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36화 (336/389)

336화 그럴 수만 있다면 (22)

다니엘은 마이스터와 함께 술자리를 뒷수습했다. 옆방에서 가져온 의자를 돌려 두고, 음식을 정리하여 트롤리에 도로 담아 두는 정도의 수습이었다.

“여기다 둬 달라고 했지?”

“예.”

이렇게 해 두면 하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적어도 귀한 술을 내주며 성주가 한 말은 그랬다.

“…쪽지 하나 남기는 게 좋겠습니다.”

“왜?”

“내일 고생하실 게 분명하잖습니까.”

숙취로 고역을 치를 확률이 높으니, 그걸 감안하여 식사를 준비해 달라는 쪽지만 남겨도 훨 나을 테다. 해장 음식이 만능은 아니라지만 최소한 없는 것보단 좋을 것이므로.

“음……?”

그 과정에서 다니엘은 세 장의 그림을 발견했다. 글귀를 남길 요량으로 종이나 천 조각을 찾다가 찾은 것이었다. 하나는 죽음을 넌지시 상징하는 그림으로 가득하고, 하나는 젖었다 마른 흔적이 있는 중년 부부의 초상이었으며, 하나는 알아볼 수 없게 먹칠이 되어 있다.

“왜?”

“아닙니다.”

이건, 그가 보면 안 되는 내용 같다. 다니엘은 마이스터의 시선이 닿기 전에 그 그림들을 뒤집어 내려 두었다. 어차피 글귀를 남길 만한 종이는 그 외에도 더 있었다.

“가시죠.”

짤막한 글을 남기는 데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 그는 순식간에 문장을 작성한 후 트롤리 위에 얹었다.

“아, 숙소까지 언제 가냐. 방 준다고 했을 때 받을 걸 그랬나.”

“그건 좀…….”

“왜? 야밤에 성 나가며 귀찮게 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낫지 않나?”

그건… 그런가? 잘 모르겠다. 그가 이단심문관이라곤 하나, 대장쯤 되는 계급이 아니고서야 성주가 기거하는 성에 출입할 일은 없었으므로.

“…일단 돌아갈 거라 결론 내리고 그에 맞는 확인을 받지 않았습니까. 예정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진 말지요.”

야밤에 손님이 돌아갈 수도 있노라 다 지시가 내려졌을진대, 그걸 갈아엎어서야 소성주의 짜증밖에 더 살까. 다니엘은 그것을 언급했고 마이스터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역시나 언질 받은 것이 있는지 경비병들은 출구로 향하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참 신기해.”

“뭐가 말입니까?”

“저놈과 관련된 주제에 한해, 허락 같은 게 쉽게 떨어지잖아. 심지어 별 권력도 없는 우리가 야밤에 드나드는 걸 승인할 정도로.”

“…그만큼 큰 공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이건 좀 과하단 느낌이란 말이지…….”

마이스터는 눈살을 찌푸려 가며 위화감을 제시했으나, 그 말을 끝까지 잇지는 않았다. 짐작 가는 것이 있으나 근거가 없어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어쩌면 이 도시에 좀 오래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겠어.”

“……?”

다만 끄트머리에 주어진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래 머무르게 된다니, 대체 누가? 모험가가?

“누가 말입니까?”

다니엘이 질문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다.” 그저 갈림길에 맞춰 그의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떠날 뿐.

다니엘은 구태여 그를 잡아 가며 캐묻지 않기로 했다.

“…왜 거기 계십니까?”

하나 외부 지원 중 신전 인력이 머무는 숙영지 앞에 쪼그려 있는 이를 발견했을 땐, 도무지 물어보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꼰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니엘은 눈살을 찡그렸다가 등잔에 비친 표정을 보고 그저 한숨을 뱉었다. 모험가의 처우가 상상보다 더 좋게 결정되었음에도 도리어 더 여위어 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까닭이다.

거기에 모험가가 머금은 생각 한 조각까지 알아 버린 마당이니…….

“…됐습니다. 너무 오래 있진 마십시오. 감기 걸립니다.”

표정으로 보아 대답할 정신머리도 없는 듯한데, 거기서 답을 재촉해 봐야 의미가 있을까. 다니엘은 술 몇 잔의 여파로 뜨뜻한 목과 뺨을 쓸며 그를 지나치려 했다.

“이봐요, 꼰대.”

이번엔 그쪽에서 다니엘을 잡았다.

“왜요.”

“…….”

“사람을 붙잡았으면 말을 하시죠.”

그렇지만 말 자체가 쉬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니엘의 끈질기다시피 한 인내심으로도 제법 긴 침묵이었다.

“…하.”

결국 두 사람 중 먼저 운을 뗀 건 그였다. 주량보다 현저히 적게 마신 상태이나, 결국 마시긴 한 술이 충동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당신, 그거 안 좋은 버릇인 거 압니까?”

얄팍한 짜증과 한심함, 안타까움을 섞어 낸 목소리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예?”

“제가 꼰대라고 부르지 말랬는데 누누이 꼰대라 부르는 거 말입니다.”

“아니…….”

“물론 이렇게 말해도 당신은 신경 하나 안 쓰겠죠. 꼰대 새끼가 또 꼰대질 하네, 정도로 여길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역시 말해야겠습니다.”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 어린애처럼 웅크려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몸만 큰 애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모험가의 묘사는 정확했다.

용사는 잘 모르겠으나 이 치기 어린 놈만큼은 확실하게 애였다.

“자기가 정한 인상 안에 사람을 가둬 두고 끝까지 그렇게만 대우하는 거, 좋은 거 아닙니다. 지금은 젊으니까 뭐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거기서 좀 더 나이 먹고 그리하면 그땐 누구도 안 봐줄 거란 말입니다.”

하나 어리석은 것이 어린 자의 권리라면, 성장하는 것은 의무다.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이 말을 이해하게 되겠지요. 하나 경고하건대, 빨리 깨닫지 않으면 당신은 많은 걸, 또는 적을지언정 소중한 걸 잃게 될 겁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또한 그 의무를 행하지 않거든 그땐 두 가지의 미래뿐이 남지 않는다. 영원히 미숙한 인간으로 남아 버려지든가, 일찍 깨닫지 못한 대가로 커다란 값을 치르게 되든가.

“…당신이 뭘 안다고!”

“예, 모릅니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의 관계 형태 같은 것,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제가 알 리 없잖습니까.”

불쌍하다면 불쌍하고, 답답하다면 참 답답하다. 다니엘은 분해서 벌떡 일어난 이를 두고 또다시 한숨을 뱉었다.

“다만 그 사람의 인내심이 거의 다해 간다는 건 압니다.”

모험가가 말했던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뭘까.

“……! 지, 지금 뭐라고…….”

“…왜, 이 사실이 놀랍습니까? 그가 영원히 당신을 받아 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니,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건 어쩌면 맹목이 아닐까?

눈물을 흘렸단 사실에 공감보다 경악을 먼저 내놓는 광신. 그가 끝까지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상상하는 맹신. 동경에 눈이 가려져 그 아래를 결코 보지 못하는 몰이해.

“…당신들이 그에게 주는 믿음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옳느냐 묻느냐면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군요. 당신들의 관계에 붙는 이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신뢰는 귀한 것이다. 하나 그것이 서로의 눈을 가린 채 엇갈리도록 만든다면 그땐 고집하기보다 달라지려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기억하십시오. 부모와 자식, 보호자와 피보호자… 그들의 관계는 보통 대등하지 않고, 한쪽의 일방적인 헌신과 인내를 요구한다는 것을.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를 이어 나가는 관계여야 연인과 친구, 동료 따위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을.”

다니엘은 이 치기 어린 자식이 부디 이 말의 진의를 알아듣길 바랐다. 이것이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 * *

“…죽겠다.”

술병이 났다. 두통과 속쓰림, 구역감 등의 환장 콜라보가 깨어난 직후의 나를 덮쳐 왔단 소리다.

“으으…….”

내가 이래서 술 안 마시려고 한 건데. 나는 내가 금주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그걸 또 답습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여간 세상은 살고 볼 일이었다.

“시스템.”

그렇지만 어젠 진짜 마실 수밖에 없었어. 나는 후회해도 의미 없는 일에 매달리는 대신, 이 거지 같은 기분에서 탈출하고자 수면 시스템을 불러냈다.

아무렴 이 세상이 현실이건 뭐건 일단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두통으로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은 지금은 수면 시스템이 딱이었다.

[미안하지만, 담당 꼬맹이가 자고 있어서 그거 못 써.]

“…걔가 담당하고 있는 거였냐?”

[정확힌 나랑 걔랑 협력 및 분담해서 하는 건데… 아무튼, 수면 시스템은 꼬맹이 없인 안 돼.]

그럼 난 자지도 못하고 이 숙취에 시달려야만 하는 거냐? 이건 통각제한으로도 어떻게 안 돼서 쌩으로 버텨야 하는데…….

“너 혼자로는 절대로 안 돼?”

[수면 시스템의 원리가 몸뚱이와 네 영혼 사이의 연결 고리를 건드려서 일시적으로 쇼크를 주는 방식인데, 계약상 네 영혼을 건드릴 때는 꼬맹이의 허락이 꼭 필요하거든. 이건 네 허락으로도 안 돼.]

“하…….”

다른 건 몰라도 내 안위만큼은 제대로 챙기려 노력했구나. 그게 지금 나를 좀 괴롭게 만들고 있지만.

나는 파우스트의 노력을 느끼며 침대에 늘어졌다. 죽을 것 같았다.

[…정 괴로우면 안으로 들어오지?]

“심상 세계에 가면 뭐 달라질 것처럼 말하네.”

[숙취란 건 결국 알코올이 신체에 들어옴으로써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니까. 육체의 감각과 반쯤 단절되는 심상 세계에선 원하지 않고서야 느껴질 일 없지.]

…진짜?

나는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심상세계에 입수했다. 두통으로 인해 집중이 조금 어려웠으나, 다행히 성공해 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매스꺼움과 어지러움이 사라졌다. 남은 건 그 잔상뿐이었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잔상.

“진짜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아.]

뭔 개소리야. 내 눈이 나도 모르게 분노를 경멸하듯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파우스트나 찾자는 마음이었다.

“아, 잔댔지.”

그렇지만 분노가 말했듯이 파우스트는 아직 자는 중이었다.

나는 오두막 안에서 새근새근 자는 소년을 보며 팔짱을 꼈다. 숙취가 사라지며 명징해졌던 이성에는 다시 온갖 얼룩이 지는 중이다.

“음…….”

그렇지만 그게 불쾌하느냐? 글쎄다. 술 마신 채로 마구 토로한 것도 감정을 털어 낸 것에 속하는 걸까. 아니면 어제 제대로 듣게 된 아이의 사정이 내 동정심을 제대로 자극해 버렸나.

더러운 기분보다는 그냥 애석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몇 번이고 보가 무너지고, 또 잠자는 과정을 통해 남은 물길마저 희석된 상태라 더 그랬다.

홍수와 폭풍이 지나고 나니 적당하게 적은 땅만 남아 버렸다. 어떤 이름의 싹이든 곧잘 뿌리 내리기 좋은 토양이다.

“하.”

뭐, 자칫하면 너무 많은 물기로 인해 뿌리가 썩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왜 한숨이야, 그레트헨.]

“왜 쉬겠냐, 내가.”

[그냥 동정을 버려. 그러면 편하잖아.]

대신 나는 절대로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는 분노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원인이라곤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저 어투. 언제나 생각하지만 놀라운 인품이었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 하나가 들었는데 말이야.”

동시에 내가 미처 잊고 있던 일 몇 가지가 떠올랐다.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모를 정도로 중요하고 또 마땅히 수행되어야만 했던 일들이었다.

“내가 그간 여유가 없긴 했나 봐.”

[……?]

“가해자랑 피해자 격리는 1순위 일인데 내가 이걸 깜빡하고 있었네.”

[자, 잠깐.]

주도권이 나한테 있다는 건 좀 좋은 것 같다. 나는 분노를 가두기 위한 벽을 적당히 상상했다. 그 과정에서 딴생각이 좀 섞여 들어갔는지, 감옥이 좀 작게 만들어졌지만 나름 성공이었다.

[그대, 못해도 허리는 펴게 해 줘! 이건 너무 좁다고!]

“그래, 힘내.”

[그레트헨……!!]

장난이고, 나는 녀석을 일시적으로 가둔 후 그 옆에 제대로 된 감옥을 세웠다.

창문은 있지만 열 수는 없고,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으며, 안에 든 것이라곤 간이 침상과 탁자가 다인 감옥이었다.

[…응용하는 법을 괜히 알려 줬어.]

“안 알려 줬으면 뭐 괜찮았을 것 같냐?”

나는 분노가 들어 있던 박스형 감옥을 통째로 들어 제대로 된 옥 안에 집어넣었다. 달칵. 문이 잠기자마자 박스를 부수고 나온… 정확힌 내가 그렇게 하게 해 준 분노가 창문을 통해 나를 응시했다.

[이런다고 저 녀석과 내 대화가 끊기진 않아.]

“알아.”

설마 이 벽이 모든 것의 해답이 될 리가 있나. 그렇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고 믿고 싶다.

나는 창문 바깥쪽에 매달아 둔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게 없어지니 속이 조금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는 뭐… 우리들의 대화가 소리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급한 건 처리가 됐고…….”

나는 내가 지어 둔 오두막과 감옥 외에 존재하는 것이 없는 세상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게 거슬린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심상 세계에 한동안─그러니까, 적어도 술이 깰 때까지─머무르는 처지가 되어 보니 참 공허하고 섬뜩한 세상이다 싶었다.

심상 바깥, 그러니까 현실이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 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하다못해 색이라도 좀 씌울 수 없나.”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적당한 들판과 숲을 상상했다. 사람 없는 거리는 도리어 을씨년하기만 하니, 차라리 자연 풍경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오, 된다, 된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이 백색인 건 그냥 색 입힐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나는 녹음이 우거진 평야를 보며 괜히 신이 났다.

아무렴, 상상만으로 세상이 변하는데 어느 누가 신이 안 나겠는가? 신이라도 된 느낌이라 굉장히 재밌었다.

“꽃도 좀 심고…….”

식물학자가 아닌 만큼 수천 종의 식물을 표현하는 건 무리다. 하나 웹 작업을 할 때나 쓰던 브러쉬를 최대한 구현하니, 그럭저럭 많은 종의 꽃과 식물이 자라났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그럴싸한 풍경이 됐다.

“풀만 있으면 이상하니까 물도 좀 넣고…….”

나는 아름다운 꽃밭을 보며 꽃밭을 휘감듯 흐르는 강과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개천들을 상상했다.

졸졸졸. 아이가 언젠가 이곳을 둘러볼 생각이 든다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근 채 놀 수 있을 깊이의 시냇물이었다.

우득, 뚝.

손으로 꽃 몇 송이를 뜯었다. 아니, 조금 많이 뜯은 것 같다.

나는 어느새 한아름이 된 꽃 뭉치를 든 채 오두막으로 향했다. 미처 색을 입히지 못했던 오두막은 감옥과 더불어 평원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해서 나는 그곳에도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두막은 안 좋은 기억을 자극할 것 같으니 채택한 건 최대한 비현실적이고 포근한 디자인이다.

벽돌집에 가깝던 오두막이 거대한 사과나무로 변했다.

끼익.

나는 삐그덕거리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그 안쪽을 살폈다. 바깥에서 안으로 자라는 넝쿨들이 벽을 덮는 동안에도 소년은 깰 기미가 없었다.

나는 파우스트가 누운 침대 옆에 커다란 원형 십자 창을 내고, 꺾어 온 꽃들을 내려 두었다. 만약 아이가 이대로 깨어나면 이것들을 가장 먼저 보게 될 것이다.

“…미안해.”

물론 이것들이 아이의 모든 상처를 고쳐 주진 않겠지.

“내가 좀 더 좋은 어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나의 최선에 아무런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아이를 도닥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당신은 이미 좋은 어른이에요.」

정신적 잠이 몰려오기 전, 어렴풋이 어떤 소리가 들려온 기분이었다.

똑똑.

“……!”

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문을 두드리는 기척 앞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깨어났다. 누군가가 나를 현실로 밀쳐 낸 기분이기도 했다.

“누구냐.”

반사적으로 라텔을 검 모양으로 쥐며 동공을 확장시켰을까. 문 바깥의 사람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접니다.” 소성주였다.

“아… 잠시만 기다려라.”

나는 라텔을 내려 두고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달칵. 문을 열어 준 건 최소한의 거지꼴을 정리한 후다. 씻지 못해서 떡진 머리까진 어떻게 못했지만서도.

“그래서 왜 찾아온 거지?”

“아, 별건 아니고…….”

혹시 머무를 거냐 말 거냐 답 들으러 온 건가. 근데 그건 아직 결정 안 했는데…….

탁탁탁탁탁!

“……?”

만에 하나 주어질 질문을 두고 난처해하는 사이, 그런 나를 지원하기 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생생히 울려, 일반인에 가까운 소성주마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잠시만…….”

하나 예절에 엄격할 성에서도 이리 뛴다는 건 그만큼 시급한 사안일 확률이 높은지라.

소성주는 내게 양해를 구했고, 나는 흔쾌히 기다리기로 했다.

“거기서 멈춰 있는 게 좋을 텐데.”

“예?”

덜컹!

물론 소성주가 급한 사안을 처리하고자 자리를 비키는 건 불가능했다. 별건 아니고, 소성주가 나가는 것보다 저쪽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더 빨라서였다.

“소, 소성주님.”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백지장 같은 얼굴의 전령이 보였다. 심각한 일이구나. 나와 소성주가 그것을 직감했다.

“대신전이 함락되고, 도시 세 개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심각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