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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57화 (357/389)

357화 왼눈이 뜨이지 않고 (5)

베르세르크는 눈이 녹았다 도로 얼어붙으며 탄생한 얼음의 땅을 보았다. 눈처럼 희지만, 퍼낼 수 없게 단단히 엉겨 붙은 매끄러운 설빙.

결코 자연이 빚어냈을 리 없는 것.

탁.

베르세르크는 무기를 단단히 거머쥔 채 마을 앞에 새겨진 거대한 굴곡을 훑었다.

Y에서 가지를 하나 더 추가한 형태의 발자국. 부채꼴과 타원이 맞닿도록 파인 구덩이. 구덩이 양쪽으로 눈이 쓸려 나간… 혹은 밀려 나간? 아무튼 그러한 인위적인 자국.

믿기지는 않지만 흔적의 형태만 보면 꼭 새가 내려앉았던 것만 같다. 그것도 집 여러 채를 연결한 것처럼 거대하고, 눈을 단숨에 녹일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체온의 새가.

“…하.”

그런데 그런 짐승이 과연 이 땅에 존재했던가? 그녀가 알기론 절대 아닐 텐데. 이 가설에 들어맞는 특성을 가진 존재는 이 땅보다 훨 남쪽에 둥지를 틀고 있을 텐데.

“…….”

…됐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변의 원인이 아니라 이 변수가 끼칠 영향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살금살금 마을로 다가갔다. 발뒤꿈치를 든 채 걷는 걸음은 고양잇과 짐승처럼 은밀하고 기민하다.

히이이잉.

푸르르륵.

“……?”

하나, 다음 순간 베르세르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노련한 사냥꾼이고 전사고 간에, 이 울음소리만큼은 이곳에서 들을 수 있을 거라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아무렴, 여긴 말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어, 어, 왜 그래. 워워, 진정해.”

“바우티야, 얘네가 갑자기 이상하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나도 몰라… 순록이라면 모를까 말은 처음이라고…….”

…심지어 옆에 있는 인간들은 말을 돌볼 줄도 모르는 인간들이었다. 최소한 저것들이 말을 데려온 게 아님은 확실하다.

스윽.

대체 뭘까. 베르세르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즉각적인 행동을 포기했다. 대신 그녀의 몸이 담을 넘고, 적당한 주택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납작한 벌레처럼 낮춘 몸은 갈색 모피에 힘입어 나무 지붕에 충분히 녹아든다.

이히힝.

“혹시 배가 고파서 이러는 건 아닌가?”

“…에이, 그건 아니겠지. 밥 준 지 얼마나 됐다고?”

푸륵, 푸르륵.

히이이이힝.

“그치만 그들이 말했다! 이렇게 울면 얘네가 불편해하는 거라고!”

“그, 그랬지. 근데 아직 알려 준 밥때도 안 됐다고……!”

그녀가 그렇게 자리를 잡는 사이, 얼간이들처럼 굴던 두 명이 ‘에라 모르겠다’라며 백기를 들었다.

“그냥 그 사람한테 물어보자, 바우티야.”

“아, 안 돼!”

“그치만 바우티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 그건 그렇지만. 말하면 그놈은 우릴 죽일 거라고!”

사람이 더 있나 보군. 베르세르크는 말과 얼간이들에게 집중했던 정신을 일깨우고, 다른 쪽에 신경을 덜어 보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서 두 개의 기척이 더 느껴졌다.

“가이니르, 너도 봤잖아! 내가 빻은 약초처럼 처맞았던 거!”

“끄응.”

“너도 그렇게 맞고 싶어?!”

“그렇진 않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돌아와서 화내면 어떡하나.”

그럼 당장 이 마을에 있는 건 인간 넷과 말 네 마리인가. 대화 내용으로 보아, 자리에 없는 인원도 있는 것 같고.

“이단심문관의 주먹은 엄청 아팠다……. 난 그것에 맞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은 그래도 죽일 것처럼 패진 않잖아!”

“그건 그런데…….”

다만 자리를 비운 인원이 돌아올 경우, 저들을 제압하기가 힘들어진다. 숫자도 때로는 힘인 법이니까.

“말이 잘못되면 그땐 처맞는 수준이 아니라 죽을 것 같아서 싫다.”

“엇.”

“파미르도 말했다. 문제 생기면 숨기지 말고 재깍재깍 보고하라고.”

지금이라도 전부 무릎 꿇릴까? 저것들만이라면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끄으으으, 알았어, 알았어. 자수해서 광명 찾자고. 크으읏.”

“바우티야, 힘내라.”

“웃지 마, 새끼야. 나만 혼날 줄 아냐?”

베르세르크는 이것들이 저 바깥에 새겨진 흔적과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헤아려 보았다.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말의 존재와 저들이 공포심을 표하는 이들. 판단은 금방 섰다.

“됐고… 그래. 저 안의 인간은 골골거리는 인간미라도 있지, 이 추위에 노르다인보다 더 얇게 입고 다니는 강철인간에게 처맞는 건 역시 아니겠─”

베르세르크는 두 얼간이가 보고를 위해 간이 마구간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 뒤로 착지했다. 퍼억! 얼간이 둘이 착지음을 듣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 그녀의 손날이 뒷목에 작렬했다.

털썩털썩.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두 사람의 인영이 넘어졌다.

히이이이잉!

이히히히힝!!

“흠.”

동시에 마구간 안에 있던 말들이 난리를 쳤다. 벽 한 장 밖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해당 사건을 인지하고 위협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여간 예민함으로 유명한 짐승다웠다.

“아이 씨, 이 새끼들아. 말 제대로 안 돌─?”

하나 이로 인해 걸리게 되어도 상관 없다. 제압할 자신은 충분하니까. 베르세르크는 그런 자신감으로 문을 박차고 나오는 새 등장인물을 맞이했다.

“어?”

“…너는.”

“예전에 용사랑 일행이었던 사람. 맞지?”

“맞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지?”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결과적으론, 아는 얼굴을 기습하지 않게 됐으므로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 말하긴 좀 길고, 당신 찾으러 왔는데.”

“나를……?”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의외의 만남이긴 했지만.

“정확힌, 나 말고 모험가가… 악마기사가 당신을 찾았어. 지금은 잠깐 나갔고.”

“…악마기사.”

한편, 마이스터는 마이스터대로 당황한 참이었다. 찾던 이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그조차 예상 못 했던 탓이다.

뭐, 이런 우연의 장난질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추론이나 지능의 영역이 아니라 예언, 예지의 권능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 그놈.”

근데 타이밍 진짜 예술이네. 그놈들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딱 찾아온담.

“수배됐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많이 나아졌나 보지. 나를 찾을 정도면.”

“뭐, 그렇지. 어찌저찌 누명은 다 풀었어.”

“그런가. 그거 다행이군. 그런데 그가 나를 대체 왜 찾지?”

“아, 뭐랬더라. 갚아야 할 게 있댔나?”

“그는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

“그건 당신 입장이고, 그놈 입장에선… 그래. 무기 박살 낸 게 빚으로 느껴졌나 보지.”

마이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미동도 없는 두 놈. 그리고 여전히 우는 말들.

“야, 너.”

“예, 부르셨습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여 안쪽에서 일하던 놈을 불러왔다. 지하실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던 인간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와서 기절한 두 놈 좀 안쪽으로 옮겨. 말도 대신 돌보고 있고.”

“예??”

마이스터가 이곳에 남게 된 이래, 매 순간 깍뜻하고 공손하게 굴던 놈이 처음으로 반문했다. 그마저도 지긋이 바라봐 주니 바로 내려 버리긴 했다마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굳이 찬바람 맞아 가며 대화할 필욘 없잖아.”

“그래.”

그렇게 따까리 한 놈이 제 친구들을 수습하는 동안, 마이스터는 베르세르크를 안쪽으로 인도했다. 이 상황이 궁금한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베르세르크 또한 그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도 일행이 있다. 데리고 와도 되겠나.”

“말 먹으려 들 놈만 아니면.”

“걱정 마라. 그럴 아이가 아닐뿐더러, 만약 그리 나온다면 내가 직접 머리통을 으깨 줄 터이니.”

“든든하네.”

대신 베르세르크도 본인 일행은 데리고 왔다. 모험가가 봤으면 사탕부터 꺼내고 봤을 나이대의 소녀였다.

“아, 안녕하세요.”

“물건 멋대로 건드리지 마라.”

“네…….”

하나 그건 모험가고, 마이스터는 굳이 먹을 걸 들려 주거나 하진 않았다.

애를 좋아하는 편도 못 될뿐더러, 애초에 이쪽도 식량이 넉넉한 편은 못 됐다. 대충… 북으로 올라간 놈들이 열흘 안에 안 돌아오면 큰일 날 정도로.

“뭔가 많군.”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보낼 필욘 없으니까.”

“하긴, 넌 장인이었지.”

주작의 권고─위험할 수도 있다─와 합리성─싸움질도 못하는데 그냥 남아서 저 새끼들 감시나 하지, 뭐─을 위해 남기는 했다.

하나 말이 감시지, 매 분 매 초 시선을 줘야 하는 상황은 또 아니지 않은가.

안쪽에 널브러진 공구는 다 그것 때문이었다. 이왕 남게 된 시간, 그는 밀린 연구라도 할 요량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베르세르크의 방문 덕에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악마기사가 그러던가? 내 무깃값을 물어 주고 싶다고?”

“요약한다면.”

“하, 그건 정당한 대련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가 책임질 이유는 조금도 없다.”

“뭐야, 그 자식. 대련에서 깨 먹은 걸 본인 책임이라고 한 거야? 하여간, 고지식하다니까.”

상호 합의하에 이뤄진 대련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그걸 또 챙기려 들다니… 그놈답다면 그놈다운 일이었다.

“근데 그래도 받아 가. 네가 거절하면 그 자식 엄청 신경 쓸걸.”

“그러니까, 나는 그걸 받을 자격이…….”

“싫음 말고. 근데 난 분명 말했다? 그 자식 엄청 신경 쓸 거라고.”

아직 벌어진 일도 아닌데 벌써부터 상상이 간다. 어떻게든 선물을 쥐여 주려고 안달 낼 그놈의 모습이.

“그건 댁 무기?”

그리고 끝내 이기는 건 그 자식이겠지. 저쪽이 받을 자격 없다고 암만 거절해 봐야, 걘 ‘그럼 한때 같이했던 전우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따위의 명목을 새로 내세우면 그만이니까.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맞아?”

“그래.”

“한번 봐도 될까?”

“장인의 호기심인가? 마음대로 해라. 망가트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이 덩치 큰 전사의 무기를 구하게 되는 건 필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분명 그가 맡게 되겠지. 모험가의 성향상 신세 진 사람에게 기성품 같은 싸구려를 줄 리는 없으니까.

“당신 덩치에 비해 좀 작아 보이는데.”

“이미 만들어진 걸 골랐으니까.”

“돈이 부족했나 보지?”

“처음부터 돈으로 산 물건이 아니다.”

물론 기성품을 주지 않을 거라고 해서 반드시 그가 맡게 되리란 보장은 없긴 하다. 미리 얘기되기는커녕 그런 뉘앙스의 언질조차도 들은 바가 없으니.

“아, 교환?”

“교환보다는 배상에 가깝겠군.”

“마탑한테 뭐 당했어?”

“어떤 머저리가 감히 나를 실험체로 삼으려 하더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세상 제일의 대명장을 바로 옆에 두고 설마 다른 사람을 수배하겠나? 그런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멍청한 짓을 다른 누구도 아닌 모험가가 하겠어?

“…멍청한 짓을 했네. 그래서?”

“팔다리를 부수고 내장을 으깨 줬다.”

“죽는 건? 죽는 건 확인했고? 생명 마법사는 자가 치유가 가능해서 목숨이 제법 질기다고.”

“걱정 마라. 나를 따라 탈출했던 다른 인간들이 온갖 집기로 그놈의 두개골을 박살 내고 살갗과 근육을 분해했으니까.”

그러니 그가 맡게 되는 건 역시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다.

마이스터는 그런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베르세르크의 인적 사항을 머리에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약간 눌릴 뻔했지만, 상대가 저지른 짓이 너무 유쾌해서 바로 괜찮아졌다. 그는 베르세르크의 무기를 만들 때 조금 더 신경 써 주기로 다짐했다.

“그럼 됐어. 당신, 제법이네.”

별개로 생각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긴 한 모양이다. 혼자 탈출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탈출했다는 걸 보면 마법사의 공방까지 갔다는 소리─인간을 다른 데 보관해 뒀을 리는 없으니─인데 공방의 마법사를 박살 내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보다 보상으로 받은 거면, 무기 종류도 본래 쓰던 거랑 다르겠네?”

“난 무기를 정해 놓고 쓰지 않는다.”

“그래도 유독 손에 익는 무기 정돈 있을 거 아냐.”

“…글쎄. 창대가 길고 날이 서 있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다. 아니어도 못 쓰지 않고.”

창대가 긴 무기라. 마이스터는 기억을 되짚어, 베뮈르헨 때 이 인간이 들고 있던 무기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했다.

대충 할버드였던 것 같은데… 배상으로 받아 온 무기가 도끼인 것도 그렇고, 전에 쓰던 무기가 할버드인 것도 그렇고, 선호하는 게 보이는 것 같다.

마이스터는 그렇게 본인이 부정하는 취향을 확정 지었다.

“질문은 끝인가? 하면 내가 묻지.”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마음대로.”

“일단, 악마기사는 어딜 갔지?”

“세계의 끝에 볼일이 생겨서, 거길 잠깐.”

“그렇군.”

무기 종류가 정해지니 자연히 디자인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교보다는 파워를 선호하는 것 같으니 날은 조금 크게 잡아도 될 것 같고… 힘도 좋아 보이니 양쪽에 날을 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다만 이렇게 되면 창대가 무게를 버티지 못할 테니 창대 소재를…….

“그럼 그 팔찌는 악마기사가 자리를 비울 때 주고 간 건가?”

그가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그려 보는 사이, 베르세르크가 그의 팔목에 잠시 주목했다. 그녀의 눈길이 정확히 닿아 있는 곳은 악마기사가 대여해 준 뼛조각 팔찌다.

“바로 알아보네?”

“아는 부족에서 쓰는 형식이니까. 왜 주고 갔는지도 알 것 같군.”

“오… 빌려주던 본인도 정작 효과에 대해선 반신반의하던데. 의미가 아예 없진 않나 봐?”

“글쎄. 마주쳤을 때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겠군.”

“아, 딱 그 정도인가.”

마이스터는 손쉽게 베르세르크가 생략한 부분을 이해했다. 마주했을 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건, 뒤집어서 말했을 때 결국 목숨 이외의 것들은 장담할 수 없단 소리였으므로.

“그게 어디야.”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목숨이라도 보장받는 게 어딘가. 물건과 목숨, 두 가지를 다 빼앗기느니 후자라도 건질 수 있는 게 훨 낫다.

악마기사가 괜히 보험용으로 들고 있으라 한 게 아니었다.

“…궁금증이 해결됐다면, 질문을 계속하지. 바깥의 눈이 녹고 다시 언 흔적. 그것도 악마기사와 관계 있나?”

“그건 왜?”

“관계가 있나 보군. 악마기사가 한 건가?”

“아니. 걔가 한 건 아닌데.”

“그럼 누가 했지?”

별도로 화제가 확 바뀌어 버렸네.

마이스터는 베르세르크의 물음을 두고 잠깐 손을 모았다. 악마기사의 목적에는 한 톨도 관심 없어 보이더니, 갑작스레 태도 변환이라. 이건 무슨 징조이고 의도일까?

“그걸 알아야 하는 이유는?”

베르세르크가 용사의 전 동료긴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주작이 합세한 이상 이이의 존재가 필수적이게 된 것도 아니고.

해서 마이스터는 그 짤막한 인연에 무턱대고 신뢰를 보이는 대신 다리를 꼬며 협상에 들어갔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의 여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는 이곳에서 무언갈 찾고 있다. 한데 요즘 들어 저런 기묘한 흔적이 여러 개 보이더군. 자연적으로 결코 나올 수 없는, 반드시 어떤 존재의 힘이 적용되었을 게 분명한 흔적들이 말이다.”

“그래서?”

“내게 자세한 사정을 얘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그럼 이것만이라도 대답해라. 그것은 내게 적대적인가?”

“당신이 찾는 게 뭔지에 따라 다르겠지?”

“…내가 찾는 건 수십 년 전에 죽은 가족의 유해다.”

“오… 그럼 굳이?”

마이스터는 짤막한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미친 짓을 꼭 해야만 하는지 싶긴 하지만… 아무튼 수색 행위 자체가 문제 될 소지는 없어 보였던 까닭이다.

암, 수십 년 전에 죽은 그녀의 가족이 설마 용에게 반환돼야 될 대상에 들었겠는가? 사람 운이 더럽게 없지 않고서야, 설마 그러겠어.

“그래, 그럼 됐다.”

“질문은 그걸로 끝?”

“그래.”

그리하여 마이스터는 안도하는 베르세르크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용사가 진행하는 의뢰의 무게가 무게인 이상, ‘전 용사 일행’ 딱지만으로는 불안하다, 이 기가 막힌 우연이 정말 일치할 경우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등등 아주 많은 이유가 그의 침묵을 정당화시켰다.

뭐어. 그 많고 많은 이유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걸 고르라면 ‘말하기 귀찮음’의 지분과 ‘그 모든 걸 무릅 쓰고 말해 줄 의리 따윈 없음’이 제일 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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