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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61화 (361/389)

361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2)

“더 자세히.”

방금 한 말로는 숭고한 용이 고생하고 있었단 사실밖에 알 수 있는 게 없다.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저것들은 차원과 차원 사이를 헤매며 명멸한 세계의 조각들을 삼키고, 여린 세상들을 뜯어 먹는 것들이니라. 불운하게도 이번엔 이 세계가 그들의 눈에 든 모양이다.]

내 채근의 진의를 알았는지, 주작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까보다 자세해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정보값의 중요도는 낮았다.

내 손이 롱소드를 고쳐 쥐었다.

“그대처럼 오래된 존재들이나 겨우 알 법한 이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기쁘나, 지금은 조금 더 중요하게 들어야 할 사항이 있는 것 같군. 그래서 저건 어떻게 대항하는 거지?”

[으음? 아아… 그렇군. 고가 잘못 생각했도다.]

그래, 무슨 생각으로 정체만 말했는진 몰라도, 깨달았으면 이제 막는 방법 자체를 말해 보라고.

애초에 지금 공격해도 되는 건 맞아? 주작이 불꽃을 쏘아 내는 걸 보면 공격 자체는 해도 되는 것 같긴 한데, 섣불리 움직이자니 상황의 규모가 규모여야지. 주작의 불꽃에 팀 킬 당할까 무섭기도 하고.

[저것은 불멸이 아니되, 불멸에 실로 가까운 존재이노라. 하니 그대여, 저것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 저것을 제거하는 데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저것의 진체가 넘어오기 전 세계의 틈을 닫는 것이니라.]

“틈을 닫는 방법은?”

[신의 대리자가 온 힘을 다하여 수복하거나… 고의 친우, 숭고한 용을 깨우는 것. 그 두 가지뿐이 방도가 없도다.]

주작의 설명에 나는 얼굴을 살풋 구겼다. 반불멸과 한정된 제압법. 사람 환장하게 만들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일단… 인퀴지터를 불러와야 할 것 같군.”

“아, 그건 제가…….”

여기서 가장 발이 빠른 데스브링거가 손을 들려 했을까. 갑작스럽게 주작이 울음을 토했다. 우르릉.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지를 가르는 검은 강의 진원지 방향이었다.

[그대, 심장 조각을 가지고 저곳으로 향하라. 그리고 반환하라, 그가 본래 누렸어야 할 것을.]

주작이 무엇을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반환하란 말을 보건대 아마 숭고한 용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 준 게 아닐까.

대리자를 부르는 것도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 결국은 숭고한 용을 깨워야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쿠르릉!

[어떻게!]

“규, 균열이 하나 더…….”

하나 그 판단도 지금만큼은 늦었다. 주작이 가로막고 있는 균열 옆으로 또 하나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작이 지금 막아 세운 것만큼 크고 거대한 금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못 움직일 것 같군.”

저기서 뭐가 튀어나올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퀴지터가 자리에 없는 지금, 여기서 효과적인 대항이 가능한 건 나뿐이다.

나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무릎을 꿇고 발목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이 닿는 표면적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부츠도, 그 안쪽의 털도, 양말도 마찬가지였다.

“데스브링거.”

“예?”

아린 바람이 드러난 살갗을 조금 스친 순간, 내 손가락이 발목에 걸고 있던 체인에 닿았다. 달칵. 후크형 잠금장치가 손쉽게 풀려 나갔다.

“받아라.”

“에?”

“살갗에 접촉한 상태에서 원하는 물건을 빼겠다, 라고 마음만 먹으면 주변 공간에 적당히 꺼내진다. 꺼내야 할 물건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테지?”

“그, 거야 알긴 알지만. 왜 제게……?”

나는 망토를 뒤로 젖히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녹았던 신발의 일부분은 어느새 감쪽같이 수복된 채다. 진짜 옷이 아니란 건 이럴 때 참 편했다.

“이단심문관, 인퀴지터를 찾는 건 그대가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법사, 그대는…….”

“싸우겠다.”

“마음대로 해라.”

“아니, 저, 나리?”

좋아, 이걸로 업무 분담은 끝이다. 나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다니엘과 마법사를 뒤로한 채 아직도 얼떨떨해 하는 이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서 용에게까지 달려갈 수 있는 이는 너뿐이 없다.”

“……!”

“부탁한다.”

엄밀히 따지면 다니엘도 가능은 한데, 쟨 느리잖아. 사안의 시급성과 거리를 생각하면 역시 발 빠른 사람을 용 쪽에 붙이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그런 판단하에 말을 이었다. 데스브링거의 눈이 순간 촉촉해졌다가, 금방 결연해졌다.

“네……!”

“그래. 그렇다고 위기를 억지로 참지는 마라.”

기합이 들어간 건 좋은데, 그렇다고 무리해서 강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발이 바뀔 때마다 속력이 붙는 몸은 어느새 새로운 균열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주작, 가세하겠다.”

[…면목이 없으나, 남은 하나를 부탁하노라.]

으드득!

마침 새로운 균열에서도 무언가가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주작이 불꽃으로, 발톱으로 꾹꾹 밀어넣고 있는 주둥이와 퍽 비슷하게 생긴 머리통이었다.

뭐, 쌍둥이라도 되나 보지?

나는 그 길쭉한 주둥이를 보며 대지를 그대로 박찼다. 하얀 눈발이 내 뒤로 휘날리고 두꺼운 망토가 무겁게 펄럭였을 때, 내 발은 막 튀어나온 콧잔등을 밟았다.

균열 너머로는 드넓은 우주와 그 아래서 빛나는 눈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부디 빌건대…….”

한쪽에 세로 열로 세 개씩, 양쪽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 빛깔은 태양을 녹여 만든 금빛이되, 눈매 하나당 세 개의 홍채를 품어 기괴하기까지 한.

“이번엔 쉽게 끝나 주기를.”

뭐어, 그래도 보기 역겹거나 하진 않았다. 여태껏 겪은 놈들 중 이 이상으로 징그럽게 생긴 놈들이 원체 많았어야지. 눈 여섯 개에 눈동자 열여덟 개면 오히려 애교 수준이다.

서걱!

별개로 지역이 바뀌면 새 레이드가 열리는 국룰 따윈 버릴 때가 되지 않았어? 애초에 여긴 게임도 아니잖아. 게임과 달리 현실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기조로 돌아가 주진 못하는 거야?

나는 그런 아쉬움을 마구 품은 채 롱소드를 휘둘렀다. 대각선으로 휘둘러진 칼날은 녀석의 왼쪽 맨 위 눈과 오른쪽 맨 아래 눈을 거침으로써 괴물의 머리를 양단한다.

[친애하는 그레트헨, 내가 말했잖아.]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녀석들에겐 물리력이 먹히지 않아.]

주둥이를 밟을 수 있는 시점에서 물리적인 형태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검을 휘두른 거고.

하나 그 생각은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얻어맞은 물처럼 참방 튀어오른 괴수의 육신이 되감기듯 본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를 보는 시선의 색채였다.

금빛이 적색으로 바뀌며 열여덟 개의 동공이 오직 나만을 좇았다.

아, 이런.

모든 동공이 내게로 모인 순간, 나는 재빨리 놈의 주둥이를 박찼다. 반쯤은 직감에 따른 결정이었는데, 과연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밟고 있던 단면이 갈라지며 새로운 입이 튀어나온 까닭이다.

콱!

불룩 솟아오른 작은 입이 내가 있던 자리를 깨물었다. 맹수의 것처럼 비죽거리는 이빨은 금수와 달리 빈틈이랄 게 없다. 물렸다간 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갔을 것 같다.

촤아악!

안 물린 건 정말 다행인데, 이제 어쩌지? 나는 땅바닥에 착지하며 황급히 사고했다. 관성으로 밀려난 몸이 등 뒤로 눈을 소담히 모았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균열을 비집고 나온 대가리를 빤히 응시했다. 놈의 머리는 틈새를 거의 빠져나와, 인제는 눈뿐 아니라 귀까지 보였다. 세세한 부분이야 달라도 전체적으로는 늑대와 썩 닮은 외형이었다.

“…귀찮게.”

그렇지만 늑대는 잘생기고 멋있기라도 하지, 쟤는 징그러운 데다가 온갖 까다로운 특성만 잔뜩……!

“마법사, 방법이 없나?”

“글쎄.”

나는 어느새 내 주변으로 다가온 에루탤크를 재촉해 보았다. 그렇지만 그도 딱히 방법은 없는 듯했다. 참으로 불편한 일이었다.

“쯧.”

아, 정말이지. 물리력이 안 통한다는 건 세상 최고로 귀찮은 일이었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부정형 괴물들을 상대해 본 적이야 있지만, 걔네는 마력 담아서 자르면 잘렸던지라 지금까진 느껴 본 적 없던 까다로움이었다.

타다닥.

그렇지만 그 까다로움에 져서는 안 된다.

내 다리가 다시 설원 위를 달렸다. 목표는 대미지가 아닌 넉백. 인퀴지터가 올 때까지 녀석이 저 틈을 못 빠져나오도록 하는 게 지금 세운 계획의 요점이었다.

타악!

그리고 그를 위해선 검보단 타격기가 효과적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하에 검을 집어넣고 몸만 뛰어올랐다.

이번엔 내가 올라타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을 심산인지, 놈의 머리가 먼저 쭉쭉 늘어났다. 늑대 같은 주둥이는 그냥 두고, 일부 피부 표면에서 입 달린 촉수 같은 게 울룩불룩 튀어나오는 모양새였다.

“흡.”

하지만 내가 말이다, 공중에서 넝쿨 발판 밟고 싸우는 건 이미 터득한 사람이라서.

나는 비류호와의 싸움을 복기하며 촉수를 밟고 뛰어올랐다. 내가 밟는 곳에서 새로운 가지가 분화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촉수가 갈라지는 것보다 내가 앞으로 튀어나가고 위로 오르는 것이 더 빨랐다.

내 다리가 기어이 주둥이 정면에 섰다. 터엉! 동시에 휙 돌아간 다리가 코 부분을 때렸다. 실제로 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늑대로 치면 코였을 부분이다.

진동파가 한차례 동심원을 그리고, 나와 괴물이 각자의 방향으로 밀려났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나만 그랬다. 괴물은 고정된 벽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쇄애액!

도리어 허공에 뜬 내게로 입들이 날아왔다. 몇 개는 피할 수 있겠지만 몇 개는 살점을 좀 내줘야 할 것 같다. 발판을 잃은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다, 기척 하나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저것의 질량은 한 개의 행성과 맞먹어. 촉수라면 몰라도 진체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내 그걸 몰랐군.”

서걱!

폭이 조금 가늘다 싶은 검이 촉수들을 베어 내 경직시키고, 한 손은 내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나를 던지려 하는 것이든, 뭘 하려는 것이든 힘을 주긴 참 미묘한 위치였다.

“다리를 접어.”

“……?”

“서로를 발판 삼는다.”

하지만, 이런 의도라면 오히려 정확하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순간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곧게 폈다. 내 발바닥에 정확히 겹쳐지는 건 에루탤크의 발이었다.

간발의 차로 촉수들을 피해 날아오른 두 개의 몸뚱이가 설원 위로 다시 착지했다.

쿵!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잠깐의 위기를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상황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인퀴지터는 언제 오는 거야.

헤어진 지 오래되지도 않은 동그랗고 빨간 머리가 그리웠다.

* * *

“허억, 헉.”

한편, 데스브링거는 차갑디차가운 바람을 맞아 가며 저 너머로 향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모험가가 넘겨준 아공간 팔찌가 꼬옥 쥐여 있다.

“빌어먹을, 멀어……!”

발목보다 조금 높이 오는 눈도, 중간중간 길을 가로막는 검은 강도 그저 최악이다. 검은 강에 빠진다고 저주에 걸리거나 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옷이 젖어서 체온이 뚝뚝 떨어진단 점에선 사실 저주와 크게 다르지도 않고.

“으……!”

모든 강이 정강이까지만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로 인해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음을 괴로워해야 하는지.

데스브링거는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숨을 뱉었다. 몸의 내부는 열로 가득 찼는데 그 열이 배출될 때면 배로 추워진다는 게 너무 괴로웠다. 축복이, 하다못해 무언가의 도구라도 필요했다.

“젠장!”

하지만 그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데스브링거는 벌게진 얼굴로,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로 계속 달렸다. 점점 모이는 검은 강들은 그가 향하는 방향이 옳음을 알려 주는 중이다.

비록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는, 얼마나 남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악.”

그래도, 아무리 막막해도 가야만 해.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데스브링거는 남아서 치열하게 싸울 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슬슬 느려진 몸을 억지로라도 가누었다. 그의 몸에 젖어 든 검은 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가끔씩 떨어지며 하얀 눈 위로 흔적을 남겼다. 무겁고 차가운 흔적이었다.

“썅…….”

꼭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것 같네.

청년은 이게 동상의 전조인가 하며 애써 웃었다. 그의 어색한 웃음 이면에는 인퀴지터가 이것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믿음이 자리한다.

“샌님… 동상도 치료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잘려 나간 신체도 복구하는 사람인데 설마 동상 하나 치료 못 하겠어. 데스브링거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아득바득 움직였다. 째각.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아… 시발. 개좆됐네.”

눈치라곤 밀 한 톨만도 못한 균열이 빌어먹게도 그의 앞에서까지 나타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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