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걸음을 낱낱이 아는 (1)
[뭐 하니? 완성하지 않고.]
마법사는 가면이 깨지건 말건 메피스토펠레스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메피스토도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아니면, 악마를 처음 보기라도 하니?]
“…어떻게.”
[다만 어리석은 것아,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란다.]
도리어 그녀는 친절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제야 바닥에 웅크리다시피 한 마법사와 시선이 얼추 맞았다. 스윽. 뻗어진 가죽 장갑의 손이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두고 마법사의 턱 아래서 멈췄다.
[용사가 무너지면, 너는 죽어.]
“……!!”
또한 깨진 가면으로 인해 드러난 하관이 고운 입술을 짓물었다. 분노, 짜증, 패배감, 모멸감. 단편적인 감정들이 하얗게 질린 입술 위를 스쳤다가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너는, 할 줄 모르나?”
[안타깝게도, 나는 마법의 조예가 얕아서.]
“대악마란 이름이 아깝군.”
[도발을 노렸다면, 형편없어.]
흥. 콧김을 내뱉은 이가 칼을 들었다. 콱. 땅바닥에 박힌 검이 뜻하는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 마법진의 음각이 재개되었다.
[살다 살다 타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지키게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 모르는 거야.]
그것을 일별하던 메피스토는 손에 들린 사슬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차르륵. 반경 수십 미터를 조각낼 정도로 길었던 사슬은 어느새 30cm 남짓한 길이로 줄어든 채다.
스멀스멀. 복원을 마친 티끌들이 다시 움직일 기색을 보였다.
“이것 좀 놓……!”
[그리고 너, 아까부터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데… 그만 좀 하지 그래? 나라고 원해서 널 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그것들을 일일이 관측하며 오른쪽 장갑을 벗었다. 숯처럼 새까만 손가락이 공기와 맞닿고, 그대로 왼손의 사슬을 옮겨 받았다. 사슬의 한쪽 끝, 손가락에 걸기 좋은 고리가 용도에 알맞게 검지로 쏙 들어갔다.
피이잉. 짧아진 체인이 훨씬 살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끝에 달린 손가락 크기의 칼날은 가는 사슬과 대비되어 훨씬 짙은 궤적을 허공에 남기고 만다.
“악마 주제에……!”
[나야 네가 죽든 살든 알 바 아니지만, 친애하는 그레첸이 네 생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걸 어쩌겠니. 난 그에게 더는 미움받고 싶지 않단다.]
그리고 한 순간 정면을 향해 체인이 쏘아졌다. 촤르륵. 뻗어져 나감과 동시에 수십 미터로 증가한 길이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다.
순식간에 서너 번 원을 그린 손목이 쇠사슬을 손바닥 전체로 휘감고, 그 상태에서 강하게 힘을 주어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허공에 두 번째 지평선이 새겨졌다.
[좁디좁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이젠 질렸는걸.]
「갈비뼈 뜯어 버리기 전에 헛소리는 관둬.」
[까칠한 꼬맹이는 내가 혼잣말만 해도 뭐라 하고 말이지.]
「가증스러운 새끼가……!」
그녀는 거기서 체인을 거두지 않았다.
친애하는 그레트헨이 마법진을 유지하고 추가해 나갈 걸 고려하면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양은 실로 제한적이니. 라텔을 한번 변화시켰다면 그에 투입된 마기만큼의 뽕은 뽑아야만 했다.
[발버둥 치다 팔다리가 잘려도 나는 몰라?]
“……!”
메피스토는 이단심문관 일을 하는 하릅강아지에게 가벼운 경고를 내주곤 사슬을 움직였다. 긴 곡선보다는 짧은 직선의 나열에 가까운 체인이 부자연스럽게 튀어 올랐다.
싸돌아다니다 죽지 말란 의미로 털 망토를 이용해 속박해 둔 하릅강아지의 바로 왼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릅강아지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난 채로 치솟은 사슬이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다시 나아갔다.
[마법사, 허리 숙여.]
“호위의 의미가 없군.”
[악마한테 뭘 바라는 거니?]
그렇지만 절대로 땅을 후려치진 않는다. 미묘한 각도 조절로 나아가던 쇠사슬의 방향을 수평에 가깝게 누인 메피스토는 이번엔 왼편의 세상을 갈랐다.
[그레첸만 아니었어도 너흰 이미 죽었을 텐데.]
그녀는 왼손을 뻗어 허공의 사슬을 살짝 옭아맸다. 촤악. 동시에 오른손은 체인을 회수할 것처럼 강하게 당겼다. 왼손을 거친 사슬이 뽑혀 나온 실처럼 그녀의 주위에 마구 떠돌았다.
[그보다 아직 멀었니?]
메피스토는 오른손으로 체인의 길이를 조절하고 왼손으로 방향과 휘둘러지는 세기를 다시 결정했다. 촤악. 앞으로 나아간 칼날이 막 다가오던 촉수를 분쇄했다.
괴수의 진체를 막아 내던 힘이 약해짐에 따라 기어이 튀어 나고 만 것이었다.
[슬슬 진체가 움직이는데.]
용사도 끝물인가 보네. 메피스토펠레스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감정이 새어 나왔다기보다는 버릇처럼 쓰인 가면에 더 가까울 미소였다.
“대리자시여……!”
[하, 하나 정도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그렇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주변을 힐끗 돌아보았다. 가능성이 보여서 분업을 제시하긴 했지만,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정밀하게 제어된 마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경이로운 재능이었다.
공간 감각도 라텔이나 인벤토리를 기상천외하게 써먹는 엉뚱함도 분명 탁월한 축에 속하겠지만, 그 모든 걸 합쳐도 이것만은 못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럼 살기 참 편해질 텐데.]
‘거래 조건 까먹었으면 빨리 말해라.’
[그럴 리가 있나.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대.]
하지만 그런 그레첸에게도 부족한 건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대에게 더 이상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
예컨대… 수백, 수천 번에 거쳐 갈고닦아진 경험이라거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 같은 것.
단순히 상황을 벗어나거나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상대만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그 악독함이 그에겐 없단 말이다.
[별개로, 적디적은 마기를 가지고 강대한 적을 상대해야 한다라.]
그래서 그는 약하다. 집요한 적의와 살인 욕구에서 떠오르는 발상은 세상 그 무엇보다 효과적이고 악랄한데, 그는 그를 위한 전제 조건을 성립시키지 못하니 약하다.
[불쾌하네.]
그래서 짜증 난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힘을 멋대로 쓸 수 없었다면, 저것은 결국 아무것도 못 지키게 됐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버리게 됐을 텐데.
그녀처럼 진창에 처박혀 버렸을 텐데.
쓸데없이 운이 좋아서.
[영광인 줄 알렴, 꼬마 아가씨.]
메피스토는 발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지익. 눈이 밀려남과 동시에 그녀를 품은 몸뚱이가 힘차게 도약했다. 사슬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그녀를 따라오게 되는 도약이었다.
“커헉!”
털 망토에 휘감긴 누군가가 복부 압박 및 어지러움으로 토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사슬을 몇 번이고 되감아 체인의 전체 길이를 조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왼손의 체인이 1m 남짓까지 줄어들었을 때, 그녀의 왼손이 체인을 뱅글뱅글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이신의 사제 주제에, 내게 보호받게 됐잖니.]
그녀의 발이 인퀴지터 근처 대지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그녀의 팔은 회전시키고 있던 체인을 앞으로 던졌다. 일부러 왼손과 오른손 사이, 등 뒤로 늘어지게 해 두었던 여분의 체인이 같이 딸려 갔다.
촤자자작!
수십 개의 촉수를 관통한 칼날이 그것들을 그대로 끌고 왔다. 어느새 사슬 끝의 단검은 고리 형태로 변한 채다. 바늘에 꿰인 생선처럼 낚여 온 촉수들이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촤르륵!
그 순간, 메피스토는 오른 손바닥에 겹겹이 둘러 둔 사슬을 풀어냈다. 체인을 당기는 힘을 유지하는 왼손과 오른손의 사이로 뱀처럼 똬리를 튼 긴 사슬이 새롭게 생겨났다.
[꼬마, 방패 들어.]
그녀는 그렇게 생긴 체인을 그물망을 펼치는 어부처럼 공중에 마구잡이로 띄워 올렸다. 그녀의 발은 그와 동시에 땅을 박차며 촉수의 예상타격 지점을 피하는 중이다.
촤르르. 허공에 떠올랐던 사슬들이 꼭 예측이라도 했던 것처럼 촉수 다발을 정확히 휘감았다. 분열되어 새로 탄생하는 촉수는 아직 느려서 공중에 뜬 그녀를 잡지 못한다.
콱! 체인을 쥔 양손에 힘을 줌으로써 다발을 묶어 낸 그녀는 그대로 그 뭉텅이를 찢어 내듯 잘라 냈다. 지익. 발레 선수처럼 가벼운 발은 바닥에 사뿐히 닿고, 분열되어 채 묶이지 않은 촉수들이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피이잉!
그러나 그녀가 유연히 몸을 뒤틀고 왼손이 당겨 잡은 체인을 팽이처럼 회전시킨 순간, 그것들은 갈가리 분쇄되었다. 메피스토가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른 곳으로 점프해 버렸기에 무용함은 더욱 짙어진다.
그녀는 명령에 따라 착실히 들어 올려진 방패 뒤로 들어갔다.
[착하지.]
“…….”
물론 명령을 따랐다 해서 인퀴지터의 표정이 좋지만은 못했다. 괴물의 진체를 막아 내느라 온 힘을 다했기도 했지만 모험가의 머리색이 그녀에게 현 상황을 알려 주기도 했던 까닭이다.
쾅!
하지만 용사의 표정 따위 알게 뭐람.
메피스토는 그녀를 쫓아 날아온 촉수를 방패로 막아서고, 촉수가 방패의 가장자리를 타고 들어오기 전에 방패를 발로 찼다. 방패가 촉수들과 함께 그대로 주욱 밀려났다.
촤르륵!
동시에 그녀의 체인은 멀리, 멀리까지 날아갔다. 목표는 마법사를 노리는 우주의 티끌들. 유려한 솜씨에 안개 수십 개가 꿰뚫리고 찢어지며 움직임을 정지했다.
[이참에 조금 더 힘을 내보는 건 어떠니? 이러다 꿰뚫리겠어.]
그러나 방패로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하여 이곳의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방패를 지나친 촉수는 뭐 했다고 벌써 코앞이었고, 메피스토에겐 대항할 만한 게 없었다.
“신, 이시여!”
결국 인퀴지터가 피를 토해 가며 신성력을 더 끌어올렸다. 그걸 보고 머릿속의 꼬맹이가 왱알거렸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놀랍게도 이건 메피스토의 최선이었다.
[장해라.]
어차피 회복도 가능하겠다, 그냥 어깨나 다리를 내준 채 다음 동작으로 이어 가려 했는데… 용사 덕에 피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신성력 여과기 덕에 몸에 닿지 못하는 신성력을 두고 가늘게 웃었다.
“네놈의 칭찬 따윈…….”
[필요 없겠지. 그래. 아니까 한 거란다.]
아무튼, 이 자리를 계속 고수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용사가 한계에 달한 이상 어차피 진체는 못 막게 될 테니까.
하면 차라리 마법사와 합류하여 호위의 범위를 줄이는 게 정답이리라. 그녀는 망토 자락을 하나 더 늘여 인퀴지터를 휘감았다.
“엇?!”
[얌전히 있어. 그래야 그레첸이 널 칭찬해 주지 않겠니?]
다른 한쪽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뭐, 많이 거칠게 움직이긴 했지.
메피스토펠레스는 죄책감 하나 없이 웃으며 재차 도약했다. “푸흡!” 인퀴지터가 기침을 하는 동시에 괴수 쪽에서 유리창 금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신성력에 억눌려 있던 괴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무서워라.]
우주의 늑대는 지옥에서도 상대하기 싫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그녀는 불쾌감과 짜증을 웃음으로 갈무리하며 체인을 휘둘렀다. 뱀보다는 전갈의 꼬리에 가까운 휘어짐이 마법사를 또 한 번 지켜 냈다.
[속도를 더 올리는 게 좋을 거야.]
방해가 사라짐에 따라 진행에 탄력이 붙은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론 부족해. 메피스토펠레스는 살갗을 핥는 늑대의 시선에 체인을 팽팽히 당겨 쥐었다.
[태양을 먹는 늑대가 지금 단단히 화난 모양이거든.]
캬아아아아!
늑대가 하울링한 순간, 그 털 자락이 풍성하게 일며 그 일부를 떨어트렸다. 팔랑거리는 대신 철퍽철퍽하며 떨어지는 털은 자세히 보면 거머리와 닮은 형태를 갖고 있다.
수백, 수천만의 거머리였다.
캬아악!
그리고 그 모든 거머리가 일제히 한곳에 모여들었을 때, 그것은 어떠한 짐승의 형태를 갖춘 채로 눈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닿는 모든 것을 갉아먹고 부식시키는 늑대였다.
[가서 마법진 완성이나 도우렴.]
메피스토펠레스의 망토 자락이 두 사람을 마법사 쪽으로 내던지고, 라텔의 형태를 바꾸었다.
콰앙!
부채를 닮은 거대한 방패와 거머리 늑대가 맞부딪쳤다.
* * *
데스브링거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거대한 용에게로 다가갔다. 죽은 용은 그의 접근에도 일말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채다.
“이걸…….”
이걸 어떻게 살리지?
그쯤 되어 데스브링거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심장 반환은 대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주작에게 듣고 온다는 걸 미처 잊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냥 꺼내만 주면 되나……?”
꺼내기만 하면 알아서 반환되는 구조인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마법적이든 무언가의 조치가 필요한 거라면 난 전-혀 할 줄 모르니까!
“제발 그냥 돼라.”
그는 검을 손에 묶어 두기 위해 둘렀던 천을 어렵사리 풀었다. 그러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심장보다 더 소중하게 가져온 팔찌를 조심스레 꺼냈다.
팔각 체인으로 구성된 팔찌는 마치 금속으로 이뤄진 실뱀을 보는 듯하다. 데스브링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운동했다.
“내가 꺼내고 싶은 건…….”
그의 말이 전부 이어지기도 전에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마력이 소모되었다.
번쩍
“왓씨.”
물론 재능 문제로 그는 소모되는 마력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으나, 대신 다른 것은 보았다. 그의 옆쪽 공터에 무언가가 반짝 생겨났다.
깜짝아! 적인가 싶었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가,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살짝 풀렸다.
나타난 건 관과 수습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한 구의 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