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7)
소녀는 묵직하기 짝이 없는 테이저 건을 품에 든 채 눈 위를 사박사박 뛰었다. 고개를 하나 넘었을 뿐인데 기위 목이 말라 왔다.
“후우.”
하지만, 안 돼.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엔 어쩌려고.
소녀는 슬슬 차오르는 숨을 고치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소녀의 살갗에서는 안쪽부터 솟는 열기와 맹렬한 찬 공기가 대립하며 피로를 마구 생성 중이다.
“할 수 있을까…….”
이쯤 되니 소녀도 슬슬 제 선택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고안했지만, 소녀 자신조차 가능성을 썩 높게 점치지 않는 작전인지라 더 그랬다.
아무렴, 소녀의 계획은 행운이 없으면 첫 단추와 마지막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 반쪽짜리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하늘에 맡긴 셈이니 자연스럽게 앞날을 떠올릴 때마다 아득한 기분밖에 못 느끼는 것이다.
“아냐, 할 수 있어.”
다만 그 불확실함에 주눅 들라치거든, 품 속의 묵직함이 소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건 계획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 사람의 무게다.
『참나…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릴 따라오는 건 어때? 아, 싫다고? 알았다…….』
그뿐만 아니다. 소녀의 허리춤과 어깨에도 무언가가 걸려 있긴 매한가지였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물이랑 식량도 좀 챙겨가. 우린 걱정할 필요 없어. 풍족하기 짝이 없다는 남쪽으로 곧 내려갈 거니까.』
『털 망토 필요 없나?』
그건 그녀의 가족과 이웃들에겐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선의. 정말 무겁지만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하기도 한 호의였다.
“할 수, 있어.”
소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무게들을 온전히 느껴 보았다.
부족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좀 덜 불행했을까? 혹은, 대전사를 만나기 전에 그들을 먼저 마주했다면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
만약이란 단어를 붙인 채로 소녀가 그릴 수 있는 달콤한 미래 몇 가지가 날개를 펼쳐 보았다. 당장 그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소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상상들이었다.
“하아.”
그리고 그 끝에서, 모든 상상의 끄트머리는 한곳으로 돌아왔다.
대전사, 저는 당신 같은 가족이 가지고 싶어요. 저를 위해 목숨도 걸어 줄 그런 사람이 가지고 싶어요.
째각.
“아…….”
그러니까, 그런 미래가 너무 탐이 나니까.
제가 먼저 걸어 볼게요. 그게 거래의 기본인 거잖아요?
* * *
스르르륵.
순간 제 등 뒤에서 몰아치는 마기의 향연에 다니엘은 몸을 바짝 굳히고 말았다. 그럴 상황이 아님은 아나 본능 단위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흐으으. 멈춰 선 그를 향해 검은 안개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뭐 하니, 애송아.]
그러나 그것들이 그를 잠식하기 전, 실과 같은 것이 공기를 먼저 조각냈다.
검은 안개 사이로 남겨진 잔상은 마치 천체의 흐름처럼 보였다. 서로 어긋나고 비틀린 궤적을 그리나 그 모두가 공통된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어서 내려 주지 않고.]
그리고 그 기준점은 그가 업고 있는 누군가였다.
툭툭. 실제론 닿지 않았으나, 꼭 닿은 것처럼 느껴지는 손등이 그의 뺨 근처를 두어 번 왕복하고 갔다. 명백한 재촉이었다.
탁!
[오… 그렇다고 이렇게 거칠게 내려 줄 건 없었는데. 매너 없기는.]
하여 다니엘은 지체 없이 그것을 떨쳐 냈다. 꼭 마기를 향한 불쾌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 당신 설마……!”
그는 불쾌감보다, 모험가를 향한 걱정을 우선시한 채 몸을 틀었다. 그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이를 직시하고 보다 면밀한 파악을 위함이다.
[참 이상도 하지.]
“……!”
한데 그 순간, 은빛 궤적이 다니엘의 시야에 또 한 번 새겨졌다. 촤르륵! 검은 종이에 그려 낸 하얀 선처럼 참으로 선명한 잔상이었다.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그 사람이 아닐 텐데?]
또한 그 모든 금의 건너편에서 파리한 피부의 사내가 빙긋 웃었다. 본래라면 두 가지 빛깔을 띠었어야 할 머리 색은 이제 검정색뿐이 없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매가 샐쭉 휘어졌다.
“…모험가 경을, 어떻게 한 거냐.”
[오, 지금 내게 질문한 거야?]
의뭉스럽게 웃던 이는 들고 있던 사슬을 다시 휘둘렀다. 실로 착각할 만큼 가늘고, 그 끝에 예리한 칼날이 달린 사슬이었다.
촤악! 촥! 검은 안개들이 공격할 틈도 없이 그대로 쪼개지고 갈라졌다.
“너……!”
[장난이야, 그대. 화내지 마. 그리고 너. 네 질문에 답하자면… 그래. 불행스럽게도 그는 아주 멀쩡해. 그러니─]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발하다고 해야 할까. 최소한의 마력 낭비로 주위의 모든 안개들을 경직시킨 이가 훅 다가왔다.
[너무 그런 얼굴로 나를 보지 마.]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 변해 버린 붉은색 눈동자가 시야에 대부분 들어찰 정도의 거리였다.
[죽이고 싶어지잖아.]
“─!”
[아, 잔소리. 내가 설마 계약을 어기겠어? 네가 도울 게 아니면, 입은 좀 다물고 있지 그래, 꼬마야.]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갈 뻔했다. 다니엘은 손에 들어간 힘을 가까스로 풀며 혼잣말이나 지껄이는 이를 노려보았다.
모험가가… 모험가가 이제 와서 악마에게 몸을 빼앗길 것 같진 않으니, 분명 저것은 모험가의 의도하에 나온 것이리라. 그를 단번에 죽이지 않는 행동이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 혼잣말, 그리고 혼잣말의 내용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아무튼, 나는 합당한 거래하에 나온 것뿐이니까 군말 말고 협조하도록 해.]
다만… 다만 그래. 모험가가 품고 있던 악마는… 그 악마는…….
[일단 거기 우두커니 있는 것부터─]
“묻겠다.”
지금 이것을 묻는 건 올바른 일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벌리고 혀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 못했다.
“네놈이 죽인, 내 부모님을 기억하는가?”
[음?]
검은 불꽃이 시야 한편에 넘실거리는 기분이었다.
[아.]
찰나간 의문을 표했던 상대가 곧장 탄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올라오는 손은 하관을 가리는 데 여념이 없다.
하나 큼지막한 손이 코와 입을 가렸는데도 휘어진 눈매와 눈동자에서 묻어나는 감정의 종류만큼은 숨기지 못했으니.
[그딴 거, 기억할 리가 없잖아.]
이, 개자식이─
다니엘은 솟아오르는 울분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뻗었다. 저것이 뒤집어쓴 게 모험가의 육신임은 분명 인지했었으나, 그 시점만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새까만 머리나 붉은 눈, 모험가가 결코 지을 리 없는 샐쭉한 미소만이 시야에 뱅글뱅글 돌았다. 원수의 얼굴이었다.
[친애하는 그레트헨, 이건 내 잘못 아니야. 솔직히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다만 쌓여 온 과거들이 증명하듯, 감정에 휘둘려 움직이는 건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
퍽!
“컥!”
[참 매정하기도 해라. 하나 그대, 이 행위까지 내 잘못이라 말하진 않겠지? 설득할 시간이 없다는 건 그대도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옹송그린 채로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장갑이 조금만 얇았어도 도드라진 뼈 라인이 드러났을 세기였다.
[아니면 그대, 내가 이이를 털끝도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방관하길 바라?]
갈비뼈가 부러졌나. 아니, 금이 갔을 수는 있어도 부러진 것 같지는 않다.
다니엘은 버릇처럼 자신이 입은 타격의 정도를 헤아렸다. 상대가 안 돼.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져 내리는 몸을 두고 그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것봐. 그대도 이것이 최선임을 알잖아.]
스르륵.
다만 그의 육신이 완전히 거꾸러지기 전, 두꺼운 자락 하나가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넘어가려던 몸은 덜컥 멈춰 선 채 공중으로 되레 떠오르는 중이다.
[마력 낭비라니, 그럴 리가 있나.]
“……?”
[친애하는 그레트헨, 내게 너무 박하게 말하지 마. 그대가 그리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이 아파.]
이건… 털 망토인가? 다니엘은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은 모험가의 털 망토의 갈라진 자락 중 하나와 이어져 있다. 마치 그 자락만 길게 늘어난 것 같다.
[단지… 그래. 그대도 목에 사슬을 걸면 불쾌해할 거잖아? 이것도 같은 맥락일 뿐이야.]
그리고 사슬이 다시 춤을 췄다. 검은 안개를 도화지 삼아 별의 궤적을 그리듯 그렇게 순환했다.
[나는 타인과 닿는 게 정말 싫거든. 그러니 부디 이해해 주길 바라. 그대는 참으로 상냥한 사람이니, 나를 향한 증오와 나를 향한 동정을 별도로 세워 줄 수 있을 테지?]
참으로 끔찍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다니엘은 기어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양심에 털 난 새끼가…….’
[그래, 그대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
한편, 메피스토펠레스는 영혼으로 전달되는 음성 앞에 샐쭉 웃었다.
멍청한 그레트헨. 상대할 가치 없다고 매번 말하는 주제에 약한 척하면 결국 받아들여 주지. 정말 어리석게도.
[그보다 그대, 마법진이 무너지려는 것 같은데. 계속 나와 대화해도 되는 거야?]
‘아, 미친!’
정말로, 어리석게도.
「…개수작 부리지 마.」
[마치 내가 그에게 아양이라도 떤 것처럼 말하는구나, 애송아. 나는 그저… 이런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하나쯤은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게 개수작이 아니면 뭔데!」
그러나 그가 바보 같은 인간이라서, 그녀가 이런 기회라도 얻을 수 있게 된 걸 생각하면 마냥 비웃을 수만도 없다. 그가 진실로 매정하고 비정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의 환심 사기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므로.
[오, 애송아. 싫어하는 마음에 내 모든 걸 부정하고 싶은 심정은 알겠다만, 네가 그런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진 않아.]
아니. 애초에 그가 그런 부류였다면, 그녀 자신이 이런 처지로 내몰릴 일 자체도 없지 않았으려나. 그레트헨이 진즉 저 소년을 버리고 돌아갔거나, 그녀에게 몸을 뺏겼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니까.
「하! 그래, 진실이겠지! 진실일 수는 있겠지! 접촉을 꺼리는 이유라고 해 봤자 인간이란 벌레랑은 닿기 싫어서 같은, 배려받을 가치가 전무한 것들이겠지만!」
[…네 안의 나는 대체 어떤 이미지인지 의문이네.]
「네놈 같은 개밥버러지에게, 그레첸의 상냥함은 과분해. 머리 박고 사죄해, 쓰레기.」
[그리고 친애하는 그레트헨은 네가 이리 성깔 있는 아이란 걸 아나 몰라.]
「아냐, 네놈의 사죄조차도 그레첸의 시간보단 무가치해. 그러니 그냥 자진해서 죽어 버려.」
[가차 없기는.]
아무튼, 그레트헨의 넌덜머리 나는 호구력은 이 사태의 원인이자 유일한 탈출구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유의했다.
[하지만, 꼬마야. 트라우마라는 건 진심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유념하여, 그가 들을 이야기를 골랐다.
[내가 지옥에 있었을 시절, 힘을 아직 갖지 못해 버러지처럼 바닥을 기던 그 시절에… 나를 노예로 삼은 건 색욕, 아스모데우스였으니까.]
친애해 마지않는 그레트헨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메피스토펠레스는 흔들리는 마법진의 파편을 보며 입술을 살금 끌어 올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그따위 과거를 가졌다 해서 내가 널 동정이라도 할 것 같아?」
[뭐… 그래. 사실 그렇지. 나도 동정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니야.]
소년의 동정 따위, 기대한 적 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도리어 안타깝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면 몸서리치며 닥치라고 경기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단지, 그냥 그렇다고 말해 준 것뿐이지.]
하지만 알게 모르게 돋게 되었을 누군가는 다르지. 메피스토는 지금쯤 ‘시발,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그대가 좀 더 고뇌했으면 좋겠어. 한 조각 남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그 강박이 원수조차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모순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내가 배신했을 때 더 분노하게 됐으면 좋겠어.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재차 더듬으며 손에 들린 사슬을 휘둘렀다. 심상에선 그녀를 옥죄고 제한할 뿐인 물건은 외부란 이유 하나만으로 효율적인 무기가 되어 그녀가 바란 것을 이루어 주었다.
촤르륵! 반경 수십 미터의 안개가 큐브 스테이크처럼 토막 난 채로 굳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
또한 그 반경의 끄트머리, 혼자서 어떻게든 발악하던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가엽게도. 그런 꼴로는 저 하늘에 반격조차 못 할진대.]
“……!”
검은 안개에 닿아 부식된 가면의 아랫부분이 파스슥 떨어져 내렸다.
[이번엔 널 지켜 주마. 나라는 파멸로부터.]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깨진 안쪽에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