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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78화 (378/389)

378화 그 두 눈으로 (4)

“제게, 용서를 구하지 마세요.”

나는 한참 만에 메는 목을 뚫고 말을 뱉었다.

“그 사항에 한해서는 정말로 제게 용서를 구하지 마세요. 저에겐 그럴 자격도, 그러할 이유도 없으니까.”

아.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선한 네가 대의란 이유로 이곳에 박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마 토로하지 못한 진심은 영원히 이곳을 떠돌게 될 것이다.

내 눈이 질끈 감겼다.

[그래…….]

한편, 내 반응을 본 게스타스는 뒷말을 쉬이 잊지 않았다. 스톨이나 옷자락을 매만지는 발굽에선 어쩐지 아쉬움 따위가 묻어나는 듯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건 너에게 용서받을 일이 아니지. 애초에 누군가에게 용서받을 일조차 아니야. 이를 위해 희생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

[…이야기가 너무 먼 데로 샜지? 그래도, 자. 나의 전언이 무엇을 대표하는지는 이제 너도 알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왜 아쉬워하는가.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듯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주제 전환에 암묵적 동의를 표했다.

아무렴, 이렇게나 무거운 대의 같은 건 이 이상 알고 싶지도, 더 이상 연관되고 싶지도 않았다. 아끼는 아이가 대의에 희생될 예정임을 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걸 막을 자격도, 자신도 없다. 내가 그 아이를 아끼는 이유가, 이런 데서 물러날 아이가 아니기 때문임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그 아이의 예정된 선택에 나는 그 어떤 관여도 시도할 수 없다.

[일단… 네가 이리된 것엔 심심한 사과를 전할게. 정말 유감이야. 우리도 설마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어.]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근원되는 무력감은 정말 최악이다. 나는 미묘한 불쾌감을 곱씹는 채로 그의 사과를 받았다.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변명처럼 들릴 건 알아. 하지만… 진심이야. 우린 정말로…….]

“…사과할 줄 모르시네요. 이런 건 감정적인 요소에 호소하기보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보상안을 제시하는 게 더 낫다고 보는데요.”

세상엔 감정론으로 호소해도 되는 사건과 호소해선 안 되는 사건이 따로 존재한다. 다만 여기서 대기업 내지 거대한 세력이란 조건과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조건이 붙을 경우, 대부분은 후자가 된다.

세력이 크면 클수록 실수가 발생했을 때, ‘그럴 만했다’라는 생각보단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일을 얼마나 못했으면’이란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 음. 그래…….]

“그래서, 설마 이 말만 하려고 절 데려오신 건 아니겠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수천 개의 열매를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보며 게스타스를 재촉했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동족을 희생시켜 가며 이 거창한 일을 벌였다던 사람은 어쩐지 어리숙한 얼굴로 뺨만 긁적이는 중이다.

[그건 아니니까 걱정 마. 그리고 동정을 사려거나 감장적인 무언가로 널 압박하려 했던 건 정말 아니야. 만약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러나 그 모습이 이런 협상 자체에 미숙한 것으로 비치진 않았다. 물 흐르듯 내 거슬림을 찾아 비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는 최소한 이러한 대화를 낯설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화, 화난 건 아니지? 진짜 미안해…….]

아니… 애초에 그는 동족과 함께 용사란 직위 자체를 날조해 낸 사람이다. 심지어는 그 자신이 용사 행세를 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렇게까지 일을 벌이고, 또 성공했던 사람이 진정 순진하기만 할까?

대의를 위해서였다곤 하나 거짓을 진실로 선동할 만한 대담함, 그 거짓이 현재까지 이어질 정도로 치밀하고 능숙하게 속여 낸 솜씨, 동족 모두가 그를 대표로 인정할─인정하지 않았다면 그가 이 자리에 있을 리 없으니─리더십… 그런 걸 가진 사람이 이깟 협상을 못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역시 무언가 있다.

“솔직하게 말하시죠.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거짓과 기만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그것의 의도가 설사 희디흰 것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내숭도 알고 있는 놈이 부려야 귀여운 거지, 생판 초면에 앙금까지 있는 상대가 능청 떨어 봐야 음흉한 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못 된다.

[아…….]

그러니까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해. 배상을 못 해 주겠다는 말이든, 해 줄 수 있는 게 얼마 없다는 말이든, 최소한의 해결 방안이든. 간만 보다가 빡치게 하지 말고.

내 신경질적인 반응에 게스타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조금 미안하다가도 그들이 일을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건 사실이니 금방 죄책감이 사라졌다. 난 여기서 눈치 볼 필요 없는 순수 피해자다.

[사실 이것도 일종의 감정적 호소로 느껴질까 봐 말 안 하려 했던 건데… 음. 사실 나, 인간일 때의 감정을 많이 잊어버렸거든. 그래서 인간의 관점과 비틀린 말을 내뱉을 수도 있어. 그로 인해 네가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고.]

“…감정을 잊어요?”

[아까… 영혼이 자칫하면 신에게 흡수되어 자아를 상실한다고 말했었잖아. 그런 맥락이야. 나무라는 중간고리를 통해 최대한 나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고 있긴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면 결국 신과 섞이고 말거든.]

물통을 바다에 던져 놓는 것과 비슷하다며, 게스타스는 비유를 들었다.

[물통을 아무리 단단히 밀봉해도 결국 새어 나오는 게 있잖아. 그렇지만 물통의 물이 바다를 희석시킬 순 없지. 바다가 물통 안의 물을 제 것으로 삼킬 순 있어도. 그런 논리야.]

“…그러니까, 신과 동화될수록 인간성을 상실한다. 그런 이야기인가요?”

[아! 정확해. 응, 네 말이 딱 맞아. 인간성을 상실한다. 그게 바로 나와 다른 열매들의 상황이야. 타락 외에도 열매가 많이 필요한 이유지.]

말문이 막혀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와 나 사이의 악감정들을 떠나, 인간성의 상실을 뭐 저리 헤실거리며 말한단 말인가.

인간다움을 잃는다는 건 결국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해 가고 있단 소리밖에 못 되는데.

[아무튼 그래서… 지금도 옛 기억을 살려서 대화 중이긴 한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러니 내가 인간적이지 않은 답을 내놓거나 그냥 짜증나는 답을 내놓았다 싶으면 언제든 말해 줘. 시정할게.]

“…그게 말로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그러죠.”

아, 이 사람 잘못은 아닌데 진짜 뭔가 열받네. 나는 죽고 나서 이곳에 박제된 채 인간성을 서서히 상실해 갈 인퀴지터까지 떠올렸다가 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그곳으로 돌아가거든 너는 절대로 이거 하지 말라고 설득해야지. 빌어먹을.

[그래서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배상안 내지 해결 방법을 제시해 달라고 했었지?]

각설하고, 인간성을 잃어 가는 초대 용사가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솔직히 배상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얼마 없어. 아무래도 네가 다른 세계 사람이고 신이 지금 제 힘을 못 내는 상태다 보니까… 대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너를 붙잡고 있는 육신을 죽여서 바로 집에 보내 주는 식으로. 그게 우리가 고안한 첫 번째 해결법이야.]

아무래도 인간성을 잃었다는 건 진실인 것 같았다. 내 얼굴이 차게 식었다.

“…제가 그럴 거였으면 진즉 갔겠죠?”

[역시 거절인가… 뭐, 반쯤은 예상하고 있었어. 존재마저 잊는 것과 별개로 세상 흘러가는 꼴을 아예 인지 못 하진 않거든. 행동할 때를 알고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상황을 인지하곤 있어야 하니까. 물론 선잠 자듯 파악하는 정도일 뿐이긴 한데.]

“그래서, 해결법은 그게 끝?”

[그럴 리가! 네가 거절할 때를 대비해 두 번째 세 번째 해결 방안도 준비해 놨어.]

그래, 그래야지. 나는 이어지는 말에 그나마 안도했다가, 다시 고개를 휙 들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

[이번이 아니면, 너,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이 지나야만 돌아갈 수 있을 텐데.]

“……??”

이건 또 뭔 소리야.

* * *

베르세르크는 깨어나지 못하는 소녀를 곁에 둔 채 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데스브링거가 신경을 써 준 것인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등이 파인 이는 정면으로 뒤집어 두면 척추뼈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옷까지 제대로 입혀 두면 더욱 그랬다.

그녀는 자매의 귀에 여즉 꽂혀 있는 꽃을 보며 가만 손을 뻗었다.

“…이것들은 누가 준비했나?”

“예?”

“이 꽃과 관. 처음부터 이리 발견되었을 리 없으니, 분명 그쪽에서 준비한 것일 것 아닌가.”

“아…….”

소녀 근처에 화톳불을 준비하고 있던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멋쩍게 긁었다.

“아마 모험가 경께서 준비하신 걸 겁니다. 시신 운반은… 여기 오기 전까지 그분이 담당하셨었으니까요.”

“모험가?”

“아, 악마기사 경 말입니다.”

“…그렇군.”

호칭을 바꾸었나. 태도를 보아 사이도 개선된 모양이고.

베르세르크는 바뀐 두 사람의 태도와 악마기사의… 모험가의 변경된 호칭을 기억해 두며 관을 물끄러미 계속 보았다.

단단하고, 밝지만 약간 노랏빛을 띄는 목재 색. 코를 가까이 대면 얕게 배어 나는 솔 향. 쓸데없이 음각으로 장식된 겉면… 그런 것들 따위가 그녀의 시야에 끝없이 들어왔다.

정말로, 모험가다운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에게 감사해야겠구나.”

고향 그 누구의 존중도 받지 못했던 자매다.

그런 이가 생전 처음 보는 이의 손에 닿고 나서야 존엄성을 되찾았다. 드디어 죽음을 추도받고 사후를 대접받으며 응당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이제야 되찾았단 소리다.

심지어 모험가는 이 이가 그녀의 가족임조차 몰랐을진대. 이는 결국 모험가란 사람이 망자마저 존중한다는 행운과 죽은 자매가 딱 그를 마주했다는 우연의 결합일 뿐이니.

실로 천운이고, 더없이 운명이다.

베르세르크는 이 놀라운 인연 앞에 속절없이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이제 모험가의 적은 그녀의 적이 될 것이고, 모험가의 목표는 그녀의 목표가 될 것이다.

오직 그녀의 자매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대한 조각이네.]

“……?”

그때 인퀴지터나 데스브링거와 종알거리는 듯하던 새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불꽃으로 이뤄진 작은 새의 눈길이 향한 곳은 정확히 베르세르크, 그녀가 있는 자리다.

“…그 조각이란 게 나한테도 있나.”

조각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확한 개념은 파악하지 못할지언정, 영문을 몰라 전전긍긍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 또한 아니었으므로.

[응. 엄청 커. 저 시신이 가지고 있던 것만큼 커.]

“…….”

저 시신, 이라. 베르세르크는 혈육에게서 뽑혀 나왔던 청동빛 척추뼈를 떠올렸다. 보통의 인간에게선 볼 수 없는 빛깔의 뼈. 그것은 아무래도 그녀 본인에게조차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애도… 작지 않은 조각을 가지고 있네.]

“…저, 아이도 말인가?”

[조각의 위치가 다른 놈들이랑 다르긴 한데… 사는 데 지장은 없을 거야.]

심지어는 저 어린 피리꾼에게도.

[대신 둘 다 죽을 것 같으면 나한테 와. 너희가 죽고 남겨진 조각은 용에게 돌려줘야 하니까.]

“…당장 돌려보내진 않는 건가.”

[용이 깨어나지 못했다면 그랬겠지만, 깨어난 지금은 굳이? 저 녀석도 달가워하진 않을 거야. 안 그래도 영혼이 몇 개나 섞여 들어서 정신없을 텐데, 여기서 두 사람까지 더해지면─]

“잠깐, 영혼이 섞여 들어?”

그냥 넘기기엔 문제가 많은 발언에 베르세르크의 눈자위가 휙 돌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 안쪽에선 미묘한 열망 따위가 미지근하게 타오르는 중이다.

[아, 그거. 조각을 품고 있으면 조각에 영혼이 붙잡혀 버리는 것 때문에 그래.]

“왜… 붙잡히는 겁니까?”

[용의 입장에선 심장 조각이 먼 곳으로 흩어지면 곤란해지니까. 조각을 품고 있는 자는 이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떠나도 결국 돌아오게 되도록 저주했거든. 영혼이 조각에 붙잡히는 건 그 부작용.]

그렇다면, 저 말이 정녕 진실이라면. 자매의 영혼은 그 척추뼈에 갇혀 수십 년을 존재했다는 건가? 심지어 이제는 용에게 흡수되었고?

“영혼은! 용에게 흡수된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무언가 차오르는 감정이 그녀의 손을 앞으로 뻗게 만들었다. 큼지막한 손에 난데없이 붙잡힌 주작이 으엑 비명을 질렀다.

“흡수된 영혼은 어떻게 되냔 말이냐!”

[그, 그냥 흡수되는 거지! 딱히 뭐 되는 거 없어!]

“…뭐?”

그럼, 그럼 결국 그녀의 자매도 저 용과 하나가 됐단 이야긴가? 수십 년을 설원에 맥없이 존재한 결과가 저 용과 합쳐져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고작 그것이 알스비드르의 종막이라고?

[아, 물론 너나 저 시신 같은… 커다란 조각을 품고 태어난 녀석은 좀 다를 수도 있어. 커다란 조각을 품고 태어났다는 건 그만큼 영혼이 커다랗단 소리니까.]

“자세히, 말해라.”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어. 절대로 인정 못 해.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면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핏줄이 도드라진 채 답을 강요하는 베르세르크의 모습에 주작이 꼬리 끝을 파르르 떨었다.

[바닷물에 물 잔을 던지면 의미 없지만, 강에 던지면 아무래도 여파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거야. 조각의 주인이었던 녀석의 영혼이 용에게도 영향을 끼치든가, 아니면 아예 용의 영혼을 장악하고 자아를 유지하든가… 그런 식의 흔적이 남겠지. 아마도.]

“그럼… 내 자매도 아직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단 거냐?”

[자매? 어쩐지 좀 닮았더라… 그리고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지 아닐지는 나도 모르지. 어쩌면 그냥 녹아 사라졌을 수도 있고.]

“빌어먹을, 그래서 뭐가 답이란 거냐!”

[아니, 애초에 추측일 뿐인데 거기서 답을 구하려 들면 어떡해! 으악! 주작 죽는다!!!]

“겨, 경. 조금 진정하심이……!”

하나 아무리 캐묻고 캐물어도 원하는 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베르세르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핏기를 잃기 시작했다. 은애하는 자매가 사후초자 편치 못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공포의 잔재였다.

그녀의 이가 스스로의 입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만.]

그리고 그녀의 공포가 한계에 다다라 분노로 치환되려던 그때.

[그만하렴.]

용이 드디어 눈을 떴다.

[아르바르크, 이제 그만해도 돼.]

알스, 비드르. 베르세르크의 몸이 온전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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