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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63화 (363/389)

363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4)

“으악! 악!”

데스브링거는 균열 새로 흘러든 검은 안개를 피해 눈밭 위를 데굴 굴렀다. 얼어붙은 다리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단 건 대충 기합으로 이겨 냈다.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건 기분 탓이지만, 목이 굴러떨어지면 그땐 기분 탓이 아니게 되므로 그것이 가능했다. 옷 위로 엉겨 붙은 눈송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사박사박 떨어져 나갔다.

“부, 부정검이라도 먹히면 좀 좋냐, 이 미친 놈들아!”

흐으으으아!

“아오!!”

엄밀히 따지면 아예 안 먹히는 건 아니다. 하나 경직만 조금 줄 뿐이지, 죽일 수 없다면 그게 뭔 소용인가. 심지어 그를 노리는 적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썅!”

눈깔이 없으니 연막탄도 소용없고, 호흡 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니 독 가루도 무쓸모다.

그나마 위안되는 점은 개체 자체의 속도가 높지 않아, 최선을 다해 뛰면 따돌릴 수 있다는 점인데… 그마저도 포위가 가능할 만큼 수가 많은 시점에선 별 의미는 없다. 제거가 불가능한 이상 이대로는 포위망의 완성이 먼저 이뤄질 것이다.

“빌어먹을!”

그런 결론이 서 버린 순간, 데스브링거는 아주 난처해졌다. 항상 느끼는 무력함에 짜증과 슬픔, 좌절감 따위를 추가로 버무린 난처함이었다.

가장 위험한 건 다른 사람들이 전부 해 주고 있는데 난 이것마저 못 하는 거야? 빌어먹을, 물건 전달이라는 간단한 일마저 나는 못 해내는 거냐고!

『여기서 용에게까지 달려갈 수 있는 이는 너뿐이 없다.』

나리는 이런 나조차 믿어 주셨는데……!

『부탁한다.』

데스브링거는 이를 악문 채 몸을 재차 굴렸다. 최대한 멀고 낮게 뛴 몸 뒤로 안개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파삭!

물과 비슷한 형질의 그것은 대지에 닿는 순간 사방으로 퍼졌다. 진짜 물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눈에 스며들지 않고 다시 날아오른단 점이다.

조금 더 말한다면, 보통 개체보다 커다랬던 검은 안개가 다시 셋으로 분열된다는 것 정도.

“후우.”

데스브링거는 그 꼬라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하다 하다 이젠 합체냐. 그 한숨의 이면에는 부족한 속도가 저것으로 메워지고 말았다는 비탄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촤악!

그렇지만 완전히 메워진 건 아니야.

데스브링거는 그 사실 하나만을 움켜쥔 채 부정검을 휘둘렀다. 조금만 실수해도 놓쳐 버릴 것 같아, 끈으로 묶어 둔 검이 팔과 함께 허공을 갈랐다. 검술보다는 팔의 연장에 가까운 막무가내성 공격이었다.

흐으으.

그래도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그를 덮치려 들던 안개 하나가 움츠러든다면 그걸로 족하다. 데스브링거는 자신의 망토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다.

질량이 없어서 공격이 안 먹히는 대신, 밀리기도 잘 밀리는 안개가 뒤로 후욱 퍼졌다. 다시 뭉칠 즈음이면 그는 열 발자국 이상 거리를 벌리고 있을 테다.

“용은, 시발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러나 산 너머 산이라고, 하나의 위기를 뛰어넘으니 또 하나의 위기가 그를 반겨 주었다. 어디서 기어 온 것인지 여섯 마리의 안개가 포위하듯 그의 앞에 선 것이다.

“젠장……!”

저걸 어떻게 피하지? 저 녀석과 제대로 접촉하거나 통과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야말로 그 도박을 해 볼 차례인가?

푸확!

그렇게 데스브링거의 마음이 위험을 감수하는 쪽으로 차차 기우려는 찰나, 눈 아래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하얗지만 눈보다는 색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물체였다.

콰악!

저것의 질감을 정의한다면 그건 아마도 뼈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뼈로만 이뤄진 생명체가 있을 수 있나? 그 이전에 저것이 나를 돕는 이유는 뭔데?

데스브링거의 본능이 답을 내리는 동안, 상어를 닮은 그것은 눈 위를 마구 오가며 안개들을 마구 짓씹었다.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고민해 온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그가 가야 할 길이 열렸다.

“아!”

저게 뭐든 간에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데스브링거는 살금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저 뼈상어 같은 것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돌릴까 싶어 택한 조심성이었다.

콱!

흐우어어어어!

그러나 뼈상어는 오롯이 안개만을 노렸고, 덕분에 그는 쉬이 몸을 뺄 수 있었다. 앞쪽에 있던 안개도 다 처리한 것인지,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대체 뭐가 뭔지…….”

아직도 뼈상어의 정체는 가늠되지 않지만, 자신에게 호재라면 그걸로 됐다.

데스브링거는 후다닥 검은 강을 넘어갔다.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으나 그건 어떻게든 넘겼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그의 시야 귀퉁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하얗게 명멸하는 파괴였다.

“아!”

그러다 그의 몸이 정말 한계라며 비명을 지르던 그때, 검은 강의 끄트머리, 입 벌린 가오리처럼 구멍이 난 둔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데스브링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곳이 내가 가야 할 곳이다.

그는 무너지려는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불어넣었다. 귀까지 보라색으로 변한 몸은 더는 달린다고 할 수 없는 속도로 눈밭 위를 걷는 중이다. 다닥, 다닥, 다닥. 뇌까지 차오른 냉기에 이빨이 절로 떨렸다.

“제발…….”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제발 저기까지만 가자.

데스브링거는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치뜬 채 걸음걸음을 옮겼다. 하나 둔덕이 예상보다 멀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추위에 질린 뇌가 착각을 일으켰던 뿐인 것인지. 둔덕은 도통 가까워질 생각을 안 했다. 마치 제자리걸음만 걷는 기분이었다.

“왜…….”

거의 다 왔는데. 정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그는 기우는 세상을 보며 눈을 감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올렸을 때는 이미 세상이 옆으로 누운 상태였다.

아.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이단심문관 나리를 보내자고 할걸. 데스브링거는 내뱉는 숨조차 얼어 버리는 세상에서 손가락을 떨었다. 시야에 들어 있는 손가락은 분명 움직이고 있는데, 감각으로는 전해지는 게 없었다.

파리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가면…….”

왜 그는 마력을 다룰 수 없는 걸까. 신은 왜 그에게 조금의 신성력도 내려 주지 않는 걸까. 단순히 신앙심이 부족해서라고 하면 그땐 할 말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세상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젠장…….”

치밀어오르는 설움에 때 아닌 눈물이 났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얼어 버려서, 그렇게 눈을 찔러서 더욱 서러웠다.

바삭바삭 얼어붙은 눈물이 송곳 조각처럼 너무도 따끔했다. 그의 눈물이 모험가에게 닿을 때 그러할 것처럼 정말 처절하게 역겨웠다.

“여기서, 멈추기 싫어.”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걸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살을 도려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 아픔이 두려워서 차마 메스를 휘젓지 못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끝나긴 싫다고…….”

헤어지기 싫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하기 싫다.

억지고 어리광이라도 해도 어쩔 수 없어. 실낱같은 연으로라도 이어져 있길 바라는 마음이, 이것이 끝이 아니길 바라는 욕망이 심장을 좀먹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정말로 확정되는 끝이 싫어서 끝까지 미루고 싶어 하는 건 모두가 다 똑같은 거잖아.

“빌어먹을─!”

샌님이 부럽다. 이단심문관 나리가 부럽다. 사실 그들과 함께하는 모두가 부럽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가 싶어서.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나 싶어서.

나는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여전히 나약하기만 한데.

“마지막까지……!”

데스브링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시 일으켰다. 눈물에 찔려 찢겨 나간 살갗이 핏방울을 흘렸으나 아픔 따윈 없었다. 자잘한 고통을 호소하기엔 이곳은 너무도 추운 곳이었다.

“마지막까지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고!”

탁, 탁, 탁. 소리를 흡수하는 눈이 그의 외침 대신 눈물과 피를 훔쳐 갔다. 아깝진 않았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내주어도 괜찮은 것들이었다. 그의 다리가 가소로운 도둑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달렸다.

파앗!

“어, 어엇!”

한데 그런 그의 발밑이 순간적으로 울룩불룩 움직이더니, 금세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안개를 자비 없이 물어뜯던 뼈상어였다.

“와악!”

하나 그것의 등장은 그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출현에 데스브링거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찰나, 뼈상어의 편평한 등판이 데스브링거를 받아 낸 채 그대로 눈밭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상어처럼 뾰족하게 솟은 지느러미는 잡기 좋은 지지대였다.

“뭐, 뭔데!!”

빠, 빨라!! 데스브링거는 파리한 얼굴을 더욱 파리하게 물들이며 지느러미를 엉겁결에 껴안았다. 어찌 보면 그다지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속력을 올려도 나가떨어지지 않을 거란 판단이 선 듯, 뼈상어의 속도가 한층 더 올라갔다.

“와아아악!”

눈밭을 물처럼 헤엄치는 뼈상어의 몸이 순식간에 둔덕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와 둔덕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었는지, 실제로 본 둔덕은 동산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산 쪽에 가까웠다.

자연히 구멍도 엄청나게 컸다.

“허억, 허억.”

거, 걸어왔다면 100% 죽었겠는데. 데스브링거는 가까워지는 입구를 보며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에퉤퉷!” 상어가 헤치고 나간 눈발이 입에 들어오는 통에 바로 닫아야 했지만.

“고, 고맙다.”

아무튼 뼈상어 덕에 살아 도착했다. 데스브링거는 구멍 앞에 도착하자마자 속력을 줄인 상어에게서 몸을 내렸다. 파삭! 상어는 감사 인사를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다시 눈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진짜 뭐지…….”

혹시 숭고한 용인지 뭔지 하는 게 보낸 건가? 그는 그럴싸한 가설에 스스로 납득하며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공기는 바깥보다 따뜻해서 조금은 살 만했다.

“아파…….”

정정하겠다. 하나도 좋지 않았다. 얼었던 몸이 녹음으로써 미뤄졌던 고통이 한 번에 몰려온 까닭이다. 손발이 저리고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안, 쪽까지 데려다주지…….”

눈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쉽다. 데스브링거는 덜덜 떨어 가며 한 발 한 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중에 가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거의 기다시피 해야 했다.

짐과 다름없어진 몸이 지렁이처럼 바지락거리며 안쪽의 동공으로 진입했다.

“아…….”

그리고 그 끝에서, 데스브링거는 보았다.

유백색의 몸체를 사방에 연결해 두고, 심장께에선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그대로 잠든 거대한 용을.

그들이 심장을 반환하기 위해 찾았던 존재를.

* * *

나는 마력이 반 이하로 줄어든 후에야 인정했다. 이걸론 안 된다. 섬격의 화력조차 저것을 막기엔 부족했다.

“…이대론 안 될 것 같은데.”

분노의 말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진짜 안 될 것 같다. 쫄들은 계속 늘어나고, 괴수의 진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마법사, 방법이 없나?”

심지어 저건 지금 머리통만 나온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촉수로 우리를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있단 거다.

그런데 여기서 진체가 다 튀어나오면? 그땐 어떻게 될까. 아마 감당이 안 되지 않을까?

“그대의 지식으로도 이것이 최선인가?”

근거는 없으나 딱히 반박할 사람 없을 논리로 미래를 예지한 나는 다급히 에루탤크를 재촉해 보았다. 그의 정체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상당히 불편해지겠으나, 그 불편함이 목숨보다 크진 않았다.

“…제대로 타격을 줄 방법이, 아예 없진 않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는지는 탓하지 않겠다. 그 방법이 뭐지?”

“그건…….”

나는 이 순간에도 날아오는 공격들을 쳐 내고 베어 내며 에루탤크의 답을 기다렸다. 그를 이 이상 채근하지 않는 건 그가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쪽도 공격을 쳐 내느라 여유가 없는 상황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행하려면 네 잘난 마력으로 내가 요구하는 마법진을 그려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마법진만 그리면 되나?”

“그래. 본래라면 영창과 필자의 계산이 필요하지만… 네놈이 그걸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그것까지 마법진에 포함할 거다.”

“그럼 문제없겠군. 하겠다.”

“…하면 이제부터 내가 눈 위에 진을 그리겠다. 그것을 보고 제대로 따라하도록.”

근데, 그… 마법진이란 게 혹시 바닥에 그려야 할 정도로 커? 작은 게 아니야?

“…노력해 보지.”

나, 할 수 있을까? 아니, 근데 그 이전에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쳐 내고 소환된 우주의 티끌들을 전부 피해 가며 마법진을 그려 보이는 게 가능은 해?

나는 에루탤크가 바닥에 검을 박는 걸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지만, 진짜 레이드 한번 하드코어하구만.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모험가님!!”

아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었다.

“제가 왔습니다! 합세하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리 왕김치만두랑 그 배달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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