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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73화 (373/389)

373화 걸음을 낱낱이 아는 (7)

와장창!

세상이 깨졌다, 라고 생각이 된 순간 폐부로 차가운 공기가 와닿았다. 쿵. 연이어 든 감각은 무릎이나 손바닥 관절 따위에 닿는 둔탁한 충격이다. 마치 해먹에서 떨어졌을 때와 비슷했다.

“으…….”

그렇지만 소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추락의 충격이 아니었다. “아으으으…….” 화상을 입은 채로 무언갈 두드리느라 완전히 짓무르고 만 살갗 따위였지.

“하으…….”

심지어 소녀가 떨어진 곳의 환경도 썩 좋지 못했다. 추위에 익숙한 소녀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냉기가 소녀에게 엄습하기 시작했다.

물크러진 살점 새로 흘러나오는 핏방울이 통째로 얼고, 살갗이 부으며 퍼레질 한기였다. 서릿발 같은 공기가 소녀의 상처 위를 지날 때마다 칼이 몸을 베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윽.”

하지만 칼바람 자체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건 이 칼바람에 가려지는, 손가락 발가락이 붓고 검게 변하는 증상들이었다.

“하아.”

소녀가 알기로, 이 증상들은 추방자들이 얼어죽기 전 보이는 전조와 동일하다. 이와 같은 병세가 나타난 주민이 가끔 손가락 발가락, 심하면 팔이나 다리를 자르던 것도 기억했다. 사지 말단을 잘라 낸 그들이 결국 추방자가 되었기에 더더욱 확실한 기억이었다.

“흐으…….”

즉, 이대로 가면 소녀도 위험하다. 소녀의 이가 악다물렸다.

다닥, 다닥.

한데 이 좀 깨물었다고 이번엔 서로 부딪치고 난리다. 진짜 춥구나. 소녀는 옛저녁에 이겨 낸 습관을 두고 서글프게 웃었다. 정말로 추워. 이 땅에서 가장 무의미한 불평이었다.

“가, 야 돼.”

그래도 어떻게 탈출한 시련인데, 여기서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순 없다. 안간힘을 써 가며 몸을 일으킨 소녀가 눈 위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주르르르.

그녀의 왼편에는 생전 처음 보는, 검은 물로 이뤄진 강이 있다.

“흐으으아.”

추워, 너무 추워. 소녀는 옷자락을 여미며 어떻게든 열기를 보존하려 노력했다. 소녀의 마음 한편은 무게를 덜기 위해 시련 안에서 벗어 던지고 온 털 망토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금처럼 옷가지가 절실한 적이 또 없는데. 소녀는 바람을 덜 맞기 위해 몸을 구부리며 숨을 뱉었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아쉬움만 가득이다.

보랏빛으로 변한 소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콜록!”

그러다 소녀의 발목이 살짝 꺾이며 몸이 비틀비틀 옆 걸음을 걸었다. 한 번의 실수로 여기기엔 이동한 옆 걸음의 수가 꽤 되는 장면이었다.

거기에 옆 걸음이 멎었을 때 소녀는 자세를 다시 잡긴커녕 그 상태로 철푸덕 엎어지기까지 했으니. 하아. 숨을 뱉은 소녀의 몸이 땅속을 기는 벌레처럼 바르작대었다.

“안,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데… 소녀는 엎어진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굴뚝같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꿈틀. 오직 손끝만이 소녀의 바람을 반영하여 꿈틀댈 뿐이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소녀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추위로 인한 반사작용이었을지 모르고.

“…아.”

그러다 소녀의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설원 저편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까만 점이었다.

“……?”

그 까만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시야가 흐릿하여 정확한 윤곽은 볼 수 없었으나 실루엣 자체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대, 전사……?”

그리고 그것의 거리가 어렴풋한 시야마저 뚫고 들어올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소녀는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상대를 보았다. 오로라처럼 빛나는 상대였다.

“대… 전사…….”

사사사사삭, 파앗!

감기는 눈 사이로, 눈밭이 파헤쳐지는 듯한 소리가 아련히 울러 퍼졌다.

* * *

“이, 미친!”

나는 사방에서 짓쳐드는 입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몰이당하고 있는 상황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피할 공간도 주지 않고 공격을 전방위로 갈기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이건 답 없어, 그대. 섬격이나 갈겨.]

나는 이를 바득바득 씹다가 분노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 방법밖엔 없는 것 같았다.

저놈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꼭 개수작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꼭 다른 방법이 있을 것만 같지만. 설사 있대도 나는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촤아아악!

…그런데 진짜 없나? 나는 전후좌우 위아래 모든 곳에서 쏟아지는 촉수들을 보며 입술을 꿈틀거렸다. 상도덕 없는 새끼. 한차례 거대한 구로 나를 가두고, 그 상태에서 서서히 좁혀 오던 촉수의 다발이 기어이 내 몸을 덮쳤다.

──!

또한 그것은 한순간에 삭제되었다.

마치 올가미를 쳐 두고 Delete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쪽 단면이 뽕 하고 사라진 구체가 내게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저 구멍이 메워지기 전 탈출하는 것이다.

[달려, 그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허공을 밟고 뛰었다. 딱히 무언가의 발판이 있지는 않았으나,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던 허공은 내게 밟혀 주었다.

[의외야. 다른 무엇도 아니고 바닥을 정의하는 데 좀 걸릴 줄이야.]

아니이. 바닥이 있으면서도 없으며, 모든 공간이 디딜 수 있는 곳이자 밟지 못하는 우주, 라는 설명 앞에서 그걸 바로 이해하면 그 사람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나는 차마 토해 낼 수 없는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켰다. 어쨌거나 최종적으론 이해하는 데 성공한 까닭이다. 분노의 말마따나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

각설하고, 나는 허공을 밟아 가며 촉수의 구체를 탈출했다. 그러자 바깥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젠장.”

구의 바깥은 놀랍게도 쩌억 벌어진 늑대의 아가리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목구멍이 코앞인 자리.

“야, 이것도 답 없냐?”

[…내가 어떻게 굴욕을 참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야?”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어. 이 망할 호구 새끼가…….]

“시발 새끼야, 진심 내보내지 말고 답을 말해!! 진짜 뒈질 위기 같잖아!!”

* * *

“그걸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베르세르크는 몸을 흠칫 떨었다.

맞아. 그걸 어떻게 포기해. 흉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그 말에 차마 동의도 부정도 함부로 표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대답을 돌려주려 했다간 그녀의 결심이 흔들릴 것만 같아서였다.

“물러나라.”

“그건 안 돼요.”

“이번엔 팔로 그치지 않을 거다.”

“각오했어요.”

“정말 죽일 거란 말이다!”

“그러시라니까요?”

“어린 사냥꾼!”

하지만 목숨을 도외시한 채,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만을 위하여 다가오는 이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제 목숨이 필요하다면,”

『내 목숨은 아깝지 않아.』

“그까짓 거 뭘 못 주겠습니까.”

『너만 살릴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베르세르크의 발이 기어이 한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그저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지 마라.”

어째서 소중하단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버리려 드는가. 그 사람들이 그것을 바랄지 바라지 않을지 모르는 주제에 어찌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어.

“제발 내가 널 죽이게 만들지 마라.”

남겨진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을 줄 알고.

“어린 사냥꾼아, 제발……!”

“투사 나리, 부탁입니다.”

베르세르크는 도끼를 쥔 손에 무심코 힘을 주었다. 통, 통, 통. 한 발로 악착같이 다가오던 이가 갈라진 성대로 그녀를 불렀다.

“선택할 수 없다면, 제가 그들을 구할 수라도 있게 해 주십쇼.”

『넌 이제 살 수 있어…….』

정말, 지긋지긋한 목소리였다.

“아아아아아!!!”

베르세르크의 포효가 용의 동굴을 가득 메웠다. 듣는 자의 영혼까지 비참해지는, 그런 포호였다. 쿵, 쿵쿵쿵쿵! 처절하게 비명 지른 이가 막무가내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

데스브링거는 그를 보자마자 검을 고쳐 쥐었으나, 타이밍이 조금 늦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무의식 어딘가가 주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베르세르크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모험가가 겹쳐지며, 데스브링거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는 이제 찌를 수 없다.

쿠웅!

데스브링거와 베르세르크의 몸이 서로 부딪치며 뒤로 넘어갔다. 데스브링거는 등과 뒤통수를 바닥에 처박고, 베르세르크는 손과 무릎을 바닥에 찍으며 그 사이에 데스브링거를 가두는 자세였다.

“포기해라.”

베르세르크는 데스브링거를 바닥에 깐 채 그의 목을 쥐었다.

“제발 포기해라.”

하나 참 이상하게도, 그 상황에서 눈물 흘리는 건 데스브링거가 아니었다.

“제발…….”

투둑, 툭. 떨어지자마자 얼어 버리는 눈물이 데스브링거의 코와 뺨을 때렸다. 청년의 눈이 흐려졌다.

눈물조차 얼려 버리는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춥기만 한가. 죽인다 죽인다 말하면서도 결국 손에 힘을 주지 못하는 이 사람처럼, 조금은 더 따듯했어도 좋았을 텐데.

“투사 나리.”

그런 따듯함 정도는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괜찮아요.”

거짓이다. 데스브링거는 자신이 내뱉는 게 입바른 말임을 알면서도 그저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가 죽어도, 혹은 찾아낸 시신의 온전함이 망가져도. 어느 쪽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며, 서로 믿지 않는 거짓을 담았다.

“…너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처음 듣는 소린뎁쇼.”

살갗에 닿아 부서지는 서리의 숫자가 더 늘고, 또 늘어서, 기어이 목에 붙은 손을 떼어 냈다.

“이젠 잃는 것도 진절머리 나…….”

비척비척 일어난 이는 결국 데스브링거를 내버려 둔 채 그녀의 가족에게로 향했다. 털썩. 관에 기대듯 앉은 이의 몸이 시신을 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데스브링거에게 등을 훤히 내주는 형태였다.

“…어린 사냥꾼아, 네 말이 맞다.”

그녀는 그 상태로 자신의 가족을 보고, 또 관 안의 꽃을 들어 올렸다. 본래라면 시들었어야 하는 꽃은 시들 틈도 없이 얼려 버리는 공기에 마치 얼음 조각처럼 변해 버린 상태다.

“나는 선택할 수 없다.”

자연이 만든 그 신비에 베르세르크는 몇 번이고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네가 선택해라.”

그러곤 그것을 끝내 가족의 귓가에 꽂았다.

언니, 이건 꽃이라는 거야. 언니는 처음 보지? 남쪽에 가면 이게 정말 많은데, 이것보다 예쁜 것도 진짜 많은데.

“조각인지 뭔지가 필요하다면, 나를 죽여라.”

보여 주고 싶었어. 정말로, 보여 주고 싶었어.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끝 뒤에 다음이란 게 있다면 그땐 같이 보러 가자.

베르세르크는 희미하게 웃으며 끝내 눈을 감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선택할 필요도 없고 잃을 것 없는…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안온함이었다.

쿵!

“아흑.”

“……?”

하나 세상은 그녀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데스브링거가 치열한 갈등을 끝내기도 전,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는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졌다. 절대로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목소리였다.

“…피리꾼?”

눈의 정령이 그녀를 홀렸나. 베르세르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을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동굴의 초입, 바윗덩이 위에서 콩콩 뛰는 흰색 상어와 그 옆에 쓰러진 소녀의 형체가 보였다.

“……?”

“뭐, 뭐야?”

추위가 가져온 환시인가? 아니, 정말 환시였다면 데스브링거가 저런 표정일 리 없다. 데스브링거 또한 갑자기 나타난 상어와 소녀를 두고 떨떠름해하는 중이니까.

“왜… 왜.”

그렇자면 저 존재는 필히 진실이리라.

“왜……?”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소녀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설마 그녀를 쫓아서? 저 빈약한 몸으로 어떻게?

“흐으.”

폭발적으로 치솟던 의문은 소녀가 숨 한 번 뱉은 순간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하릴없었다. 소녀의 숨은 결코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피리, 피리꾼아……!”

당혹감에 머릿속이 백지로 변한 그녀가 무심코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면.”

다만 그녀가 관으로부터 세 걸음 이상 거리를 벌렸을 때.

“전 조각을 분리할 겁니다.”

데스브링거가 조용히 읊조렸다. 협박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어조로.

“그 후에 당신이 저를 죽이려 들든 뭘 하든 간에, 전 할 거라고요. 분명 말했습니다.”

저건 진심이다. 베르세르크는 지금 당장이라도 데스브링거의 목을 꺾고 싶단 충동에 휩싸였다.

“…대, 전사.”

하지만, 그러기엔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갸냘프기 짝이 없어서.

“…빌어먹을!”

결국 베르세르크는 선택을 내렸다. 그렇게도 내리기 싫었던, 끔찍할 정도로 하기 싫었던 결정이었다.

“왜, 왜 온 거냐!! 왜 온 거냔 말이야!!”

그녀는 절규 끝에 죽은 언니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소녀에게로 달려갔다.

길고 긴 외면의 종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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