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왼눈이 뜨이지 않고 (7)
쾅!
베르세르크는 부뜰이 무너질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흉흉한 낯은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진 것이 새어 나온 결과다.
“저, 잠깐─”
똑똑한 것들은 항상 그렇다. 거짓 없는 말을 열거함으로써 신임을 사되 진정 중요한 진실들은 은근슬쩍 가린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본인은 발을 뺄 수 있게, 책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의 것이 되도록.
“비켜라.”
그것이 원망스럽느냐면, 딱히 그렇진 않다. 세상은 정직한 자보다 약은 자가 득세하기 쉬우며,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려 하지 않던가.
하니 마이스터가 그녀를 교묘하게 속이려 한 것도, 그녀가 자칫하면 그것에 넘어갈 뻔했던 것도 상관없다. 그건 정말 괜찮다.
“저, 그게. 저희가 당부받은 건 말들의 안전만이 아니라서…….”
그것 자체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녀를 이용해 먹으려 들거나 그녀를 속이려 들었던 교활한 인간 따윈 지난 이십 년 동안도 정말 많았으니까. 정말, 정말 많았으니까.
“안 죽일 거다. 비켜라.”
“그런 얼굴로 말하셔도…….”
“푸른열망의 파미르.”
하지만 언니의 마지막 흔적이 시시각각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만은 견딜 수 없다. 그녀가 되찾기도 전에 유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나는 너와 네 친우들의 목을 꺾지 않는 것으로 나의 인내를 증명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더 이상 시험하지 마라.”
하므로 베르세르크는 한 자 한 자 긁어낸 영혼으로 절규했다.
“비켜라.”
꿀꺽. 푸른열망의 파미르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발을 물렸다. 문과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쾅!
베르세르크는 거침없이 그 길을 나아갔다. 힘 조절을 하지 않은 덕택에 벌컥 열린 문의 바깥 손잡이가 으스러졌다.
“피리꾼!”
“헛, 예, 예!”
그녀는 그대로 마이스터가 있는 주택에 들어갔다. 거실 안쪽에서 무언갈 뚝딱거리고 있던 대명장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 쯧. 마주친 눈이 찌푸려지며 혀를 찼다.
“영관 너머에 갈 것이다. 너는 이만 부족으로 돌아가라.”
“예… 네?”
“지금 가진 식량이면 충분할 테지?”
하나 그것에게 나눠 줄 관심 따윈 없다. 저것을 죽인다고 해서 나아질 기분도 아니거니와, 저것에게 팔찌를 넘겨준 악마기사의 심정을 존중해서라도 저것의 목을 딸 순 없었다.
베르세르크는 대명장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자신의 짐을 챙겼다. 다듬어진 무기와 무기. 그 이상의 짐은 불필요했다.
“자, 잠깐, 대전사님. 갑자기 왜…….”
“가라.”
피리꾼의 실력이면 충분히 돌아가겠지. 아니더라도 일일이 챙겨 줄 여유가 없다. 베르세르크는 소녀가 알아서 할 것을 믿으며 발길을 다시 돌렸다.
“지금 가도 늦을 텐데.”
“안다.”
삐걱. 열린 문 사이로 막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 하나가 흘러들었다.
“그래도 갈 거다.”
언제나처럼, 춥디추운 눈이었다.
* * *
서걱!
나는 굳은 몸을 풀어 줄 겸, 가장 가까이 있는 부정형 괴물의 몸뚱이를 베어 보았다. 물이나 쌓인 눈을 벤 것 같은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일렁.
이어서 검을 휘둘렀을 때도 비슷했다. 찝찝한 손맛과 함께 네 조각 난 연무가 얼마 안 가 하나로 합쳐졌다.
“음.”
공격보다 복원에 중점을 두는 걸로 보아 대미지가 들어가긴 들어간 것 같은데… 부정형이라 그런가, 참격도 별로 효과적인 것 같진 않다. 뭐어, 공격보다 복원을 우선하는 걸로 보아, 동작 정지로 인한 시간 벌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지만.
흐으웅─!
그사이 괴물은 바람 소리와 비슷한 울음을 토해 내며 내게 다가왔다. 겉보기엔 검은 안개가 사람을 먹으려 드는 모양새였다.
“나리!”
“걱정 마라.”
다만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다. 나는 뒷걸음질로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딱. 물러나며 튕긴 손가락이 허공에 불티를 일으켰다.
화르르륵!
끼이이이─!!
“흠.”
오, 이건 좀 잘 타네.
나는 불꽃에 삼켜지는 괴물을 보며 다른 방향으로도 손가락을 내밀었다. 불을 일으키는 데 꼭 손가락질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요격 위치를 정하는 데는 기준점이 있는 게 편했다.
조금 떨어진 위치의 괴물 다섯 마리가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베기나 찌르기로 죽이는 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좋아. 이 정도면 정보 나눔 할 시간은 충분히 벌었겠지. 나는 그런 판단하에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에루탤크를 가운데 두고 막 원형진을 짜는 중이다.
뭐, 말이 진이지 실상 에루텔크 옆에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이 선 것에 불과하지만은.
“엑. 그렇습니까요…….”
“으음… 곤란하게 됐군요.”
“하면 모험가님, 정화는 먹힐 것 같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군. 그렇지만 통할 것 같긴 하다.”
애초에 정화의 원리가 그거잖아. 더 많은 신성력으로 반발하는 기운들을 제압하고 으깨는 거.
그러니 저것들이 신성력과 상극이기만 하면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비록… 신성력이 조금 많이 들겠지만.
“흠, 그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인퀴지터도 조금 긴가민가했는지 직접 시험에 나섰다. 다짜고짜 고코스트의 정화를 쓰기엔 좀 부담됐는지, 끌어올려진 신성력은 커다란 방패에 우선해서 펴 발라진다.
“흡!”
퍼억!
다만 청년이 방패로 공격하는 방식은 제법 충격적이었던지라.
나는 방패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괴물의 대가리─윗부분?─를 후려치는 행위에 무심코 입을 벌렸다. 내 머릿속에는 예부터 유구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개그용 짤 몇 개가 둥실둥실 떠오르고 만다.
“흠. 확실히 타격은… 어떤 기운을 동원하든 정말 안 통하는군요.”
“종이야 다르지만, 기존의 부정형 악마 대하듯 싸우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심문관 형제님의 말이 옳습니다.”
별개로 이게 깡 소리가 안 나네. 나는 약간의 안쓰러움을 담아 평평해진 괴물의 윗부분을 보았다.
괴물은 현재 헤드 판정을 받아 스턴에 걸린 몹처럼 완벽히 정지한 상태다. 머리도 없고 자연히 뇌도 없는데 왜 굳은 건지는 도통 모르겠지만서도.
끼이이이익─!
“확실히, 정화가 더 효과적이군요.”
각설하고, 인퀴지터도 결국 물리 타격을 포기한 채 정화를 주축으로 돌렸다. 괴물이 한 마리 더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에루탤크 님, 부정형 악마와 싸우는 법을 아십니까?”
“안다. 하지만 네가 아는 것보다 더 걸릴 거다.”
“그건 감수해야겠지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뭐, 뭔데요.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난 모른다고요.”
“아, 당신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냥 마법사님을 보호하면 됩니다.”
“어… 마법 쓸 시간 벌려는 겁니까요?”
“예. 잘 아시는군요.”
와중에, 상성이 맞지 않던 두 사람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들 스스로 얻어 낸 해법은 아닐지언정 수상함을 무릅쓰고 마법사를 데려온 보람은 있는 돌파구였다.
역시 유틸 쪽으로는 마법사를 따라갈 수 있는 직업이 없다.
“세 분도 방도를 찾으셨습니까?”
“아, 예.”
“그럼 구역을 나누지요. 여러분은 이쪽 방면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모험가님은…….”
“이쪽으로 가지.”
“예.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쪽을 도맡겠습니다.”
하여간 각자 방법을 찾았으니 이제 분담만 하면 된다.
우리는 피자를 자르듯 영역을 셋으로 쪼개, 나 하나, 인퀴지터 하나, 저 셋이서 하나씩 나누어 맡았다. 비율로 치면 2:2:0.5 정도였다.
“기사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산답니까…….”
“어쩔 수 없지요. 만용을 부릴 환경은 아니니까요.”
새삼스럽게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이 박탈감을 느끼긴 했지만, 뭐 어쩔 도리 있나. 다니엘 말마따나 만용 부리면 목숨이 회까닥인데.
“호기를 부리는 건 이해하나, 다치진 마라.”
그런 이유에서 나는 가볍게 데스브링거의 어깨를 도닥였다. 춥다며 옷가지로 몸을 꽁꽁 싸맨 청년이 몸을 흠칫 굳혔다. 너무 과한 응원이었나. 잠깐 후회가 됐다.
“…네.”
“그래.”
다음부턴 좀 더 조심할까. 멋대로 굴어도 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요즘 선을 파악하는 게 좀 어렵단 말이지.
나는 그따위 고민을 주워 삼키며 내게 할당된 구역으로 휘적휘적 나아갔다.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화르르륵!
끼이이이─!
나는 검은 안개 괴물이 눈에 들어오는 족족 그것을 태웠다.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은근히 마력 소모가 컸지만, 일반 공격이 안 통하니 별수 없었다. 괴물의 수가 많진 않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래도 일반 짐승에 비하면 면적 대비 마력 소모가 더 큰 것 같은데… 맞아?’
「네, 맞아요.」
‘내성이나 저항력 같은 거라도 있나.’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저도 저런 건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너야 그럴 만하지.’
여기서만 나오는 놈들 같은데, 그런 녀석들을 파우스트가 어찌 알겠나. 내가 오기 전에 여기 올 일이 있었을 리도 없고.
‘야, 악마. 너는 아냐?’
그렇지만 얘는 아니겠지. 나는 오랜만에 분스비에게 말을 걸었다.
[…뻔뻔하네. 사람 가둬 놓고 그런 걸 물어보기야?]
‘모름 말고.’
[우주의 티끌들이야. 차원과 차원 사이를 기어다니는 만큼 저항력이 뛰어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감수하고.]
미련 없이 물러나려고 하자 분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럴 걸 모르지 않으면서 매번 이러는 건 무슨 심리인가 싶다.
‘더 쉽게 죽이는 방법은?’
[없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최선이고 가장 편한 수단이야. 저건 물리력이 아예 안 먹히니까.]
아니면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받아 주는 걸 기대하는 건가? 허. 양심 터졌네.
‘그래. 없으면 됐다.’
정말이지 염치도 없고 도움 안 되는 자식. 나는 옆쪽에서 다가오던 우주의 티끌을 하나 더 태워 버린 후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갔다. 퉁. 발코에 무언가가 걸렸다.
“……?”
이게 뭐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한 번, 그런 허공에 막히는 부츠 앞코를 한 번 번갈아 살폈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뭐가 있나? 나는 기연미연한 마음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통. 부츠가 막혔던 것처럼 손 또한 투명한 무언가에게 가로막혔다. 꼭 투명 플라스틱 판이 내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막혔다.」
“…이래서 세계의 끝이었나.”
나는 다른 손도 들어 그곳에 가져다 대었다. 굴곡 없이 평평한 벽이 장갑 너머로 느껴졌다. 내가 만지고 있는 부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양옆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게 분명한 벽이었다.
“이 무슨, 필드에 제한 걸어 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뚝 끊겨 있다거나, 넘을 수 없는 협곡 같은 게 있다거나, 바다가 대신 펼쳐져 있다거나… 그런 식으로 끝을 보여 줬다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웠을 텐데.
투명 벽을 쓰니까 느낌이 좀 이상하다.
나는 매끈한 벽을 좀 더 쓰다듬어 보다가, 그대로 손을 떼었다. 누가 보면 마임 하는 줄 알겠어. 내가 대는 변명은 대충 그러한 것이다.
「세상의 끝은… 이런 식이었네요. 뭔가… 신기해요. 다른 곳은 바다뿐이 없는데.」
‘그러게.’
「…만약 그 바다도 끝없이 나아가면 이런 끝이 나올까요?」
‘어…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여긴 순한 맛 콜럼버스가 없나?’
「콜럼버스?」
뭐, 내 기분이 어떻든 이미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이다. 전진이 막힌 이상 우주의 티끌 사냥도 더는 어렵겠고.
‘아. 콜럼버스라고, 바다 저편에 인도란 나라가 있을 거라며 몇 달의 항해 끝에 엉뚱한 대륙을 찾아 버린 사람이 있어. 정복 전쟁을 벌이고 그곳의 주민들을 학살한 점에서 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 이제 어쩔까.
‘정 궁금하면 네가 직접 가 보는 건 어때.’
「…제가요?」
‘그래. 난 이제 바다라면 좀 질색이라서…….’
「…저도 바다는 좀. 뱃멀미는 너무 어지러워요.」
‘아, 그것도 그렇네……. 그럼 그건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자.’
어쩌긴 뭘 어째. 다른 놈들 도와주러 가야지.
‘대신… 책을 편찬하든 뭘 하든 이곳에 대한 걸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 줘 보는 건 어떨까? 중요한 정보는 숨겨야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너도 방금 바다 너머를 궁금해했잖아. 그것처럼 영관 너머의 땅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알아. 하다못해 뮌문트의 소성주한테도 여기 얘길 들려주면 흥미로운 태도로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은데.’
「소성주님이 바깥을 좀 궁금해하는 편이긴 했죠……. 근데 그건 저 말고 그레트헨께서 하시는 게 좀 더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일이 끝나면 난 평범한 주민1이 될 거라고.’
나는 세 명이 담당한 구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기준 대각선으로 점점 멀어지게 흐르는 검은 강이 어렴풋이 보였다.
‘거기에 말이야. 평범한 주민들은 보통 세계의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거든? 그걸 알면 절대 평범한 주민이 못 되거든?’
그리고 그 검은 강 사이로 곧 점 같은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지는 점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곽선이 인간과 안개, 그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러니까 네가 말해 줘.’
「…….」
‘소성주는 정말 좋아할 테니까.’
또한 두 가지로 나뉜 그 그림자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단심문관의 묵직한 검술, 재빠른 도적의 찌르기. 마지막으로…….
“……?”
나는 안개의 수가 생각보다 많음을 인지한 순간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나 그것보다 먼저 괴물에게 향한 것이 있었으니.
“경이롭구나.”
흔해 빠진 디자인의 철검이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사위의 검은 기체들을 벤 순간, 나는 이질적인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저 움직임, 어디서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