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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40화 (340/389)

340화 내 이 손으로 (4)

회의가 끝난 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홀을 빠져나갔다. 용사 일행도, 마이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퀴지터, 진심입니까? 북쪽으로 향하겠다는 것은…….”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크메이지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퀴지터.”

“…뮌문트의 사정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이대로만 차근차근 나아가면 방역이 뚫리는 일 없이 모든 게 종료되겠죠. 즉, 이 도시엔 이제 제가 없어도 됩니다. 북쪽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같이 나가는 길이었기에 소성주도 해당 발언을 듣기는 했을 것이다. 하나 용사라는 커다란 패가 떠난다는 이야기에도 그는 특유의 감흥 없는 표정으로 시선만 힐끗 줄 뿐, 특별히 말을 더 얹지는 않았다.

용사를 꼬드길 건덕지도 없겠다, 자잘한 사유로 설득될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포기하겠다는 판단 같다. 그가 생각한 게 맞다면, 용사를 꼭 붙잡지 않아도 되는 상황일 수도 있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마왕성을 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딱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

“가야 합니다.”

“죽상인 얼굴로 각오 다져 봐야 비장한 일이 되진 않는데요.”

바로 인퀴지터의 표정이었다.

“하, 담배 말리네.”

소성주는 벌써 자리를 뜨는 중이지만, 그래도 하인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담배를 피긴 그렇다. 그런 연유로 마이스터는 담뱃불 없이 담배의 끄트머리를 질근질근 씹었다.

뭐어… 그 대가로 녹색귀가 그를 미친 인간 보듯 보았지만, 알 반가? 저놈은 그를 야릇한 눈길로 꼬나보기 전에 지 업보부터 청산하고 오라지.

그리고 아크메이지는… 노친네들 나이 먹고 신중해지는 건 다 똑같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그녀 입장상 인퀴지터한테 대놓고 일 때려치워라, 세상 포기하라, 종용하긴 어려운 것도 맞고.

“이봐, 용사님.”

하니 마이스터는 직접 입을 열기로 했다.

이건 걔가 말하는 게 더 직빵일 텐데. 좀 더 나은 대안이 머릿속에 잠깐 떠오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그냥 본인이 나서는 걸 택했다.

“힘들면 그만둬요.”

“……!”

어차피 이건 그도 항상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굳이 말해 줘야 하나 하며 매번 포기하긴 했지만.

“정 괴로우면 용사 일 그만두고 자기 일 우선해 보라는 거예요.”

기실, 마이스터는 여전히 용사에게 별 유감이 없다. 그렇지만 모험가가 홀로 헌신하고 자책하는 것에 역정을 낸 것이 바로 어제 일이다. 인퀴지터가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형태로 바늘 삼키기 중인 게 작금이고.

“당신이 실패하거나 자신의 일을 좀 우선시한다고 해서 뭐 세상이 망하겠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간 차를 두고 또 새로운 용사가 나오겠지.”

그러니 차마 나서지 않고 배길 수 있나? 안 그래도 인퀴지터의 처지가 거지 같게 느껴지긴 했던 참인데.

“그러니까 정 못 하겠다 싶으면 때려치워요.”

해서 그는 그냥 속 시원히 말하기로 했다. 설령 누군가는 그 뒤를 도맡아 줄 의향도 무력도 없는 주제에 무책임한 말을 한다며 손가락질하겠지만, 그따위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도 그걸 몰라서 이리 말한 게 아니었다. 단지 인성이 파탄 나서 굳이 보완하려 들지 않은 거지.

“…제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뭐, 그렇겠죠? 근데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돼먹은 세상이 좆같은 거지.”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그게 맞아요. 그 새끼도 그렇고, 그 애새끼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왜 자기 잘못도 아닌 걸 끌어안고 징징거리지?”

동시에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런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었다. 이리 말하는 그가 무책임한 거라면, 한 사람의 희생을 방관하는 그들은 뭐 떳떳하겠냐는 마인드 덕분이었다.

“그냥 ‘세상 좆같네’ 한마디 하고 던져요. 솔직히 조별 과제를 한 사람한테 맡긴 세상이 잘못이지, 그게 던진 사람 잘못인가.”

하므로 그의 행위는 옳다. 마이스터는 자신의 말이 어린 용사에게 어떤 의미로 닿든,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든… 최소한 선택지 하나 주지 않으려 든 나머지보단 무조건 낫다.

“그렇다고 걔한테 도와 달라고 하진 말고. 댁만큼이나 걔도 고생했으니까.”

마이스터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 * *

그가, 모험가가 그를 호출했다.

“소성주.”

귄터는 하인을 통해 그 사실을 듣자마자 집무실로 달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던 까닭이다.

“파우스트의 외삼촌에게 그 아이의 생존을 알렸다. 내 육신이 파우스트인 점은 숨기되 내가 그 아이의 조력자 같은 존재임도 같이.”

“그렇군요. 관련해서 제가 도와야 할 게 있습니까?”

“…근 시일 내에 그를 소환해서 대화를 나눠 주지 않겠나. 내가 갈색 머리 마법사와 동일 인물임을 그대도 알고 있노라 언급하니 의심은 거의 거둬들이는 듯했지만… 그래도 그대가 직접 불러 얘기하는 것만큼 확신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누군지만 알려 주십시오.”

“정찰대에 소속된 병사다. 회색 머리카락의 큐어티족이고 리챠라는 별명을 쓰는데… 자세한 정보를 듣는 걸 깜빡했군.”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금방 찾습니다.”

“아, 내가 이 도시에 처음 들어올 적 나와 함께 있던 병사다.”

그쯤 들으니, 귄터는 한 사람을 바로 떠올렸다.

변장 상태의 상대를 이 도시에 데려오고, 또 비호하던 그 병사. 입막음을 위해 불렀던 당시, 어디까지 아는지 넌지시 물어보는 족족 마법사를 은근히 비호하기만 할 뿐 영웅과 동일 인물임은 상상 못 하는 듯하던 그 병사.

그땐 크게 당부해 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것 같아, 마법사의 거짓 죽음만을 알려 주고 끝냈는데… 아무래도 그를 다시 불러야 할 모양이다.

“누군지 알 것 같군요.”

별개로 그가 설마 파우스트의 혈육이었을 줄이야. 이 도시에서 회색 머리는 굉장히 흔한 편이고, 그 아이의 친가나 외가와 접촉한 적도 없어서 몰라봤다.

귄터는 어쩐지 동생에 대한 추억을 공유할 대상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더불어… 내가 마법사인 척하던 걸 아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하시지요.”

“…비밀 엄수는 완벽한 건가?”

“눈치챘음에도 의문을 표출하지 않는 자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완벽은 자신 못 드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주류 의견이 되는 일 역시.”

기사 둘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불문을 깰 타입이 아니다. 또한 상대의 감시를 맡았던 병사들은 둘 다 전사했다. 성벽에 있던 자들 역시 자신들이 본 게 맞는지 틀린지 확신을 못 하는 상태고.

마법사의 모습만 봤던 이들도 거짓 죽음을 날조하니 안타까워만 할 뿐, 영웅과의 연관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마법사의 죽음 자체도 별 의심을 받지 못했고.

하니 누군가가 의문을 품을 수는 있어도 상대의 비밀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상, 영원히.

“…그래. 신전이나 용사의 귀에 특히 들어가지 않도록 부탁하지.”

“예.”

물론 귄터도 사람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사실을 숨기려는 점이나, 마법사를 가정하던 때와 지금의 성격 차이가 제법 궁금했다.

하나 그는 파우스트를 위해 모든 걸 참고 인내하는 중이니. 귄터는 그 사실 하나를 이유 삼아 모든 걸 불문에 부쳤다. 호기심 따위보단 파우스트의 안위가 더 중요했으므로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도리어 진정 어려운 쪽은 이것이었다.

“…오만이 전선에 나설 수 있음이 알려지며, 최전선의 위험성은 더욱 급증했습니다. 얼마 전 사태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마당에 서부 쪽으로 지원을 전부 뺏기게 생긴 저흰 더욱 위험한 상태… 라고 모두 인식하고 있는 중이고 말입니다.”

진짜 파우스트가 아니어도 된다. 그냥 상대의 안에 파우스트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귄터는 그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감정에 호소하고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물론 이 도시가 정말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낮습니다. 당신께서 남으셔도 싸울 일은 거의 없으리란 이야깁니다.”

“…꼭 확신하는 어투군.”

“북부군이 남하할 가능성을 두고 이곳을 치는 건 바보 짓이니까요.”

“북부군이 남하한다?”

“북부 전선은 마왕성과 가장 가까운 전선입니다. 그럼에도 마왕성에 다가가지 못한 건, 전선을 지키던 두 마리의 대악마 때문이었고요. 하나 당신께서 그중 하나를 살해한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죠.”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파우스트가 화내겠지. 그 또한 불편해져서 거절할 확률이 더 크고.

“서부가 뚫린 이상 그곳으로도 인력을 보내야 할 테니 아마 마왕성을 치는 것까진 시도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 하나 점령전만큼은 반드시 시작하겠죠. 자신들을 막는 장애물 중 하나가 사라진 지금만큼 좋은 타이밍이 또 없으니까.”

그러니 그가 이곳에 머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찾아 승부한다. 귄터는 오늘 하루 자신이 머리 굴려 떠올린 가정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점령전?”

“…악마와 인간의 전선이 고착화된 건 서로의 전력이 비등비등한 것뿐 아니라, 땅의 마계화 유무도 영향을 끼쳐서가 아닙니까. 마계화된 땅에 인간이 살 수 없고, 마계화되지 않은 땅에선 악마가 제 힘을 낼 수 없으니까.”

“흠…….”

“여하튼, 그런 이유에서 북부는 이 타이밍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고… 마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악마도 북부 전선만큼은 사수하려 할 겁니다. 서부를 턴 소수 정예를 북쪽으로 올릴 수밖에 없단 거죠. 식탐의 빈자리를 채워야만 하니까.”

“…아까 서부가 뚫려서 그곳에 인력을 보낼 거라 했지. 만약 동쪽도 쳐서 북부군을 더 분산시키려 든다면?”

“글쎄요. 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그 확률은 대단히 낮을 겁니다.”

물론 이것이 100% 맞아 들 리는 없겠지. 하나 상대에게 이곳이 최선이라는 생각만 심어 줄 수 있다면 이것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 그는 감흥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렴 당신이 식탐을 죽인 지금이 아닙니까? 악마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서부를 친 정예를 함부로 이곳에 보내진 못할 겁니다. 그것들이 식탐처럼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대들을 모욕하는 건 아니나, 그대들만의 힘으론 어려울 텐데.”

“맞습니다. 식탐을 죽인 건 오롯이 당신의 공이었죠. 하나 인간들조차 당신의 거취 향방을 모르는데 악마들이라고 알겠습니까?”

“음…….”

“당신의 행방을 모른 채 동부를 친다는 건 병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한단 의미입니다. 한데 아까 말했다시피, 여력이 생긴 북부는 남하할 확률이 높죠. 그런 상황에서 녀석들이 과연 도박을 하려 들까요?”

“…아닐 것 같군.”

“그래서입니다. 이 도시는 겉보기에 위태로우나, 실상은 안전할 가능성이 그 무엇보다 높습니다. 당신이 ‘만약의 상황’을 언급하며 이곳에 눌러앉는대도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을 테지만, 실제론 싸우는 일 거의 없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란 겁니다.”

겉보기엔 위험해 보이는 만큼 상대에게 과한 대우를 베풀어도 ‘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구나’라고 넘길 뿐, 특별 대우라고 여기는 자는 안 나올 거다.

귄터는 그 점을 명확히 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본바, 상대가 가장 망설이는 건 다름 아닌 이 부분─그의 존재가 민폐가 되는 건 아닌지─인 듯해서였기 때문이다. 정말 의외롭게도.

“이 도시가 손해만 보는 건 아닌가… 란 걱정 역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남는다면 악마들은 이 도시는 더더욱 건드리지 않으려 들 것이니,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이 도시의 안전을 확보하는 셈이 됩니다. 당신의 빈자리가 이 도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나, 당신이 이곳에 남는 것이 문제의 소지가 될 일은 더더욱 없을 거란 이야깁니다.”

아무튼 이것으로 그의 모든 패는 끝났다. 귄터는 심장이 목울대까지 올라온 기분으로 다음 답을 기다렸다.

“나는…….”

그의 입장에선 마치 신과 다르지 않은 상대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 * *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 아크메이지님.”

“그의 말이 맞습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끝나는 세상이 어디 정상적이겠습니까.”

인퀴지터는 상상치도 못한 말에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아크메이지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미안합니다, 인퀴지터.” 그녀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아, 아크메이지님께서 죄송할 일이…….”

“당신이 사명감으로만 움직이게 만들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저일진대, 제게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

“이제야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조차 송구합니다. 하나 인퀴지터… 용기가 늦었다 하여 말마저 잘못된 것이라 여기진 말아 주십시오. 당신께선 지금껏 용사로서 많은 활약을 보이셨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스스로를 챙겨도 무어라 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 지만. 제가 하지 않으면…….”

“마음껏 슬퍼하셔도 됩니다. 힘들다면 멈춰서 쉬어도 됩니다. 하루가 늦는다고 망할 세상이라면 이미 망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과 말들은 그녀의 오랜 족쇄를 흔들고 부수는 것들뿐이라. 인퀴지터는 그것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당신께선 악마기사가, 모험가가 끝없이 헌신하는 것을 두고 괴로워하셨지요. 하나 인퀴지터, 모험가가 헌신한 만큼 쉬어도 된다는 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혼란스러울지언정 괴롭진 않다는 것이었다.

인퀴지터는 아크메이지를 역으로 껴안은 채 와앙 울었다. 한평생의 고향이 사라졌다는 비통함, 모험가에게 쌓인 죄책감, 그럼에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 하는 죄악감… 그 모든 것을 털어 내는 눈물이었다.

“…저는, 그래도 북쪽으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청년은 붉어진 눈가로 선언했다.

“그것이 저의 사명이어서가 아니라, 이 모든 싸움을 매듭짓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저의 소망이고 의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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