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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64화 (364/389)

364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5)

“신이시여!!”

합류한 인퀴지터의 첫 번째 행동은 기도였다. 소담한 금빛이 청년의 녹안 속에서 바람 맞는 보리처럼 물결쳤다.

“외적에게 심판을!”

그리고 그 바람이 멎었을 때, 수많은 보리알이 우수수 떨어지며 황금의 동산을 만들어 냈다. 균열에 걸쳐진 늑대의 머리를 때리고 파묻는 동산이었다.

캬아아악!

신성력에 짓눌린 괴수가 구슬픈 포효를 내질렀다. 그것에게서 뻗어 나왔던 촉수들의 다발은 시든 꽃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그저 추락하기 바쁘다.

팍, 팍, 팍. 마비침에 당한 뱀처럼 쓰러진 다발들이 흰 설원 위에 박제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지금이다.”

그렇지만 에루탤크는 그것에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안심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는 괴수가 무력화된 모습에서 경각심을 느끼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쇠 긁는 음성으로 나를 일깨운 그는, 곧장 자신의 검을 움직였다. 눈 일부를 긁어 내어 마법을 새기는 검로였다.

“…그래.”

뭐, 사실 저게 맞긴 하지. 괴수가 완전히 쫓겨난 것도 아니고 일시적─아무리 생각해도 저게 오래갈 것 같진 않았다─으로 무력화시켰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안심해서야 방심밖에 더 되겠나?

상대가 움직이지 못할 땐 자고로 딜을 쑤셔 박거나, 다음 수를 대비해 두는 게 현명한 법이다. 나는 군말 없이 에루탤크의 움직임을 따랐다.

사르륵. 거슬림 없이 이어지는 움직임이 망토 자락과 겹쳐지며 우아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흐으으으!

“잠깐─”

다만 에루탤크가 새기는 선에 집중하느라, 그에게 접근하는 티끌의 존재를 놓치고 말았다. 깨달았을 땐 이미 티끌이 그의 지척으로 접근한 상태였다.

“조심……!”

나는 다급히 마력을 뭉치는 한편, 그를 도울 수 있는 다른 인력을 찾아보았다. 하나 인퀴지터는 식은땀을 뚝뚝 흘려 가며 괴술를 견제 중이니 움직일 수 없다. 또한 다니엘은…….

“엇.”

다니엘은 나보다 먼저 에루탤크를 도우려 움직이긴 했다. 본인의 신성력으론 인퀴지터를 도울 수 없으니 이쪽으로 합류하려 든 덕이다.

하나 결과적으론 의미 없는 일이었다.

샤악!

발끝으로 땅을 긋던 칼을 튕겨 올리고, 그렇게 안개를 베어 낸 이가 다른 쪽 손으로 본인의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팔락. 박쥐의 피막처럼 손을 따라 펼쳐 올라간 망토가 안개를 추가로 갈랐다. 마치 부유하는 가루들을 부채질로 밀어낸 것 같기도 했다.

티끌은 에루탤크를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스턴에 걸렸다.

콱!

그사이, 손쉽게 안개 하나를 견제해 낸 이는 손목 스냅 한 번으로 검을 회전시켜 다시 땅에 박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선의 끝부분과 1mm도 차이 나지 않는, 본의 아니게 검을 뽑아야만 했던 그 지점, 그 자리였다.

가공할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큰일인데.’

「네? 제, 제가 뭘 놓쳤……?」

‘나 진짜 따라 그릴 수 있을까?’

「아…….」

우주티끌을 수월히 제압하고 마저 선을 잇는 솜씨를 보자니, 저 인간이라면 진짜 마법진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마력을 담지 않았으니 발동되는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무 하드코어하지 않냐, 이번 레이드……?!’

문제는 그가 그려 내는 데 성공할 시, 그 이후 성공을 좌우하는 건 완전하게 내 몫이 된다는 점이다. 상대가 그 힘겨운 일을 해내 버린 시점에서, 실패했다간 눈칫밥 엄청나게 먹을 상황이기도 했다.

「죄, 죄송해요. 암기랑 마력 제어는 저도 자신이 없어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진짜 실패하는 걸 바란 건 아니긴 한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진짜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없어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입을 털었던 몇 분 전의 자신을 원망하고, 동시에 내게 그 외 선택지를 내주지 않은 현실을 탓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늘따라 검은 마력이 참 겨자처럼 보였다. 울면서도 먹어야 할 겨자였다.

* * *

“너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테니까.”

소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미쳐 버린 대전사는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잠깐─!”

하지만, 대전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잘 대해 주든 못 대해 주든 결국 끝에 가선 타인에 불과할 것이 가족일진대,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어야만 할 이유가 있어요?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당신이라고 어디든 못 가고 무엇도 될 수 없는 건 아닐 것인데.

대체 왜.

“아.”

…모르겠다. 역시 모르겠다. 소녀의 일천한 지식과 경험으로썬 대전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소녀의 가족과 대전사의 가족이 전혀 다른 인간임을 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만약, 만약에요.”

대신, 소녀는 시야에 비치는 눈에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제가 당신 같은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면.”

소녀의 가족이 소녀를 버리지 않는 풍경. 스스로보다 소녀를 더 아끼던 누군가가 있는 미래.

“지금의 당신이 하는 선택을 이해했을까요?”

대전사가, 당신이 내 혈육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능성.

“당신처럼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버릴 수 있게 될까요?”

아, 당신 같은 사람이 나한테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대전사, 나는…….”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도 웃을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게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나는 너무 궁금해요.”

나는 행복했을까?

“그런 사랑이라도 있는 삶이 더 좋아요?”

소녀는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순간 깨달았다. 대전사가 가진 것이 행복일지 아닐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적어도 소녀가 지금껏 누려 왔던 삶은 행복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각해 버린 이상,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결핍에서 비롯된 끈적한 불행이 소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 * *

초마다 균일하게 마력을 뽑아내는 건 둘째 치고, 뽑아낸 마력을 바닥의 선 따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건 진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제법 잘 따라 하는군.”

머리 아프니까 말 걸지 좀 말아 줄래? 농담 아니고 나 진짜 뇌가 박살 날 것 같거든?

“경, 괜찮으십…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니엘은 눈치가 빨랐다. 아까부터 내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말 걸기를 포기하고 호위만 대신 서 주었다.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주티끌까지 견제하라 했다면, 나는 그냥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을 것이다.

“경,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하나 그런 다니엘의 노력도 금세 한계에 부딪쳤다. 우주티끌의 수는 너무 많고, 다니엘에겐 그것들을 제거하는 능력이 없는 탓이었다.

해서 그는 차선으로 나를 업고 튀는 걸 택했다. 다니엘 딴에는 나름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다만 문제는 그때의 내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에루탤크의 움직임과 그로서 이어질 선 그리고 기존에 그려 둔 선을 따라 응집된 마력에 몰두한 상태였고, 그로 인해 외부 상황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즉, 다니엘이 고민해서 내린 선택도 그때의 내겐 갑작스럽기만 했단 소리다.

“무슨─”

그런고로 나는 내 몸이 들리던 찰나 나도 모르게 비명을, 정확힌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 낼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순전히 마법 때문이었다. 집중이 풀리려 하자마자 진을 이루던 마력 일부가 흐트러지려 했던 것이다.

한데 그걸 그냥 봐주고 넘길 수 있을 리 있나. 내가 지금껏 어떻게 유지해 왔는데.

나는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리며 다시 마법에 골몰했다. 반절 정도만 완성된 마법진 끄트머리가 무너지려다가 다시 명확한 형태를 갖추었다.

흐으으으.

“…이런!”

이 와중에 티끌 놈들, 더럽게 늘어났네. 나는 뇌를 원심분리기에 넣는 기분으로 멀티태스킹에 도전했다.

방금 전이라고 해서 멀티태스킹을 안 하던 건 아니지만, 프로그램을 하나 더 늘리지 않으면 나와 다니엘의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긴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쥐어짜 내다시피 만들어 낸 지성의 여유분이 우릴 노리던 티끌에게로 마력을 분배하고 불을 붙였다.

화르륵!

“경?!”

“처리, 했.”

으아아악! 마법진 또 무너진다!! 나는 잠깐 새 일부 파트가 무너지려는 걸 인지하자마자 기겁해서 달려들었다.

티끌이나 바람, 기타 등등 이유로 바닥에 그려져 있던 선 태반이 지워진 작금인지라 공포의 정도는 더 심했다. 이젠 보고 복구할 선도 없어서 진짜 무너지면 안 된다.

스스스스.

“또……!”

그러나 재수란 게 한번 없어졌다 싶으면 그날 내내 없는 것 같은 법이라. 예컨대 지각한 날에 유독 신호등이 자주 걸린다든가, 용변이 급해서 다급하게 들어간 화장실이 하필 휴지가 딱 떨어진 곳이라든가. 뭐 그런 것처럼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를 덮치려 드는 티끌은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다니엘이 평범한 인간 수준에서 상위권일 뿐이며, 둘러메고 다니기엔 내가 너무 무겁다는 것도 이 상황을 구성한 문제점 중 하나였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게 아니라, 울기 싫은데 울라고 뺨 때리는 기분이었다.

“크으.”

하지만 공격하자고 목숨을 포기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목숨을 챙겨야 공격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나는 그 딜레마 속에서 하는 수 없이 멀티태스킹을 다시 시작했다. 차라리 팔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싸우는 게 낫겠어. 차마 내뱉지 못할 속마음이 이성 저편에서 스러졌다.

투둑.

“경, 다치셨습니까?”

이미지 머리에 고정해 두느라 바쁜데 넌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다니엘의 외침을 흘려들었다가, 얼마 안 가 그 말을 되짚어 보게 됐다. 별 이유는 없었다. 코로 내쉬는 숨이 조금 가빠졌다 싶더라니, 그 원인이 코피였음을 뒤늦게 자각한 탓이다.

심지어 조금 흐른 것도 아니었다. 다니엘의 어깨 부분은 눈에 보일 정도로 피에 물들어 있었다.

저게 전부 내가 흘린 거야? 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어처구니가 사라졌다. 머리를 너무 써서 코피 흘린 건 수능 이후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크윽!”

와중에 에루탤크는 또 무슨 일이야… 아니, 사실 진즉 비명이 터져 나왔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입장이 그쪽이긴 했지만.

“마법사님!”

“나는 신경 쓰지……!”

티끌을 제거할 수 없어, 신체 능력에 의지한 채 도망다녀야 하는 건 에루탤크나 다니엘이나 똑같다. 바닥에 선을 그려 가며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선 다니엘보다 더 불리하기도 했다.

함에도 그가 지금까지 견뎌 온 건, 그 모든 페널티를 평균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과 절제된 움직임, 노련한 판단 능력으로 커버해 냈기 때문이었다.

즉, 이제는 그걸로도 부족할 시점이 되고 말았다. 이대론 완성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쓰러질 것이다.

“주작은…….”

“…아직, 아직입니다.”

차라리 이 마법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이것에 계속 붙들려 있으면 우리 셋으로선 대항할 방법이 아예 없잖아.

그나마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주작은 자기 몫으로 떨어진 괴물을 막느라 여념이 없는 듯하고.

“으으…….”

캬아아악!

거기에 억지로 여유를 짜내 확인해 본 인퀴지터의 상황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본인을 보호할 용도의 결계 외 모든 신성력을 괴물에게 붓고 있음에도, 괴수의 머리통이 균열을 점차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대론 우리가 밀린다.

“멈추지 마라, 살고 싶다면!”

하나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저편에서 에루탤크가 외쳤다. 언뜻 보인 그는 망토 자락이 많이 찢기고 해진 상태였으나 그 기세만큼은 한 점 깎임이 없다.

“…하아.”

사실은, 그래. 그렇겠지. 완성될 이게 어떤 마법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이걸 포기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방법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안 될 것 같은 걸 어떡해. 나는 천재가 아니라고. 차라리 몸을 굴리라고 하면 굴리겠는데, 머리로는 진짜…….

[도와줄까?]

문득, 머릿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와줄까, 그레트헨?]

착각인가. 거미줄처럼 희고 끈적거리는 머리카락이 시야에 드리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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