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그 두 눈으로 (7)
“허억!”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폐부에 얼음장 같은 공기가 파고들며 정신을 완전히 깨워 주었다. 눈꺼풀이 떠오르고 귀가 제 일을 시작했다.
“나, 나리!”
[오, 깼네.]
“으…….”
24시간을 잠만 자다 깬 기분이야…….
나는 뻐근하기 짝이 없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몸이 잠깐 돌로 재질을 바꾸었던 건지 온 근육이 뻑뻑했다.
“나, 나리. 괘, 괜찮으신…….”
[나는 그럼 저쪽으로 가 볼게. 심장 잘 이어 붙이는지 확인 좀 하게.]
“아, 앗. 넵.”
그래도 몇 번 움직이니까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몸을 가볍게 좌우로 늘이며 혀를 움직였다.
“괜찮, 괜찮다.”
목소리도 가라앉았군… 이거 대체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야? 나는 바짝 마른 듯한 목에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다. 하나 손으로 주변을 아무리 더듬어도 잡히는 건 깔아 둔 침낭과 딱딱한 바닥밖에 없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어느 얼음동굴임을 깨달았다.
“아, 물 드릴까요?”
“…고맙다. 그런데,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그나마 눈치 좋은 데스브링거가 내게 물을 내밀었다. 물통의 생김새가 어째 내 아공간 팔찌에 있던 놈 같지만, 그러려니 했다.
여기서 불을 피우긴 어려웠을 테니, 아공간을 터는 게 최선이었겠지. 나도 그럴 의도로 팔찌 안에 물과 식량을 꽉꽉 채워 왔고.
꼴깍, 꼴깍.
하므로 잘 써 주면 그걸로 만족이다. 따뜻하지만 점진적으로 식고 있는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갔다.
“그게 말입죠…….”
다만, 그러는 동안에도 데스브링거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으니.
나는 베르세르크가 우연히 이곳에 도달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조달한 관의 주인이 베르세르크의 자매란 말도, 베르세르크를 쫓아온 소녀가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주작이 다른 인격으로 부활했다는 것도 경악스럽고, 용이 깨어났다 다시 잠든 것도 신기하지만 이 둘만큼 놀라운 건 솔직히 없다.
“용케 별일 없었군.”
그보다 베르세르크가 잘도 참았다 싶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대의에 의해 자매의 시신이 일방적으로 훼손되는 꼴이었을 텐데.
그녀가 제 가족과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보통의 관계 이상만 됐다면 분명 불같이 화내려 했을 터. 정말 용케도 별일 없었다.
“…….”
“…왜 눈을 피하지?”
그런데, 설마 아니야? 역시 일 있던 거야?
나는 도르륵 굴러가는 데스브링거의 시선을 보며 조용히 그 손등을 짓눌렀다. 역시나, 도망칠 생각이었던 건지 뒤로 몸을 빼려던 이가 붙잡힌 손에 몸을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은데.”
“저, 저는 다 말했습니다요?”
“정말 다 말했나?”
그가 설명한 조각의 분리 방법은 척추뼈를 도려내는 것이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검의 훼손을 가져온다. 한데 그걸 베르세르크가 그냥 두고 봤다고?
“데스브링거.”
유해를 건드리기 전에 베르세르크가 도착했다면 한 번의 실랑이를 거쳤을 것이고, 건드린 후에 도착했다면 그녀의 화를 일방적으로 받아 내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베르세르크는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무기를 겨눌 수 있을 정도로 호전적인 성향이니. 가족이 건드려진 상황에서 정말 손이 안 나갔을까?
“진실을 말해라.”
안타깝게도, 난 아니라고 본다. 베르세르크가 한때 우리의 동료였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우리 사이엔 가족 일을 참을 정도의 유대가 없다.
그녀는 분명 분노를 참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별거 없었어요. 화를 좀 내시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이해해 주셨단 말입니다.”
“그래?”
그런데 얘가 진짜.
“그럼 내가 그녀에게 진실을 물어봤을 때도 같은 답이 나올 테지?”
“아, 아아니, 그건.”
지금 데스브링거가 멀쩡히 있다는 점에서 결국 베르세르크가 져 줬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패배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지.
말해 달라 부탁하면 분명 말해 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노리기로 했다.
데스브링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가 좀 다치긴 했지만, 투사 나리한텐 잘못 없어요!”
“그래, 다치긴 했단 소리군.”
그래 놓고 입을 다물려 들어? 그런 와중에 베르세르크는 또 덮어 주려고 하고? 이 자식이 진짜. 내가 지금 잘잘못을 찾으려고 이러는 줄 아나.
“…내가 이렇게 캐묻는 건, 누군가의 잘잘못을 묻기 위함이 아니다.”
베르세르크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나무랄 의향도 없다. 가족 일 때문에 화나서 그런 게 분명할 텐데, 그걸 가지고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단지 네가 걱정돼서 묻는 거다.”
“……!”
“다시 묻겠다. 얼마나 다쳤던 거냐.”
하지만 그 모든 걸 제쳐서라도 걱정은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아팠다는 투정 정도는 들어 줘도 괜찮은 거잖아. 우리 사이가 남에 가까워진대도 서로가 인간인 이상 그것만은 허용되는 거잖아.
아니면, 나만 그렇게 여기는 거야?
“양… 팔이.”
내가 잘못 사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조금 고민하고 있을 때. 한참 만에 데스브링거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양팔이 부러져서…….”
“…아팠겠군.”
“그렇지만, 온몸이 불탄 나리에 비하면─”
“타인의 불행이 나의 것보다 크다고 해서 불행이 불행이 아니게 되진 않는다. 아픔도 마찬가지다.”
나는 억지로 누르고 있던 손을 떼었다. 조금 속상했다. 인퀴지터만 해도 무리하는 게 싫었는데, 이번엔 데스브링거까지 크게 다쳐 버렸다니. 이래서야 앞장서서 뛰어다닌 보람이 없다.
“고생했다.”
나는 해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머리에 손을 얹어 보았다. 인퀴지터가 좋아했으니 얘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다.
“……!”
귀가 바짝 섰다. 싫은가 보다. 나는 서둘러 손을 떼려다가, 돌진하는 머리통에 다시 손바닥을 안착시키고 말았다. 뒤로 누운 귀가 정수리를 쓰다듬기 좋도록 만들었다.
이러면… 싫은 건 아닌 건가……. 나는 그런 소소한 고민을 하며 그 머리통을 복복 쓰다듬어 주었다. 데스브링거의 얼굴이 뿌앵 울 것 같은 느낌으로 달아올랐다.
“나리이이…….”
“정말 고생했다.”
어휴, 양팔이 부러질 정도로 싸운 거면… 아니, 일방적으로 당한 쪽이었으려나. 데스브링거가 아무리 날래도 베르세르크를 당해 내는 건 무리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설득해 내고… 진짜 고생했네.
“…죄송해요.”
“너는 내 부탁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네 덕분에 나도 목숨을 건졌고. 미안해할 필요 없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요.”
한데 내가 슬슬 손을 거둘 즈음, 데스브링거가 벌게진 눈가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 언젠가 보았던 눈이다.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뒤돌아 봤더니 아이가 훌쩍 자라 있을 때의 그 순간. 그 기분이다.
“근데 나리, 저는, 정말로…….”
가늘게 떨렸던 목소리가 울음을 움켜쥔 채 다시 명확해지려 노력했다.
“…나리한테 버림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렸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함에도 눈물이란 건, 나오면 안 돼 나오면 안 돼 주문을 욀수록 더 박차고 나오기 마련이라. 데스브링거가 코를 먹으며 본인의 눈가를 닦았다.
“너무 늦었겠지만, 이제 와 사과드려서 죄송해요…….”
청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정말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사과고 눈부신 찰나였다.
“그래.”
정말이지… 아이는 정말 느리고, 빨리 자란다.
“사과해 줘서 고맙다.”
그럭저럭 기분이 나아졌다. 모든 상처가 단번에 나아지진 못해도 약은 발린, 그러한 기분이다. 내 입가에 함소가 슬쩍 지어졌다.
“…떠나셔도, 언젠가 마주칠 수 있습니까요?”
“…응?”
“욕심인 건 알지만… 아니, 제가 너무 주제 넘었습니다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쇼.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데… 어…….
나는 쭈그러진 녹색 청년을 난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얘네 입장에서, 나는 이번 일만 끝나면 헤어지는 상황이었지…….
곧 헤어질 걸 알아서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서 사과한 것 같은데, 이 여정이 더 연장될 거라 하면 이제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푸흐.”
상상할수록 웃긴 반응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평소와 달리 대놓고 피식 웃었다. 데스브링거는 귀를 삐쭉 들며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것 말인데─”
“아아앗!!”
우리 아무래도 사탄 잡을 때까지 같이 가야 할 것 같아. 이어지려던 말이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 끊겼다.
“모험가님!! 일어나셨습니까!!”
인퀴지터였다.
[안뇽.]
“아아, 그래. 일어났─”
[이제야 제대로 인사하네.]
“……?”
신성력이 바닥나, 치료를 중단한 이가 내게로 우다다 달려왔다. 한데 그녀의 머리엔 불꽃으로 이뤄진 참새 같은 것이 대롱대롱 달려 있으니.
[안녕안녕!]
“…그래, 안녕.”
이게 부활한 주작이구나. 전이랑 너무 달라서 괴리감 느껴지네. 나는 내 앞쪽으로 포르르 날아온 주작을 보다가 그에게 손가락을 뻗어 보았다. 물론 그는 앉지 않았다. 정화의 힘이 내게 따가움을 선사할까 조심하는 듯했다.
“경? 일어나셨습니까?”
그사이, 데스브링거에게 전달받은 식량과 마법사가 일으킨 불꽃으로 수프를 끓이던 다니엘도, 그 옆의 베르세르크도 내게 시선을 주었다.
보다 정확힌, 베르세르크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가 이제야 시선 준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마침 밥도 다 된 참입니다. 다 같이 식사하면 되겠군요.”
뭐어, 이왕 말하는 거라면 모두가 듣는 데서 한 번에 말하는 것이 좋겠지. 데스브링거와 베르세르크가 과연 한자리에서 밥을 먹으려 들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다니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동안 열량이 바닥난 것인지 인퀴지터가 침 고인 얼굴로 고개를 열차게 끄덕였다. 기운 없어 보이던 소녀도 이 순간만은 고대하는 표정이다.
“많이 드십시오, 모험가님!”
“식기 전에 드시는 게 좋습니다. 식량은 넉넉하지만 땔감은 많지 않아서요. 이렇게 데운 음식은 하루에 한 번뿐이 못 먹습니다.”
“그렇군…….”
“두 분도 드시지요.”
“가, 감사합니다.”
“…고맙다.”
“마법사님은…….”
“필요 없다.”
나는 땔감이 없어, 스스로의 마력으로 화덕을 자처했을 마법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부서진 가면이나마 아득바득 쓰고 있는 꼴은 둘째 치고, 의외다 싶었다. 내게 정체가 밝혀진 만큼 이런 자잘한 것에는 협력 안 해 줄 줄 알았는데.
“불이 필요한 거라면 나도 돕지. 마기가 섞인 불도 괜찮다면 말이야.”
“이 추운 곳에서 마기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뭐, 식사 시간에 말을 꺼내서 굳이 분위기를 뭉갤 필요는 없겠지. 게스타스가 말해 준 ‘오만의 마법진’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거야 몰래 물어보면 그만이고.
나는 그것으로 에루탤크의 정체 밝히기를 미뤄 둔 채 그릇을 받아들였다. 그릇에 옮긴 지 얼마나 됐다고, 음식의 온기는 벌써 미지근해진 채다.
“간 조절이 잘됐군…….”
[오, 인간의 음식은 꽤 맛나구나.]
그래도 맛은 있었다. 당연하다. 소금 간을 잘하면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게 느껴진다. 고된 육체 노동을 마친 후라면 더 그렇다.
“칭찬 감사합니다.”
“나리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요.”
“…….”
글쎄. 정말 그럴까…….
나는 저번에 내가 했던 걸 먹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던 이들을 떠올리며 숟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러자 다니엘과 데스브링거가 어색하게 웃었다.
“전 그것도 좋았습니다! 미묘하게 무너진 밸런스가 색다름을 도전하셨단 걸 증─ 어푸풉.”
참고로 윗말은 인퀴지터의 것이다. 중간에 끊어진 이유는 당연히 데스브링거 때문이다.
“다음에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
데스브링거도 그렇고 다니엘도 그렇고 어떻게 이렇게 소금 간을 잘 조절하지. 난 1인분까진 어떻게 해도 3인분 넘어가면 헷갈리던데.
나는 부러움을 수프와 함께 삼켰다. 내 손목으로 날아온 주작이 중간중간 내 몫을 빼앗아 먹었다.
“그보다 마법사님은 정녕 안 드셔도 괜찮습니까?”
“괜찮다.”
근데 에루탤크는 이번에도 안 먹는 건가. 솔직히 그녀의 정체를 고려하면, 실험 여파로 인해 정해진 것만 먹어야 하느니 뭐니 하는 건 다 뻥 같은데.
당장 가면만 해도 박살 났는데 아무 이상 없잖아. 그렇다고 먹는 게 특별한가 싶으면 그것도 아니고.
“와서 먹어라.”
혼자서 차가운 빵 따위를 씹게 내버려 두는 건 역시 마음에 걸린다. 해서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권했다.
“나는…….”
“변명은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 알 텐데.”
“…….”
결국 반박하려던 이가 포기하고 식사에 합류했다. 여분의 그릇이 있었기에 나눠 주지 못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저… 역시 두 분은 전부터 알고 지내셨던 게…….”
“아, 그렇지.”
아는 사이인 건 맞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밝혔다간 인퀴지터와 에루탤크 사이가 개판이 날 거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사흘이나 여기에 짱박혀 있어야 하지.
나는 그 사흘을 그 분위기 속에서 버티느니 말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마침 전환하기 좋은 주제도 있었다.
“혼절해 있는 동안 신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예?”
“해서 사탄을 죽일까 한다.”
“예??”
내 말을 들은 모두가 벙찐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