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오른눈이 보이지 않아도 (1)
“잠깐, 잠깐, 대전사님!”
베르세르크는 영관을 오르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녀의 뒤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어린 피리꾼의 것이다.
“대전사님!”
물론 소녀는 그녀를 따라잡지 못했다. 베르세르크와 소녀의 신체 능력은 동산과 태산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제가, 제가!”
다만, 잡을 수는 있어도 부를 수는 있다. 어렸던 그녀가 언니를 막지 못하되 언니의 이름을 끝없이 외쳤던 것처럼.
베르세르크는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소녀의 행동에 고개를 힐끗 돌렸다.
“제가… 대전사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문득,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쇄적으로 기묘한 물음을 그녀에게 던지는 중이다.
“부족으로 다시 돌아와 주실 거예요?”
그녀는 과연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살아서 소녀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다고 해 주시면 안 돼요?”
확실한 건, 유해의 행방을 알아내기 전까지 그녀가 이곳에 돌아오는 일 따윈 없으리란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제발, 제발요, 대전사.”
다만… 그래. 언니의 잔재를 찾는 날 따윈 아마 오지 않겠지. 태곳적 짐승이 진정 시신을 가져갔다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살아서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흐르는 불과 눈뿐이 없는 불모지를 건너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정은 정말 성립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 드넓은 대지에서 정확히 그들이 있는 위치를 찾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야?
천의 확률로 그것이 성사된다 해도, 그것이 늦지 않게 이뤄질 확률은 세상에 존재하고?
“어린 피리꾼아.”
자문 끝에서 베르세르크는 예언했다.
나는 무엇도 해내지 못한 채 죽게 될 거야. 백 년을 산 노인이 스스로에게 교시받은 말미를 말하듯, 칼에 폐를 찔린 자가 덧없이 직감하듯 그렇게 외치는 예지였다.
“자유롭게 살아라.”
그렇지만 그런 미래라도 괜찮았다. 죽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괴로운 게 그녀의 삶이었고, 그래서 미쳐 버린 게 그녀의 영혼이었으므로.
“너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랬으므로, 그러했으므로.
베르세르크는 어린 소녀를 등진 채, 어떤 세계의 끝으로 나아갔다. 한때 그녀의 언니가 그리했던 것처럼.
* * *
“우왁!”
찝찝함에 온 이목이 사로잡혔을까. 비명 한 번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화륵! 앞으로 뻗어 나간 손은 이성보다 먼저 일을 이행하는 중이다. 데스브링거를 덮치던 녀석들이 불꽃에 휩싸였다.
서걱!
나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다니엘이 상대하던 놈들에게도 검을 뻗었다. 다니엘이 아득바득 상대하던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쪼개졌다.
샤각. 정정하겠다. 두 마리가 갈라졌다. 원인은 에루탤크가 휘두른 칼날이었다. 단순하지만 예사롭지 못한 검로에 절로 눈이 향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경.”
그사이, 나와 에루탤크가 각각 한 마리씩 처리해 줌으로써 1대1 구도가 된 다니엘이 남은 한 마리를 손쉽게 밀어냈다. 검으로 베고 손으로 할퀴듯 휘젓는 모습에선 어째 노련함이 엿보이는 듯하다.
화륵!
“어떻게 된 거지?”
아, 왜 손을 추가로 휘둘렀나 했더니 이러면 경직 시간이 느나 보네.
나는 1초에서 2초 굳는 걸로 변한 우주티끌에게 불티를 튕겼다. 화르르륵. 불꽃이 검은 안개를 살라 먹으며 찰나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게…….”
“세계의 균열이다.”
다니엘이 설명하기 전 숨을 잠깐 골랐을까. 호흡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에루탤크가 툭 하고 설명했다. 그의 검은 한쪽 방향을 우뚝 가리키는 중이다.
“노르다인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빙하의 시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저것이…….”
와, 진짜 게이트!
나는 부서진 유리창처럼 보이는 균열을 보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영화나 게임 CG로 많이 보던 이미지라 새삼스럽게 놀랍진 않았다. 그냥 좀 떨떠름할 뿐이지.
“말 그대로 균열이군.”
“…갑자기 저게 나타나는 바람에 곤욕이었습니다요.”
“경께서 와 주시지 않았다면 필시 문제가 생겼겠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별개로 이 세계는 장르가 대체 몇 개나 짬뽕이 된 거야? 그리고 우주의 티끌인지 뭔지는 뭔데 이 순간에도 쉼 없이 기어나온대? 저거 닫힐 때까지 계속 넘어오는 구조라도 되는 거야?
“저건 계속 새어 나오는 건가.”
“균열을 닫기 전까진 계속 나올 거다.”
진짠갑네.
“귀찮군.”
나는 균열 너머로 비치는 검고 은하수가 가득한 우주를 슬 보다가, 거기서 나온 티끌들에게 불꽃을 쏘아 보냈다. 나오는 족족 활활 타오르는 게 꼭 폐기물 처리하는 기분이었다.
쓰레기를 향한 본능적 불쾌감과 그 불결한 것들이 처리된다는 시원함, 보람 따위가 교차했다.
“균열을 닫는 방법은?”
“닫는 방법은…….”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내 마력도 영원하진 않으니까.
“모르나?”
“…균열 안으로 진입해, 차원벽을 뜯어먹는 거머리를 죽이면 된다.”
“그렇군.”
그런데 에루탤크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지? 마법사라서 안다고 하기엔, 빙하의 시련은 노르다인들만의 비밀이잖아. 그것도 전사 계급들만 공유하는 비밀.
에루탤크가 마탑주와 밀접한 사이라서 알고 있다고 여기기엔, 무언가 꺼림칙하다. 내 시선이 그에게로 되돌아갔다.
“넌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다. 단지 궁금할 뿐.”
수상함이야 받아들일 때부터 각오한 바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높은 지식 수준이나, 평범하지 않은 검술 실력 같은 걸 보게 되면 호기심은 절로 쌓이는지라.
「…저기.」
‘왜?’
「…아, 아니에요.」
‘뭔데. 그냥 말해.’
「아니, 그… 기분 탓인 것 같아서.」
‘괜찮아. 일단 말해 봐.’
거기에 내 머릿속에는 나 외에도 의문점을 제시해 줄 인간들이 살고 있는 참이다. 자신감을 바닥에 마구 던져 낸 소년의 목소리가 우물쭈물 이어졌다.
「그으, 정말 별거 아니긴 한데… 저 마법사, 뮌문트의 검술을 배운 것 같아요. 제 착각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자신 없어 하는 소년의 태도와 달리, 그렇게 가벼운 무게의 말은 아니었다. 검 자루를 툭툭 두드리던 내 손이 그것을 꽉 쥐었다.
하필이면 뮌문트.
‘…더 자세히.’
「그러니까… 검술이란 게 지방마다, 그리고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거든요. 발 스텝이라거나 검을 쥐는 법이라거나… 그런데, 저 사람의 것에선 묘하게 뮌문트 고유의 느낌이 나요. 조금 애매하긴 해도요.」
‘…내가 뮌문트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뮌문트의 검술이 흔히 볼 수 있는 편이야?’
「그럴 리가요. 검술도 일종의 비전이라서 함부로 유출하지 않아요. 중도 포기자 출신이거나 그에게 배웠다고 하면 딱히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나는 에루탤크가 합류할 때를 떠올렸다. 하얀 까마귀는 분명 저이를 두고 체술을 갈고닦았다고만 말했지, 검을 제대로 사사했다곤 이야기 안 했지.
물론 전자의 문장이 후자의 뜻을 포함하긴 한다. 하나 언어란 게 뉘앙스에서 전해지는 맥락 또한 있는 법 아니겠나. 전자의 문장을 듣거든, 보통 배움을 받은 것보다 홀로 수련하는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파우스트.’
「네.」
‘뮌문트… 뭐 그런 걸 떠나, 저 사람의 검술 그 자체를 본 적 있다는 느낌은 없어?’
「…사실, 조금요. 본 동작이 몇 개 안 돼서 확신은 안 서요.」
‘그거면 됐어.’
그런 점에서 이 교묘한 농락은 역시 무언갈 숨기기 위함이 아닐까? 이 마법사의 정체든… 혹은 그 너머의 것이든 간에.
“마법사.”
“왜 부르지.”
“이 질문이 그대를 상처 입힐 수 있음은 미리 사죄하겠다. 하나 가능한 답변을 돌려줬으면 좋겠군.”
“나리?”
나는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이 나를 의아하게 보건 말건, 에루탤크에게 품어 온 질문을 던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그에게 상당히 무례한 주제일 걸 알기에 지금까진 참았지만… 이만큼 의구심이 쌓인 지금은 안 되겠다. 나는 쓰레기가 될 것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하얀 까마귀가 만들고 싶어 한 마검사는 정확히 무엇이지?”
그는 마검사를 말할 때 내 존재를 언급했다. 그것을 통해 하얀 까마귀가 바라는 ‘마검사의 상’을 대충이나마 가늠했지만… 지금 와선 다시 궁금해진다.
하얀 까마귀가 만들고자 하는 마검사는 정말 내가 떠올린 개념과 같을까?
“우습군. 그 질문을 하는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라는 것은.”
“그래서, 답은?”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도 신체의 조종에 어려움이 없는 존재. 마법을 다루지 않을지라도 마법이나 다름없는 이적을 보일 수 있는 자. 그것이 하얀 까마귀가 바란 마검사의 상이다.”
“…그렇군. 하면 두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대는 실패작인가?”
이 사람의 정체는 진정 내가 모르는 사람일까?
“나, 나리!”
“…경.”
누가 들어도 몰상식하게 느껴질 발언에 당사자보다 다른 이들이 먼저 경악을 표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그런 말? 해석하자면 그쯤 될 표정이었다.
“…실로, 무례하다.”
다만 저들의 충격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부분이라.
나는 마법사에게 집중했다. 어떤 감정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그 점은 사과하지. 물러날 수 없는 부분이라.”
마음 같아선 당사자 말고 분노를 털어 보고 싶은데,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그놈이 절대 인정할 리 없다. 해서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일부러 에루탤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만일, 그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절대 이를 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난 실패작이다.”
…근데, 아닌가? 내가 틀렸나? 내가 봤을 때, 정말 그 사람이면 이 도발은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았을 텐데.
「그…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야.’
아니… 아닐 수도 있지. 내 캐해석이 틀린 것이든, 그냥 내 오해였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나는 그렇게 상념을 갈무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절박하지 않음에도 우리와 함께한 이유는 무엇이지?”
“질문이 많군.”
“그 또한, 사과하지. 단지 그대 정도면 마탑주의 강제만으로 이곳에 합류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이젠 진짜 시간을 더 끌기 어렵다. 나는 균열로 차차 걸음을 옮기며 마법사의 답을 기다렸다.
다만 그때까지 답이 안 오는 걸 보면, 역시 빡쳐서 더는 대답해 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각오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갔다 오겠다.”
“저도…….”
“혹시 모르니 남아 있도록.”
그렇게 내가 균열에 막 발을 넘기려 했을 때. “나는.” 마법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만을 죽일 것이다.”
뒷말은 안타깝게도 듣지 못했다. 째그락. 균열이 조금 많이 커지고, 균열 너머로 비치던 우주에서 어떤 점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균열이 점점 더 위로, 위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
[피해라!]
그 뒤는 잘 모르겠다. 인지를 통하는 대신 본능을 따라 몸을 굴리고, 두 사람을 뒤로 집어 던진 후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보호하듯 껴안았다는 것밖에는.
콰아아앙!
그리고 우리의 몸이 눈 위에 엎어졌을 때, 굉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두둥실 떠오르는 눈송이들은 잠깐 동안 땅과 하늘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착시를 준다.
“크읏.”
아래에서 스크래치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오는 사이, 나는 몸을 뒤틀듯 들추었다. 등에 내려앉았던 눈이 떨어지고 내 시야가 하늘 쪽으로 돌아갔다.
“……!”
“저, 건.”
이런, 미친. 나는 거대해진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거대한 주둥이를 보며 입술을 조금 벌리고 말았다. 내가 몸을 옆으로 비킴으로써 시야가 트인 에루탤크도 비슷했다. 정신적 충격이 우리들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뒤로 물러나라! 당장!]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저 미지의 것에 그저 노출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긴급하게 날아온 주작이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그의 준엄한 외침과 쏟아지는 불꽃의 세례는 상황의 심각성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려 주는 듯하다.
“가지.”
지금이다. 나는 주둥이가 불꽃에 처맞는 동안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겸사겸사 에루탤크에게도 손을 뻗는 걸 잊지 않았다. 혼자 몸을 일으키는 것보단 잡고 일어나는 게 더 빠를 것이기 때문이다. 접촉을 싫어하던 그도 이번만큼은 거절하지 않았다.
타닥타닥.
아무튼 우리는 빠르게 몸을 물렸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위치는 내가 뒤로 던져 버렸던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채다.
“겨, 경. 감, 감사합니다만. 다음번엔 경고라도 부디 해 주심이…….”
“코, 코피가…….”
다만 둘 다 착지가 잘못된 모양이다. 마주친 다니엘은 허리를 두드리고, 데스브링거는 코피를 줄줄 흘렸다. 뭔가 미안해졌다.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아깐 진짜 급했어. 나는 이 순간에도 불꽃을 밀어내며 균열을 비집고 나오는 존재를 일별했다. 저것의 정체는 여즉 짐작도 가지 않으나, 저게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란 직감만은 선명했다.
본인들의 고통에 쩔쩔매던 두 사람도 그 존재를 인지한 후엔 입을 꾹 다물었다.
“주작, 설명해라.”
그래서 갑자기 튀어나온 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내 질문에 주작이 침음을 삼키며 설명했다.
[숭고한 용이 막고 있던 것들이다. 오늘에 이르러, 기어이 한계에 달한 듯하다마는.]
딱히, 해결법을 함의하고 있는 답은 아니었다. 빌어먹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