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46화 (346/389)

346화 신께 고하리라 (4)

“신의 대리자를 뵙습니다.”

2주를 넘게 달린 끝에 주작이 지정한 접선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 그곳에서 우릴 맞이한 건 주작 본인이 아니었다.

주작에게 전령 일을 부탁받은 성주만이 있었지.

“이것을… 세계의 끝에 가지고 가야 한단 말입니까?”

한데 성주가 부탁받은 말을 마치는 순간 우리 모두는 떨떠름한 심정이 되었다. 어지간하면 반문 없이 수긍하는 인퀴지터마저 귀를 의심하며 되물을 정도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신을?”

그렇지만 솔직히 그럴 만했다. 특정 사물을 노르다 지방까지 옮겨야 한다는 건 둘째 치고, 그 화물이 사람의 송장인 건 역시 이상했다.

“…누구의 주검인지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아크메이지조차 당황하여 말을 더듬을 때, 나는 미라처럼 꽁꽁 동여매진 시신을 보았다. 실루엣이 딱 사람의 것이라 오해할 수도 없었다. 이건 명백히 인간의 육신이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듣지 못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이것들이 숭고한 용에게 반드시 반환되어야 하며 그 전에 이것들이 망가지면 세상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이 위험해진다?”

“오래된 존재께서 그리 말하셨습니다.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근데 정말 정체가 뭐지. 반환되지 못하면 세상이 위험해진다니, 이거 뭐 비류호랑 비슷한 케이스냐? 사랑에 미친 용이 주검이라도 돌려받지 못하면 세상을 붕괴시키겠다 크롸롸롸- 하고 있는 거냐?

“그보다… 방금 이것들이라 하셨죠? 전해야 할 게 시신뿐이 아닌가 보네요?”

내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사이, 마이스터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송장을 감싼 천에 닿아 있다.

“오래된 존재께서 당부하신 건 시신뿐이 아닙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주는 들고 있던 짧은 지팡이로 주검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끼고 있는 팔짱이나 가슴 때문에 봉긋해졌다기엔 무언가 미묘한 굴곡이 눈에 띄었다. 꼭 무언가를 안은 상태에서 천에 둘러진 것 같았다.

“오래된 존재께서 맡기신 건 어떤 조각들도 함께입니다. 보관의 용이함을 위하여 주머니에 담고, 시체의 품에 끼워 둔 채 천으로 감싸 직접 확인하기는 어려우시겠지만요.”

“아…….”

“참고로 이 천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마법사들로 하여금 방부 처리 및 파손 방지 마법을 건 것입니다.”

“그렇군요.”

“힘을 지닌 자가 작정하고 망가트리려 든다면 뭔들 못 부수겠습니까마는, 최소한 이동 중 이는 충격으로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응당 해야 했을 일입니다.”

인퀴지터의 감사에 성주는 가볍게 묵례하곤,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열쇠를 가진 자 외의 대상이 천을 풀려 든다면 보호 마법이 일도록 했습니다. 하니 천을 풀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것을 착용하고 풀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준비가 아주 철저한 사람이다 싶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반드시 반지를 끼고 푸셔야─”

“와, 뭐야? 천에다가 전격 마법을 어떻게 새겼지? 출력도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 기사마저 바싹 태울 정도인데. 재료를 얼마나 처부은─ 잠깐, 이 마크는… 제작자가 할배 직제자 출신인가 본데.”

“…티마뉴크 님의 작품입니다.”

“티마뉴크? 아, 그 양반이면 확실히…….”

와중에 아까부터 천만 꼬나보던 마이스터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친근감이 가득한 게, 아무래도 제작자를 아는 눈치였다.

성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런데 이거, 어지간하면 붕대는 안 푸는 게 좋겠다. 제작자 본인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풀었다가 다시 묶으면 효과가 떨어질 거야.”

“…무슨 원리로 그렇게 되는 겁니까?”

“새겨진 문자의 위치 때문에 그러는 것 같군. 둘렀을 때 인접할 마법진까지 계산해서 만든 물건이라 조금만 다르게 묶어도 효과가 반감될 걸세.”

“…그게 가능한 영역입니까?”

“계산만 잘하면 되는 문젠데, 뭐.”

“번거롭긴 하지만, 어렵진 않네.”

하나 마법사 둘은 붕대에 푹 빠졌고, 신전 출신 둘은 눈만 데굴 굴리며 듣고 있는 상황이며, 나랑 데스브링거는 출신 때문에라도 성주와 직접 말 섞고 싶은 입장이 아니다.

성주는 자신이 했어야 할 설명마저 빼앗긴 채로 오묘한 표정을 끝까지 유지했다.

“크흠, 더 해설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하면 운송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차를 빌려드릴까요?”

“아, 그렇죠. 파손 방지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해서 이걸 짊어지고 갈 순 없으니까… 하지만 마차를 가져가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아, 그건 아공간에 넣으면 됩니다.”

“가능합니까, 아크메이지님?”

“생명체는 아니니까요. 아공간에 넣어 둔 짐을 좀 덜어 내면 한 구 정돈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쪽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운송에 대한 문제도 김빠질 정도로 쉽게 해결됐다. 마법은 신이었다.

“이러면 마법 천은 별 의미 없는 거 아닙니까요?”

“그건 아니지. 꺼낼 때 환경이 어떨지, 부득이한 일로 아공간에서 꺼내게 되는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

“흐음… 그래도 좀 돈 낭비 같게 느껴지긴 하네요.”

“세상의 안위가 걸려 있다는데 돈이 대수겠어?”

물론 아공간에 시체가 들어가는 건 좀 꺼림칙하긴 했는데… 내 아공간도 아니고 그게 편의적인 것도 맞기에 무어라 말 얹지는 않았다. 도맡아 준다는 아크메이지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근데 정말 세상의 안위가 걸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거면, 왜 본인은 얼굴도 안 보인답니까?”

각설하고, 아크메이지가 본인 인벤 테트리스를 하는 동안 데스브링거가 마땅한 의문을 품었다. 성주를 의식한 것인지 목소리를 무척이나 낮춘, 옆에 서 있던 나나 마이스터에게만 들릴 만한 음성이었다.

“글쎄다.”

마이스터도 그 부분이 궁금한지 조금 골몰하는 얼굴이 되었다.

“주작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그마저도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왜 고민하며 시간 낭비 했지?’하는 표정으로 곧 바뀌었지만. 마이스터의 당돌한 질문에 성주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전선으로 가셨습니다.”

그래도 성주는 프로였다. 언짢음을 순식간에 지워 낸 이가 담담히 답을 내주었다.

“전선으로? 그럼 그냥 좀만 기다리면 되는 게…….”

“그리고 이 주째 이곳에 못 오고 계시지요.”

“…그렇게 위험한 상태입니까?”

이동하는 동안은 소식 들을 겨를이 못 됐고, 도시에 들어온 후에는 이곳으로 직행했다.

덕분에 우리는 주작이 2주째 전장에 붙들려 있단 소리를 처음 들었다. 전선이 그렇게 안 좋은 상태인가. 불안감이 치솟은 건 덤이었다.

“최악… 은 아닙니다. 하나 오래된 분께서 섣불리 발을 뺄 상황도 아니라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드디어 이해했는지, 성주도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색욕의 대악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느니, 서쪽을 멸한 것으로 추측되는 오만의 권속이 전장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느니. 하나같이 안 좋은 소식이었다.

“서쪽에서 힘을 소모했다는 추측이 맞는 것인지,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치는 건 아닙니다. 하나 그쪽에도 기동력이 좋고 부패의 힘을 다루는 악마가 새로 등장해, 오래된 분이 나서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허어… 그래서.”

“하여 부득이하게도 먼저 가길 청하신 듯합니다. 세상의 안위를 언급하신 걸로 보아, 이것의 중요성도 전선만 못하지 않은 듯하니까요. 더불어 반드시 용사께서 가야 하노라 하신 걸 보면, 반환 과정에서 용사님의 힘이 꼭 필요한 듯했고요.”

“그렇군요.”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대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를뿐더러 상황이 언제 안 좋아질지도 모르는 만큼, 주작을 그저 기다리는 건 답이 아니게 되긴 했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이것을 세상의 끝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끼리 먼저 가라는 주작의 부탁을 온전히 납득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왜 반환되어야만 하는지, 숭고한 용이 누군지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뭐 어쩌겠나. 그건 아마 주작만이 아는 사항인 듯한데.

우리는 주작이 와야만 해결될 의문점을 품은 채 다시 도시를 떠났다.

“빌어먹을… 너희 여정은 왜 이렇게 빡빡한 거야?”

“작년부터 매번 이렇게 살아왔다고 하면 기절하겠군?”

“…괜찮으신 겁니까? 이런 강행군은 이단심문관들조차 버거워할 수준인데.”

“허허허허.”

약간의 불만이 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출발은 출발이었다.

* * *

베르세르크는 불을 피우고자 나뭇가지 따위를 찾았다.

하나 죽어 가는 땅에 초목이 존재해 봐야 얼마나 존재할까. 그녀는 한참 만에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몇 장과 바스러진 나무 토막 몇 개만을 겨우 주웠다. 불을 피울 수는 있으나 제대로 된 모닥불을 만들긴 불가능한 양이었다.

“위대한 전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진 못하는군?”

그걸 본 사냥꾼이 낄낄 웃었다. 길잡이로 삼으라 마을에서 붙여 준 사냥꾼이다.

“네 웃음이 타개책을 기반 삼길 바라지.”

“오… 안타깝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하는 건 사냥꾼도 마찬가지야.”

그녀를 두고 웃던 사냥꾼이 손을 들어 올렸다. 베르세르크보다 두 배는 족히 많은, 그럼에도 모닥불을 이루기엔 부족한 양의 소재가 보였다.

사냥꾼의 자질이 부족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없어서 가져오지 못한 것 같았다.

“쯧.”

저것들로 모닥불을 제작하느니, 그냥 마탑에서 가져온 냉병기를 쓰는 게 낫겠다.

그녀는 피해 보상을 빌미로 뜯어 온 도끼를 바닥에 내려 두었다. 발열 마법이 내장된 도끼였다.

“대체 뭘 하려고?”

물론 마법도구에 조예가 없는 사냥꾼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연히 그녀가 양철 머그컵을 꺼내 눈을 퍼담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눈째로 먹게?”

“아니.”

달그락. 그녀는 도끼 면에 머그컵을 올렸다. 열이 오르며 서서히 붉어지던 도끼가 머그컵에까지 열기를 뿜었다. 눈이 녹기 시작했다.

“…재미난 걸 가지고 있군. 남쪽의 것인가?”

“가지고 싶나?”

“가능하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그녀는 녹은 물을 반절 마셨다. 남은 것은 사냥꾼에게 넘겨줄 것이다.

“내게 명분이 없었다면, 나조차 이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대전사마저 물러나야 할 만큼 위험한 곳이란 말인가…….”

사냥꾼이 한탄했다. “저것이 몇 개만 더 있다면 장작 걱정을 덜 것인데.” 부족을 걱정하는 자의 탄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절박하고 간절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베르세르크는 말을 고치지 않았다.

『빙하의 전사, 북방의 약탈자, 북쪽의 야만인, 얼어붙은 땅의 주인… 그리고 용의 저주를 받은 자. 후후. 당신들에 대한 연구가 끝난 상태라는 걸 감사히 여겨.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이 살아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본인의 영역 속에 웅크려 있던 그 흰 마법사는, 그녀조차 승리를 단언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빨리 마시기나 해라. 수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

이 산의 눈을 모조리 헤집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언니의 시체를 찾아낼 것이다. 이 산에 없다면 저 산을, 저 산에 없다면 그 너머의 산을 휘저어서라도, 반드시.

“하지만 대전사, 당신이 가져온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산엔 먹을 수 있는 짐승이…….”

“그래서?”

베르세르크는 발열 마법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온기는 없을지언정 바람을 차단해 주던 굴을 나서자 순식간에 추위가 몰려왔다. 익숙한 한기였다.

“먹을 것이 없다면 먹지 않으면 된다.”

“그, 대전사. 그건 당신이라서 가능한…….”

“배고픔을 견딜 수 없다면 내려가라. 처음부터 데려올 생각 없었다.”

콩고물을 바란 마을 사람들이 억지로 붙여 준 것이지, 그녀가 사냥꾼을 요구한 적은 없다. 그녀는 그것을 확실히 하며 하얀 숨을 내뱉었다. 폐부가 하얀 공기로 가득 차고 나서야 그녀 자신의 삶이 느껴졌다. 서글픈 삶이었다.

“…아직은 괜찮으니 계속 가지.”

얻은 것 없는 사냥꾼이 주눅 든 표정으로 뒤따랐다.

“아까 나무를 찾는 과정에서 기묘한 흔적을 봤다, 대전사. 크레바스 너머에 있던 것이라 바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수색할 가치가 없진 않을 거다.”

주검의 흔적일 리는 없겠으나 짐승의 흔적이라면 사냥해서 식량으로 만들 수 있다. 짐승이 아닌 이상 현상이라도 만일을 대비해 조사해 볼 필요는 충분하고.

하니 나설 당위성은 전부 충족되었다. 베르세르크는 사냥꾼의 제안을 순순히 따랐다.

“…이건?”

“왜 그러지?”

“눈이… 녹았다 얼어붙은 흔적이다. 심지어 여긴 땅이 뒤집어져 있는데… 뭐지? 나무뿌리라도 캔 건가?”

그러나, 정작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사냥꾼은 내리는 눈이 채 덮지 못한 흔적을 보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눈이 쌓인 걸 보면 꽤 된 흔적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눈에 띄는 굴곡이 남아 있을 정도니…….”

“…빙하의 시련에서 괴물이 튀어나온 건가.”

“확실하진 않아.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군. 으음… 대전사, 이건 아무래도 부족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할 소식인 것 같다. 그대가 바쁘다곤 하나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겠지?”

“…그래.”

정말 빙하의 시련이 시작된 것이라면 뒤로 미룰 수 없다. 베르세르크는 성가시고 까다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