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왼눈이 뜨이지 않고 (6)
중간에 네 사람과 네 마리를 내려 주고, 용암이 강처럼 흐르는 땅을 내려다보며 하루를 꼬박 더 날았을까.
우리는 바다를 만났다. 유빙과 암초가 그득그득하여 배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을 바다였다.
“저게 세계의 끝입니까?”
[아니. 세계의 끝은 바다 너머의 땅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그보다도 더 멀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물통의 물이 얼고, 바람으로 인해 불도 피우기 힘들며, 마법사나 인퀴지터가 나서지 않으면 잠을 청하기도 힘든 환경이 사흘 더 지속되었다.
[이제 거의 다왔구나.]
그리고 얼음 반 물 반의 바다가 끝났을 때, 우리는 드디어 세계의 끝을 마주했다.
내 상상과는 많이 다른 형태의 끝이었다.
“저기가 세계의 끝…….”
“끝이라는 느낌이 아닌뎁쇼……?”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저 뒤에 땅이 더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건 땅이 아니다.]
솔직히 보이는 것만 그대로 표현하면, 그건 그냥 새로운 대륙이었다. 굴곡이라곤 하나도 없되 검은 물이 지표면에 흐르는 눈의 대륙.
뚝 끊긴다거나, 표백된다거나, 부서지고 있다거나. 그런 식의 이펙트라곤 아주 조금도 없었다. 주작의 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곳이 세계의 끝이라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저 새로운 땅이겠거니 여기지.
“땅이 아니면……?”
[후후, 아래로 내려가게 되거든 직접 보라. 천 개의 단어를 늘여도 한 번의 체험만은 못할 테니.]
우리의 의문에 주작이 껄껄 웃었다. 간단한 힌트조차 주지 않으니 호기심은 더 깊어졌지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내린 후를 기약하는 수밖에는.
“별개로…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군요.”
[고 혼자만의 비행이 아니니 어쩔 수 없도다. 걸음을 재촉하는 대가로 그대들을 낙오시켜야 본말전도가 아닌가.]
“그건 그렇죠.”
[자, 내려가겠다.]
허, 참. 저게 정말 세계의 끝이라고? 대체 뭘 근거로 끝이라 하는 거지.
머릿속에 온갖 추측을 늘어놓는 사이, 주작이 서서히 하강을 시작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게 절대 아닌, 나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비행이었다.
[쯧. 그 잠깐 새에 벌레들이 또 증식했군.]
“벌레?”
[설명에는 시간이 요구된다. 하여 그런데, 그것들의 처리를 우선해도 되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존재라면 마땅히 그러할 일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도리어 저희가 도울 일은 없─?”
인퀴지터의 물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고도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설원 위가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눈밭을 종횡하는 검은 것들. 우리는 벌레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졌다.
“저건 뭐랍니까……?”
드라우거도 아니고, 저게 뭐람. 꼭 먼지 뭉치… 아니, 검은 안개처럼 생겼네.
“저것도 악마입니까?”
“…악마와는 조금 다르군요. 하지만 이 세상의 생물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그대의 말이 맞다. 저것은 이 땅의 생명이 아닌, 차원과 차원 사이를 방황하던 존재들이다.]
펄럭!
날갯짓에 이는 풍압으로 쌓여 있던 눈을 날려 보내며 주작이 바닥에 착지할 준비를 했다. 우으으. 설원 위를 돌아다니던 부정형 괴물들이 우리에게 주목했다.
“징그럽진 않은데 뭔가 꺼림칙한 놈들이네요.”
“이 세상의… 질서와 다른 방식으로 태어난 것들이니까요.”
[물리적인 공격이 먹히지 않으니, 신성력이나 마력을 동원하여 타격하라.]
눈코입도, 명확한 형체도 없이 그저 검은 가루로 이루어진 생물이라. 나는 고민 좀 하다가 마력창을 가볍게 소환해 보았다.
푸욱!
마력창이 괴물의 몸을 관통하고, 그 자리에 동그란 구멍을 남겼다. 그마저도 곧장 메워지는 구멍이었다.
“이런 식의 공격은 효과적이지 않은 듯하군.”
“그러게요.”
관통당한 순간 몸 전체의 기류가 흔들린 걸 보면 타격이 아예 없는 것 같진 않다. 하나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마력창을 공격 방법에서 제했다.
“일단 먼저 가지.”
“앗!”
그럼 이제 베거나 때려 볼까. 나는 바구니에서 크게 뛰어, 대지 위로 착지했다. 하루 가까이를 같은 자세로 보낸 몸은 엄청나게 찌뿌둥했으나 어떻게 균형은 잡아 냈다. 나는 망토 안에서 뻑뻑한 근육을 풀었다.
[고는 멀리 떨어진 것들을 죽이고 오겠노라. 이 일대를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흐으으으.
그사이 일행들이 차례차례 주작의 등에서 내려왔고, 바람 소리인지 괴물이 흘리는 소리인지 모를 것은 내 귀를 간지럽혔다.
“몸풀기로는 적격이군.”
아, 공포 브금 서라운드는 좀 선넘지.
내 손이 한손검 형태의 라텔을 단단히 쥐었다.
* * *
“어, 어라. 내가 왜 여기에……?”
“오, 바우티야 깼다.”
웅성웅성 닿아 오는 소근거림에 베르세르크는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슬쩍 내다본 창 바깥은 해의 위치가 사뭇 달라진 상태다.
“뭐야, 나 왜 여깄어?”
“우리 쓰러졌다. 바우티야는 기억 못 하나?”
얼추 다섯 시간 정도 숙면한 건가. 베르세르크는 해의 기울기로 시간을 계산한 뒤, 피리꾼 소녀가 깨어났는지를 확인했다.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소녀는 여전히 꿈나라에 갇혀 있는 상태다.
“우리가 날아온 눈덩이에 맞고 기절해 있던 걸, 파미르가 발견하고 주워 왔다 했다.”
“눈……? 아닌데. 마지막의 그건 눈이 아니라…….”
얘를 깨울까 말까. 베르세르크는 소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콧김의 강도로 보아 단시간 내에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세르크는 어린 피리꾼을 더 재우기로 했다.
“깼냐?”
“그래.”
“무기 다 해 놨으니까 확인해 봐.”
“빠르군.”
마침 그런 그녀에겐 확인해야 할 것도 있었다.
베르세르크는 마탑을 박살 내 줬단 이유로 대명장이 매만져 준 도끼를 회수했다. 잠들기 전과 비교해 바뀐 것이라곤 손잡이 부분이 다였다.
“마법이 새겨진 부분은 안 건드렸어, 도구가 없어서.”
“그래.”
하나 ‘고작 손잡이?’라고 하기엔 쥐었을 때 오는 느낌이 확연하게 다르다. 베르세르크는 전보다 훨씬 잡기가 수월해진 도끼를 휙휙 휘둘러 보았다. 확실히,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제법이군.”
“누가 한 건데, 당연하지.”
베르세르크는 마이스터의 실력을 인정하며 도끼를 허리춤에 걸었다. 바뀐 고리의 위치가 걸리적거림을 제거하고 수납의 용이함을 선물했다. 이걸 만든 마탑에선 왜 이렇게 안 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갈 거냐?”
“아니. 가볍게 돌아만 보고 올 거다.”
“그래.”
각설하고, 무기에 변화가 생기면 한번 시험해 봐야 하는 법이다. 소녀가 깨길 망연히 기다리는 것도 낭비인 참이고.
“너희도 가지?”
“예, 예?”
“말들 안 돌봐?”
“아, 옙!!”
베르세르크는 마이스터가 다른 이들을 갈구건, 벽돌같이 생긴 걸 이리저리 매만지건 안중에 하등 두지 않은 채 나갈 채비를 했다. 멀리 나갈 건 아니기에 단단한 준비 같은 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녀는 무기 두어 개와 망토, 물통 하나만을 챙겼다.
“어휴, 심장 쫄려 뒈지는 줄 알았네…….”
다만 그녀가 집을 나서는 때와 쪼임을 받은 이들이 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순간이 공교롭게도 겹쳤다. 베르세르크의 시선이 그들에게 슬 향했다.
“하늘멧돼지? 푸른열망? 둘 중 어디지?”
억양이나 생김새로 보아 노르다 출신인 건 분명하다. 악마기사와 정식으로 일행을 꾸렸다면 분명 잘 먹고 다녔을 텐데, 셋 다 깡 마른 것으로 보아 같이 다닌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고.
하면 그들은 왜 악마기사와 함께 다니는 걸까? 마이스터는 왜 세계의 끝으로 가지 않았고?
“어… 설마 싶었는데 댁도 노르다인?”
복잡한 정치나 음험한 모략, 숨겨진 배경을 집요하게 캐내는 행위 따위를 썩 좋아하는 편은 못 된다. 그러나 선호하지 않는단 게 못 한다는 소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
필요하다면 한다. 베르세르크는 마이스터와 대화 나눈 직후, 줄곧 느껴지던 꺼림칙함을 해결하고자 그들과의 대화에 나섰다.
“오… 미안. 들어 본 적 없는 억양이어서 긴가민가했어.”
“이해한다.”
“가이니르와 파미르는 푸른열망이고 난 하늘멧돼지 출신이야.”
“푸른열망, 하늘멧돼지 전부 망했다. 그래서 우리 함께한다.”
“댁은?”
“달그림자. 지금은 절연했다.”
“오… 그래.”
베르세르크는 이들을 따라 마구간으로 따라 들어갔다. 안면 있는 말이 하나, 처음 보는 말이 셋 정도 보였다.
히이이잉.
“갑자기 왜 그래.”
“파미르! 우리 왔다.”
“아, 드디어 깼… 뒤의 당신은?”
베르세르크는 불안해하는 말들을 배려해 자신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보통 말보다 더 예민한 녀석들인지 넷 다 입술을 몇 번 더 떨었으나, 무해한 스탠스를 꾸준히 유지하자 금세 진정했다.
말의 투레질에 애먹던 인간 하나가 드디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베르세르크.”
“…달그림자의?”
“나는 그곳에서의 도리를 다했다. 앞으론 조심해 줬으면 좋겠군.”
“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정체라… 푸른열망의 파미르입니다.”
그들은 부족마다 달라지는, 그렇지만 눈치껏 통일된 북부식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았다. 가구들은 다 내버렸을지언정 부뜰은 남아 있어서 충분히 그게 가능했다.
“왜 저들과 함께하지?”
“말하면 좀 길어지는데…….”
술과 먹을 것이 있었다면 좀 더 좋았을 텐데, 베르세르크는 사람의 입을 여는 데 탁월한 물품들을 떠올리는 한편, 느긋해 보이는 태도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조급함을 숨기지 않고 재촉하거든, 저들이 경계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마이스터가 입을 꽉 다문 지금, 든 의구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이들뿐이다. 결코 경계를 사선 안 됐다.
“…래서 합류했죠. 남쪽으로 가면 최소한 먹을 거라도 있을 테니까.”
“흐음. 그런 이유였나.”
“예, 예.”
“그럼 지금 말을 돌보고 있는 건?”
“아, 부탁받은 겁니다. 부족에 맡겼다간… 아시잖아요? 잡아먹힐 거라는 거.”
“그건 그렇지.”
다행히 베르세르크란 이름값은 다른 덴 몰라도 노르다에서만큼은 탁월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그것을 십분 활용해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다만… 내가 알기로 말은 생초짜끼리 돌볼 만한 짐승이 아니다. 짧은 기간이 아니라 달 단위라면 더더욱. 그걸 모를 리 없음에도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군. 세계의 끝으로 가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될 텐데……?”
“그게 말입니다…….”
그녀는 악마기사가 세계의 끝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품었던 의문을 꺼내 두었다. 파미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난처해졌다. 이걸 말해야 해, 말아야 해. 표정의 의미는 분명했다.
베르세르크는 고민하는 파미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머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쟤는 좀 신중해 보이니, 보다 입을 잘 놀릴 것 같은 이를 골라내기 위함이었다.
“달? 그렇게나 오래 걸리나? 이상하다. 파미르, 그들은 열흘 안에 올거라고 하지 않았나?”
“…가이니르!”
“아이고.”
아, 저놈이군. 베르세르크는 톡 건드리기만 술술 불어 줄 게 분명한 이를 건조하게 응시했다. 물론 그녀의 눈썹이나 얼굴근육은 이 눈빛을 들키지 않기 위해 와락 찌뿌려지고 있는 상태다.
“말도 안 된다. 그들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영관을 넘는 데만 해도 닷새가 넘게 걸릴 텐데?”
“정말인가, 대전사?”
“그래. 내가 그곳에 다녀올 때도 그랬다. 심지어 난 동토의 초입 부분만 확인하고 돌아왔는데도 한 달이 넘게 흘렀었지.”
“파미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진정해, 가이니르. 그들은 혼자 간 게 아니잖아.”
별개로 정말 무슨 수를 쓸 것이기에 열흘 만에 다녀온단 소리가 나오는 걸까. 베르세르크는 삐뚤어지게 앉은 자세를 더욱 태만히 기울였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물리적 거리가 줄어들진 않지.”
가이니르를 달래던 바우티야가 약하게 한숨을 뱉고, 파미르가 침음을 삼켰다.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간 재미없어질 거라는 무언의 압박을 인지한 얼굴들이다.
결국 파미르가 두 손을 들었다.
“…그게 아니고, 하. 신의 짐승이 나서서 그런 겁니다.”
“신의 짐승.”
다만 그가 언급한 것은 그녀가 설마설마하며 덮어 두었던 존재라.
신의 짐승 혹은 태곳적 짐승. 불사조.
“피닉스?”
“예.”
“그 존재는 전선을 돌아다닌다고 알고 있는데.”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그냥 그들이 세계의 끝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만 들었지.”
피닉스, 피닉스라. 이렇게 되면 그들이 열흘 안에 다녀온다 자신한 이유도, 저 바깥의 흔적도 해명이 된다. 정확히, 딱 그것들만.
그것이 왜 전선을 내버려 두고 이곳에 왔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정말 피닉스인가?”
“사제가 인정했으니 아마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나는 앞서 이 마을 앞에 있는 흔적과 비슷한… 동일한 흔적들을 다른 곳에서도 보았다. 개중 많은 것들이 이번에 생긴 게 아니라 한 달도 전에 생긴 것이었지.”
하물며 간격을 둬 가며 노르다를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있는 건 또 왜인가?
베르세르크는 그녀의 불안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부분을 두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것만은 들어야 해. 그녀를 여러 번 도왔던 본능이 소리를 빼액빼액 질러 댔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흰 그냥 남쪽으로 내려갈 때 같이 데려가 준대서 따라온 거라니까요?”
“예상 가는 거라도 없나?”
“글쎄요. 저로선 딱히…….”
눈치 빠른 새끼. 베르세르크는 악마기사 일행에게 문책당하기 싫어, 중요한 부분에선 입을 꾹 다무는 이를 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걸 억지로라도 들어야 할까? 자칫하면 악마기사와 척지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해서 나올 답이 과연 그만한 가치를 지닐까? 무지에서 오는 불확실만이 그녀의 유일한 목줄이었다.
“아! 가이니르, 알 것 같다!”
“……!”
“잠깐, 야……!”
“그거 시체 주우려는 거다!”
“…너!”
“…시체?”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얼간이가 내려 준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건 절대 비밀이라고 그 사람들이……!”
시체. 시체. 무엇의?
“말해라.”
베르세르크의 직감이 귓가에 대고 사근거렸다. 이거다, 이거야.
“시체를 주우려 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아, 찾아도 찾아도 나오지 않은 언니의 유해는 정말 그녀가 못 찾았기 때문이기만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