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신께 고하리라 (6)
“정말 빙하의 시련이 시작된 게 맞나?”
그녀를 따라온 전사 한 명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눈보라가 지나가며 새하얗게 물든 산을 향해 있다.
“모른다.”
“…분명 빙하의 시련이라고 하지 않았나?”
“추위에 귓구멍이 얼어붙기라도 했나? 나는 빙하의 시련이 시작됐다고 한 적 없다.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 대비하는 게 좋을 거라 말했을 뿐.”
베르세르크의 눈길 또한 산에 닿아 있긴 매한가지였다. 전사와 그녀의 시선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 무엇을 좇고자 하는지가 되겠지만 말이다.
뿌우─ 뿌우우우우.
“…흔적이 하나 더 발견됐군.”
“신호를 줘라.”
그러다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베르세르크가 눈을 가늘게 접고, 전사들을 이끄는 노련한 사냥군이 손짓했다. 사냥꾼의 뒤꽁무니를 쫓던 소녀가 지니고 있던 뿔피리를 입에 물었다.
뿌─뿌우우우─
이쪽 무리의 생존을 알리되 알아낸 게 없음을 알려 주는 신호가 허공을 향해 길게 울려 퍼졌다. 눈이 소리를 먹고 먹어도 산 너머까지 닿을 소리였다.
뿌우우우─뿌─뿌우우
“대전사, 저쪽은 돌아가겠다는데, 이제 어쩔 텐가?”
“나는 내려가지 않는다.”
“…나흘째인데?”
“그래서?”
베르세르크는 잔향이 사라졌음에도 울리는 듯한 귀를 두어 번 매만진 후, 손을 탁탁 털었다. 눈이 녹으며 축축해졌던 장갑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함으로써 참으로 찝찝한 기분을 선사한다.
“고향을 등진 지 이십여 년이 흘렀건만, 그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군.”
그러나 그런 장갑보다 더 불쾌한 건 이 공간 자체였다. 베르세르크는 가슴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지긋지긋함에 넌덜머리가 났다.
“오히려 더 나약해지고, 쇠잔해졌어. 더는 전사라 불릴 가치도 없다.”
“…대전사! 당신이 아무리 전설의 대전사라지만, 그 말은 도가─!”
“내 평가가 억울한가? 그렇다면 무기를 들어라.”
그녀는 발끈하며 나온 이에게 도끼를 겨누었다.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겨누기만 한 모양새였으나 그 동작 한 번으로 모두가 바짝 굳었다.
그녀가 이십 년 전 부족을 등진 사람이라곤 하나, 한때의 그녀가 세웠던 기록은 그들의 발목을 붙들기 충분했다.
“무기를 들어라. 어째서 들지 않지? 멋대로 혀를 놀린 자가 있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는 것이 전사의 미덕 아니었나?”
빙하의 시련. 전사와 대전사를 가르는 구분 선이자, 지난 수백 년간 수천, 수만 명의 전사를 잡아먹은 생사지경의 시험.
이미 한 번의 시련을 극복한 대전사조차도 다음을 장담할 수 없어 목숨을 거는 그곳에서, 베르세르크는 스무 번의 대기록을 세웠다. 이십 명의 전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이겨 내기 힘든 시련을, 그녀는 단신으로 스무 번이나 이겨 냈단 소리다.
“정말 무기를 들 자가 하나도 없나?”
하니 그런 전설의 앞에서 어찌 까불대랴?
베르세르크가 무어라 하던 전사들은 입만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베르세르크를 더 짜증나게 만들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채였다.
“하. 모욕에 분노할 자존심은 있으나, 정작 자존심을 뒷받침할 능력이나 기개라곤 한 톨도 없는 머저리들뿐이었군. 더 이상의 입씨름조차 낭비다. 꺼져라.”
각설하고, 답답함이 핏줄 가득 채워진 베르세르크는 도끼를 도로 집어넣었다. 이딴 것들도 전사라고. 부글거리는 속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모를 분노로 인해 더욱 끓어오르는 중이다.
그늘진 금안이 도낏자루를 빠드득 쥐었다.
“잠깐, 대전사. 어딜 가려는 건가?”
“분명 말해 주었을 텐데.”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눈을 성큼성큼 밟아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나의 자매를 찾기 전까지 결단코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짓씹듯 내뱉은 말은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 * *
주작 택시 덕에 한 달 반가량을 스킵했다곤 하나, 세계의 끝은 아직도 멀다.
“이곳이 클레베흐입니까?”
“…염병,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으으, 추워…….”
“…장비를 더 두꺼운 것으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 우리는 지도를 살펴 가장 가까이 있던 도시에 들렀다. 클레베흐.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마탑이 있는 도시였다.
“…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기 출신이야.”
“…….”
다만 클레베흐를 본 마이스터의 표정이 심히 안 좋아졌다. 단순히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파리한 안색도 안색이지만, 마이스터의 손은 아까부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나?”
“아니. 굉장히 안 좋아.”
“…보급만 마치고 바로 떠날까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 도시가 좆같은 것과 별개로 오늘 하루만큼은 제발 침대에서 자고 싶거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그땐 편히 자기도 힘들 텐데.”
“옙.”
나는 마이스터의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시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 반응인데 정말 머물러도 되는 건가?
물론 클레베흐보다 더 위로 가거든, 아크메이지의 표현을 빌려 ‘콧물이 나오자마자 어는 곳’이 되겠지만… 그래도 추위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마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정신적 문제와 다르게.
“정말 괜찮겠나?”
그걸 고려하면 좀 피곤하더라도 다음 마을까지 가서 쉬는 게 낫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런데.
“괜찮아.”
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고집 부리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나.”
“일반인이면 몰라, 너희에겐 딱히…….”
시큰둥하게 고개를 젓던 마이스터가 갑작스레 “아.” 소리를 냈다. 그의 시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데스브링거를 향한다.
“너는 좀 조심해야겠다.”
“…이 파티에서 제가 제일 약하단 건 저도 압니다요.”
“뭔 소리야. 내가 제일 약한데.”
“…….”
마이스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일행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마치 여우가 갯과라는 사실을 처음 접한 사람들 같았다.
“뭔데. 왜 다들 그런 표정인데.”
“…아니, 그. 댁이 약, 약하다는 게…….”
“대, 대명장께서, 약, 약…….”
“그럼, 내가 강하냐?”
“아니, 그… 이단심문관을 주먹으로 기절시킨 양반이 약한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데스브링거가 더듬거리며 한마디 했다. 나는 처음 듣는 일화였다.
뭐, 듣자마자 ‘그게 돼?’라는 당혹감보다는 ‘마이스터라면 그럴 만해.’라는 수긍이 먼저 찾아왔지만. 이단심문관을 기절시켰다는 것조차 ‘쟤라면 가능해.’ 싶었지만.
“뭔 개소리야. 너한텐 근력이랑 무력이 같냐?”
그사이 마이스터가 우리를 흰눈으로 흘겼다.
“같, 같진 않긴 한데…….”
“이단심문관도 결국은 인간이고, 나는 대장장이를 겸하고 있지. 그런 조건에서 기습적으로 선빵 쳤는데 기절 못 시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그것도 맞는 말이지. 나는 마이스터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렴, 가느다란 발레리나도 진심을 다해 사람을 차면 갈비뼈 나가는 게 현실이다. 그들이 근력을 목적으로 운동한 게 아니고 사람을 해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님에도, 그간 쌓아 온 코어 힘만으로 사람 뼈가 동강 날 만한 파워가 나오는 거다.
그런 마당에 대장장이라고 뭐 다를까? 도리어 뼈가 안 부서진 게 다행이다. 나는 이름 모를 이단심문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다니엘이 순식간에 땀으로 절여졌다.
“그리고 내가 사람 기절시킬 근력이 있다고 해서 기사랑 일대일로 붙을 수 있겠냐? 악마랑 일대일로 붙을 수 있겠냐고.”
“그건… 아니죠…….”
“대상이 기사나 악마가 아닌, 보통의 범죄자라도 마찬가지야.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왈패나 취객 정도지, 작정하고 사람 죽이거나 패는 범법자들까진 아니거든?”
“그… 으래요?”
“너는 시발, 날 뭐라 생각하는 거야?”
…악마 사이에 던져 놔도 아가리로 살아 올 인간?
나는 마이스터가 들으면 분명 화낼 생각을 삼키며 마이스터의 약함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아직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확실히 객관적 지표로 따지면 그는 약자가 맞았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네가 조심해야 하는 건 네가 좆밥이라서가 아니라, 네가 평소 쏘다니는 곳이 뒷골목이라서야. 다른 도시라면 몰라도 여긴 진짜 위험하다고.”
“예, 옙.”
“뭐, 이것도 십몇 년 전 기준이라 지금은 또 다를 수 있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숙소에 박혀 있어. 잡혀 가서 실험체 되지 말고.”
와중에 마이스터가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실험체. 아크메이지의 얼굴이 싸늘해지고 인퀴지터가 노기로 볼을 붉혔다.
“인간을 상대로 실험하는 건─!”
“새삼스럽게 왜 화내요? 예전에 뇌 실험 땐 화 안 냈으면서.”
“…그, 그건.”
뇌 실험? 나는 내가 없는 동안 그들이 나눴을 대화를 가늠해 보는 한편, 미간을 살짝 구긴 채 팔짱을 풀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지. 곧 우리 차례다.”
다른 건 몰라도 클레베흐 병사 앞에서 클레베흐 험담을 하는 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도리를 떠나서 우리에게 불이익이 올 수도 있고, 나중에 꼬투리 잡혀서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주지시켰다. 흥분했던 이들이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사람 잡아갑니까?”
“지금은 모르지. 근데 나 땐 그랬어.”
물론 이런 상황에도 은근히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사람은 있었다. 데스브링거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묻고, 마이스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기울여 응답했다.
“혹시 싶어서 묻는 건데… 마탑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건 아니죠?”
“설마 그러겠냐?”
“아, 역시─”
“마탑 소속 마법사가 개인적으로 일 치는 거지.”
“아니, 시발.”
앞줄의 인퀴지터와 다니엘, 아크메이지가 신원을 증명하는 사이, 데스브링거가 펄쩍 뛰었다. “뭡니까?” 자연히 병사의 관심이 그쪽으로 끌렸다.
“아, 아닙니다.”
그러게 누가 폴짝 뛰래. 나는 내 모험가패를 꺼내며 데스브링거의 등을 콕 찔렀다.
“앞으로 가라.”
“앗, 옙.”
데스브링거가 대화를 잠깐 멈추고 본인을 위한 신원 증명서를 꺼냈다. 앞에서 심사받았던 세 사람 덕에 우리들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짜 마기다…….”
그 과정에서 다소… 우리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긴 했지만 이건 항상 그랬으니까 뭐.
“…성주랑 신전은 뭐 놀아요?”
“그럴 리가. 걔네도 일은 해.”
“일을 하는데 왜…….”
“그만큼 은밀하게 이뤄지니까.”
“은밀하다면 그만큼 더 강력히 규제하고 삼엄히 감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튼, 심사가 끝나자마자 인퀴지터와 다니엘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크메이지도 입만 열지 않을 뿐 계속 대화를 주시하는 눈치였다.
“…그게 되겠어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상에 대한 상식을 여럿 배운 인퀴지터지만, 그렇다고 순진함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다. 마이스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얀 까마귀의 마탑은 악마의 약점을 파헤치는 데 탁월한 동시에 생명 마법 분야의 선두 주자예요. 하얀까마귀가 인신매매 및 인체 실험을 옹호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마탑을 명분 없이 검문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이거죠.”
생명 마법의 선두 주자라는 건 치료 마법의 대가란 소리도 된다. 권력을 거머쥔 성주가 하얀 까마귀의 눈치를 보는 이유다.
“뭐, 신전은 눈치 볼 이유가 없긴 한데… 거기도 명분 없이 들이닥치긴 어렵죠? 마탑의 북부 전선 기여도는 그리 적지 않으니까.”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건데…….”
“무엇보다, 뒷골목의 버러지들 몇 명이 죽어 나가는 대가로 치료 마법이 개선되어 죽을 병사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정도 손해는 눈감아 줄 의향의 사람이 참 많아서요.”
“……!”
“…역겹군.”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확언받는 건 역시 끔찍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숙소나 빨리 잡자고 재촉했다. 다른 이들보다 상태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나도 침대가 고픈 건 사실이었다.
“…근데 저거 왜 저래?”
“……?”
“아니, 마탑 한쪽이 박살 나 있는데?”
“……??”
* * *
“신의 대리인이 도시 안에 들어왔습니다.”
클레베흐 마탑 지부만의 규칙에 따라 단 한 발짝만 안으로 들어온 이가 그 어떤 인사나 소개도 없이 소식만을 전했다. “신의 대리인?” 듣고 있던 하얀 까마귀의 눈이 가늘어진 건 그중 한 단어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 제게 들어온 요청이 있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만 꺼지십시오.”
하지만 그 대상이 이쪽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다. 하얀 까마귀는 부리 가면의 향을 흡수하며 손짓으로 전령을 내쫓았다.
“그래서… 들었나요?”
그는 한층 느긋해진 목소리로 손을 퉁겼다. 비늘과 비늘이 부딪치는 미묘한 소리와 함께, 의태해 있던 무언가가 제 색과 형태를 되찾았다. 마치 검은 타르처럼 보이는 슬라임이었다.
스르르륵.
그것은 꼭 물방울처럼 천장으로 이동했다. 마치 천장에 맺힌 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역재생한 것 같았다. 천장에 달라붙은 슬라임이 넓게 퍼지며 천장의 색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네, 73번?”
“…닥쳐.”
대신 슬라임이 떠난 자리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세로로 길쭉한 관형 유리관이었다.
“빨리 시작이나 해.”
“후후, 급하기는.”
단지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을 뿐인 유리관.
“좋아요. 그럼, 강화를 마저 시도해 볼까요.”
하얀 까마귀가 샐쭉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