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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54화 (354/389)

354화 왼눈이 뜨이지 않고 (2)

네 개의 기척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을 감지한 첫 순간,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일행 중 최약체가 다쳤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걱정 때문이었다.

“씹새끼가 사람 놀래키고 있어, 진짜.”

“이미 기절했잖습니까… 그만 좀 패십시오.”

“이 새끼가 먼저 깝쳤잖아.”

그러나 진실된 상황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그 모든 감정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다니엘은 그렇다 쳐도, 지옥에 던져 놔도 잘만 살 것 같은 마이스터를 걱정하다니, 내가 멍청했다.

“…혹시 몰라 와 봤는데, 아주 멀쩡하군.”

“경?”

“왔냐?”

“다친 덴 없나?”

그래도 물어보긴 해야지. 나는 의례적으로 물어본 후, 답도 듣기 전에 제압된 이들에게 다가갔다. 다니엘이 제압한 이는 그럭저럭 멀쩡했는데, 마이스터가 제압한 쪽은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죽였나?”

“죽였겠냐?”

“아무리 봐도 죽인 것 같은데.”

“시발, 아니라고.”

아이고, 얘 다음 날 되면 얼굴이 아주 푸르딩딩해지겠는데. 안 그래도 피골이 상접한 상태인데 여기서 멍까지 드니까 더 측은하게 느껴진다.

나는 기절한 이를 안쓰럽게 보며 그 몸뚱이를 둘러멨다. 불쌍함은 둘째 치고 이 날씨에 여기다 두고 가면 얼어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합류 장소로 돌아가지.”

“예.”

다니엘 역시 본인이 제압한 이를 오라에 묶어 인도했다.

마이스터가 사람 하나를 뒈지게 패는 걸 봐서 그런가, 그는 정신 차린 상태였음에도 우리에게 굉장히 협조적이었다. 우리는 편안히 합류 장소로 돌아갔다.

“어, 그 사람들은……?”

“그쪽은 별일이 없었나 보군.”

“갑자기 기습해 오는 걸 사로잡았습니다.”

근데 어떻게 딱 약속했던 이십 분만 흘렀나 보다. 합류 장소로 향하니 인퀴지터와 에루탤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데스브링거도 프레드릭에 사람을 얹은 채 터벅터벅 돌아오는 참이었고.

“사람을 잘도 얹었군.”

“한 번만 봐 달라고 싹싹 비니까 태워는 주덥니다.”

대신 앉아서는 못 태우고 짐짝처럼 얹어야만 봐주던데요.

데스브링거가 쌀 포대처럼 축 늘어진 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프레드릭은 ‘그래서 뭐?’ 따위의 눈빛이다.

“잘했다.”

그래. 이거라도 어디냐. 나는 프레드릭의 얼굴을 쓰다듬어 준 후 빨랫감처럼 걸쳐져 있던 인간을 끄집어냈다. 머리에 피가 쏠렸는지 얼굴이 붉었다.

“기습이라. 오면서 알아낸 건 있나?”

“좀 있죠.”

“그럼… 음, 여기서 듣긴 좀 그런데.”

“저희 쪽에 터가 괜찮은 곳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 좋습니다! 저희 쪽은 집들이 영 아니었어서…….”

아, 괜히 끄집어냈나? 나는 프레드릭을 힐끗 살폈다. 다시 올릴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푸륵.

“…그래.”

그런데 이 이상은 안 된단다. 치사한 놈. 나는 끄집어낸 이를 내 어깨에 짊어졌다.

“확실히 괜찮네요.”

각설하고, 마이스터와 다니엘이 찾아낸 터는 제법 괜찮았다. 커다랗고, 방도 많았고, 마구간으로 쓸 만한 창고까지 나란히 있었으니까.

“말은 이쪽으로 몰아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하죠.”

“나도 돕겠다.”

“심문은 안 보고?”

“내가 꼭 필요한 곳이 아니잖나.”

어차피 내가 직접 심문할 일은 없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관람도 딱히 끌리지 않고.

하여 나는 머물기로 한 집 안에 사람을 던진 후, 다니엘을 도와 마구간을 제작했다. 마이스터의 정교한 기술 따윈 필요하지도 않았다. 간이 마구간에 필요한 건 사방을 막아 줄 벽과 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뿐이었다.

“마법사.”

“설치했다. 필요한 게 더 없다면 이만 가지.”

“그래.”

무어. 조금 더 보탠다면, 마법사의 보온 결계와 침입자의 존재를 알려 줄 알람 마법 같은 것도 좋다.

우리가 벽 좀 부수는 사이에 작업이 종료될 정도로 설치가 금방 끝나긴 했지만.

“가구들은 전부 빼죠.”

“그러지.”

“이건… 건드리지 않는 게 낫겠지요?”

“그래. 이것까진 굳이 들어낼 필요 없을 것 같다. 괜히 돌가루만 날릴 것 같으니.”

하여튼, 오롯이 근력으로만 한쪽 벽면을 허문 우리는 몇몇 가구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곤 근처 주택을 전부 순회하여 침대나 태피스트리로 쓰이던 동물 가죽들을 모아 왔다. 바닥에 깔아 줄 용도였다.

“이곳은 전부 모피를 쓰는군요……?”

“풀보다 가죽이 흔하단 증거겠지.”

“그런 걸까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풀이나 낙엽은 장작으로 쓸 수 있는 시점에서 가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땔감 걱정 없는 곳에서만 지내 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가죽을 장작 삼을 수 있단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거든.

“말들이 이걸로 만족할지 모르겠습니다.”

“없는 것보단 나을 거다. 그보다 온도가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건 먹일 물도 마련할 때 처리하지요. 아직 낮이고, 장작이 귀하니까요.”

“그대의 말에 따르겠다.”

우리는 온갖 동물 가죽을 바닥에 차곡차곡 깔아 준 후, 꼬리를 살랑거리던 말들을 안으로 들였다. 차가운 공기가 덜해지자 말들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나리, 끝나셨습니까요?”

“거의. 무슨 일 있나?”

“아뇨, 신문이 다 끝나서요.”

“그런가.”

나와 다니엘은 입구에 천막을 걸어 두는 걸 마지막으로, 임시 거처에 들어갔다. 아까 사람 내려 둘 때보단 훨씬 살 만해진 내부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래서, 저 녀석들은?”

“그냥 방랑자였습니다요.”

“방랑자?”

“돌아갈 마을은 없고, 남쪽으로 내려가긴 겁나서 폐허에서만 깔짝이던 떠돌이들이요. 강도 짓까진 안 했다 하고, 실제로도 안 해 본 놈들 같아서 밧줄은 풀어 줬습니다.”

아하.

하긴, 특별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요, 마이스터에게조차 당한 무력이니 풀어 줘도 상관은 없겠지. 무기도 다 압수한 듯하고.

“그럼 저희를 기습한 건…….”

“인간사냥꾼인 줄 알았답니다. 그… 사람 잡아다 노예상이나 마법사한테 팔아먹는 놈들이요. 제압해서 캐물어 보려고 했지, 특별히 죽일 의도는 없었다 합니다.”

“…그렇군요. 근데 제가 신전의 문양을 등에 지고 있었는데도 절 인간사냥꾼으로 의심한 겁니까?”

“그으… 화내지 말고 들어요. 쟤들 말론 요즘 신전에서 나온 구호 병력인 척하면서 사람 잡아가는 놈들이 있─”

“어떤 쓰레기가……!”

“아, 화내지 말라니까요.”

나는 다니엘이 입에서 불을 뿜는 걸 보며,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움찔. 하필 그 근처에 있던 세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몸을 떨었다. 무언가 찔려서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우리가 겁나서 눈치 보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아, 졸려 뒈지겠네.”

“…….”

근데… 솔직히 그럴 만해! 한 명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던 사람이 저편에 있는데 겁이 안 나면 그게 사람임? 지상에 간 놓고 왔다며 배짱 부렸던 토끼지.

“그래서, 그냥 놓아 주는 건가.”

“예… 해당 문제에 대해선 저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대신 저들의 사정을 참작해 달라는 편지 정도를 들려 주기로 했습니다. 저들이 진정 남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정착할 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겠지요.”

“그래. 잘했다.”

편지 정도면 정말 최선이다. 나는 인퀴지터의 판단에 긍정을 표했다. 청년이 코를 찡그려 가며 웃었다. 흣힝. 그런 단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웃음이었다.

“그보다, 마을이 이렇게 된 이유는 결국 모르는 건가?”

“아, 그건 아닙니다.”

인퀴지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최대한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땅이 메마르며 먹을 게 사라지고, 먹을 게 없으니 모두가 굶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망했다. 아무튼 짧으니까 가벼운 설명이었다.

“위로 갈수록 식량이 귀해지겠군.”

“망종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근데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 같은데. 가뜩이나 세계의 끝까지 가야 하는 우리잖아. 중간에 식량 부족해지면 어떡해??

“전 지금이라도 남쪽에 다시 내려가야 한다 봅니다요.”

“닷새나 올라왔는데?”

“아뇨, 고작 닷새죠. 한 달이나 이동했다가 식량 부족으로 회군하는 것보단 낫잖습니까요.”

나와 똑같은 걸 걱정하는 듯, 데스브링거가 임시 후퇴를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식량을 제대로 챙겨 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으음…….”

“내 고향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있다. 이번은 이쪽 의견이 맞는 것 같군.”

“모험가님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너희는 식량 없이 못 버티지 않나.”

최종 선택은 인퀴지터의 몫이니만큼 이 이상 주장하진 않겠지만, 역시 이대로 가는 건 위험해 보인단 말이지.

“…저도 한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급하단 이유로 제대로 된 대비 없이 투입되었다가 죽은 형제자매들이 많습니다.”

“이단심문관님께서도 그런 의견이십니까…….”

인퀴지터가 결국 고개를 주억였다. “다시 내려가죠.”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이스터가 힘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 이 길을 또 반복해야 한단 거지.”

“음. 이참에 마지막 도시에서 대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 어떤가? 그게 네게도, 우리에게도 나을 것 같은데.”

“그럴까…….”

식량이 제한되는 문제가 있다면, 쓸모가 덜한 인력부터 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 제안에 마이스터가 제법 고민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나도 북부가 어떤지 보고 싶었는데. 거기서만 쓴다는 금속도 궁금하고.”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세상 구경은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짊어진 의뢰는 그게 안 된다. 마이스터도 그걸 인식하고 있는지 툴툴거릴지언정 고집부리진 않았다. 이걸로 다시 올라올 때 마이스터는 빠진다.

“그, 저어…….”

“……?”

“남쪽으로 내려갈 거면 저, 저희도 혹시 같이 갈 수 있을지…….”

“아.”

겁나서 남쪽으로 못 간다 했지.

“따라오는 건 상관없으나,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즉, 낙오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도 따라오고 싶나?”

“네, 네!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인퀴지터의 엄격한 발언에 세 사람은 화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들이 정말 우리를 따라올 수 있을지는 글쎄.

타고난 골격이 커서 티가 덜할 뿐, 지금도 가죽과 뼈가 거의 맞붙다시피 한 세 사람이다. 그런 몸 상태로 우리를 따라온다고? 절대 안 될 것 같은데.

“샌님, 무조건 짐이 될 것 같은뎁쇼.”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지 않나. 그들이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그건… 그치만…….”

“정 안 되겠으면 식량을 좀 덜어 주고 보내는 걸로 하겠다. 어차피 우린 내려가서 보충할 식량이니까.”

“그 정도라면, 괜찮겠네요.”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침묵을 고수하는 에루탤크를 흘끔 본 후, 슬슬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얼마 안 가 식량을 꺼내 달라 요구할 데스브링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네가 찾던 그… 베르세르크에 대한 건 안 물어봐?”

“…저들이 알고 있을지 의문이군.”

하지만 물어봐서 나쁠 건 없지. 좋은 지적이다.

“너희.”

“옙!”

“베르세르크란 사람을 아나?”

군기가 바짝 든 건 좋은데, 역시 모르고 있겠지. 나는 기대를 완전히 접은, 감흥 없는 태도로 툭 물었다.

“그, 악귀를 지닌 대전사를 말하는 겁니까?”

“…악귀?”

“꼭 두 사람이 한 몸을 쓰는 것처럼 구는… 아닙니까?”

뭔 소리야. 내가 의문에 눈을 껌뻑일 때,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가 탄성을 질렀다.

“네, 그분 맞습니다.”

뭐야, 나만 지금 이해를 못 하는 거냐?

* * *

“빙하의 시련은… 이런 거였군요.”

“괴롭나?”

“전… 전 괜찮아요. 대전사께서 전부 절 지켜 주고 계시는걸요.”

베르세르크는 바닥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마치 밤하늘을 통째로 펼쳐 낸 것 같은 세계를 응시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득한 풍경이었다.

“허세는 부리지 않아도 괜찮다. 많은 대전사가 이 공허함을 버티지 못해 미치니까.”

또한 까마득한 광경을 맞대고 있노라면,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째서 이다지도 보잘것없는가. 우리의 존재는 이런 세상에 비하면 티끌조차 못 될 만큼 작을진대, 이런 생에 진정 의미는 있는가?

“나가고 싶다면 말해라. 나는 시련을 끝까지 완수하지 않아도 탈출하는 방법을 안다.”

“…그런 게 가능했나요? 제가 듣기로 시련은 절대 중도 포기가 안 된다 했는데.”

“그렇겠지. 이 방법을 찾아낼 만큼 시련을 반복한 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

이런 삶은 정말로 이어 나갈 가치가 있나?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바닥을 두드려라. 보이지 않는 벽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그동안 널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정말 든든해요. 그렇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언제, 어디서 무언가가 나타날지 모르는 건 분명 무섭지만… 그것들을 전부 물리쳐 주시는 대전사께서 옆에 계시는걸요.”

“…그런가.”

빙하의 시련이 주는 진정한 적은 다른 게 아니다. 지독한 허망함과 무기력감, 신비와 미지를 향한 공포야말로 이 시련의 본질이지.

“넌 참 강하구나.”

그런 점에서 소녀는 시련의 절반을 통과해 냈다. 차가운 어둠에서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최소한 스스로의 감정에 먹히는 일도 없을 것이므로.

“가, 강하다뇨. 저는… 저는 재능 없는 반푼이인걸요.”

“하, 재능 따위가 진정한 강약을 정할 것 같으냐, 어린 피리꾼아.”

그래, 이 시련에서 살아 나갔음에도 미지를 향한 공포를 이겨 내지 못해 마약에 손대고, 망가지고, 그렇게 죽을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므로 소녀는 강하다. 그것도 강함이었다.

“철에 쇠하지 않고, 세월에 굴하지 않는 육신이 있다 해도 정신이 나약하면 의미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전사가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건…….”

“하나 너는 그러지 않겠지. 하니 너는 강한 거다. 가슴을 펴라, 어린 피리꾼아. 너는 강하다.”

“…….”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강함이다.

우드득.

“…물러나라.”

“네.”

하나 그녀가 영영 가질 수 없는 영롱함에 영원히 시선을 두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베르세르크는 밤하늘 저편에서 건너오는 그림자들을 보며 도끼를 고쳐 잡았다.

싸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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