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내 이 손으로 (2)
하필 이 타이밍에 오만이 등장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분노가 경고할 정도로 강력한 악마가 하필이면 이때 등판하는 것이 진정 우연인 게 맞아?
나는 감옥에 갇혀 있을 분노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남은 대악마가 몇 없기에 오만이 나섰을 뿐인가, 혹은 어떠한 그림에 의한 출정인 것인가. 속내가 온갖 의심과 불신으로 얼룩졌다.
“오만이…….”
아니, 아니다. 사실 의심과 불신 따윈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연이라면 그저 순응하여 대처할 뿐이고, 누군가의 계략이라면 그 은밀함에 감탄하며 대응 방법을 준비하면 될 일이니까.
─오만의 사도가 움직인 건가……?
다만 오만의 등장에 민감한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딱 셋이고 겹쳐져서 하나다.
예컨대, 그것이 분노가 경고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 나는 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날 것을 고민 중이며, 내가 빠지면 인퀴지터의 부담이 는다는 것. 그 세 상황의 교차점이야말로 내 짙은 짜증과 불안의 중심이란 소리다.
─그, 확실한 겁니까? 오만의 사도가 보통 사도보다 강한 편이라곤 하나 이런 사건을 터트릴 정도는 아닐진대…….
─글쎄요, 놈들이 도시 중심에 세우던 제단에서 깃털이 새겨진 오각성이 보였노라는 증언이 들어왔는데도?
나는 그쯤 되어 이 자리를 나가고 싶어졌다.
계속 있어 봐야 피해 규모나 지루한 탁상공론만 이어질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할까? 나중에 소성주든 누구든, 중요한 것만 요약 및 정리해서 달라고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어차피 내게 도움을 청하려 한다면 이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줄 수밖에 없을 텐데.
─생존자의 증언을 모아 마법사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무조건적인 신뢰는 어렵더라도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생각하는데요.
나는 적당한 자기 합리화 끝에 발길을 틀었다. 정말 효율만 노리고 떠났느냐 진심으로 묻는다면 그건 아니겠지만, 나를 위한 도망인 것만은 분명했다.
“…….”
나는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의 덩치 뒤로 절묘하게 숨어 있던 이의 시선을 받으며 방문에 손을 얹었다. 움직이는 기척을 두고 소성주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으나, 나가는 것을 제지하진 않았다.
끼익.
문 하나 차이로 숨 막히던 감정들이 나를 놓아 주었다. 잠깐의 자유였다.
“경?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나 자유를 얻어도 딱히 갈 데가 없는 건 문제였다.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자니, 요 며칠 그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던 참이 아닌가.
이왕 바깥에 나온 것, 오랜만에 바람이라도 좀 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다 해도, 그래도.
“회의에 참여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나왔다.”
“그러셨군요. 하긴, 경께서 꼭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물론 정말 멍하니 돌아다니기만 하는 건 적성에 안 맞았으므로, 그나마 인연이 있다 할 수 있는 다니엘을 찾아왔다. 악연을 풀었다곤 하나 여전히 편한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지만… 뭐, 그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나와 그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뭘 하고 있지?”
“아… 주검과 유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일이 터진 지 일주일도 흐르지 않았다. 역병이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시체를 태우고 묻었다 하나, 그 사이사이에 생겨난 사망자까지 완벽하게 처리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거다.
즉, 지금 정리하는 주검은 바로 그런 이들의 것이다. 팍, 팍, 팍. 한쪽에서는 시체를 태우고, 한쪽에서는 그 유해를 묻을 땅을 파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돕고 싶은데, 괜찮겠나?”
나는 두 덩이로 나누어, 하나는 두손검, 하나는 한손검 형태로 걸어 둔 라텔을 매만졌다. 분노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로 인한 혐오감보다 검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더 커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무기가 없는 순간보다 무기가 온몸 곳곳에 매여 있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음, 그…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한손검 하니까 기억난 건데, 아직 호박색 검을 안 돌려줬어.
나는 돌려줘야지, 돌려줘야지 하기만 하고 정작 소성주와 만날 때면 존재를 까먹는 검을 떠올렸다. 이번엔 진짜 돌려줘야지. 기약 못 할 다짐이 또 한 번 새겨졌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만.”
“좀 더 쉬시는 게…….”
“닷새를 쉬었다. 이 이상의 휴식은 태만이 되겠지.”
한데 무기 하면 겸사겸사 떠오르는 것이 있다.
“버서커… 베르세르크는?”
베르세르크에게도 사과와 함께 새 무기를 장만해 줘야 하는데. 나는 이제야 떠올린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약간의 의아함도 함께 느꼈다. 회의에서도 안 보였던 베르세르크가 이 자리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아함이다.
“그녀는 없나?”
베르세르크가 비록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긴 하나, 이런 비극을 두고 땡땡이칠 만큼 도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다. 회의 같은 것이야 지루하다며 빠질 수는 있어도, 이렇게 힘 쓰는 일에선 물러날 만한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함에도 이 자리에선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어째서인가?
“베르세르크라 하심은…….”
“다른 복구 현장으로 갔나?”
“그… 아닙니다. 그분은 이 도시에 안 계십니다.”
“……?”
내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베르세르크는 파티를 나갔다. 그녀의 부재를 해명하는 명쾌한 한마디였다.
“그런가…….”
그녀가 이 도시에 없다니. 일이 조금 귀찮게 됐다. 이러면 사과하는 것도, 보상하는 것도 어려워지는데.
“그분은 왜 찾으십니까?”
“돌려줘야 할 것이 있어서.”
이건 저녁에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나는 의외의 변수에 매몰되는 대신 라텔을 제대로 쥐었다.
“아무튼, 땅을 파는 작업을 도와도 되겠나?”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
분노의 불꽃이면 시체를 흔적도, 연기도 없이 태울 수 있겠으나 마기가 진동할 거란 점에서 함부로 행할 수 없다. 마기의 불꽃에 태워진다면 사람들도 꺼림칙해할 테고.
해서 나는 땅을 파는 쪽으로 도움의 방향을 정했다.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라텔 덕에 삽을 따로 가져올 필요 없었다.
“신기하네요. 뭐든지 변하는 겁니까?”
“그래.”
“편하겠군요.”
“편하긴 하지.”
나는 삽 형태로 변한 라텔을 이용해 손수 땅을 팠다. 원한다면 한 번에 땅을 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 과정에서 사제들이 자극받을 가능성도 있거니와, 그 행위는 애초에 내가 여기 온 목적과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난 까닭이다.
아무렴, 나는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기 온 건데, 라텔로 전부 밀어 버리면 그 뒤엔 뭘 하란 말인가?
더구나 세상에 있어 상념 없이 시간을 보내는 데엔 단순 노동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효율 대신 비효율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엄청 빨리 파시는군요. 전에 해 보신 적 있으신 겁니까?”
“…….”
뭐, 그런 비합리성 행동마저도 시간을 오래 끌지는 못했지만.
“물이라도 드시면서 하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형제님.”
유해를 묻을 자리를 몇 개쯤 팠을까. 어린 사제 하나가 종종 다가와 물을 나눠 주었다.
“…드시겠어요?”
지나치거나 다니엘을 통해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내게도 직접 건네주었다. “고맙다.” 나는 어린 사제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스윽.
나는 입가를 가리던 넥워머를 내리고 나무 잔을 입술에 대었다. 내 앞에서 꼬물거리던 사제의 시선이 코끝에 닿아 왔으나,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넥워머가 내려가도 눈과 머리를 가리는 후드는 여전했다.
“…안 불편하십니까?”
결국 어린 사제가 소득 없이 돌아가고, 사제의 시선을 진즉 눈치채고 있던 다니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게 그도 신경 쓰였던 것이 분명하다.
“예전엔 안 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이유라도 생긴 겁니까?”
그런데 여기에선 딱히 해 줄 만한 말이 없다. 내가 후드를 눌러쓰는 이유는 사실 체면을 위한 행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도시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갈색 머리(가발)였던 걸 본 병사가 몇인가. 성벽에 올라 싸우던 초반, 터럭이 갈색이었음을 목격한 사람은 몇이고?
물론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가발을 대놓고 벗기야 했다. 하나 그 과정을 보려면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 쪽을 계속 주시했어야만 하니. 당시 여건상 그걸 해낸 사람은 없을 거라고 본다. 즉, 그 부분은 안전하다.
“경?”
그렇지만 반반 머리가 된 지금을 대놓고 보여 줘서야, 그 전(갈색 머리)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찌 의구심을 품지 않고 넘길까.
또한 그 의구심이 부풀고 부풀면 결국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왜 머리색이 달라졌냐고. 해명해 달라고.
“…그건.”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명해? 변장하고 다녔다는 걸 어떻게 말하냐고! 그걸 말하는 순간 변장한 모습의 행적을 캘 사람이 분명 나올 텐데. 그 때 그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어떻게 설명해……!
“…내가, 베뮈르헨에서 도망친 전적이 있지 않나.”
기억을 되찾았다는 변명으로 전보단 약간 누그러진 성격을 연기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으면 이런 변명을 동원해도 이 정도의 변화만이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게 되니.
변장 도중의 행적이 알려지면 분명 추궁이 들어올 거다. 뭐냐고, 진짜 뭐냐고.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납득해 주었으나, 모르는 이들은 나를 미심쩍게 여길 터. 그것을 방지하고자 가렸을 뿐이다. 언젠가 밝혀질 정체일지라도… 당장 소란의 여지가 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니까.”
마이스터야 눈치챘음에도 크게 안 캐묻고 묻어 줬지만, 걔도 사실 내가 변장한 꼴로 보인 성격을 직접 보면 절대 그냥 안 넘겼을걸?
그러니 숨겨야 한다. 숨겨야만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분명 난…….
“아…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런 점에서 양쪽 다 직접 목격한 소성주와 그 기사들이 제일 문제긴 한데… 소성주가 잘 단도리 했다고 했으니 일단은 그 말을 신뢰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이 일행에게 진실을 꼰지르려 한단들, 내게 그걸 예방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실, 전 병사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의식하신 건가 했습니다.”
“…소문?”
“그, 이 도시에서 몇 년 전 사라진 기사가 한 분 있는데, 경이 그 기사란 이야기가 병사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돌더군요.”
그사이, 다니엘이 머쓱하게 어떤 이야기를 꺼냈다. ‘몇 년 전 사라진 기사’라는 점에서 예상 가는 인물들이 있어 내 가슴이 많이 찔렸으나, 다니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파우스트의 출신을 모르는 탓도 아마 꽤 클 것이다. 파우스트는 과거를 얘기할 때 자신이 이 도시 출신이라는 점이나 유명한 기사… 잉걸불의 자식이란 점은 빼놓고 이야기 했으니까.
“…왜 그런 이야기가 도는지 모르겠군.”
별개로 정말 왜 그런 이야기가 도는 거지? 위기에 처하며 맹목적으로 영웅을 바라던 심리가 그런 착각을 불러온 건가?
“저도 제대로 듣진 못했는데… 공통적으로 불꽃에 휩싸인 검을 운운하더군요.”
“불꽃……?”
“예.”
“…분노의 힘은 불꽃과 흡사하지. 그래서 착각했나 보군.”
“아마도 그렇겠지요.”
내가 호기심을 품는 동안, 다니엘은 슬쩍 웃으며 삽의 둥근 손잡이를 쥐고 땅에 푹 박았다. 퍼석 갈라진 땅에 2, 3cm 파고든 삽이 기우뚱 섰다. 다니엘이 둥근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지 않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 기사의 머리 색이 갈색이니, 병사들의 기대를 깨지 않기 위해 일부러 후드를 쓰고 다니시는 건 줄 알았습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모르는 영웅보단 아는 영웅이 더 사기 진작에 좋지 않습니까.”
“…딱히 그런 걸 노린 적은 없다.”
머리 색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식겁했을까. 이어지는 다니엘의 말에 나는 도리어 ‘오호라?’하는 마음이 되었다. 병사들이 나를 그 기사로 착각하고 있다면 갈색 머리 목격담도 그들의 희망 사항으로 치부되어 넘겨지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이었다.
“실제로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전장에 끼어드는 걸 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것은 다니엘이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보다 현실적인 바람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착각이겠죠. 기사가 실종됐다 함은 변절이 아니고서야 보통 살해당해서이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렇지.”
“어쩌면 급박한 상황에 경을 착각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머리카락 색보다 더 확실한 특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잖습니까? 불꽃의 검은 머리 색을 묻기 충분한 특징이고요.”
“안다. 인간의 기억은 쉽게 오염될뿐더러, 기억의 왜곡에는 당사자의 소망이나 편견이 영향을 끼친다는걸.”
“그것도 아십니까……?”
“난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
“범죄자를 쫓다 보면 증인의 기억과 범죄자의 외형이 다른 경우가 참 많아서요.”
이거, 어쩌면 내 변장은 유야무야 묻힐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악마기사를 아는 사람들이 갈색 머리 소리를 들어도 병사들에 착각이겠거니 넘길 확률이 대폭 상승했으니까.
엄청난 이득이었다.
“아, 그렇지.”
“……?”
“혹시… 음.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혹 실례는 아닐까 해서.”
내가 의외의 행운을 두고 다소 좋은 기분이 되었을 때, 다니엘이 갑작스레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해라.”
어떤 질문인지 걱정은 됐으나 그보단 궁금증이 좀 더 짙다. 내 강압적인 어투에 다니엘이 눈썹을 모았다.
“그… 소성주님과 아는 사이십니까?”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질문이군.”
실례는 아니지만, 이건 또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아니, 소성주가 내게 보인 배려면 충분히 추측 가능한 부분인가? 아무리 도시의 은인이라도 좀 과하게 대접하긴 했으니까.
“그런 생각은 왜 했지?”
어쨌거나 이건 들켜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주제다. 나는 약간의 긍정을 내포한 되물음을 건네주었다. 다니엘의 눈이 두 번 깜빡였다.
“그것이… 술자리가 파한 후, 마이스터께서 허락이 쉽게 떨어지는 게 이상하다 말씀하셨거든요.”
역시 그쪽에서 걸린 건가. 충분히 납득 가능할 만한 사유였다. 발언자가 마이스터인 것도 수긍에 한몫했다. 대명장이란 위명 아래 높으신 분들과 자주 어울렸을 녀석이야말로 수상함을 쉽게 인지할 만한 대상이었다.
“나랑 아는 사이는 아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의문은 그게 다인가?”
“음… 하나 더 있긴 합니다.”
와중에 질문이 하나 더?
“뭐냐.”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것도 받아 주기로 했다. 변장 관련 건이 스무스하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부른 여유였다.
“그… 이곳에 남으실 겁니까?”
그렇지만 이건 너무 민감한 질문 아니냐? 다니엘 입장에선 방금 한 질문이나 지금 이 질문이나 똑같아 보일 수는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