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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71화 (371/389)

371화 걸음을 낱낱이 아는 (5)

콰아아아앙─!

소녀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찰나, 저편의 하늘이 부서졌다. 그 아래로 추락하는 건, 거대한 늑대와 그것을 꿰뚫는 찬란한 홍염이다.

아, 찾았다. 가장 밝은 별.

소녀는 테이저 건의 방향을 바꾸었다. 타앙! 카트리지가 바닥을 향해 쇠침을 토해 냈다. 지지지직! 제대로 충전하지 못해, 위력이 다소 떨어지는 전격이 일었다.

“크으읏!”

또한 그 덕에 소녀는 목숨을 건졌다. 감전. 소녀가 미처 예상치 못한, 근거리에서 테이저 건을 쏠 때의 폐해였다. 위력이 떨어진 게 유일한 천운이었다.

“……!”

다만 목숨을 건진 대가인가. 소녀는 단번에 탈출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째각. 그 무엇도 없는 것 같던 바닥에 금이 가긴 했으나, 딱 그 정도에 그친 것이다.

바닥은 부서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소녀도 시련을 나가지 못하게 됐다. 화상 입은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던 소녀가 이를 악물었다. 처억. 그나마 멀쩡한 소녀의 오른팔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텅!

“부서져!”

텅!

“부서지라고!”

소녀는 깨진 바닥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두드렸다. 그 순간에도 검은 안개는 그녀에게로 다가왔으나 전부 외면했다. 화상에 짓무른 살갗이 충격으로 물크러졌지만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르문 입술에서 핏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아직!”

그리고 기어이 검은 안개가 소녀의 온몸을 삼키려 들었을 때.

“안 끝났어!!”

쨍그랑!

우주가 부서져 내렸다.

소녀의 몸과 함께.

* * *

타앙!

소리라곤 나와 늑대가 내는 것 외에 없는 세계에서 유달리 선명한 발포음이 들려왔다. 그래, 그건 발포음이었다. 화약 냄새가 날 것 같은, ㄱ자 형태의 쇳덩이에서 나올 법한 그런 소리.

캬오오오!

하나 그것의 소리는 곧장 묻혔다. 어쩌면 잊힌 것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작금의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어디서 들려왔는지 모를 발포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거대한 괴수였으니 말이다.

“죽어라.”

으드득!

나는 늑대의 머리통에 꽂힌 칼을 더욱 강하게 박아 넣었다. 그러자 늑대가 속절없이 뒤로 몸을 물렸다.

행성 하나의 질량이라더니, 대체 에루탤크와 주작이 내게 무슨 마법을 건 것인지 모르겠다.

“흐읍!”

그치만 조금만 더, 보통의 생명체라면 뇌가 있을 자리까지. 더.

이걸로는 안전한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아.

나는 그런 각오로 칼날을 끝없이 밀었다. 늑대의 힘이 내게 작용하려는지 몸이 아까보다 둔해졌지만 최대한 모른 체했다. 나와 이 검에 걸린 가호는 단순히 힘만 세지는 게 아니었다.

화르르륵!

딱딱히 굳은 운무 사이로 꽂힌 칼날이 홍염을 마구마구 내뿜었다. 주변을 살라 먹는 것도 모자라 주인조차 태우는 불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호, 더 센 걸로 걸어 달라 할 걸 그랬어!”

나는 까맣게 타들어 가는 양팔을 보며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욕심 내서 가호 좀 강하게 받았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후회막심한 아쉬움이었다.

[온다, 그대.]

「왼쪽에서 와요!」

그래도 일단 1차 목표(밀어내기)는 달성했으니까. 나는 미련 없이 칼을 두고 물러났다. 화염이 맺혀 있는 칼은 그것의 가호가 다하기 전까지 계속 타오를 것이다.

스르륵!

그때 얼마 없는 마력이 소모됨과 동시에, 내 손쪽 허공에서 새하얀 점액질이 창조되었다. 점에서 시작한 그것은 점차 질량을 늘려 길쭉하게 뻗어진다.

[맨손으로 싸울 건 아니지?]

‘너냐…….’

[아까 약속했잖아. 이 몸의 안위가 걸린 상황에선 약간 개입해도 된다고. 이 정도도 안 된다고 할 건 아니지?]

기분은 나빴지만 마냥 거절할 수는 없는 제안이다. 나는 약간의 불쾌감과 떫음을 혀에 머금은 채 형태를 갖춰 가는 그 흰 물체를 잡아챘다.

‘다음부턴 말하고 해.’

[컨트롤 프릭? 별로 좋아하는 군상은 아니지만, 친애하는 그레트헨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그레첸! 안 떠들도록 유의시킬게요!」

어… 조용하게 만드는 건 좋지만, 너랑 쟤가 대화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바에야 그냥 떠들게 냅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견을 조심스레 전달하며 손가락 사이로 쥐인 그것을 움직였다.

[역시, 그대 나와 대화하고 싶었던 거구나?]

‘겠냐? 집중해야 하니까 다물어.’

팅, 티딩!

길쭉한 창대가 날아오던 가시털들─운무의 형태를 잃어서 그런지, 이젠 딱딱한 공격밖에 오지 않았다─을 쳐 냈다.

익숙지 않은 물건이라 다루기 조금 어색했지만, 오랜만에 떠오른 시스템창이 그런 나를 도와주었다. 검을 다룰 땐 거의 볼 일 없는, 추천 경로나 추천 검로를 보여 주는 보정창이었다.

「저, 저도 창은 많이 다뤄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지원하겠습니다.」

‘오, 조력 고마워.’

왼쪽 쳐 내고 오른쪽 쳐 내고, 손으로 휘두를 짬이 안 되니까 발로 차서 봉을 회전시킨 후 쳐 내고. 수직으로 봉이 섰을 때 잡아 세운 후 아래로 내려찍어서 가시털 막고. 그다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밟아 뛰고…….

아, 이거 좀 머리 아프네.

[참고로 나도 도와주고 있어. 그대.]

「넌 다물어!」

더 이상 스킬에 구애받지 않고 적절한 때에 방향이나 빈틈 같은 걸 알려 주는 건 좋다. 때때로 적정 동작을 추천해 주는 것도 내겐 좋은 일이고.

근데 가끔 보면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나 싶다.

나는 창대를 허공으로 던진 후 끄트머리를 발로 차 회전시켰다. 회전판처럼 빠르게 회전한 창대가 가시털 두 개를 튕겨 낸 순간, 내 손이 그것을 다시 잡아챘다.

거기서 봉의 양쪽 끝으로 두 개 견제. 팅팅. 달리면서 몸을 비틀고 건너편의 것을 봉으로 찍어 뜀틀 뛰기 하듯 점프. 타닥. 그다음으로는 봉 끄트머리가 정면을 향하게 둔 채로 마구 내질러 새로운 가시털을 견제. 티딩, 팅팅.

나는 리듬 게임… 그것보다는 댄스 게임을 하듯 자세를 하나하나 소화했다. 낯선 무기라서 조금 애는 먹었으나 소화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 몸이 어느새 늑대의 머리 근처까지 다시 근접했다.

‘확실히, 이런 걸 상대할 땐 봉이 나을지도.’

[괜히 그런 형태로 만들어 준 게 아니라고?]

검이라면 가시털들을 베어 버릴 수 있겠으나, 지금까지 경험해 본바 이것들은 베어 봤자 바로 재생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봉에 맞아 움푹 파인 자국들도 1초 만에 원상 복구 되어 다시 날아오는 게 보였고.

하니 어차피 복구될 상처를 낼 바에야, 밀어내고 쳐 내며 안전을 도모하는 게 훨씬 이득인 것 같긴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상 유지에 불과하단 점에선 무언가의 돌파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흐읍!”

각설하고, 당장의 내가 가진 돌파구는 늑대의 대가리에 박힌 저 검뿐이 없다. 훌쩍 뛰어올라 늑대의 살갗을 밟은 내 다리가 그것의 주둥이를 타고 달렸다.

캬아아아!!

물론 늑대도 보고만 있진 않았다. 그것의 입이 벌어지고 고개가 마구 흔들리며 나를 털어 내려 들었다.

“후.”

그런데 말이야, 이 정도 발악은 지금까지의 싸움에 비하면 애교란 말이지.

도리어 이쯤 되면 편하기까지 하다. 최소한 얘는 밟고 있는 자리가 꺼지거나 흩어지거나 아까처럼 촉수가 새로 돋거나 하진 않지 않은가.

지금까지 쏟아져 온 가시털도 쳐 내면 다시 날아오거나 방향을 무작위로 꺾거나 공중에서 깨진 다음 비산하는 등 결코 만만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 나한텐 이런 쪽이 차라리 낫다. 유연하고 물컹물컹하고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건 질색이다.

티딩! 팅!

각설하고, 드디어 아까 검을 박아 뒀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이 순간에도 뾰족뾰족한 가시털들은 나를 노렸으나 슬슬 손에 익은 창대가 그것을 모조리 튕겨 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내 주위 허공이 빈 그 순간, 나는 못을 향해 망치질을 하는 사람처럼 칼을 향해 봉을 내리쳤다. 까앙! 검이 좀 더 박혀 들어갔다.

캬아아아아악!!!

괴물이 더 강렬한 강도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어라, 괜찮은 건가 이거?”

[아닌 것 같은데.]

* * *

“그, 투사 나리, 오랜만입니다요?”

베, 베르세르크가 여기에 왜 있어?? 아니, 진짜로 왜 여기 있어???

데스브링거는 이곳에서 결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인물의 등장에 혼이 쏙 빠졌다. 그 사람의 몰골이 형편없는 것도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였다.

“언니…….”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을 꼽으라면 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단어가 으뜸 아닐까.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비척비척 다가오는 이가 적이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그 확신이 불분명해졌다.

다가가면 베인다. 땀이 식은 자리에 냉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언니… 드디어 찾았어…….”

그사이 비틀비틀 걸어온 이는 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트러진 천과 꽃 사이에 파묻힌 시신을 보는 눈동자는 참으로 절절하기 그지없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고…….”

베르세르크의 손이 시신의 콧등에 슬그머니 닿았다. 건드리면 깨질 보석을 만지는 사람처럼 참으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아…….”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관에 기대 앉은 베르세르크는 허리와 고개를 숙여 시신과 시선을 맞추었다. 언제라도 죽은 자가 눈을 떠 줄 것처럼, 그런 헛된 희망을 품은 행위였다.

베르세르크의 눈에서 새어 나온 눈물이 망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저 투사 나리…….”

하지만 그 절절한 재회는 데스브링거에게 잘 와닿지 못했다.

아니, 와닿긴 했으나 곤란함도 컸다. 아무렴 지금 그가 짊어진 것은 안타까운 감정 하나로 흐트러트릴 만한 게 못 됐다.

“그…….”

무슨 사람이 천 년 만의 상봉만치 애틋해하냐. 물론 에밋의 무덤 앞에 그를 내던져 둔다면 저만치 슬퍼할 자신이 있기에 꼭 이해 못 할 심정은 아니지만…….

데스브링거는 손에 들린 부정검을 일별했다. 이걸로 척추를 도려내야 한다고 말하면… 역시 화내겠지? 절대로 화내겠지?

“투사 나리.”

그렇지만 화내도 어쩔 수 없다.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모두를 위해서. 그에게 부탁한다 말하기까지 한 모험가를 위해서.

“투사 나리!”

“……?”

데스브링거의 용기 낸 외침이 드디어 베르세르크에게 닿았다. 지끔껏 언니의 시신에 정신이 팔려 그의 존재조차 자각 못 하고 있었던지, 베르세르크의 눈에 잠시 놀람이 담겼다.

“…어린 사냥꾼아.”

“…오랜만입니다요.”

“……그래. 오랜만이다.”

하나 그 놀람도 곧 지워졌다. 서글픔이 잔뜩 묻어나는 손이 시신의 뺨을 쓸었다. 툭. 시신의 이마에 맞닿는 그녀의 이마는 지금쯤 얼음장과도 같아졌을 것이다.

“투사 나리…….”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지?”

“…저는 용의 심장 조각을 찾아야 합니다요.”

“…….”

“그런데, 그 조각이…….”

그 시신의 척추뼈에 있어요. 데스브링거는 바싹바싹 마른 목소리로 말을 잇다가, 그대로 눈동자를 키웠다. “어?” 시신과 이마를 맞대던 이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부정해라.”

아니다. 그녀는 그의 앞에 있었다.

“커헉!”

“말을 잘못했다고, 실수로 잘못 말했다고.”

붙잡힌 목이 억센 아귀힘에 옥죄어졌다.

“당장!”

미친, 미친, 미친! 데스브링거는 엄습하는 공포와 본능적인 반사작용으로서 제 목을 그러쥔 손목을 잡았다.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똑같이 손을 뻗어 눈을 찌르거나 코를 잡아 뜯는 것이겠지만 차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품에 숨겨 둔 단검을 꺼내 배를 찌르는 것도, 목을 찌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그를 알게 모르게 챙겨 주던, 한때의 위안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커, 커억.”

그렇다고 그녀의 바람따라 부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건 기만이었다. 그가 잘하고, 잘하게 된 것이지만 이 사람들에게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기만 말이다.

“으아아아!!”

결국 다음 행동을 먼저 선택한 것은 베르세르크였다. 부웅! 강력한 악력이 조그만 나무 토막을 던지는 것처럼 데스브링거의 육신을 뒤로 날려 버렸다.

“저건 내 언니다, 내 가족이란 말이다!!”

쿵!

몇 초간 공중을 부유한 청년의 몸이 곧 용의 머리와 부딪쳤다. 비늘이나 뿔 없이 매끈매끈한 것이라 살았지, 아니었다면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절대 건드릴 수 없다.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다!!”

그러나 그것이 신경 쓰이느냐면 글쎄. 둔탁한 통증도 사실 견딜 만했다.

“설사 어린 사냥꾼, 너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포호해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에 비하면야, 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아들었나!!”

데스브링거의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하지만요, 나리.”

함에도, 함에도 하릴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 스스로조차 하고 싶지 않음에도, 그걸 막기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있더래도, 전체를 위해선 감수해야만 하는 불행이 세상엔 있었다.

“그 조각이 없으면……! 다들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요!!”

그러니까 이조차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뿐인 일인 겁니다. 데스브링거의 손이 부정검을 단단히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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