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왼눈이 뜨이지 않고 (4)
저번처럼 등에 우리를 태운 주작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갈랐다. 졸지에 우리와 같이 움직이게 된 현지인 셋은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스릴을 만끽하는 중이다.
“혀, 형, 나 무섭다……!”
“지, 진정해라, 가이니르.”
“떠, 떨어지는 거 아니야? 이건 진짜……!”
“파미르, 이건 진짜 미친 짓─”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한발 늦는 법.
제발 버리고 가지 말아 달라 애원하던 그들은 이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자업자득인 관계로 남 탓조차 못하는 점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모험가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참고로 내가 이걸 어찌 알고 있느냐면, 그건 주작의 배려 덕분이었다.
황공하게도, 주작은 본인의 등에 오를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함을 기억하다 못해 그를 위한 아이템까지 준비해 온 것이다. 그것도 무려 고정용 고리가 바닥에 부착된 바구니로.
“좁아 보이시는데…….”
“버틸 만하다.”
“그러십니까.”
물론 크기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나 같은 덩치의 사람이 들어가면 딱 맞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잠깐 있긴 좋아도 장시간 있으면 쥐 나기 딱 좋은 너비다. 이마저도 포대기에 비하면 감지덕지라 거절은 안 했지만.
“차라리 저게 낫…….”
“나도, 나도 바구니…….”
“쉿, 가이니르.”
뭐어… 겁많은 사람들─현지인 셋─은 이런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대충 듣기로, 바람이 거세다 보니 그냥 있으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나.
하다못해 말들처럼 고정용 고리와 줄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수가 부족해서 못 받았다. 결국 생으로 버티게 됐단 소리다.
“쓸데없이 일어서거나 뛰지만 않으면 절대 안 떨어진다니까요.”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말도 잘 타고 있는데 왜 난립니까.”
“그러는 당신도 처음 탔을 땐 유난이었던 것 같은데…….”
“시, 심문관 나리는 빠지라고요.”
다만 그들의 동동거림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아무렴, 일반인에게 있어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털만 잡고 N시간 버티기’는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나.
설사 그 등이 엄청 넓고 주작의 비행이 매우 안정적인 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 심리란 건 그렇게 이성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은 특히 그러하고.
“됐고, 저 인간을 봐요. 잘만 자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냥 저 사람이 특이한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물론 마이스터는 이번이 2회 차랍시고 잘만 숙면했다. 피로에 절여졌다곤 하나, 참 담대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에루탤크. 혹시 방법 같은 게 없을까요?”
아무튼, 그런 이들을 가엾게 여긴 인퀴지터가 에루탤크에게 물어보았다.
“없다.”
그러나 과거의 내 컨셉보다 말을 더 아끼는 마법사, 에루탤크가 들려준 한마디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딱 잘라 부정하는 말투에선 어째서인지 한심함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그렇군요…….”
결국 발을 동동 구르는 현지인 셋을 외면 못 한 인퀴지터가 신성력 막으로 바람을 줄여 주었다. 그들의 표정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아, 그렇지. 주작이시여, 전선의 상황은 괜찮습니까?”
[썩 좋지는 않다.]
“…많이 심각합니까?”
[충량하고 강직한 자들이 고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노라. 하나 전장의 승패란 무릇 의지의 강약으로 결정되지 않는 법. 고가 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노라.]
“그런…….”
[너무 마음 쓰지 말라. 세상에 피해 없는 전쟁은 없으며, 하나의 세계를 걸고 치르는 성전은 더더욱 많은 피해를 동반하느니. 이는 그대가 홀로 감당할 문제가 아니니라.]
다만 인퀴지터가 실질적 힘을 동원함으로써 그들에게 평온을 선물했다면, 주작은 언어의 힘으로 인퀴지터를 달랬다.
[다만 고와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벌어 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데 있음이라. 신의 대리자는 표정은 풀고 그대의 사명만을 생각하라.]
“…예!”
다행히 주작은 제법 나잇값을 하는 편이었다. 산군이나 육귀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근엄하게 받쳐 주던 존재가 워낙 드물다 보니 마음이 참 든든했다.
“그럼 이번엔 끝까지 함께하시는 겁니까?”
[저항할 수 없는 이변이 오지 않는 한, 고는 그리할 것이다.]
더불어 세상의 끝까지 편하게 갈 수 있게 됐단 소식 역시 반가웠다. 추위나 식량에 구애받지 않는 몸이라도 눈 그득그득한 길을 걷는 것마저 편하진 않거든. 다른 사람들보다야 상황이 좋은 건 맞지만.
“아.”
그러고 보니 추위랑 먹을 거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렇게 되면 현지인들까지 세계의 끝으로 데려가게 되는 건가……?
“주작.”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세계의 끝이 어떤 환경인지 알고 있나?”
[직접 가 보았으니 알고는 있다. 하나 고가 지금 떠올린 것들이 그대가 진정으로 알고 싶은 바와 일치하진 않을 것 같도다. 하니 그대여,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그곳으로 곧장 향했을 때, 저 세 명의 일반인이 그대의 조력 없이도 장시간 생존할 수 있나?”
[…고의 생각이 짧았노라. 강경히 말렸어야 했던 것을.]
찰나간 머뭇거리던 주작이 그런 답을 내놓았다. 완곡한 부정의 표현이었다.
“헛, 그럼 어떻게 해야…….”
[흐음. 하면 산맥을 넘기 전 있는 마을에 이들을 잠시 내려 주는 것은 어떠한가? 가는 경로에 마을이 하나 있음을 고는 분명히 보았노라.]
다행히 해결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식량난으로 아우성이라는 이 땅의 사람들이 저들을 임시로라도 받아 줄지는 의문이지만.
[기왕 이리된 것, 이 말들 또한 맡겨 두는 것도 좋으리라. 끝과 맞닿아 있는 땅에 존재하는 위협은 추위뿐이 아니니.]
“아…….”
그렇지만 이어진 말로 인해 들르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식량만 주면 어떻게든 버틸 것 같은 세 사람과 달리, 말들은 사람의 돌봄이 필요했다.
“지금 식량 없다고 다들 아우성이라던데, 맡긴 말들 냅다 잡아먹는 거 아닙니까요?”
“…설마 그러겠습니까.”
근데 데스브링거가 지금 지적했다시피, 그들이 말을 잘 챙겨 줄지가 의문이란 말이지. 주작이 아무리 권위 있는 존재라지만, 그것도 눈치 볼 여력이 있을 때여야 의미가 있는 거잖아.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이 과연 우리 말들을 지켜 줄까?
“아니면,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요……?”
[그건 아니 될 말이니라. 지금도 전선에선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을진대, 어찌 된 도리로 네 마리의 말을 위하여 몸을 돌리겠는가?]
확실히… 그건 그렇지. 지금 한 시간 정도 온 것 같은데, 여기서 돌아가면 내려가는 데 한 시간, 다시 올라오는 데 한 시간. 도합 두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 두 시간이면… 전장에선 몇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프레드릭을 아끼는 입장으로서도 도저히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을 가족처럼 아끼고 있다면 고가 미리 사과하겠도다. 하나 그대들에게 말이 가족일 수 있는 것처럼, 전선에 선 모든 인간은 고가 아끼는 자식과 같음이라. 고는 결코 이들을 위해 머리를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안은 결국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이건 우리 잘못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모험가님. 제가 이를 예상하지 못해서…….”
“사과하지 마라. 이렇게 될 걸 모르고 함부로 말을 데려온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뼈가 좀 아프긴 하네. 내 실수인데 걸린 건 프레드릭 목숨이라니. 프레드릭이 뒷발로 나를 걷어차도 차마 할 말이 없다. 이럴 거면 그냥 데리고 오지 않는 거였는데.
“그… 그러지 마시고 폐허나 대충 적당한 야지에 저희를 내려다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때 얌전히 이야기 듣고 있던 현지인의 리더가 발언했다.
“마을에 말을 맡기면 필히 도축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희 셋이 말들을 돌보고 있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말들 먹이랑 저희가 먹을 식량만 좀 챙겨 주신다면야…….”
“흠, 괜찮은데? 어차피 세계의 끝에서 몇 날 며칠씩 있을 거 아니잖아?”
“으음. 확실히 이게 최선 같아 보이긴 합니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나는 스노우볼이 되어 구르는 세 사람의 합류를 보며 조금 당황했다. 이게 진짜 이렇게 되네. 매우 긍정적인 방향의 당혹감이었다.
[결정됐나? 그럼 산맥에 다다랐을 즈음, 인적이 없되 머물기 좋은 곳에 잠깐 착지하여 그대들을 내려 주는 것으로 하겠노라.]
“옙.”
아무튼, 이걸로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세계의 끝을 향해 갈 수 있게 되었다.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프레드릭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아, 회수해야 할 게 하나 더 생겼군. 잠시 하강하겠다.]
“네.”
“끄, 끝입니까?”
“끝이겠습니까? 잠깐 뭐 좀 주우러 내려가는 겁니다요.”
나는 안도감을 품은 채 점차 기울기 시작한 날개에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을 가르는 주홍빛 불꽃은 몽환적인 매력이 있어서 참 좋았다.
상황과 별개로, 참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 * *
“어……? 아까 저희가 들어갔던 곳과 좀 다른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아니. 네가 정확히 봤다.”
베르세르크는 어린 피리꾼의 말에 긍정하며 머리를 털었다. 그때마다 그림자들이 끼얹고 간 검은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공기 중에 부스스 녹아드는 먼지였다.
“빙하의 시련은 균열이 생성됐던 자리로 나오지 않는다. 그자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딘지에 따라 나올 위치가 결정되지.”
“지, 진짜요?”
“재수 없으면 영관 너머 동토에 떨어지는 일도 있다. 빙하의 시련이 전사들의 무덤이 되는 두 번째 이유다.”
물론 그녀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운을 노력의 영역으로 끌어내릴 줄 알게 되었다. 일종의 꼼수고, 그녀도 완벽히 숙달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원리라면… 만약 제가 혼자 탈출했다면 전 대전사님과 다른 곳에 떨어졌겠네요.”
“그래. 그렇지만 그 밤하늘에 미치는 것보다 그게 더 생존 확률이 높았을 거다.”
“…그런가요.”
“…어린 피리꾼아, 네가 만약 빙하의 시련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면, 그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아 반대로 뛰어라.”
“가장 밝게 빛나는 별……?”
“그래. 그 별을 길잡이 삼아 뛴다면, 네가 영관 너머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다.”
수천 개의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찾아내는 게 가능할까. 그 이전에 별 사이에서 흘러드는 괴물을 소녀가 처치할 수는 있을까.
베르세르크는 두 개의 질문에 각기 부정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알려는 주었다. 세상살이에 있어 알았을 때 나쁜 건 상실의 고통뿐이 없었다.
“…빙하의 시련이 이런 건 줄 몰랐어요.”
“알아야 될 이유가 없으니까. 해당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당위성이 생기면 그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베르세르크는 건조한 조언과 함께 허벅지의 손도끼를 쥐었다. 휘리리릭. 회전하며 날아간 손도끼가 숨어 있던 늑대의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으깼다.
“식사거리가 생겼군.”
안 그래도 식량이 다 떨어져서 조마조마하던 상황인데, 제법 운이 좋다.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늑대의 머리에 꽂힌 도끼를 회수했다. 도끼날에 질펀히도 묻어 있는 핏물은 널리고 널린 눈을 이용해 적당히 닦아 내면 끝이다.
“도축은 제가 할게요.”
“그래.”
어린 피리꾼이 손칼을 쥐고 늑대의 배를 갈랐다. 내장이 끄집어내진 자리에 고이는 피는 김이 폴폴 피어오를 정도로 뜨끈뜨끈하다. 얼마 안 가 온기를 잃고 얼어 버릴 피였다.
“먼저 드세요.”
또한 그런 상황이기에, 노르다인들은 사냥에 성공한 순간 가장 먼저 피를 마신다. 목을 축이는 것과 몸을 덥히는 것, 둘 모두를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전통과 생존 방식, 그 어드메를 따라 피리꾼이 서둘러 떠낸 핏물을 건넸다.
“너도 마셔라.”
“네.”
“순록이 아닌 게 아쉽군.”
“순록 보기가 신의 옷자락 보기보다 더 힘들어졌으니까요,”
고기의 양이나 맛도 그렇지만, 건강을 고려해도 늑대보단 순록이 낫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육식동물의 고기만 섭취한 사람은 잇몸에서 피가 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까닭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그래.”
하나 소녀의 말마따나, 현 상황에선 늑대 고기조차 호사다.
그들은 피를 최대한 떠 마신 후, 그것이 얼어 버린 후에는 고기를 얇게 저며 입에 넣었다. 불 피울 장작도 없겠다, 본래도 구운 고기보단 생고기를 더 자주 먹는 민족이 그들이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시신, 계속 찾으실 거죠?”
“당연히.”
“바로 가실 건가요?”
그렇게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소녀는 남은 살을 발라, 허리에 줄줄이 매었다. 어차피 얼어 버릴 고기기에 상할 걱정은 없었다.
“…글쎄.”
다만 그 모든 작업을 마쳤을 때, 소녀의 눈가에는 피로가 그득그득 맺히고 말았으니. 베르세르크는 그를 발견하고 말을 흐렸다.
“시련 안에서 밤을 지새운 만큼, 바로 수색을 재개하기보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테지. 좋다, 피리꾼아. 사냥꾼 아래에서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음을 내게 증명해 봐라.”
“……! 네!”
하늘을 보면 이제 막 해가 뜨는 시각이나, 어린 소녀의 체력을 배려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녀의 언니가 그녀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베르세르크는 그렇게 휴식을 결정했다. 그사이, 소녀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달뜬 볼로 열심히 손가락을 꼼찔거리는 중이다.
“봉우리의 형태를 보아 여긴 전쟁과 하늘 사이 같아요. 그리고 전쟁과 하늘 사이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주하던 부족이 하나 있었구요. 사람이야 더는 없겠지만, 그래도 훨씬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안내해 봐라, 어린 피리꾼아.”
“네!”
눈 위에 그림을 그려 가며 위치를 헤아리던 소녀는 주어진 기회에 눈을 빛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빙하의 시련 안에 있던 아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밝음이었다.
“부족은 아래에 있어요. 내려가죠!”
내가 전사입네 뽐내다가 진짜 시련을 맛보자마자 질질 짜던 자식들보단 백 배 천 배 낫군. 베르세르크는 피로와 배부름이 겹치며 탄생한 나른함에 젖은 채로 소녀를 쫄쫄 따라갔다.
“역시! 저기 마을이 보인─ 어라.”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어떠한 흔적을 마주했다.
“얼음이 왜 녹았…….”
“너, 근처에 적당히 숨어 있어라.”
먼젓번, 노련한 사냥꾼이 빙하의 시련으로 오인했던 그 흔적이었다.
베르세르크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