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그럴 수만 있다면 (20)
「…조금만 잘게요.」
나는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를 두고 긍정했다. 진짜 잘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조차 심정이 복잡한데 당사자인 파우스트는 어떻겠는가.
“잠깐…….”
다만 아이 말고 악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나는 다니엘과 마이스터에게 양해를 구한 후 눈을 감았다. 어둠이 뒤집어지고 백색이 펼쳐졌다. 나는 그 뒤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 옹송그린 소년과 사슬에 묶여 있는 악마가 하나 보였다.
“이유가 뭐야?”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운데.]
“오두막을 숨긴 이유, 뭐냐고.”
[그냥 선의로─]
“너도 안 믿을 소리 말고.”
내 말에 분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가면 위에 떠오른 붉은 구슬은 가로 동공 특유의 기괴한 분위기를 마구 내뿜는 중이다.
[…그때, 박쥐 새끼의 심부름꾼이 근처에 있었거든.]
“박쥐 새끼? 심부름꾼?”
[박쥐 새끼는 오만을 말하는 거야. 그놈의 역린이 박쥐 소리거든.]
“그래서,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데.”
오만이면 대악마 중 하나인가? 근데 왜 역린이 박쥐지? 나는 무슨 콤플렉스라도 있나 고민하며 분노를 채근했다. 녀석은 어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으음… 뭐, 언젠간 말했어야 했으니 상관없나.]
한참 만에 분노가 망설임을 깼다. 차라리 잘됐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대충 그런 후련함이 느껴진다. 고민 끝에 언짢음이 풀려난 자의 감정이었다.
[일단, 이걸 이해하려면 인과관계를 알아야 하니 거기부터 설명해 주지.]
촤르륵. 놈이 사슬에 휘감긴 팔을 살짝 휘저었다. 그러자 바윗덩이 비슷한 것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먼저, 내가 잠깐이라도 몸을 담을 만한 그릇은 적어. 실종돼도 주목받지 않을 만큼 덜 여물었거나 유명세가 낮아야 한다는 조건을 더하면 더욱 적지.]
“그래서?”
[반면, 매개체 없이 영혼을 땅에 붙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니 어쩌겠어? 그릇이 없다면… 대체할 무언가라도 다급히 마련하는 수밖에.]
분노는 거기다 엉덩이를 붙이고 허리를 기댔다. 제대로 된 의자가 아니라서 불편할 것임에도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박쥐 새끼가 그런 임시방편을 만들 줄 알거든. 정확히는 박쥐 새끼 단 하나만이 그게 가능해.]
그 태연함 때문인가. 놈의 고급스러운 옷차림과는 썩 매치되지 않는 조합임에도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사이는 아니다 보니 거래는 그놈 부하를 통해서만 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나는 종종 녀석과 거래를 했어, 그레트헨. 불쾌한 일이었지. 유리한 입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녀석은 나한테 항상 바가지를 씌웠거든. 엿같은 새끼…….]
아니, 그건 어쩌면 분노의 인성과 인품이 바위에서 쪼개져 나온 돌가루만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독설을 품었다가, 이마저도 사고의 낭비 같아서 내다 버렸다.
“협상에 쓰이는 재화는? 설마 돈을 쓴 건 아닐 거잖아.”
[당연하지. 우리한테 인간의 화폐가 의미 있을 리 없잖아? 인색 머저리 새끼가 아니고서야.]
대신 놈이 말하는 진실 속에서 불쾌한 요소들을 찾아 혹시 모를 감정을 방지했다.
[대가로 내준 건 그간 차지해 온 육신의 영혼들이야. 왜, 나를 잠시라도 담아 낼 수 있는 육신이란 건, 다르게 보면 그만큼 커다란 영혼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잖아? 그리고 거대한 영혼은 대부분 질 좋은 제물이 되어 주지. 합성 괴물… 키메라를 제작하는 취미가 있는 녀석에겐 특히 그렇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 몸 뺏고 영혼을 제물로 바쳤단 소릴 죄책감 없이 담백하게 뇌까리는 시점에서 이놈은 사람 새끼가 아니다.
[아무튼 그때도 그릇이 영 안 보여서 거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딱 얘가 보여서─ 갑자기 칼은 왜 던져?!]
“짜증나서.”
나는 단검 다섯 개를 다트처럼 던져 버리곤 마저 경청했다. 어떻게든 단검을 피하거나 사슬로 쳐 낸 분노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친애하는 그대, 계속 그러면 내 여린 마음이 상처받아.]
“지랄…….”
나는 무의식적으로 혐오와 경멸의 눈을 했다. 이런 행위조차 일종의 감정 소모였지만 도저히 그러지 않곤 배길 수 없었다. 이게 바로 악마 새낀가?
[…각설하고, 내가 이만한 육체를 차지하려 들 걸 오만이 알면 좀 곤란해지는지라. 사제들과의 조우를 포기하고 은폐 마법을 좀 펼쳐 봤지.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지만.]
글쎄, 정말 모르고 한 것 같진 않은데. 나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일단 수긍했다. 진짜로 말해 줄 줄은 몰랐으나, 아무튼 의문은 해결된 탓이다.
설령 이것이 거짓일지라도 괜찮다. 어차피 악마가 묻는 것중 대부분은 사실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인드로 묻는 것들이 많으니까.
[친애하는 그대… 내가 그대에게 이 사실을 숨김없이 말해 준 이유는 단 하나야.]
그사이, 분노가 한쪽 다리를 엉덩이 받치는 곳까지 끌어 올리며 한마디 했다.
[오만을, 그리고 그 심부름꾼들을 조심해.]
웃음기 없는 어투의 경고였다.
[녀석은 가능한 혼자, 대비 없이 싸우지 않아. 손수 제작한 무기와 함정이 즐비한 홈그라운드에서 군단을 부리며 싸우는 타입이지. 거기에 놈의 개별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도 아니야. 놈은 지옥에서 가장 많은 마법을 알고 또 다룰 줄 아는 존재이며… 결정적으로 신성을 쓸 수 있거든.]
“…신성을 쓴다고?”
[놈의 출신은 지옥이 아니고, 고향 세계에선 신에 필적했던 존재였으니까. 타락하여 마기도 다루게 됐다지만 그렇다고 본 세상에서의 신성마저 전부 내버린 건 아니거든.]
“신성이란 건…….”
[이쪽 세상의 신성력과는 기질이 달라. 그렇지만 마기와 극상성이란 건 똑같지. 극상성의 기운을 둘 다 품고 있는 지점에서 놈은 미친 새끼고.]
그 말은… 대충 마기랑 신성력을 둘다 쓰는 적이라 생각하면 될까.
나는 마기와 신성력을 처먹는 애들에 이어 등장한 새로운 유형에 눈을 찌푸렸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어려워지는 게 국룰이긴 한데 이건 너무하지 않냐. 자연스레 그와 대항하게 될 용사 파티가 걱정이 됐다.
[그러니 그레트헨, 부디 오만과는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 놈의 심부름꾼과도 가능한 마주치지 말고. 그대에 대한 정보를 일러바칠 게 분명하니까.]
결정적으로 불쾌한 건 제 목숨 챙기고 싶어서 안달 난 분노였다. 그래, 내가 오만이랑 맞다이 까서 죽는 일 없었으면 한다 이거지.
경고가 도움되지 않는 건 아닌데, 자기 보신을 근간으로 하는 조언이라 마냥 기쁘지도 않다. 본인에게 위협이 안 됐다면 끝까지 다물고 있었을 게 놈이었으므로.
“그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그건 분명하다.
나는 이 정보를 아크메이지에게 전달할 때를 가늠하며 몸을 돌렸다. 의문이 해결됐으니 심상을 나가고자 함이었다.
“…….”
다만 나가기 직전 내 시야에 밟힌 건 아무것도 없이 웅크려 자는 소년이라.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나갈 때가 되니 더욱 거슬렸다.
저 빌어먹을 꼬맹이는 스스로를 챙기지도 않고, 챙길 생각도 없었다.
“염병, 진짜.”
원한다면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에서 왜 궁상맞게 담요도 없이 자는 거야.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결국 심상 한편을 조작했다. 백색 오두막이 생겨나고 적당한 가구가 채워졌다.
[왜 굳이……?]
거기다 아이를 들어 옮겼다. 끝까지 꿈쩍도 안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자는 게 맞긴 한 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요를 꼼꼼히 덮어 준 후에야 심상을 나갔다.
“마이스터.”
“드디어 일어났냐?”
“깨셨습니까?”
“술.”
그쯤 되니 미묘한 탈력감이 들었다. 짜증이라고 하기도 미묘하고 슬픔이나 설움이라 치기도 애매한… 정말 모호한 무기력함.
“안 먹는다며?”
“마음이 바뀌었다.”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안 좋은 기억도 있지만 지금은 술을 까지 않으면 못 버티겠다. 남의 몸이고 자시고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좋아, 그럼 하나 더 깐다?”
“마음대로.”
“…그, 주량은 아십니까?”
마이스터가 은근하게 들뜬 손길로 항아리를 하나 더 꺼내고, 다니엘이 날 걱정스럽게 보았다.
“남의 몸인데 알 리가.”
“…천천히 드십시오.”
꼴꼴꼴. 다니엘이 내 주량을 걱정해 주는 사이, 화려한 세공의 작은 잔이 투명한 술로 채워졌다.
나는 그걸 냅다 원샷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맥주 정도의 도수를 생각했는데, 엄청난 화끈함이 목구멍과 위장을 와다다 쓸어내리고 갔다. 술 자체는 미지근한데도 그랬다.
향이나 맛 같은 건 잘 모르겠고 독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천, 천히 드시는 게…….”
“오, 뭐야. 잘 마시네.”
내가 입에 남은 알코올 잔향을 두고 눈을 찡그리는 사이, 다니엘이 경악했다. 뭐, 말술 마이스터는 도리어 좋아라 하며 잔을 채워 줬지만.
“더 마셔.”
나는 조금 많이 망설이다가 그것까지 원샷했다. 과한 도수나 익숙지 않은 알코올 냄새가 당황스럽다가도 속이 달궈지는 게 차라리 낫다 싶었던 까닭이다. 최소한 이 정도면 답답한 마음 정도는 가려질 테니까.
“용서하고 싶진 않다.”
아니다. 위장이 뜨거워져서 그런가, 안 그래도 부글거리던 감정은 더욱 홧홧해졌다. 이제 더는 안으로 삼킬 수 없다.
“…역시 용서할 수 없어.”
“뭐, 당연히 그렇겠지.”
“…당신은 그럴 만합니다.”
나는 세 번째로 차오른 술을 또다시 원샷했다. 미지근한 불꽃이 목구멍을 지날 때마다 몸은 더워졌지만 가슴 어딘가는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이성이라는 목줄이나 불길에 사라짐과 동시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쓸려 가는 기분이었다.
아크메이지로 인해 한번 터졌던 보가 다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억지로 용서하려 하지 마십니다. 제 일은 저의 것이고, 당신의 일은 당신의 것입니다.”
“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네 번째. 마이스터도 슬슬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잔을 채우는 속도가 느려졌다. 근데 네가 느리게 따르면 내가 술을 못 채우겠냐?
나는 다음부턴 내가 채우겠다 생각하며 반 꺾어 마셨다. 취했나? 아직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했다는 걸 잘 모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애가 그 일을 당한 건 내 잘못이 아니고, 그 애가 불쌍하다고 해서 내가 용서할 필요는 없으며,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할 이유조차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머지 반을 들이켰다. 불덩이가 위장 안에 고였다. 차가우면서도 뜨겁고,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불덩이였다.
“그런데 왜 나밖에 없지?”
탁. 잔이 탁자 위에 올라갔다. 마이스터는 따르지 않았고, 나는 올라오는 열기에 숨을 뱉었다. “그 아이를 도맡아 챙겨 주고 도와주고 보호해 줄 사람이 왜 나밖에 없지?” 아크메이지에게 미처 토하지 못했던 응어리였다.
“내가 돌아가길 택하면 그 애는 죽는다. 내가 수고하지 않으면 그 애는 구원받지 못한다. 피해를 본 건 난데, 그럼에도 내가 인내를 더 해야만 그 애가 살아날 길이 생긴다.”
마이스터가 눈꺼풀을 두 번 깜빡이더니 술을 쪼로록 따라 주었다. 안 그래도 따라 먹을 생각이었기에 거부하지 않았다. 독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르고,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가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덥다. 더웠다.
“…나도 이 상황이 벅찬 건 매한가지인데.”
빌어먹을 만큼 더웠다.
“그래도 그 애가 불쌍해.”
“…그 아이의 비극은 이런 세상에서도 흔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힘들어.”
“그럴 만하지.”
“그런데 외면하기엔 그 애가 너무 가여워.”
“…거리가 멀다면 모를까,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가깝고 특정 제약까지 걸려 있으니, 그 모순된 감정도 당연하다 봅니다.”
“하지만 나도 괴로운데…….”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목구멍에서 알코올 냄새가 넘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를 두고 더 이상 역하다는 감상마저 들지 않는다. 나는 알코올을 토해 내듯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감정까지 뱉어 냈다.
“…와중에 신 새끼는 어린애가 악마에게 당하고 있으면 손이라도 뻗어 주든가, 그러지도 않고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고. 하다못해 다른 세상에서 애꿎은 사람이 납치되고 있으면 개입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것도 방관만 하더니 대악마 두 마리 족치고 나니까 신탁 내려서 날 조지려 들어? 염병할, 무능한 건지 태만한 건지. 할 거면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 어?”
“오…….”
“아니, 근데 내가 여기서 못 할 짓을 했어 뭔 폐를 끼쳤어. 인성쓰레기버러지머저리를 몸뚱어리 안에 봉인해 준 것도 모자라 대악마 둘까지 죽이는 걸로 세상 좋은 일만 해 줬는데도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월급이나 복지도 못 챙겨 주는 주제에 지 무능까지 떠넘겨서 범죄자로 만드는 사장 새끼도 아니고. 신 주제에 강약약강만 존나 따져서 진짜 좆같게…….”
나는 홧홧한 열기에 코트를 벗고,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더위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으나 입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그, 시, 신께 유감을 가지실, 만한, 사정이시긴 하지만… 아니, 근데 다른 세상이란 건.”
“순둥인 줄 알았더니 신랄하게 말할 줄 알잖아. 좋다, 더 해 봐.”
“마이스터님……!”
“쟤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니잖아. 못 할 말도 아니고.”
잔이 비었는데 왜 술을 안 따라. 나는 낄낄 웃는 마이스터를 버리고 내가 알아서 술을 채웠다. 자작은 재수 없다지만 알 반가. 내 인생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재수가 없었다.
“신 새끼도 그렇지만 신전 새끼들도 좆같긴 매한가지야. 지들이 뭔데 날 준범죄자 취급하며 꼬나봐? 내가 이렇게 되고 싶어서 이딴 몸이 된 줄 아나. 씹새끼들이 내가 화낼 줄 몰라서 참는 건 줄 알고 깝치는데, 눈깔 확 찔러 버리고 싶다 진짜…….”
“신전 꼰대 머저리 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존나 설친다니까.”
“위험을 위험으로 인식하는 건 지능 순이라는데 그 새끼들은 지능을 신앙심으로 다 대체한 건지, 아니면 원래 지능이 없어서 교리를 일차원적으로 외우기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상등신들, 내가 안 참으면 지들 죽을 수 있다는 건 좆도 모르지…….”
근데 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꼴받네. 내 인생 억까 존나 왜 이렇게 심함? 다리 작살나고 얼굴에 스크래치 심하게 생겨서 꿈 접는 정도면 그래도 인생에서 당할 억까 다 당한 거 아님? 왜 좋아하는 게임 좀 했기로서니 이딴 개좆같은 일을 당해야 함?
“만두 걔네도… 하. 됐다. 말해서 뭐 하냐.”
“……?”
나는 스스로 채운 잔을 몇 번에 걸쳐 꺾어 마셨다. 몇 번째 잔이었더라. 다섯 번짼가? 여섯 번짼가? 독주를 스트레이트로 먹으면 뒈진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속만 홧홧거리고 좀 쓰릴 뿐, 생각보단 버틸 만해서 놀랍다. 아닌가. 이건 내 주관적인 착각일 뿐이고 실상 취해 있는 상태일 수도 있을까? 나는 이미 취해 있나?
[…그, 친애하는 그레트헨. 내가 어지간하면 말 안 얹으려고 했는데. 슬슬 그만 마시거나 마기로 알코올을 태우는 게 어떨까?]
다만 다른 건 몰라도 덥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소매도 걷었다. 몇 번 손이 미끄러졌으나 실패하진 않았다.
[그 몸이 일반인보다 우월한 편이라곤 하나, 특정 성분이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 자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거든? 그대가 독에 몇 번 당해 쓰러진 건 기억하고 있는 거지? 급성 알코올중독까진 내가 어떻게 못 하거든……?!]
그렇지만 두어 번 실수했다는 행위 자체가 짜증이 난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조차 그렇다. 아니 사실 얜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예수님 부처님도 보자마자 손절 칠 새끼가 뭐라는 거야…….”
[걔네는 다른 동네 출신이라 힘도 못 쓸 텐데.]
“너는 같은 동네였어도 손절당했을 인성이야. 영원히 고향 못 가고 지옥에서 돼지 토사물이나 처받아먹을 새끼…….”
[…그대는 정말 작정하고 욕하면 제법 거칠구나.]
진짜 마음 같아선 머리를 쪼개서라도 놈을 빼내고 싶다. 사실 그건 파우스트도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그걸 진짜 시도해 보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이마에 손을 대었다. 시원했다. 빡침이 잠깐 잊히고 손의 시원함에 집중이 쏠렸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악마랑 대화하냐?”
그사이 마이스터가 안주를 쩝쩝거리며 물었다. 다니엘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경.”
“…이 새끼 딱 한 번만 두드려 팰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폭력이 처벌에 적합한 수단이라 생각하지 않고, 딱히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후련함을 느끼는 편도 아니지만, 분노 저 새끼만큼은 좀 때리고 싶다. 등짝 스매싱 정도라도 좋으니까.
“아, 그거 말인데.”
“……?”
“그 꼬맹이가 한 것처럼 저놈도 라텔인지 뭔지에 넣어서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건 안 돼?”
“……!”
나는 홧홧한 머리로도 마이스터의 지적만은 선명히 알아들었다. 거의 본능적인 캐치였다. 다니엘조차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았다. 기대. 우리 두 사람의 눈에 그 감정이 깃들었다.
“됩니까?”
“…되나?”
[되겠냐고. 처맞을 걸 알면서 나가겠냐고, 그레트헨.]
“빌어먹을…….”
물론 그 단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거대한 실망감과 함께 그대로 필름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