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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69화 (369/389)

369화 걸음을 낱낱이 아는 (3)

소녀는 지평선이 없는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저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간 고개는 세상 저편에 있는 거대한 원형 구체를 눈에 담고 만다.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을 듯한 기묘함. 소녀는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히는 느낌에 폐를 헐떡거렸다. 세상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넓었나?

“아…….”

스스로 빛나는 안개. 반짝임으로 이뤄진 소용돌이. 때때로 추락하는 꼬리별. 베일처럼 나울거리며 오색으로 빛나는 기묘한 흐름.

실로 아득한, 너무나도 아련한 것들의 총체.

소녀는 그 경이 속에서 본인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많은 대전사가 이 공허함을 버티지 못해 미친다. 먼젓번 대전사가 했던 말이 드디어 마음에 와닿았다. 그 말은 진정 거짓이 한 점 없었다.

“대전사.”

당신과 함께했을 때는 당신이 너무 빛나서 몰랐어요. 이곳의 별들은 하나하나가 너무 찬란해서, 저 하늘에 찍힌 점이 너무 무거워서 꼭 저 자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아요.

이곳에서 저라는 존재는 과연 의미가 있나요?

“저는, 저는…….”

감당할 수 없는 몰이해의 공포에 소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건 안 돼, 안 될 거야. 엄습하는 생각들은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하얘지기만 한 이성의 파편뿐이다.

찌익, 찌이이익.

그러다 잠깐. 무서울만치 조용한 곳에서 처음으로 그녀 외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이목을 사로잡는 소리였다.

“…벌레.”

저게 분명… 빙하의 시련을 만드는 거머리였던가?

대전사가 잡아 죽이는 걸 본 적 있다. 검은 애벌레의 외관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벽을 갉작이는 저것이야말로 이 시련의 원흉이다.

“흐…….”

대전사 말로는 빙하의 시련마다 벌레의 위치가 제각각이랬는데. 들어오자마 발견해 낸 것은 과연 행운일까 불행일까?

소녀는 검은 거머리를 보며 반사적으로 품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저것을 죽이면 이곳을 나갈 수 있어. 소녀의 생존 본능은 당장이라도 거머리를 죽일 것을 요구하는 중이다.

“…….”

하지만, 이렇게 나가서 계획은 어떻게 실행하려고?

테이저 건을 든 소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충돌하는 것은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다’라는 간절함과 ‘대전사를 따라가려면 지금 나가선 안 된다’라는 절박함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손의 떨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리고 끝내, 소녀는 겨누었던 테이저 건을 아래로 내렸다.

어차피 돌아가도 날 기다리는 건 없어. 그럴 바에야 끝을 보는 게 나아. 마음속을 맴도는 몇 개의 문장은 흔들리던 심정을 올곧게 세우고 만다.

소녀의 눈이 결연함의 색채로 바로 섰다.

“간다!”

죽이지 않을 거라면 거머리의 존재는 의미 없다. 소녀는 단번에 거머리를 등지고 섰다.

“밝은 별… 가장 밝은 별…….”

동시에 그 눈은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고자 움직이니. 소녀의 눈동자가 허락된 반경 안을 종횡무진 움직였다. 어찌나 세세하고 빠르게 주변을 훑는지 눈 근육이 삽시간에 뻐근해졌다.

“안 보여…….”

그렇지만, 수천 수만 개의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이곳에서 으뜸가는 것을 어찌 고를 수 있을까? 애초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의 정의는 그저 그 빛의 세기만을 지칭하는 게 맞는가?

스멀스멀.

소녀가 고민하는 사이, 별의 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모이기 시작했다. 대전사, 베르세르크가 손수 가르쳐 주길, 물리력이란 조금도 먹히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칫……!”

저번에 본바, 저것들의 속력은 높지 않다. 그러나 저것에게 둘러싸였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되리라.

소녀는 그를 고려하여 우선 뛰기로 했다. 이때 소녀가 기준점을 잡기로 한 것은 저편에서 가장 크게 반짝이는 빛의 회오리다.

“저리 꺼져! 난 대전사님을 뵈러 갈 거야!”

결승선이 없는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 * *

명치께에서 일렁이는 청동빛에, 데스브링거는 무심코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청동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안쪽으로 곱아들었다.

“설마…….”

그가 추위에 미쳐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머리가 명정함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저것은 결코 그의 착각이 아니다.

하면, 저것의 정체는?

“빌어먹을… 제발 정답이어 달라고. 내가 착한 놈은 아니라지만 의미 없이 시체 훼손하는 미친놈도 되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는 부정검을 잠깐 내려 두었다. 거짓처럼 명치께의 빛이 사라졌다. 다시 쥐었을 때도 비슷했다. 사그라들었던 것은 언제 자취를 감췄냐는 듯 다시 생겨났다.

데스브링거의 등골이 찌릿찌릿해졌다.

“하, 하하… 이 검은 진짜…….”

사막에서 남들을 보지 못한 걸 보여 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 그냥 우연이었겠거니 여겼는데…….

왜 이 기능이 또 발현됐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기회라는 것은 분명했다. 데스브링거의 손이 부정검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죄송합니다요.”

시체를 가르는 것 자체는 큰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생전 초면의 망자조차 도리를 따라 챙기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일까. 데스브링거는 무의식적으로 사과를 읊조리며 시신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푸욱! 빛나는 명치께를 정확히 개복한 칼날이 빛의 근원지를 향해 좀더 안쪽으로 향했다.

“후…….”

위… 는 아니고, 간… 도 아니다. 폐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었다.

그는 아른거리는 청동빛을 쫓아 배 안쪽을 손으로 샅샅이 훑었다. 필요에 의해 뽑아낸 내장들은 버석거리며 주변을 구르고 있다. 단단히 얼어서 피조차 흘릴 수 없는 그런 회전이었다.

“아!”

그렇게 근육마저 절개해 뼈에 닿았을 때, 그는 원하는 것을 찾았다. 우습게도 청동빛은 척추뼈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흉추 전반에 걸쳐서.

“어우.”

우드득!

그는 억지로 뼈를 분리한 후, 그곳에 박힌 청동빛 보석을 떼어 냈다. 몸이 너무 꽝꽝 얼어 있고, 너무 일체된 것처럼 박혀 있어서 힘이 꽤나 들었지만 그래도 못 할 짓은 아니었다.

주변 기온에 맞지 않게 땀방울을 흘린 이가 분리해 낸 보석들을 손에 쥐었다.

“하.”

이게 정말 심장 조각일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는 반신반의하며 얻어 낸 보석들을 들고 용에게로 다가갔다. 도르르륵. 살점의 구멍 안쪽으로 굴러간 조각들이 복구된 심장에 기어이 닿았다.

반짝!

“……!”

됐다! 데스브링거는 아주 미세하게 늘어난 심장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정답이었다.

“시체를 헤집은 보람이 있구만…….”

문제는 헤집을 시체가 하나밖에 더 없다는 거지만.

데스브링거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시신을 돌아보았다. 저것에게서 조각을 얻어 낸다고 해서 용이 깨어날까? 솔직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인간마다 비슷한 양의 용심을 품고 있다 쳤을 때, 하나를 더 깐다고 해서 심장이 다 복구되진 않을 것이므로.

“…….”

하지만 선택지가 없다. 그는 천천히 관으로 다가갔다.

척.

“……?”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새로운 발이 뻗어졌다.

“다, 당신은…….”

“찾았다.”

찢어진 가죽신과 재 가루가 묻어나는 도끼, 흐트러진 백금발, 얼어붙은 팔과 다리.

“언니.”

베르세르크였다.

* * *

소녀는 어둑어둑하지만 별들로 인해 앞을 헤아릴 수 있는 세계를 있는 힘껏 달렸다.

하나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아련할 정도로 멀어, 아무리 걸음걸음을 뻗어도 달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다. 그녀와 검은 안개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변화 없이 처음의 위치를 고수하기만 했다.

“…허억!”

변하지 않는 것들로 인한 위화감. 그것은 차오르는 숨과 더불어 소녀의 정신을 압박했다.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고 멀미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토할 것 같다. 소녀는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구토물 특유의 쉰 냄새가 목젖 아래서 올라왔다.

흐우우우─

그러나 여기서 멈췄다간 진심으로 목숨이 끝장나게 된다.

조금 비틀거리는 듯하던 소녀의 걸음이 다시 반듯해졌다. 속도는 처음보다 느려졌지만 여전히 안개를 따돌릴 수준은 된다. 악에 받친 다리가 바닥 없는 세계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달렸다.

흐으웅.

“……!”

그러다 잠깐. 소녀가 앞만 보던 사이, 바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소녀의 발을 걸었다. 달리는 것으로 균형을 맞춰 오던 몸이 바닥을 구르는 건 삽시간의 일이었다.

소리 없이 구른 몸이 낙법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나동그라짐으로써 강제로 정지했다.

“으…….”

발이 삔 것 같아. 소녀는 엎어진 몸에서 가까스로 허리를 띄우고 무릎을 세웠다. 욱신. 발목에서 아찔한 통증이 이어졌다.

흐우우우우─

“……!”

아, 이럴 때가 아니야! 소녀는 아픈 손목에서 손을 떼고 근처로 굴러간 테이저 건을 잡았다. 찰칵. 날아간 충격으로 분리된 카트리지가 소녀의 다급한 손길하에 다시 장착됐다. 처음이니만큼 몇 번의 헛손질은 감수해야 했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철컥.

최소한, 검은 안개가 소녀에게 닿기 전까진 완성됐으므로.

“젠장, 죽어!”

탕!

방아쇠가 당겨지고 안개 괴물을 향해 쇠침이 날아갔다.

슈욱!

“……!”

다만 소녀가 고려하지 못한 건, 테이저 건이 마법을 재현하는 방식이었다. 테이저 건은 분명 전격 마법을 쏘아 내는 무기였지만 그것도 쇠침이 박힐 때만 작동했다.

팅, 티딩.

안개를 관통한 쇠침이 안개가 지나가는 자리로 추락했다.

“아…….”

그럼 이걸 들고 온 것도 의미가 없었나? 그 이전에 나는 이제 죽나? 찰나간 소녀의 머릿속이 다양한 가능성들로 꽉 들이찼다. 몇 개는 그녀의 골 밖으로 넘쳐 나와 탄식으로 치환될 정도였다.

“…싫어!”

그렇지만 탄식의 끝은 다시 저항이었다. “나는 여기서 안 죽어!” 독기 가득한 목소리가 땅을 박찼다. 발목이 지끈거렸으나 소녀의 근성은 그보다 더 컸다.

지이익. 소녀가 들고 있는 테이저 건이 실로 연결된 쇠침을 끌고 왔다.

팅!

그리고 그 두 개의 쇠침이 서로 부딪친 순간, 그것은 내장된 전격을 일으켰다. 고안자인 마이스터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지지지직!

아무튼, 쇠침은 배터리 속 마력을 전부 소모하여 전격을 일으켰고,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웠다. 하필이면 그 근처에 있던 안개도 포함한 이야기였다.

포악하기 짝이 없는 굉음에 소녀의 고개가 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

주, 죽어 버렸다. 소녀는 전격에 튀겨지다 못해 재 가루로 변한 안개를 보며 입을 살금 벌렸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네. 가장 가까웠던 놈이 사라진 이상 당장의 위협은 사라진 셈이니까.

소녀는 그렇게 당혹감을 덮어 두며 욱신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달리는 건 허락해 줘도, 완전히 그녀의 말을 듣지는 않아 줄 것인지 다친 다리가 절뚝거림을 만들어 냈다.

흐우우우우.

“후우…….”

이제 남은 카트리지는 두 개인가. 소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두고 상념에 잠겼다.

그 이전에, 그때도 과연 이와 같은 우연이 발생해 줄까? 그리고 그녀의 발목은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몇 개의 질문은 앞으로의 일을 점치는 암울함뿐이 없다.

소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암울해도 상관없어. 이미 눈은 오기 시작했으니까.

소녀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다음 행동을 정했다. 철컥. 그 첫 번째는 사용한 카트리지의 교체였다.

해당 카트리지는 재사용이 불가능하니까 쓰면 반드시 분리해서 버리랬지. 소녀는 두 개의 실이 연결된 카트리지를 뽑아 버리며─이조차도 버릴 때 투척 무기로 써먹었다─새 카트리지를 장착했다.

차칵차칵차칵.

또한 그녀는 새 카트리지를 채운 상태에서 테이저 건을 마구 흔들었다. 이 역시 마이스터가 알려 준 사용법이었다.

한 번 전격을 쓸 때마다 내장된 배터리가 동이 날 테니, 쓰고 난 후에는 반드시 흔들어서 충전을 해 줘야 한댔던가.

많이 흔들수록, 오래 흔들수록 전격의 세기가 강해질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다고 1시간 내내 흔들었다간 무기가 터질 수 있으니 뭐든지 적당히 하라 덧붙이긴 했지만.

흐우우우!

“저리 꺼져!”

그럼 한 30분 정도 흔드는 건 괜찮을까? 실제 시간을 잴 방도 따위, 나에게 없긴 하지만.

소녀는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내며 앞에서 다가오는 안개를 피했다. 절뚝거리느라 늦어진 다리는 이제 안개와 엇비슷하거나 그 아래를 맴돌고 있지만 그래도였다. 소녀는 마지막까지 발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가며 콩콩 뛰었다.

“쳇!”

그리고 한참을 달려 다시 한계에 내몰렸을 때, 소녀는 두 번째 우연을 바라며 테이저 건을 쏘았다. 운이 좋았던가. 달리면서 쏜 덕에 쇠침이 공중에서 흐트러지고, 바로 맞부딪쳤다.

지지지지직!!!

아까보다 반 배 정도 강한 전격이 일며 일대를 휩쓸었다.

“아윽!”

하나 그 대가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위력이 강해진 만큼 반동도 거세졌고, 테이저 건 자체에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교한 물건에 문외한인 소녀가 보아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신호였다.

“아직, 아직이야!”

그래도 이것밖에 없어. 소녀는 데는 것을 감수해 가며 테이저 건의 카트리지를 교체하고 그것을 품에 품었다.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던 털 망토는 어느새 무게를 덜겠다는 명목하에 바닥으로 던져 버린 지 오래다.

건네받을 때의 호의가 참으로 아쉬웠으나, 건네준 이 또한 소녀의 생존을 더 바랄 것이라 믿으며 망설임 없이 한 선택이었다.

“아!”

그러나 소녀의 발악도 끝내 한계에 달했다. 발을 잘못 내디뎠는지 아팠던 쪽 발목이 꺾이며 소녀의 몸을 기울였다. 우당탕! 바닥을 거하게 구른 건 덤이었다.

흐우우우웅─!

거기에 지금껏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던 안개까지. 소녀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끝일까? 정말로… 그녀의 도박은 성공할 수 없는 거였던 걸까?

“…대전사.”

원망은 없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덤벼든 건 소녀니까.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 잆어요.”

그렇지만 미련만은 참으로 절절히 남아서.

소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괴물들에게로 테이저 건을 겨누었다.

타앙!

카트리지가 쇠침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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