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그럴 수만 있다면 (19)
「삼 일간 이곳을 떠나지 마. 떠나려 한다면 마기를 터트릴 거야… 녀석은 그렇게 말했어요.」
처음, 파우스트가 그리 말했을 때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녀석이 진정 추격대와의 조우를 노렸다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줬을 리 없는 까닭이다.
거기에 그냥 나갔을 경우 발각되어 싸움이 일 것 또한 맹세하면서까지 경고해 주다니? 소년이 사제와 싸우다 이성을 잃으면 분노에겐 그저 좋은 일일 텐데도 그걸 막은 이유가 뭘까.
그건 결국 그 충돌로 인한 이득보다 더 커다란 손해가 녀석에게 생길 수 있었단 의미가 아닌가?
「나중에 가선 격통을 일으켜 제가 못 움직이도록 막았어요.」
심지어 저런 일까지 벌여서야.
나는 소년의 말 속에서 짙은 의문을 느꼈으나, 최종적으로는 질문을 삼갔다. 모든 걸 듣고 물어도 늦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그래도 당장 내쫓기진 않았으니까. 그걸로 족하려 했어요. 하루면 그 오두막 근처의 수색도 끝날 테니까, 그 정도면 정말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만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치달았을 때, 나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사냥꾼은 저를 죽이려 들었어요.」
소년이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을 때, 그 강제력은 더욱 강력했다. 나는 느껴지는 깊은 슬픔에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분의 자식은 마기침식으로… 그러니까 악마로 인해 돌아가셨고… 그게 아니었어도 마기가 느껴지는 인간은 적대하는 게 맞으니까.」
꼭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다니엘도 말하고자 했던 마이스터도 결과적으론 침묵한 채 경청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땐, 그땐 정말로 그게 서러워서…….」
그러자 울지 못하는 아이가 소리로써 울었다.
「배신감에 너무 화가 나 버려서.」
아. 어쩔 수 없단 말로도 해결되지 않는 울분은 대체 왜 있는 걸까?
* * *
순간적으로 치민 화를 다시 억눌렀을 땐 이미 일이 터진 후였다. 소년은 지난 1초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나, 자신이 무언갈 했다는 건 확신했다.
화르르륵!
선연한 불꽃이 사냥꾼을 집어삼켰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사냥꾼은 울부짖지 않았다. 혹은 그러지 못했다. 불꽃은 순식간에 그녀를 태우고 사라졌다.
“바우키스!”
사냥꾼의 남편이 지른 비명만이 그저 소년의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이 악마!”
다정하고 친절했던 이는 사라지고, 아내를 잃은 자의 절규와 비탄만이 남아 공격마법으로 화했다. 거대한 불의 공이 사방을 밝혔다가 그대로 소년을 향해 날아왔다.
콰앙! 간신히 피했으나 벽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다.
“네가 바우키스를!!”
마법은 캐스팅이 오래 걸린다. 그것을 고려한 것인지, 사냥꾼의 남편은 벽에 걸려 있던 단검을 하나 잡아 마구잡이로 휘둘러 오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검술을 사사한 소년에 비하면 조악한 솜씨였다.
“제가, 제가 원한 게…….”
하나 소년은 그마저도 함부로 제압하지 못했다. 상해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면 그만한 기술과 그 기술을 이용할 냉정한 이성이 필요했는데, 당장의 소년에겐 그것이 허락되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어.
저 사람에게 차라리 죽어 주고 싶어.
내가 다치면 또 악마가 나서겠지.
온갖 감정들이 소년의 가슴 안에서 마구 소용돌이치고 또 뒤섞였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이도 저도 택할 수 없는 어중간함은 마치 가시와도 같았다. 심장을 할퀴고 박히며 세상에 없는 고통을 소년의 영혼에 새겼다. 소년의 정신은 더더욱 이성과 멀어졌다.
“감히!!”
[흐음.]
그리고 사냥꾼의 남편이 소년의 머리로 칼을 휘두른 순간, 소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격통에 시달렸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명백했다. 대처할 수가 없는 게 문제였을 뿐.
서걱!
힘이 풀린 신체가 기어이 상대의 공격에 얻어맞았다.
왼쪽 이마부터 오른쪽 턱까지, 뼈를 가르진 못했으나 근육과 안구는 갈라 낸 거대한 상처였다.
“아아악!”
그 순간 소년의 마지막 이성이 휘발되고 본능이 앞장섰다. 아슬아슬하게 악마가 주도권을 잡는 건 면했으나, 고작 그뿐이었다.
차마 죽어 줄 수도,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어서 그저 공격을 쳐 내기만 하던 소년의 단검이 반사적으로 공격 태세에 들어가며 마력을 출수했다.
선으로 이루어진 마기가 오두막을 베고 지나갔다.
“끄으윽!”
소년은 그 이후를 확인할 정신조차 없어, 그저 주저앉았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나도 선연했으므로 하릴없었다.
털썩.
다만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당연했다. 소년의 공격에 당한 건 상대도 똑같았다.
“으으으…….”
아니, 어쩌면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닐 수도 있었다.
“……?”
어떻게든 치명상만은 피한 소년과 다르게 상대는 그 일격 한 번으로 바로 절명해 버렸으니까.
“아.”
소년은 얼굴에서 흐른 핏물이 웅덩이처럼 고인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죽인 것이었다.
* * *
「제가 그곳에 남는 걸 택하지 않았다면, 여유를 부리지 않고 자생하길 택했다면, 악마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 대신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해냈다면… 하다못해 그 마지막 순간에 감정을 억누르고 바로 도주하기만 했다면. 그분들이 그렇게 죽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파우스트는 항상 손에 쥐고 있던 만약의 문장을 곱씹었다.
「그러니 제 탓이에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었다면.
「모두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이 조금은 더 줄었을 텐데.
「전부 제가 나쁜 거예요…….」
소년은 가끔 생각한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악마가 그를 노리지 않았다면. 그의 가족들은 아주 멀쩡하게 살아 있었겠지. 그가 악마를 품고 일으킨 모든 재해 역시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레트헨조차 타지로 끌려와 고행하는 일 따윈 없었겠지.
그러니 결국 소년의 잘못이다. 그가 존재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전부 그의 죄였다…….
“그게 왜 당신 잘못입니까! 그게 왜……!”
그를 안아 주었던 이단심문관이 외쳤다. 온기만큼이나 다정한 태도가 없는 눈물마저 나오도록 할 것 같았으나, 파우스트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그런 결말이 나게 된 건 제 어리석음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그건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어리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분명하게 있다. 그러므로 파우스트는 자신의 죄를 외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레트헨이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줄곧 그러기로 다짐했다.
“이건, 이건 피할 수 있는 일이랄 게…….”
“아… 골 때리네. 이걸 어디서부터 말 꺼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데.”
“…….”
파우스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세 명의 어른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대지 위에 새겨진 죄. 악마가 꺼냈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맞는 말이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당신은 그저 당시에 주어진 가장 나은 길을 고르려 했을 뿐입니다. 가장 피해가 적고, 다치는 이들이 최대한 덜 나올 수 있는 최선을 택하고자 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게 당신 잘못입니까… 그게 왜 당신 잘못이에요…….”
“허, 참. 휘말릴 사람을 최소한으로 하고자 궁구하고 노력했는데 그게 왜 네 탓이냐? 거기에, 네가 그 사람들한테 적의를 보였냐 피해를 입히려 했냐 뭘 했냐. 마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한 건 그쪽이 먼저잖아, 타협을 깨고 기습한 것도 그쪽이었고. 네가 당하면 악마가 튀어나올 상황에서 방어한 게 그렇게 잘못이냐?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의 말이 맞다. 그 일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것이 너의 탓이고 책임은 아니다.”
“어떤 불행은 선의를 이깁니다. 그저 그런 일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걸 자신의 죄라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 어른들은 또다시 그의 다짐을 흐트러트렸다. 고심 끝에 골라낸 단어들은 느리고 또 나지막했지만, 그렇기에 귀에 참도 잘 박혀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아닌 건 아닌 거야. 하여간 꽉 막힌 놈들. 좀 유연하고 뻔뻔하게 살면 안 되냐?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왜 선빵 치냐고, 네가 먼저 잘못했다고 지랄하면서 살면 안 되냐고.”
그래선 안 됐다. 파우스트는 그 다정함이야말로 너무도 괴로워서, 닿아선 안 될 곳에 닿고 싶은 욕망이 더 자라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만 외쳤다.
「제가 죽인 사람은 그뿐이 아니에요!」
그는 죄인이어야만 했다. 가족들도,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한 소년은 반드시 죄인으로 남아야만 했다.
「…마이스터께선 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릇으로써 희생될 거라 하셨지요? 하지만 녀석이 한 달에 한 번 몸을 갈아 치운다손 쳐도 1년이면 열두 명이에요.」
구원은 그레트헨 같은 사람에게나 마땅한 것이었다.
「그리고 칠 년이면… 칠 년이면…….」
다만 소년은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산수를 하지 못해 말을 끊고 말았다. 열둘이 일곱 번 있으면… 그러니까…….
“84명. 그렇지만 그릇으로 점지된 놈만 죽었겠어? 휩쓸릴 타인을 계산해야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쳐도 백, 아니 이백…….」
“…336명.”
계산 엄청 빠르다. 역시 마법사를 겸하는 대명장은 달라도 다르구나. 우와.
파우스트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주 찰나간,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 기색을 읽어 낸 마이스터가 안면 근육 일부를 살짝 씰룩였다.
“그래서, 그건 왜 세는데?”
「…아.」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샛길에 있을 수는 없다. 파우스트는 갑자기 미적지근해진 공기를 두고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아무튼… 제가 없어서 악마가 다른 사람을 그릇 삼는대도 희생되는 숫자는 336명 정도예요.」
“그래. 흽쓸리는 숫자의 가변도 고려하지 않고, 악마가 적합체 아닌 그릇을 쓸 때의 평균 기간도 본인 어림짐작으로만 정했으며, 악마가 움직이는 기간 동안 벌어졌을지도 모를 살인 등의 변수를 포함하지 않은 완전 단순 계산이지만 대충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지.”
「…반면 제가 당신을 데려오기 위해 죽인 숫자는 수천 명에 달하죠. 그레트헨을 데려오기 위해 자의로 살해하고 제물로 바친 사람이 그렇게나 많단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경멸받겠지. 드디어 소년에게 주어진 과분한 관용과 기회는 전부 철회되겠지.
소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의 마지막 죄악까지 고백했다. 나는 구원받지 못한 채 죽을 거야. 신의 품에 돌아갔을 가족들과 다르게, 영원한 절망 속에 잠겨 들 거야.
차마 용서를 바라지 못하도록 하는 대죄마저 토해 내자, 가슴 한편이 후련해졌다. 공허함에 가까운 후련함이었다.
「…그러니 제발 제가 잘못한 거라고 해 주세요. 제 죄를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있잖아, 당신들에게 그런 말을 받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내게도 참회하고 회개하여 신의 곁에 갈 기회가 남아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가족들이 이미 가 있을 그곳으로 나 또한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그냥 전부 제 잘못인 걸로 해 주세요.」
그렇지만 소년의 손에는 이다지도 많은 피와 죄가 묻어 버렸으니.
이런 손으로 감히 가족들을 마주할 수는 없다. 소년의 어린 동생을 안아 들고, 형과 누나에게 얼굴을 비빌 수도 없으며, 부모님의 품에 안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밤하늘의 곁에 설 수 없다.
「나쁜 건 저예요…….」
그러므로 구원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삶은 영원히 시궁창에 처박혀 있어야 하며, 그렇게 어둠뿐인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다.
그런 결말만이 있어야 했다.
“신이시여…….”
하나 차마 바라지 못하는 품을 대신하여 이단심문관이 소년을 끌어안았다. 흘러내리는 낙루는 그저 황송하고 과분하다.
“어째서 한 사람에게 모든 죄와 고통을 몰아주시나이까? 어째서 이 어린 양에게만 이다지도 거대한 시련을 부여하나이까…….”
“아, 시발. 담배 피우고 싶네. 피워도 되냐?”
“…애 있는 데서 피우지 마라.”
“지금까지 다 봤을 텐데, 뭐.”
“모범 보이기는 너무 늦었으니 포기하지만, 간접 흡연의 문제가 남아 있지 않나.”
“공방에선 뭐라 안 했으면서.”
“그땐 몰랐으니까.”
그에게는 이런 다정함을 누릴 자격마저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 잠깐 정도는 괜찮을까. 파우스트는 한참 망설이다가 이단심문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 보았다. 너무나도 과분한 온기가 머리를 타고 살살 내려왔다.
“…야.”
그때 담배 대신 술을 벌컥벌컥 마신 마이스터가 잔을 쾅, 하고 내려 두었다.
“제물 바치고 뭐 한 건 나도 차마 옹호 못 해 주겠다. 근데 염병… 네가 그렇게까지 했던 것엔 그것밖에 답이 없어 보였다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치?”
「그것만으론 제 죄가 정당화되진…….」
“누가 정당화하재? 이건 절대로 정당화되지 못해. 어떤 사회적 약속을 끌고 와도 범죄에 해당할 수준이니까.”
술 한 동이를 비워 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불콰한 기색이 한 점 없다.
“그렇지만 억울하다 외칠 자격까지 우리에게 없겠냐? 다른 인간이 똑같은 처지에 섰을 때 너희도 안 그럴 자신 있냐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기부터 돌아보라고 말할 자격마저 없겠냐고.”
다만 존재하는 건 명징한 이성과 수라장을 거쳐 온 생존자의 독기뿐이라.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너도 나도 그런 선택은 안 했어. 우리에게 없던 건 기회였지, 머리가 아니잖냐.”
「…하지만, 제가 어떻게─」
“망할 애송아, 잘 들어. 네가 그럴 수록 네 삶이 편해질 것 같아? 모든 걸 다 떠안고,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며 죽을 때까지 학대하면 좀 마음 편해질 것 같냐고.”
그는 잔에 술을 더 채워 놓곤 그대로 원샷했다. 그 박력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쾅. 또다시 잔이 탁자에 내려졌다.
“절대 아니야. 죄책감은 파도 파도 끝없이 나와. 한번 자책하기 시작하면 세상 모든 불행이 다 나 때문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끝없이 괴로움만 반복된다고.”
그리고 그 위로 마이스터의 목소리가 표독하게 이어졌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악에 받쳐 살아. 죄? 인정해, 그래서 회개하고 또 속죄하려고 하고 있어. 근데 거기다 대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지랄하냐? 넌 뭐 떳떳해? 나보다 더 잘할 자신 있어? 그런 마인드로 살라고.”
그래. 그건 분명한 독살스러움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그 어떤 걸 대가로 바쳐서라도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시할 수 있는 사람의 독함.
“아무렴. 내가, 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뒈지면 나로 인한 희생자나 피해자의 죽음은 뭐가 되겠냐.”
죄책감을 기반으로 하는 사나움.
“어차피 죄책감을 갖고 살 거면 차라리 독을 품고 살아. 네가 딛고 선 목숨의 무게만큼 무언갈 해내겠다는 각오로 살라고. 누군가의 희생을 짊어진 순간부터 내 목숨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파우스트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마음가짐 앞에서 손가락을 몇 번 굽혔다.
『까놓고 말해서 사람 수천 명을 죽이고 나란 어른 하나 갈아 가면서 겨우 부지한 목숨. 여기서 끊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시작점은 다를지언정 공통된 말을 들어 본 상태기에 그 혼란함은 더욱 컸다. 『그냥, 살아만 줘. 살아만 줘, 파샤…….』 그가 가장 동경하고 또 송구해하는 대상들은 하나같이 소년의 삶을 말했다. 그것이 정말 해답이라는 것처럼.
“…핍박받던 자가 죄를 고백하였나니, 의로우신 분이시여. 불의 속에서도 의를 좇는 자를 사해 주십시오. 업을 경계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신의 코가 있을 것이오. 죄를 참회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신의 입이 있을 것이오. 생에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신의 귀가 있을 것이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처럼.
“길 없이 헤매던 이에게 구원 있으라…….”
투둑.
이단심문관이 소년의 고백에 답가를 들려준 직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처럼 녹기 시작한 육체가 마치 하나의 눈물처럼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