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걸음을 낱낱이 아는 (8)
“대체 왜……!!”
왜 이곳에 왔는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어째서 하필 이때 왔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뇌를 휘감았다. 제 몸을 먹고, 제 몸이 자라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감정의 비늘들은 형태가 뭉개져 색조차 알아보기 힘든 채다.
“왜 지금……!”
네가 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소녀만 지금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포기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필 이 순간에 찾아오는 것만 아니었다면 나는…….
“…대, 전사.”
나는…….
“…피리꾼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겠지.
더는 선택하고 싶지 않아서 남의 선택을 기다리려 한 것이 방금이었으니까. 참으로 비겁하게도, 나약하게도.
“아… 진짜 대전사님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도 간절히 그리던 가족의 유해를 지키는 대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녀를 붙잡기로 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근 삼십 년을 기다려 온 이보다 이 주도 채 되지 않은 만남이 무거울 리 없는데. 그녀의 삶 그 자체를 증명하는 존재가 지나가는 인연 하나에 질 가벼움이 아닌데.
“…왜.”
어째서 그녀는 이곳에 있을까?
“왜 이 꼴이 되어서까지 날 찾아온 거냐…….”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자매가 담긴 관에 돌아가고 싶다. 그곳으로 향하는 데스브링거의 발걸음을 막고 싶다. 혈육이 죽어서까지 무언가를 빼앗기는 걸 보느니, 차라리 먼저 눈을 감고 싶단 말이다.
“왜 다들 목숨을 그리 쉽게 내버리는 거냔 말이냐……!”
하지만 그런 욕구가 머리를 장악하려 들 때마다 품에 안긴 생명이 움찔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갈라진 숨과 헤픈 미소, 바들거리는 떨림. 고작 그 정도 따위의 신호로 그녀의 몸을 우두커니 사로잡고 마는 것이다.
“대체 왜……!”
베르세르크는 자신이 울고 싶은 건지 화내고 싶은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로 그 숨결을 꼬옥 안았다. 그러자 소름 돋는 한기가 오소소 다가왔다. 과거, 그녀가 끌어안았던 언니의 마지막과 지독하게 닮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의 냉기였다.
“…대전, 사.”
심지어 뱉는 숨마저 서리가 한 올 한 올 얽혀 있다. 마치 설원에 동화되어 사라질 눈의 요정처럼.
“당신이, 말했, 잖아요.”
그러지 마. 가지 마.
베르세르크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를 붙잡고자 그 몸을 더욱 강하게 그러쥐었다. 베르세르크의 큼지막한 손에 들린 채로 품에 갇힌 소녀의 호흡이 조금은 더 커졌다.
“저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숨결 속에서 헤픈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지금 소녀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도 자각하지 못하면서 웃는 사람의 미소였다.
“그렇다면 대전사… 제가 당신이 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나요?”
아, 세상은 왜 이렇게 끔찍하고 잔인한 걸까?
베르세르크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 * *
데스브링거는 베르세르크가 소녀에게 달려가는 걸 확인한 후, 관으로 다가갔다. 귀에 꽃을 꽂은 백금발의 사람은 이런 소동에도 놀라우리만치 고요하기만 하다. 뭐, 죽은 사람이니까 당연하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요.”
그는 가끔 모험가가 죽은 사람을 두고 외던 말을 내뱉었다. 이유는 크게 없었다. 이곳의 것과 어긋날 때는 있어도 대체로 예법과 예절에 통달한 듯 보이는 사람이 모험가이니. 그 사람이 하던 말이라면 이 사람에게 충분한 존중과 존경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요.”
물론 보통의 경우였다면 그냥 ‘미안합니다’만 하고 넘겼을 거다. 이 전에 시체를 후벼 팔 때 그리했듯.
하지만 이 사람이 정녕 베르세르크의 가족이라면, 절대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망자의 몸을 들추었다. 필요한 건 척추뼈였으므로 뒤집기까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녀와 여인 그 어드메에 속한 육체가 휙 돌아갔다.
“끄응.”
이다음으론 옷을 자른다. 손이 멀쩡했다면 벗기는 등의 행위로 망가지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았겠으나, 두 팔이 작살난 지금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뒤집으면 옷이 멀쩡한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척추뼈를 따라 필요한 면적만 도려냈다.
“윽.”
다만 옷에 쓰인 가죽이 두껍고 억센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동상 입은 발가락의 감각이 무뎌지며 선이 약간 비뚤빼뚤해졌다. 옷만 자른다는 게 피부 겉면에도 약간의 상처를 남겨, 괜히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손만 멀쩡했어도…….”
아니, 사실 발가락으로도 깔끔히 자를 능력은 있었다. 여기가 더럽게 춥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하다못해 동상을 입지만 않았어도 가능했을지 모르고.
“후.”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데스브링거는 지금 발가락으로 척추뼈를 도려냈다간 단면이 굉장히 지저분하게 나올 것임을 인정했다. 척추뼈를 도려낼 방식을 바꿀 때였다.
샥.
그는 일단 단검으로 다른 쪽 발의 뒤꿈치 부분을 찔렀다.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인지 상처의 크기에 비해 피가 적게 나왔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단검을 잠시 내려두고 엄지발가락에 그 피를 펴 발랐다. 이제 이것은 척추뼈 라인을 따라 선을 그릴 붓이 되어 줄 것이다.
“아잇, 피가 얼면 어쩌잔 거야…….”
그래도 약간의 고초가 있을지언정 대략적인 안내선을 그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는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 발가락으로 집는 부분은 결코 칼자루가 아니다. 그는 발가락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단검의 칼등 부분을 잡았다. 전부 이에 칼을 물리기 위함이었다.
콱.
단검의 빈 칼자루가 이 사이에 끼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프흐.”
그는 미리 그려 둔 안내선을 확인하며 자세를 잡았다. 허벅지가 관의 옆판에 닿은 채 허리를 숙인, 오롯이 다리와 허릿심으로만 버티는 자세였다.
푹.
손으로 땅을 짚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아니, 애초에 손이 멀쩡했다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로 잡고 있는 단검을 등에 박았다. 안내선을 미리 그려 둔 덕에 거리감으로 인한 척추뼈의 위치 혼동 따윈 없었다.
그는 이가 부러져라 꽝꽝 언 살을 단검으로 파헤쳤다. 손으로 한 것보다는 역시 덜 깔끔했으나 생각보다는 더 깔끔하게 베인 등이 기어이 척추뼈를 보여 주었다.
“크으.”
이제 이것만 꺼내면 되는데… 어떻게 꺼내지? 이로 꺼내기엔 애초에 얼어붙은 살점 사이로 머리가 파고들지 못할 텐데. 그럼 역시 발로 꺼내야 하나? 아니면 칼을 지렛대 삼아서?
한데 그가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뻗어 왔다.
“…이걸 꺼내면 되는 거냐.”
끝없는 절규와 탄식 끝에 쉬어 버린 목소리가 손 없는 그를 대신하여 척추뼈를 꺼내 주었다. 청동빛이 박혀 있는 수준이 아니라, 청동빛 그 자체로 이뤄진 척추뼈였다.
“…투사 나리.”
“이걸 어디다 두면 되는 거냐.”
“저기 파헤쳐진 부분으로 굴러 떨어트리면 되는데… 괜찮겠습니까요?”
그의 물음에 소녀를 안고 있던 이가 표정을 흐린 채 선웃음을 지었다. 눈물, 혹은 절망, 또는 체념. 너무 많은 것이 섞여, 도통 근원을 알아볼 수 없는 비소悲嘯였다.
“작은 사냥꾼, 너는 사람을 치료할 줄 알지.”
“아니, 치료래 봤자 응급조치 수준입니다만…….”
“어린 피리꾼을 부탁한다.”
데스브링거의 항변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은 이가 소녀를 내려두었다. 베르세르크가 걸치고 있던 옷들로 둘둘 싸맨 소녀였다.
“어…….”
코끝에서 희미한 숨결이 새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죽은 자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다. 금방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랄까.
심지어 그는 치료할 손이 없는 상태다. 손이 있어도 간당간당할 상황에 양팔이 모조리 박살 났으니,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단 이야기다.
그러나 데스브링거는 그것을 차마 지적하지 못했다. 소녀를 내버려 둔 베르세르크가 바로 자리를 뜬 것도 있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이 참으로 울적해서도 있었다.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같다. 데스브링거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베르세르크는 자매의 척추뼈를 든 채 용에게로 다가갔다.
이게 옳은가? 글쎄. 가는 동안 자문자답해 보는 가슴은 더 이상 파문이 없다. 바다가 뒤집어지면 파도도 안 보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통의 극치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차라리 희게 멀어 버린 가슴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하아.”
그리고 끝내 용의 가슴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척추뼈를 들어 올려 보았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채로 얼어 있는 척추뼈는 그 빛깔이 청동색인 덕에 꼭 무언가의 조각상처럼 보인다.
무엇을 표현한 조각상이냐 묻느냐면 그땐 창이나 지네 따위밖에 답이 안 나오겠지만서도.
“…아.”
그래도 역시 보내 주기 싫다. 이 또한 자매의 것이기에, 고작 그러한 이유만으로 떠나보내는 게 싫다.
그녀는 손에 쥐인 뼈를 두고 눈물을 떨구었다. 헤어짐이란 몇 번이 반복돼도 이렇게나 아픈 것이었다.
“숨, 숨 계속 쉬어야 합니다요.”
“흐으…….”
“나리, 제발 도움 되는 게 안에 있다고 해 주십쇼… 따스운 물이나 뭐 그런 거 넣어 놨다고 해 주십쇼…….”
그러나 이제는 보내 줘야 한다. 더는 돌아가기엔 늦었으니까.
“알스비드르…….”
아, 사랑하는 자매여. 그대는 끝까지 누군가를 구하는구나.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심장을 뜯어내는 심정으로 비드르의 뼈를 살점의 구멍 안에 던져 넣었다. 스으윽. 미끄러지듯 안으로 진입한 뼛조각이 복구된 심장에 닿았다.
3/5. 정확히 절반이었던 심장의 크기가 단번에 불어나며 엄청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죽은 것처럼 희멀거니 뜨여 있기만 하던 안구가 선명해지고, 용의 고개가 다시 들어 올려졌다.
크아아아아─! 데스브링거가 경험했던 포호와는 질적으로 다른, 훨씬 더 맑고 또렷한 울음소리가 그 목을 타고 허공으로 뱉어졌다.
화아악!
동시에 용의 유백색 몸체와 동굴을 연결하던 거미줄 같은 실들이 자잘한 빛무리를 머금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통해 무언가가 흘러 들어오고 무언가가 흘러 나가는 듯한 흐름이었다.
반짝임들이 쌍방을 오가며 동굴을 환히 밝혔다.
“이건…….”
빛무리가 사방에 가득하지만 눈이 부시진 않다. 마치 낮에 촛불을 켜 둔 듯한 은은함이었다. 분명 있지만 존재감이 강하진 않다.
베르세르크는 그 은은한 빛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면 안 돼.]
“……!”
하나 그런 그녀의 행동은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 앞에 막혔다.
분명 언젠가 들어 봤던,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그 목소리였다.
“…비, 드르?”
이 목소리의 주인이 대체 누구인가. 지금 그녀를 막은 건 누구인가. 그녀는 그것을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피에, 영혼에 새겨진 이름이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어. 바그르가 이 세상에 오다니.]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는 대신 다른 소리를 뱉었다. 꼭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베르세르크의 마음에 절박함과 조급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답해! 비드르, 비드르 너야?!”
[아… 나의 일을 대신 해 주는 이가 있었나. 그대들에게 무궁한 영광과 감사를.]
“알스비드르─!”
그녀는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는 용을 보며 그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콜록.” 그러나 뒤쪽에서 소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세르크의 발이 찰나간 머뭇거렸다.
[또한 고결한 불꽃의 새여, 지금의 나에겐 상황을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나는 무정하게도 그대의 죽음을 요구하고자 한다.]
다만 그녀가 머뭇거린 동안, 용이 목과 고개를 둥글게 구부렸다. 그의 몸에서 나는 빛이 거미줄과 같은 실타래를 따라 강하게 퍼져 나가며 세상을 유백색으로 물들이고 만다.
[아, 영원한 태양이 뜰 시간이다.]
얼어붙은 땅에 백야가 찾아왔다.
3년간 지지 않을 태양의 도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