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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62화 (362/389)

362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3)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곳으로 향하는 일 자체가 가능은 한가.

발을 내딛는 순간순간에도 절망은 시시각각 차올랐다. 늪지대처럼 질척이고 끈적이는 감정이었다.

쨍강.

하나 폭설을 품은 구름조차도 그 가장자리만은 환하게 빛난다 했던가. 그 말처럼 나아갈 방도가 없는 것 같던 그녀의 앞길에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졌다.

흐으으으으.

“…실패와 동치되는 죽음을 담보 삼은 희망이라.”

정말이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알스비드르, 네 곁에 가기 위한 티켓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아. 너무나도 빨라, 죽음에마저 먼저 닿은 나의 자매를 위하여.

베르세르크는 밤하늘 너머로 몸을 던졌다. 목표는 단 하나,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 * *

탁, 타닷!

나는 또다시 촉수를 발판 삼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내 시야 끄트머리에 괴수의 눈이 잡히는 찰나, 마력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팡! 손짓을 따라 휘몰아친 마력이 불티가 되고 화염으로 성장하며 괴수의 눈에 그대로 옮겨붙었다.

크아아아아!

오, 이건 좀 타격이 있는 것 같네. 나는 괴수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으며 추락을 준비했다.

투두두두!

“……!!”

하나 나의 몸이 2m를 채 하강하지 못한 그 시점, 불꽃 사이로 수백 개의 입이 넝쿨처럼 내게 날아왔다. 내가 밟고 뛰기엔 너무 가늘고, 대항하기엔 수백 개가 다발처럼 날아오는 형상이라 대처 방법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재앙 신도 아니고……!”

저거에 닿았다간 멍 자국 같은 저주가 온몸에 새겨질 것만 같다. 그러니 피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에루탤크의 기척은 아직 지상이고 내가 쓸 수 있는 발판은 하나도 없는 공중에서, 대체 어떻게.

「그레첸, 섬격을……!」

‘……!’

아, 그런 수가 있었지?

──!

소리조차 삼키는 불꽃이 세상에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눈에 닿는다 싶으면 그 불조차 잔재 없이 사그라진 후인, 세상 일부를 도려 내자마자 사라지는 화염이었다.

“…후.”

이 기술은 다 좋은데 마력 소모가 진짜 심하단 말이지.

나는 저번보다 훨씬 국소적으로 발휘했음에도 눈에 띄게 줄어든 잔여마력을 확인하며 마음 편히 추락했다.

쉬이이익!

“……?!”

조금 이른 안도였다. 삭제되었던 촉수들의 자리를 채우려는 듯 또 다른 촉수의 다발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섬격을 쓴 의미가 사라진 풍경이었다.

“이, 미친……!”

마력 반 토막 날 걸 각오하더라도 본체까지 범위에 넣었어야 했나? 그 이전에 저것들은 어떻게 피하지? 또 섬격을 질러? 그치만 방금 꼴을 보고도 쓰면 그건 머저리 아닌가?

“…마법사!”

나는 머리를 쥐어짠 끝에 비명 지르듯 답을 토해 냈다. 내 손에 쥐여 있던 롱소드가 순식간에 하얀 점액질로 변했다. 중요한 건 이것이 변할 이후의 모습이다.

쇄애액! 끝에 고리가 걸린 하얀 로프가 내 완력에 힘입어 에루탤크에게로 날아갔다.

부웅!

간발의 차로 내 몸이 촉수 다발을 피해 지상으로 당겨졌다. 로프가 에루탤크에게 조금만 더 늦게 닿았거나, 에루탤크가 로프를 당길 때 한 박자만이라도 머뭇거렸다면 나는 필히 촉수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혼자선 무엇도 못 하는 머저리였나?”

“그런 그대는 저걸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뻗어진 에루탤크의 손을 잡고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충격을 덜기 위함인지 에루탤크가 부드럽게 회전하며 나를 저편으로 돌려세웠으나 내 쪽에선 오히려 그게 나았다.

눈 위로 미끄러진 발이 무릎을 굽혀 가며 균형을 잡고, 앞으로 뻗어진 손은 마력을 끌어모아 앞으로 쏘아 냈다.

나를 돕느라 괴물을 등지게 된 에루탤크의 머리를 지나, 그 뒤편으로 날아간 마력이 공중에서 화염을 일으켰다. 날아오는 촉수 다발을 정체시키는 화염이었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용이다.”

“내 운용법이 못마땅하다면 가르침이라도 내려 주지 그러나.”

물론 저 화염만으로는 저것들을 완전히 멈출 수 없다. 우리는 폭발 소리가 귀에 꽂히자마자 한 방향으로 뛰었다. 딱히 조율한 건 아니고,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콱, 콱, 콱!

우리 뒤로 촉수 다발이 창날처럼 바닥에 하나둘씩 박혀 오기 시작했다.

촤악!

나는 그 꼬라지에 대항할 방법을 검토하는 한편, 로프 형태로 길게 늘어진 라텔을 회수했다. 줄자처럼 촤르륵 회수된 로프가 다시 검의 형상을 띠었다.

챙, 채챙!

그와 함께 촉수가 앞쪽으로도 짓쳐들어왔다. 내 칼날이 첫 번째 촉수를 쳐 내는 동안 사각에서 스며드는 것은 에루탤크의 몫이다. 우리는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자연스럽게 본인이 맡게 된 방향을 커버했다.

‘…역시 묘하게 낯익단 말이지.’

「하지만. 그 사람은 죽지 않았……?」

‘그건 모를 일이지.’

나는 촉수를 몇 개 쳐 내며, 유려하기 짝이 없는 검로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역시, 낯익었다.

스르륵

“……!”

문득, 우리들의 몸이 괴수의 왼편에 위치할 즈음엔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만다. 최대한 뛰고 뛴대도 벗어날 수 없을 크기의 그림자였다.

“미리 사과하지.”

“무슨─”

피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판단이 서자마자, 나는 에루탤크를 멈춰 세우고 끌어안듯 내 품 안쪽에 밀어넣었다. 평균에 비하면 큰 신장일지언정,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작은 사람이라 참 다행이었다.

에루탤크가 기 막힌다는 듯 거부 의사를 잠깐 표했다가, 이내 따라 주었다. 거절할 상황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참 빠른 깨달음이었다.

콰가가가각!

어찌 됐건 촉수의 폭포는 우리를 덮치고 말았다. 보다 정확히는, 나선의 칼날 형태를 띤 채로 우리를 덮은 라텔의 위에.

“돌, 겠군!”

나는 촉수의 다발이 라텔에 닿는 즉시,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칼날 형태의 라텔이 360도 회전하며 촉수를 갈가리 찢기 시작했다.

일종의 치킨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촉수 다발이 먼저 끝나느냐, 내 마력이 먼저 동나느냐의 치킨 게임.

카가가각!

근데 보통 이런 형태의 스킬은 초 단위에서 그치지 않아? 얜 왜 도리어 압박감이 점점 커져?

나는 그렇게 황당함을 표하는 한편, 라텔의 회전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라텔의 회전이 막히거나, 라텔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면 그땐 진짜 대참사였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추위를 잊은 몸이 식은땀 한 방울을 목 위로 흘려보냈다.

“점점 좁아지는군.”

아, 그게 말이지. 라텔이 깨질 것 같으면 안쪽으로 한 겹 더 만들고 위의 겹은 포기하는 식으로 현상 유지 중인 거라서요.

“알면 방법을 강구해 주길 바라지.”

“지상으로 나갈 수 없다면, 지하로 가면 될 일이다.”

철퍽!

땅과 라텔의 틈새로 들어온 촉수를 찔러 터트린 이가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 태연함에 약간 질리기도 했으나 말 자체는 제법 솔깃하다 싶었다.

“그런 수도 가능은 하겠군.”

긴장으로 한계까지 몰아세워졌던 내 어깨에서 약간의 힘이 빠져나갔다.

“저건 대지를 통과 못 하나?”

“질량이 겹치니까.”

“우리처럼 파고들 가능성은.”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있다면 모를까, 지성 없는 입은 그러지 않을 거다.”

그런 이유라면 진짜 기대를 걸고 시도해 볼 만하다.

나는 흰 점액질을 땅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실상 안쪽의 틈새 틈새를 이용해 스며든 것에 불과하다.

들썩들썩.

조금씩 조금씩 흙과 얼음을 밀어낸 라텔의 일부가 금세 지반 일부를 들어 올렸다. 우리가 있던 공간에 흙을 채워 넣고 비워진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우리 둘 다 지하에 훅 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블록 탈출 게임처럼 순차적으로 움직일 뿐이지.

“가라.”

“그러지.”

권하는 말에 에루탤크는 사양 한 번 보이지 않고 먼저 구멍에 쏙 들어갔다. 그가 있던 자리엔 이제 새로운 흙이 밀어 올려지는 중이다.

콰가가각!

다만 이쯤 되니 촉수를 갈가리 찢어 주던 칼날 부분도 한계라.

나는 다급히 구멍 안으로 몸을 밀어넣고, 라텔을 회수할 때 흙이 구멍을 덮도록 유도했다. 쿵! 우리가 사라진 자리로 라텔이 구멍을 덮어 주는 그 마지막 순간, 촉수가 우리 있던 자리로 물밀듯 쏟아지는 게 보였다.

쿵!

“…급한 불은 껐군.”

나는 라텔에 막힌 천장과 그 천장 위 대지를 두드리는 촉수 다발의 존재를 느끼며 주먹을 쥐락 펴락 했다. 사유는 혹시라도 저 촉수가 라텔처럼 물같이 변해 안쪽으로 스며들까 걱정돼서다.

“그래서, 그 효율적인 방법이란 건 뭐지?”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일까. 그것보단 다른 쪽으로 길을 내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공격이 곧 멈출까?

나는 이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를 머릿속 한편에 정리해 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시선은 에루탤크를 일별하고 있다.

“…진심으로 묻는 건가?”

“그렇다만. 아니면 아까 그 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었나?”

아, 뭐야. 건강한 피드백이 아니라 그냥 심술이었어?

나는 맥 빠지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말투 끝부분을 비틀었다. 말하고 나서야 ‘너무 비꼬는 말투 같은데?’하고 아차 할 정도였다.

“…불꽃은 연소 반응의 부차적인 결과물이다. 또한 완전연소는 파격적이고 압도적으로 보일 순 있을지언정 효율적이진 않다. 꼭 재 가루가 남지 않아야만 죽음인 건 아니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것이 호재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가 내 말을 ‘님 쫄?’ 내지 ‘님 그것도 모름?’ 수준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만… 아무튼.

“그리고 연소 반응의 특징은 점진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그것까지 생각한다면 그대의 쓰레기 같은 효율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흐음.”

그래도 덕분에 감은 좀 잡히는 것 같다. 너무 이과적인 설명이라서 좀 아리까리하긴 한데, 그거야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찔러 봐도 될 일이니까.

“일단 나가지.”

나는 위에서 전해져 오던 진동의 존재감이 싹 사라진 걸 인지한 후, 라텔의 형태를 변형했다. 원뿔 모양으로 천장이 솟아오른 라텔은 땅을 뒤집고 우리가 나갈 길을 만들어 준다.

촉수 다발이 더는 보이지 않는, 말끔한 하늘이 내딛는 걸음을 반겨 주었다.

챙!

시정하겠다. 우리가 죽은 줄 알고 촉수를 거두었던 놈이 긴급하게 우릴 다시 공격해 왔다. 솟아오른 라텔이 그것을 튕겨 내고 잘라 내며 우리가 이동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흠.”

좋아. 그러면 이때 시험을 해 볼까.

나는 설원 위를 다시 내달리며 괴수의 주둥이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까보다 구멍에서 더 많이 튀어나온 녀석은 징그러운 열여덟 개의 동공으로 나만을 뒤쫓는 중이다.

“그러니까.”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어그로가 끌려 있으니까 공격하긴 편하네. 나는 에루탤크가 내게서 멀어지는 걸 느끼며 마력에 집중했다.

“이렇게… 이렇겐가?”

규모를 무턱대고 키우기보단 발화점을 여러 곳 두고… 모든 걸 태우려 드는 건 에너지 낭비니까 죽음에 이르기만을 유도하거나 고통만 준다는 느낌으로… 음, 이게 맞나?

“아, 이거군.”

“……!”

[…참, 경이로운 재능이지.]

나는 미묘하게 거슬리던 부분까지 교정한 후 그대로 마력을 터트렸다. 폭발과는 조금 다른, 굳이 따지자면 부싯돌 수십 개를 사방에서 부딪치는 느낌의 시작이었다.

“…말도 안 돼.”

그 결과 수십 곳에서 불티가 튀더니 그대로 촉수들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촉수 자체를 살라 먹는 화염이 아니라 촉수의 안쪽을 구우며 겉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불꽃이었다.

그렇다고 화력이 약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시작할 땐 약했을지언정 점진적으로 범위를 넓혀 가던 불꽃은 다른 불꽃과 만나자마자 그대로 섞여 들며 덩치를 불렸다. 결과적으론 동시간대 더 커다란 불꽃이 태어나는 꼴이었다.

“그대는─”

와. 이러니까 확실히 마력 소모가 덜 드네. 훨씬 효과적이기도 하고.

나는 에루탤크가 일타 강사의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며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촉수들이야 결국은 사지 말단에 불과할 것이니, 본격적으로 진체를 공격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캬아아아아!

“……!”

하지만 내가 진체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전, 늑대를 닮은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포효를 내질렀다. 소리의 파장만으로 설원이 뒤집어지며 눈송이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스르르륵!

또한 그 사이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했다. 우주의 티끌들이 분명했다. 째각째각! 주둥이와 균열의 틈새로 커다란 발톱이 튀어나오며 균열을 더욱 벌리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아, 쫄 소환 패턴만은 제발요. 쫄 주제에 죽이기 힘든 놈들을 보스전에서까지 꺼내는 건 너무 양심 없지 않아?

“알아서 버텨라, 마법사.”

“새삼스러운 강조로군.”

하나 여지껏 해 온 싸움들을 돌아보거든, 양심 있는 놈들이 되레 드문지라. 나는 따지기를 그냥 포기했다. 그런 행위로 시간 낭비하느니 1초라도 더 많이, 빨리 딜을 넣는 게 더 나았다.

[다만 그대…….]

한데 그 부분에서 내가 미처 생각 못 한 게 있다면, 그것은 딱 하나였다.

[내 불꽃으로 저걸 다 태우느니,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는 게 더 빠를걸?]

저것의 질량이 한 개의 행성과 맞먹는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피통이 그만큼 못돼 처먹었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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