매는 사이, 소녀가 조곤조곤 말했다. 참고로 소녀의 말에 다독여 준 건 내가 아니라 베르세르크다.
매정한 듯 다정한 말에 소녀가 꼼틀거리던 손가락을 허벅지 위로 모았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기뻐요. 하지만… 저 때문에 무언갈 포기하신 건 사실이잖아요. 전… 전 그게 기쁘면서도 참 슬퍼서…….”
그리고 그 손가락은 곧 동그랗게 오므라졌다. 부르튼 손등과 그 사이사이에 박인 굳은살이 뼈와 함께 도드라졌다.
“전 대전사님이 좋아요. 가능하다면 대전사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대전사님의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아요. 하고 싶은 걸 하는 대전사님은 밤하늘을 가릴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시니까요.”
동시에 달아오른 뺨은 동경을, 싱그러운 두 눈은 존경을 가득 담아 반짝이기 시작하니.
“그러니 대전사님은 대전사님의 삶을 사세요. 쫓아가는 건 제가 할게요.”
이건 내가 졌다. 나는 소녀의 결심을 막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정말이지 화강암보다 단단한 심지의 소녀였다.
“…그러다 못 따라가면, 어쩌려구요.”
내가 좌절하는 사이,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데스브링거가 샐쭉이 끼어들었다. 괜히 부정검만 만지작거리는 손은 어딘가 주눅 든 면이 있다.
“슬프지만,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감수해야죠.”
“…댁은 미련도 없어요?”
“어떻게 없겠어요? 다만 저는 포기를 배웠을 뿐이에요. 제가 원한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단 점이나, 무언갈 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 한다는 점 같은 걸. 그만한 대가를 내놓을 수 없다면, 그땐 포기하는 수밖에 없죠.”
“…….”
그, 세상살이란 게 사실 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니냐. 아직 열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이렇게까지 염세적일 필요 있어?
나는 전반적으로 체념이 깔린 소녀의 사고관을 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쩌면 가벼운 속상함의 발로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겐 실용적고 강인한 사리 판단일 소녀의 단념은, 내 입장에선 그저 서글픈 무언가였다. 아이들은 좀 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자랄 권리가 있다.
“그러니… 대전사, 다녀오세요. 전 괜찮아요. 당신께서 저를 선택해 주신 그 순간부터, 저는 원하는 모든 걸 얻었는걸요.”
그렇지만, 서글프더래도 그것의 소녀의 결론이라면 내가 참견할 자격은 없다.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답은 나와 버린 것 같군.”
진짜, 이왕 파티에서 나간 거 사지까지 끌고가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아쉬움을 더 커다란 불꽃으로 표현하며 팔짱을 꼈다. 베르세르크는 이 상황에 만족하는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다. 비록 함소에서 아린 맛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을지라도.
“아, 그렇지.”
“……?”
“그대, 무기나… 그에 준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이 있나?”
다만 그런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내가 베르세르크를 만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이었다.
“예전에 내가 그대의 무기를 박살 낸 게 있으니─”
“필요 없다.”
그리고 단칼에 제안이 거절당했다. 꼭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예리한 답이었다.
졸지에 말이 잘린 내 입술이 떨떠름하게 닫혔다.
“…진짜 괜찮겠나?”
“그래.”
연이어 찔러 본 질문도 비슷했다.
틈조차 주지 않고 긍정한 이가 자신의 등이 매달린 무기를 꺼내 보였다. 뭔가 좀 있어 보이는 디자인의 도끼였다.
거기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겉면에 빼곡히 새겨진 걸 보거든 어쩌면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단 예상까지 가능하니.
“새로 구했나 보군.”
“운 좋게도 연이 닿아서.”
아, 평범하거나 좀 구려 보이면 억지로라도 새 거 구해 주려 그랬는데. 나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완전 힝이다.
* * *
베르세르크는 미묘하게 비틀어진 모험가의 입매를 보며 그의 심정을 짐작했다. 아쉬워하는군. 그것도 엄청.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방어구는─”
“쓸데없는 장비는 취급하지 않는다. 움직임에 방해가 될 뿐이니.”
“…그렇군.”
이어진 사고 회로를 추측하는 것도 쉬웠다.
재수 없는 대명장의 말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모험가는 이런 사안에 심중을 기울일 사람이 실로 맞았던 까닭이다.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절대로 멍청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다만 신발 정도는 새로 사야 할 것 같긴 하다. 더운 지방에 맞는 신발은 이미 버렸으니까.”
“……!”
베르세르크는 결국 상대적으로 값싸되 그가 선물하기 좋을 만한 물건을 골라 입 밖으로 뱉었다.
역시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모험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선물한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머릿속은 누구보다 빨리 신발을 구해 낼 욕망으로 가득하리라.
“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나요?”
한데 그녀가 그런 예측을 늘어놓고 있자니, 소녀가 살포시 손을 들어 올렸다. 베르세르크와 모험가, 둘의 고개가 동시에 소녀에게로 틀어졌다.
“뭐냐.”
“물어봐라.”
똑같이 단조로운, 다만 다른 언어를 골랐을 뿐인 두 개의 음성. 그를 두고 바람을 눈에 담은 피리꾼은 조용히 손을 내렸다.
“그, 두 분은… 대체 무슨 사이세요?”
요상한 질문이 돌아와 버렸다.
“평범한 동료다만.”
“굳이 정의한다면, 동료에 가깝겠군.”
모험가와 그녀의 관계? 이것에 대해선 고찰해 본 적이 없다. 처음엔 모험가의 강함에 관심이 끌렸고, 그 후엔 평범한 동행이었으며, 모험가가 사라진 후엔 그렇게 끝난 인연이 되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헤어짐에 대해서 미련이나 아쉬움이 존재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아무렴, 이별을 두고 절절함을 느낄 만치 그들의 유대가 깊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작해야 모험가의 가여운 처지나 인격적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했던 품성을 두고 안타까움 한두 번을 느꼈을 뿐이지.
“그래서, 그건 왜 궁금해하지?”
각설하고, 피리꾼은 그것을 왜 궁금해하는 걸까. 베르세르크는 역으로 질문했다.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별건 아니고… 다들 원래 알고 지내시던 사이 같은데, 전 잘 모르니까…….”
콕 집어 모험가를 골랐던 건, 가장 친해 보여서 그런 거라며 소녀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결국 소녀가 궁금해했던 건 둘의 관계가 아니라 이들과 베르세르크의 관계였던 셈이었다.
드디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자들이 맥 빠지는 숨을 뱉었다.
“남쪽에서 잠깐 함께했었을 뿐인 관계다. 고향에 돌아올 때 헤어졌고 다시 만날 예정도 없었지.”
그렇지만 우연의 장난으로 이리 마주했고, 모험가의 선의가 이 인연을 다시 묶었다. 베르세르크의 대답에 소녀가 그제야 납득한 얼굴을 했다.
“그럼 이쪽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은데.”
반면 다른 쪽은 그녀의 답에서 새로운 의문을 얻어 버린 모양이다. 모험가가 그녀에게 말을 붙여 왔다.
“둘은 정확히 무슨 사이지?”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본 사이다. 사냥꾼의 기술로 내가 자매의 유해를 찾는 걸 도와주었지.”
“오… 실력이 뛰어난가 보네요. 아직 어린데.”
“그,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요.”
끼어든 데스브링거의 칭찬에 소녀가 볼을 붉혔다. “재능이 없어서 추방당할 뻔도 했었는걸요.” 다음 말에 볼을 붉힌 건 반대 쪽 진영이다.
“…고생이 많았겠군.”
“그래도 진짜 추방된 건 아니니까요. 그럭저럭 살 만했어요. 결과적으론 이렇게 대전사도 만났고.”
“그래…….”
모험가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구태여 부정하진 않았다. 짧게 늘어지던 목소리가 손가락으로 본인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럼 두 사람이 이곳에 온 것도 네가 안내한 결과인가? 시신의… 위치를 쫓아서?”
“네? 아, 그건 아닌데.”
“그럼?”
둘은 여기 어떻게 온 거지?
진즉 물었어야 했었을, 그러나 여러 이유로 미뤄진 의문이 던져졌다. 베르세르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명장을 만났다.”
“…대명장? 마이스터 나리 말하는 겁니까요??”
“그래.”
“그 사람이… 우리의 위치를 알려 준 겁니까?”
“그럴 리가.”
베르세르크의 입에서 나온 답이 의외였던 것인지, 데스브링거가 새로 개입해 왔다. 그녀의 입술이 비틀어지듯 꼬였다.
“그는 그대들이 세계의 끝으로 향했다는 사실까진 말해 주었지만, 그대들의 정확한 목적을 말하진 않았다. 아마, 만일을 고려한 행위였겠지. 나는 그에게 모든 답을 듣기 전에, 내가 먼저 자매의 유해를 찾고 있노라 고백한 상태였으니까.”
“……!”
“다만 그 옆에 있는 떨거지들 덕에 알게 됐다. 그대들이 사람들의 시신을 모아 세계의 끝으로 옮기는 중이라는 걸.”
“…그 머저리 새끼들이. 아, 그렇다고 투사 나리 잘못이란 건 아닙니다. 단지… 아.”
“이해한다. 신경 쓰지 마라.”
그 머저리 새끼들의 말실수 덕에 베르세르크는 자매의 유해를 되찾았지만, 데스브링거 입장에선 그저 욕 나올 일인 것도 사실이니.
베르세르크는 그의 말을 관대히 넘겨 주었다. 결과가 이렇게 돼 준 이상, 딱히 못 넘어갈 이유도 없었다.
“…혹시, 죽였나?”
모험가의 물음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라면 물어볼 수 있지. 그녀는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아니. 너를 봐서 살려 뒀다.”
“…그거 정말 고맙군.”
모험가가 다소 안도한 얼굴을 했다.
“아무튼… 가능성 낮은 일임은 알았다. 시간 안에 따라잡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함에도 나는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결국 그대들을 쫓기로 했다.”
“…그런가.”
“다행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빙하의 시련은 잘만 사용하면 공간을 건너뛰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공간을 건너뛰어?”
아, 그것부터 설명해야 하나.
모험가의 반문에 베르세르크는 빙하의 시련이 가진 특징을 몇 가지 해설해 주었다. 외지인에게 말해선 안 된다는 전통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딴 전통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도움이 돼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릴 따라올 수 있던 거였군.”
“그래.”
“그래도 위험했다. 행운이 그대의 손을 들어 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도리어 전통을 깨니 진심 어린 걱정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찌푸려진 모험가의 미간이 말끝을 잠시 흐리다, 순간적으로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잠깐, 혹시……?”
“참고로, 난 소녀를 데려온 적 없다. 쟤가 멋대로 따라온 거다.”
“헤헤… 저도 성공할 줄은 몰랐어요.”
“…돌겠군.”
기어이, 모험가가 얼굴을 짚었다. 딱히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