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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30화 (330/389)

330화 그럴 수만 있다면 (16)

왜 그를 용서하는가? 왜 용서를 넘어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해 주는가?

파우스트는 다니엘의 말을,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상냥한 그레트헨에게 기회를 받게 된 순간이 그러하듯, 이번에 주어진 관용 역시 납득되지 않았다.

「왜, 왜…….」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의 부모님은 살았을 거야. 내가 그때 그런 생각만 안 했다면 당신이 부모님을, 당신의 세계 일부를 잃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대체 왜…….」

그런데 그레첸과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말해?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들이 그런 일을 겪을 이유는 없는데, 당신들의 고통과 괴로움은 전부 내게서 전염된 것인데. 왜 내 탓을 하지 않아?

“고맙습니다.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제 억지가 분명한 상처였을 텐데. 그럼에도 용기 내어 말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각이 무딘, 거의 없다시피 한 몸체 위로 은은한 압박감이 얹어졌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여백 하나 남기지 않을 기세로 안아 주는 건 불편함 이전에 아늑함이 더욱 컸다.

설령 더는 그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그 부드러움이 인지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에 새겨진 안온함은 순식간에 망각의 베일을 벗고 한때의 따스함을 영혼에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당신의 처지를 모르고 그저 원망만 해서, 안 그래도 무거웠을 당신의 어깨에 새로운 짐을 떠안겨 줘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소년은 단단한 품속에서 고개를 반사적으로 저었다. 형태를 바꿀 때마다 요구되는 마력이 영혼을 스치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가, 제가 잘못한 거예요.」

소년은 발악하듯 말을 쏟았다. 「전부 제가 잘못한─!」 하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쓸어 내린 손은 그 온기만으로 소년의 혀를 마비시켰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달콤한 독이었다.

“우리의 불행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 책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사이, 그레트헨이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 다니엘의 입에서 또다시 튀어나왔다. 소년은 그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은 그를 용서할 필요가 없는데, 정말로 없는데. 대체 왜…….

“당신도 괴로웠을 텐데, 우리의 원망까지 챙기려 들지 말란 말입니다…….”

하지만 말을 이어 나가야 할 목소리는 이상하게 나올 생각을 않았다. 방금까지 잘만 말했으니 이제와 목소리가 사라진 건 분명 아닐진대, 정말 신묘하게도 그랬다.

「으우…….」

이래선 안 돼. 소년은 다니엘의 어깨로부터 고개를 살금 들어, 도움을 청하고자 주변을 보았다. 모든 게 그의 죄라고 속 편히 말해 줄 누군가를 애타게 구했다.

“…….”

그러나 그레트헨은 이미 그에게 자비를 베푼 전적이 있으니. 『그가 진정으로 널 봐주는 것 같아?』 그가 잠든 후에야 겨우 속내를 토한 그는 소년이 원하는 답을 결코 들려주지 않으리라. 『그는 또다시 인내하고 희생한 것뿐이야. 네가 어리고 불쌍하단 이유 하나만으로.』 파우스트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남은 한 사람에게 향했다.

“뭐… 고생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마이스터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심드렁하게 한마디 툭 뱉었다.

“미치기 딱 좋은 환경이었는데 용케도 버텼어.”

언뜻 비꼬는 것처럼 보이는 말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덕택에 그런 느낌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객관적인 무언가에게 인정받은 느낌도 들었다.

“별개로 너도 진짜 피곤하게 사는구나. 저놈도 그렇고 왜 너도 본인 잘못 아닌 걸로 땅을 파고 있냐?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어서 벌어진 일일 뿐이잖아. 그걸 왜 본인 책임으로 돌려서 할 필요도 없는 자책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이어지는 말 또한 그랬다. 마이스터조차 조금도 소년을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소년을 더 노골적으로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쟤네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다? 글쎄. 그런 가정론을 해 봐야 별 의미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거기에 그런 가정을 할 거면 다른 것도 해 봐야지.”

마이스터의 다리가 베 꼬이더니 무릎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네가 그 악마를 몸에 품은 채 버티는 일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 악마는 그동안 뭘 했겠냐?”

「…그건.」

“일단 네 말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악마는 아마 본인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찾아 세상을 전전해 온 것 같은데… 그 녀석에게 맞는 그릇, 적합체가 많지는 않을 거야. 많았다면 진즉에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을 테니까.”

동시에 그는 다른 손으로 삿대질을 하듯 허공에 마구 손을 휘둘렀다. 강조를 위한 손짓 같았는데, 덕분에 모든 이의 시선이 잠시 그의 손으로 모였다.

“거기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네 묘사를 떠올리면 적합체가 아닌 인간은 그 녀석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체가 붕괴해 버리는 것으로 추측돼. 그렇다는 건? 녀석은 신체 붕괴를 피해 끊임없이 몸을 옮겨 다녔을 거란 거지.”

“…분노는 대악마 중에서도 유독 목격담이나 관련 정보가 없는 편입니다. 고대 문헌에서나 두어 번 이름이 나올 정도로. 만약 그 원인이 육체가 없어 힘을 쓸 수 없던 것이었다면… 말이 되는군요.”

“그래. 거기에 사람 한둘 죽어 나가는 건 별로 의심받을 일도 아니지. 세상엔 그보다 더한 일도 많으니까.”

각설하고, 만약 그랬다면 최종적으로 나왔을 피해자의 숫자는 얼만큼이었을까. 몸을 옮길 때 과연 부수적인 피해가 나오지 않았을까. 놈이 네 몸으로 갈아탈 때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마이스터의 말이 이어질수록 파우스트는 차마 입술을 떼기가 어려워졌다. 배운 게 많다는 마이스터는 파우스트가 무슨 말을 해도 증거를 내밀며 반박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정. 네가 몸을 빼앗긴 후 녀석에게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 가정은 딱 듣기만 해도 감 잡히지 않냐? 그 상황이 지금보다 더 최악이면 최악이지, 좋지는 못할 거란 거?”

“…잠깐 폭주했을 때도 그 난리가 났는데, 제대로 활개 칠 걸 생각하니 끔찍하군.”

“저놈 말이 맞아. 너랑 저놈이 간신히 틀어막은 게 베뮈르헨이야. 그런데 놈이 그 몸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면 어떤 꼬라지가 났겠냐.”

그러나 마이스터는 소년이 운을 떼지 않아도 조목조목 소년의 생각들을 따져 무너트렸다. 그건 참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저 녀석들이 겪은 건 분명 비극이야. 돌이킬 수도 없고, 평생 낫기도 어려운 비극. 그렇지만 네가 악마에게서 버티지 못했다고 해서 저 녀석들이 행복해졌을까? 뭐, 이런 일 아니면 휘말릴 일 없는 저놈이야 행복했을 수도 있겠지. 저 자식의 가족들도 재해에 비껴 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없진 않고. 그런데 저 두 놈이 사건을 안 당했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랬겠냐? 내가 봤을 때, 쟤네들이 안 당할 수도 있는 대신 비슷한 피해자의 숫자는 몇십, 몇백으로 불어났을 거다. 베뮈르헨을 고려하면 사실상 수만 배도 가능해 보이고.”

“…대악마가 나타났다면 저희 가족은 반드시 지원에 나섰을 겁니다. 운 좋게 비껴 나갔대도 결과적으론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 같군요.”

“그래. 결국 그런 거라고.”

끔찍하면서도 달콤하고, 듣기 싫으면서도 끝까지 놓고 싶지 않다. 소년은 자신을 안고 있는 다니엘의 옷깃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어린 시절의 그가 그의 형에게 했던 것처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옳지는 않아. 그렇지만, 몇 명의 비극에 매몰되어 네가 구한 많은 것을 부정하는 것도 맞는 짓이겠냐? 제발 챙길 건 좀 챙겨라, 호구들아. 너흰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야. 악마로부터 더 많은 사람을 구한 거지.”

“…그래, 저 말이 맞다. 넌 최선을 다했다.”

“너도 제대로 실감 못 하는 주제에 뭐라는 거야. 이건 너한테도 적용되는 말이야, 멍청아.”

“…….”

“멍청이란 말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마이스터께서 온전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닙니다. 경께서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니 모든 걸 품으려는 건 그만두십시오.”

“아니, 난…….”

그때 다니엘이 자세를 살짝 고쳐 앉았다. 파우스트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그를 보다 제대로 끌어안는 자세였다.

그의 덩치가 또래보다 왜소할 뿐이지 나이를 고려하면 그렇게 작은 편도 아닌데, 왜 굳이? 파우스트는 깜짝 놀라서 그의 옷깃을 놓았다.

“아… 역시 불편합니까? 사촌을 안아 줘 버릇하다 보니 그만.”

그러나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말에도 무심코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심한 다니엘이 그를 꼭 안았다. 본격적인 보호 태세에 소년의 몸이 바짝 굳었다.

“아무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 이유로 비극을 완전히 무시하라곤 말 안 해. 애초에 그게 안 되는 게 너희라는 걸 아니까. 그렇지만 너희가 해낸 일의 가치를 낮게 잡지도 마라. 자랑스럽게 여겨도 모자랄 일인데 왜 굳이 부정해 가며 스스로의 가치를 까먹는 거냐? 너희가 아니었으면 시발, 인류는 지금 절반쯤 뒈졌어.”

“…….”

“정말이지, 한숨만 다 나온다. 너흰 해낸 일에 비해 왜 이렇게 자존심이 없냐? 이렇게 순해 빠져서 세상 어떻게 살려고…….”

“…순하게 살진 않았는데.”

“그럼 호구같이 살았다고 해 주랴?”

그사이 마이스터가 그레트헨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레트헨은 잘못 없어요.” 지금껏 봐 온 것이 있는 만큼 마이스터가 싫진 않지만, 그레첸에게 뭐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소년은 뾰족하게 소심한 반항의 말을 뱉었다.

“어쭈. 네 뒤치다꺼리해 주는 사람이 욕 듣는 건 싫나 보지? 그 성질을 너 자신한테도 좀 적용해 봐라. 내가 별의별 손님을 다 맞이해 보고, 거기서 이름난 실력자들도 많았지만 너희처럼 맹한 놈들은 하나도 없었어.”

그러나 소년이 한마디 하는 순간 마이스터가 핑계를 잡은 사람처럼 마구 쏘아붙였다.

“걔네들은 실력보다 프라이드가 더 커서 빡쳤는데 왜 너흰 그 반대 짓거리를 하고 있냐? 자격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핀잔이었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레첸과 파우스트는 동시에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주 영혼의 쌍둥이지.” 마이스터는 당연히 더 짜증냈다.

「…그, 단검 얘기 아직 다 안 끝났는데.」

“꼬맹이가 말 피하려고 꼼수 쓰네.”

「…하지만 그 이야기까지 들으면 여러분도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전 정말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요.」

“오오냐. 한번 말해 봐라.”

마이스터가 청순한 얼굴로 그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죄를 고백하는 자리였는데, 그 표정 앞에서 소년은 이유 없이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품어선 안 되는 상황이고 주제인데도 그랬다.

「…이 단검은 제가 죽인 사람의 것이에요.」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에만큼은 다시 순수한 죄책감만 차올랐으니. 소년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끝내 다니엘의 옷깃 잡기를 포기했다.

「악마가 아니라, 제가 죽인 사람들의 것이요.」

P. B.

소년은 단검에 새겨진 이니셜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벌써부터 가슴 어림이 아파 오는 듯했다.

* * *

소년은 달리고 달리다가, 바닥에 깔려 있던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 후드득.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소년의 머리가 그제야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잡아 냈다.

흔적이 짙게 남아 버렸다.

‘안 돼… 이렇게 되면…….’

소년은 헐떡거리는 숨과 깊은 죄책감, 절망감 따위로 겨우겨우 사고를 이어 나갔다. 히끅히끅. 목을 죄는 감정이 그의 생각을 어지럽혔으나 이겨 내야만 했다. 이 이상의 피해자는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분명 쫓아오는 사람이 생길 거야.’

물론 소년은 숲에서 단서를 찾는 법 따윈 잘 몰랐다. 그러나 훈련된 병사가 자그만 단서를 토대로 어디까지 추론할 수 있는지는 어림짐작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추격자가 붙을 것이다.

‘이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선 안 돼……! 하지만 어떻게 해야…….’

지금껏 소년의 불행에 휘말려 죽은 이들은 수가 적거나 숨어 살던 집단뿐이 없다.

사고사로 오해하여 전문 추적꾼을 보내지 않거나, 실종 소식이 한참 뒤에나 퍼질 수 있는 이들만이 휘말려 살해당했단 거다.

그리고 그건 모두에 있어 나름 행운이었다. 사람이 죽은 게 어찌 긍정적 일이 될 수 있겠느냐만, 그 부분에 한정되거든 그건 분명 행운이 맞았다.

아무렴, 전문 추적꾼이 아닌 일반인이 어디 근소한 자취를 두고 소년을 쫓는 데 성공하겠는가? 실종 소식이 한참 후에야 전해진다면 그만큼 흔적도 사라졌을 텐데, 그땐 노련한 추격자라고 해서 달리 방도가 있겠는가?

거기에 이단심문관 무리마저 단번에 당해 버린 지금이다. 추격대라고 그를 멀쩡히 추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쫓아와 봤자 개죽음만 당할 거란 소리다.

하니 그들이 못 쫓는 건 행운이다. 범죄가 은폐되는 건 서글픈 일이나, 횡액에 당할 피해자가 줄어드는 건 차라리 나은 일일 것이므로.

‘흔적을… 흔적을 숨겨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사냥꾼 한 명의 실종은 슬프지만 흔히 벌어지는 사건인 반면, 이단심문관 무리의 실종은 결코 비근하지 않다. 소식이 닿는 즉시 추적대가 나설 게 분명하다.

그리고 소년의 흔적은 그들이 올 때까지 대부분 유지되겠지. 빠르다면 일주일, 못해도 열흘 안에 도착할 확률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의 증거는 열흘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아니야. 훈련받은 것도 없는 내가 시도해 봐야 제대로 가려지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에야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게…….’

소년은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웠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그대로 멀리 내던졌다. 타닥. 눈물이 말라붙은 몸은 다시 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

물을 밟고 뛰면 흔적이 덜 남을까? 소년은 짤막한 상식과 사고로 조금 고민해 보았다.

일단 가자. 어차피 사고가 있던 곳에서 멀어지는 방향이긴 하니까. 소년은 얻어걸리면 좋겠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실개천을 밟고 달렸다.

“아이?”

“……!”

하나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썩 좋지 않은 만남을 가져왔다. 목을 축이러 오는 짐승을 잡고자 숨어 있던 늙은 사냥꾼이 소년을 발견하고 허리를 폈다.

목격자가 생겼어. 소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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