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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50화 (350/389)

350화 신께 고하리라 (8)

지혜로운 금풍. 오래전 과거에 두고 온 이명이 들려옴에 따라 아크메이지는 눈을 한차례 감았다. 시간이 그녀의 고통을 앗아 갔는지 생각보다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금방 눈을 떴다.

“세월이 벌써 그리 됐군. 오랜만이오.”

“흐음… 이제 괜찮아졌나 보네요?”

“시간이 약이라지 않소.”

별개로 여전한 악취미다. 사람의 흉터를 알면서 들쑤시는 행위는.

“그래서, 제 마탑엔 무슨 일입니까?”

하나 인제는 그것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안다. 저건 그냥 타고난 성질머리가 더러운 것뿐이다.

“찾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하여 아크메이지는 과거처럼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매정한 삭풍의 연구 자료, 분명히 빼돌린 게 있을 테지? 탓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빌려주시오.”

잿더미 아래로 가라앉은 지식을 찾을 때였다.

* * *

“저희끼리 가란 말입니까?”

그날 저녁, 가장 늦게 돌아온 아크메이지가 충격적인 발언을 꺼냈다. 이 도시에 잠시 남아 있어야 할 것 같네. 그건 재합류가 예정되어 있을지언정 당장은 파티에서 나가 있겠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저, 저희끼리 갈 수 있을까요?”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겠지. 지구에서도 마법 없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판인데, 아크메이지가 빠진다고 해서 이 여정이 실패할 리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는…….”

하나 아크메이지가 빠짐으로써 우리가 고려해야 할 지점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아크메이지가 빠진다는 건 단순히 머릿수 하나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그녀가 제공하던 많은 마법도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예컨대 보온 마법이나 추적 마법, 알람 마법, 결계 마법, 나아가 아공간 마법 같은 것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를 갈음할 수 있는 마법사와 물건을 수배해 두었으니까요. 노르다 지방에도 빠삭하다 하니 제가 있는 것보다 훨 나을 겁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크메이지는 그녀의 빈자리가 일으킬 파장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타용 마법사를 수배해 둔 게 첫 번째 증거다.

“그래도…….”

물론 이것만으로는 모든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인퀴지터의 반응만 봐도 그랬다.

그녀는 시야에서 주인이 사라진 강아지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괜찮습니다. 인퀴지터께선 지금까지 잘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

그래도 아크메이지가 두어 번 타이르니 좀 나아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꼭 이 타이밍이어야만 했을까?

나는 새벽에 종종 들려오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크메이지님, 모든 사정을 숙고하여 내린 결정입니까?”

다른 천막을 쓰는 나조차 들은 것을, 아크메이지라고 못 들었을 것 같진 않다. 인퀴지터는 강인한 사람이지만, 지켜 줘야 할 부분은 여전히 있었다.

“…확신은 못 하겠네. 그렇지만… 여정의 끝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함에도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나는 아크메이지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살짝 주억였다.

“아크메이지님의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

노르다 지방에서의 일이 끝나면 나와 마이스터는 파티에서 나갈 텐데, 거기서 아크메이지까지 자리를 비울 순 없을 테니까.

“…미안하네. 자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부담까진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아크메이지의 빈자리가 나를 힘겹게 하느냐? 딱히 그렇지도 않다.

마법이 제공하는 편의는 부차적으로 두더라도… 인퀴지터는 각별한 보살핌을 요구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본 지금의 그녀는 그랬다.

“그보다, 아크메이지님을 대신할 마법사는 확인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하니 괜찮을 거다. 나는 걱정과 결연함을 번복하는 머리통 앞에 사탕을 떨어트렸다. 아까 단검 사러 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메이플 시럽 사탕이었다.

“헛. 감사합니다.”

인퀴지터가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인 채 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그러자 사탕이 두 개 남았다.

“망종, 너도 먹어라.”

“…저, 저도 주시는 겁니까요.”

“마이스터께서도 드시겠습니까?”

“전 됐으니까 용사님이나 많이 드세요.”

“다니엘 이단심문관께선……?”

“저도 괜찮습니다.”

사 온 양이 꽤 되니까, 먹겠다고 하면 더 줄 수 있는데.

나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했고, 그 안에 서린 미적지근함을 발견했다. 뺏어 먹어도 어른 걸 뺏어 먹어야지 애들 걸 어떻게 뺏어 먹어… 하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쟤네한테도 하나씩 돌려야겠다.

“그럼 남은 하나는 아크메이지님이 드십시오!”

“전 괜찮으니 인퀴지터께서…….”

“저만 두 개 먹을 순 없습니다! 그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애매하게 남은 하나는 아크메이지에게 돌아갔다. 건네는 눈이 너무 반짝이고 공정해서, 아크메이지는 거절도 못 했다.

“아무튼, 그 마법사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사실… 나도 그 마법사를 아직 보지 못했네. 사정이 있어서 내일 아침에나 볼 수 있을 거라더군.”

“…내일 오전에 출발 예정인데?”

사탕을 쥐고 있던 아크메이지가 말하고, 마이스터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소개해 준 이의 말로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북쪽의 마법사를 믿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오늘 하루 만에 대신할 마법사를 구한 것 자체가 용한 거긴 한데…….

이 여정의 목표를 고려하거든, 실력과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대는 없느니만 못하다. 나는 마이스터의 편견에는 동의하지 않되, 그가 제시한 불안함에는 힘을 실어 주었다.

“저야 그 마법사가 어떤 인간이든 괜찮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운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좀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기실 이 의뢰 자체는 내가 관여할 게 아니지만… 인류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이상 방관만 할 수도 없다. 최악의 경우 나는 집에 가면 된다지만, 얘네는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지 않는가.

내가 그 지점을 은밀히 지적하자 아크메이지가 순순히 수긍했다. “그 말도 맞네.” 이 대화를 이미 예상해 둔 사람의 수긍이었다.

“그래서 아까 말하지 않았나, 마법사와 물건을 수배했다고.”

“…사람은 거절해도 되는 겁니까요?”

“그렇다네.”

“그렇다면, 뭐.”

아, 꼭 사람을 들일 필요가 없는 거구나. 그렇다면 괜찮을지도. 내일 만나서 영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되는 거잖아.

“인퀴지터.”

“예?”

“네가 결정권자지 않나.”

당연하지만, 이건 전부 내 의견이고 인퀴지터는 어떨지 모른다. 나는 사탕만 오물오물 먹고 있던 청년에게 시선을 쓱 주었다.

말간 눈이 멀뚱멀뚱 나를 보았다.

“아아, 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우리 판단만 따르지 말고 네 생각을 똑바로 세워라. 주변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과 주변의 의견에 휘둘리는 건 다르다.”

“엇.”

지금까지의 행보를 돌아보거든, 큼직큼직한 사건이야 인퀴지터가 결정해도 자잘한 건 우리 의견에 휩쓸릴 때가 많았다.

하나 그것이 어디 정상적인 일일까. 이 파티의 진정한 중심점도, 결국 이 파티를 끌고 가야 하는 사람도 인퀴지터인데.

컨셉 때문에 강제되는 것도 없겠다, 내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겠다, 인제는 고칠 때가 됐다. 내 지적에 인퀴지터가 자세를 바르게 했다.

“하면… 결정에 앞서, 아크메이지님, 중개해 준 분께서 그 마법사에 대해 달리 한 말은 없습니까?”

“마법에 대한 지식에 비해 실제로 쓸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가 적다곤 했습니다. 마력량이 마법사치고 많지 않아서 그렇다더군요.”

“…그럼 실력이 별로인 거 아닙니까요?”

“아, 그 지점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장담했네. 쓸 수 있는 마법이 별로 없는 대신, 체술을 갈고닦아, 마법 없이도 어지간한 용병은 때려눕힐 수 있게 됐다니까.”

“에……?”

“마력이 많을수록 신체 통제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역이용한 셈이지. 북쪽으로 갈수록 길이 험해질 걸 고려하면 나보다 나을 걸세.”

확실히… 그 정도면 짐은 되지 않을 것 같다. 까놓고 말해서, 길이 좀만 험해져도 아크메이지는 잘 못 따라왔거든. 그 때문에 여정 속도가 늦춰진 적도 많고.

“…신체적으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확실히 같이 다니긴 편하겠습니다만, 정작 쓸 수 있는 마법이 몇 개 없어서야 마법사로서의 가치가 적지 않습니까? 다소 본말전도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그 점만 보고 데려가기엔 좀 애매하다. 마법사로서의 가치를 다하지 못하는 마법사라면 데려갈 의미가 없으니까.

“대신, 제가 여정 중 쓰던 보조 마법은 그도 쓸 수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것이고요.”

“그렇군요.”

아, 보조 마법은 다 써?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어차피 길 가는 데 대규모 마법이 요구될 일은 거의 없으니까……. 수행 중인 의뢰도 싸움에 연루될 만한 여지가 딱히 없었고.

“소개해 준 분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사람 자체야 인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부류는 아닙니다만… 이런 문제를 두고 거짓을 말할 친구도 아닙니다. 실력에 대한 평가는 믿어도 됩니다.”

“그렇다면… 만나 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행에 마법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정말 크니까요. 다만 무지의 위험성이 있는 만큼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요. 만나서 몇 가지를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별개로 세상 물 덜 먹어서 순진한 거랑 멍청한 건 역시 다르니까. 나는 차분히 본인의 사고를 열거하는 인퀴지터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누가 키웠는지 애가 아주 똑부러졌다.

“출발 시각을 고려하면 시험할 시간은 짧다. 어떻게 확인할 거지?”

나는 속으로 인퀴지터의 머리를 복박박 쓰다듬고, 실제 손으로는 사탕을 몇 개 더 쥐여 주며 시험성 질문을 던졌다.

햄스터처럼 볼따구에 사탕을 저장한 인퀴지터가 눈을 두어 번 껌뻑인 후 대답했다.

“최소한의 됨됨이를 확인해야 하니… 그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야겠지요. 또한 인품이 되어도 실력이 안 되면 데리고 갈 이유가 없습니다. 실력 파악을 위해 마법 쓰는 모습도 몇 가지 봐야겠습니다.”

아. 저는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이 부분에 대해선 아크메이지님과 마이스터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퀴지터가 말을 하다 말고 지원을 요청했다. 본인이 할 수 없는 분야를 명확히 인지하고, 또 인정하며 도움을 청하는 게 아주 훌륭했다.

“물론 마이스터님께서 힘드시다면 안 해 주셔도 괜찮─”

“내가요? 뭐가요? 그 정돈 해 줄 수 있거든요?”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마이스터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바로 나서게 만든 점까지 완벽하다. 이 도시에,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듯한 마이스터가 정말 괜찮을지는 의문이지만.

“그걸로 끝인가?”

“주위 평판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으나… 시간이 늦은 만큼 이 부분은 어렵겠지요. 대신 내일 아침에… 망종, 네가 힘을 빌려주면 좋을 것 같다. 너라면 짧은 시간 안에도 몇 개의 소식을 잡아낼 테니까.”

“그, 그럼요.”

“다만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마도 마법사일 테니… 만일을 대비해 다니엘 이단심문관께서 망종과 함께 다녀 주셨으면 합니다. 모험가님도 충분히 위협에 대처하실 수 있지만… 능력과 별개로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부분도 가지고 계시니까요.”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업무를 분담하고 인선을 정하는 솜씨가 진짜 제법인데?

나는 각자 능력에 맞춰 배치하는 인퀴지터의 판단에 감탄했다. 우리 애가 이 정도로 자질이 뛰어났는데 내가 이걸 몰랐다.

“더불어 의뢰 물품… 대상은… 괜찮으시다면 모험가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 말인가?”

“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장하긴 한데, 우리 애가 정말 잘하고 있긴 한데……!

“일단, 아크메이지님께서 수배한 아이템은 이쪽 마탑에서 제공한 것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아크메이지님께서 마법사를 마탑 아닌 곳에서 구하셨을 리 없으니, 그도 결국 마탑 소속일 텐데… 마탑에서 소개해 준 마법사가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들이 제공한 아이템이라고 안심할 수 없잖습니까.”

“그렇… 지.”

“하니 보관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아이템이나 능력을 통하는 것이 안전한데… 저희 일행 중에서 아공간 아이템을 지니고 계신 건 아크메이지님과 모험가님 두 분뿐입니다.”

“…그것도 그렇지.”

“꼭 아공간 때문만이 아니라, 보호를 위해서라도 모험가님이 맡아 주시는 게 좋습니다. 마법사의 실력이 어떻든, 모험가님이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와중에 말의 정합성이 너무 뛰어나서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 래. 내가 맡겠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장으로 주검을 인벤토리에 받아들였다.

인퀴지터의 손에 들린 사탕이 괜히 얄미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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