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그럴 수만 있다면 (15)
「죽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어 편해지자.」
* * *
포그르르. 밤을 투영하여 검푸른 물길이 모든 시야를 삼켰을까. 수면 위로 요요히 스며드는 달빛이 소년의 숨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촤아아아악!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거친 유속은 소년의 몸을 휘감은 채 아래로 아래로 내달렸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빼빼 마른 몸이 세찬 물길에 떠밀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발악이야.]
콰드드드드. 귓가가 순식간에 멍멍해졌다.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무엇도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은 추운 사위로부터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퍼억! 바위에 몸이 찍힌 건 그다음이었다.
[넌 네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프다. 소년은 점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예상보다 죽음은 더 차갑고 욱신거리는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그렇지만 버텨야 해. 소년은 하천 밑바닥에 깔린 자갈과 돌들이 그의 몸을 두드리고 할퀴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너는 죽지 못해.]
그리고 끝내 숨을 오랫동안 잇지 못한 육신이 혼몽함에 접어들었을 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절대로.]
정말 끔찍했다.
* * *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 * *
“아.”
소년은 어느 순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새까만 마기가 끝끝내 그를 이 땅에 붙여 놓았음을 자각했다.
“아아……!”
그는 죽을 수 없다. 소년은 불타 버린 강가의 화전촌을 보며 기어이 절규했다.
* * *
「저는 죽을 수 없었어요.」
* * *
[아… 또 빼앗겼나.]
그의 몸에 들어온 악마는 참 잔인한 존재였다.
[일단 먹던 것을 마저 먹는 게 어떨까? 양분 섭취가 없더라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지만, 성장은 또 별개거든. 성체가 되려면 뭘 먹어야 해.]
못해도 20채는 있던 듯한 마을을 불태운 주제에, 소년이 먹어야 할 음식과 써야 할 물품은 남겨 둔 시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배를 채운 후에는 모아 둔 물건을 챙겨. 내가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네가 다 벗고 다닐 것 같아서 따로 구해 봤어.]
그것은 지극히도 이기적이었으나, 신체를 공유한단 이유로 그 이기심의 일부는 꼭 다정함처럼 표현되었다. 그것이 제일 잔인했다. 현재에 이르러 소년의 안위를 가장 챙겨 주는 존재는 소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와 동일했다.
[아참, 강이 근처인 김에 씻어 두는 건 어떨까?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잖니.]
소년은 그 정 없는 상냥함에 또다시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이 사람들을 죽인 주제에.” 그의 손에는 여전히 음식이 들려 있기에 그 고통은 배가되었다. “내 가족들을 전부 죽인 주제에…….” 가증의 산물.
“제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소년은 음식을 내던졌다. 철퍽. 조금도 후련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재와 뒤섞인 음식 냄새가 세상을 채웠다.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소년은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강을 망연히 응시했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다시 뛰어든다면 죽을 수 있을까? 소년은 무릎을 꿇었다. 그치만 만약 죽지 못한다면, 이 광경은 또 반복되겠지. 소년의 손이 기어이 대지를 두드렸다.
“제발 죽게 해 줘…….”
[오… 아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죽여 줘…….”
[정 그만하고 싶다면, 이름을 말해 줘. 그거면 돼. 그럼 네게 죽음과도 같은 소멸을 선물해 줄 테니.]
돌멩이에 찍힌 살갗이 찢기고 터졌으나 이제 이깟 것은 고통 축에도 들지 않는다. 소년은 소리 없이 오열하며 대지에 손을 박았다. 손톱이 부러지고 깨졌으나 심장에 박힌 상처보다는 덜 아팠다. 붉은 피가 대지에 점점이 고였다.
[…다만 네가 그러지 않겠다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네.]
그리고 그를 부드럽게 유혹하던 목소리가 점차 냉엄해졌다. 소년의 심장께에서 하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가야, 앞으로 네가 쓰러질 때면 나는 북쪽으로… 네 고향이 있는 방향으로 경로를 잡을 거야.]
흘러내린 흰 액체는 꾸물거리며 하나의 형태를 잡았다. 사륵. 하얀 손이 소년의 뺨으로부터 가죽 한 장의 거리를 두고 뻗어졌다.
접촉하진 않았으나, 그 존재감에 소년의 고개가 억지로 들렸다.
[또한 그 목적지에 온전히 다다랐을 때, 나는 네 고향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여 가며 네게 물어볼 거란다.]
가면을… 산양의 머리뼈를 가면 삼아 쓴 순백의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너!”
[이 몸의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이 있니? 없다면 이 사람의 사지를 찢어 버릴 거야. 그래도 없어? 좋아, 어디까지 가나 볼까.]
“그딴 짓거리를 하기만 해 봐! 반드시 널─!”
[이런 미래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야.]
소년은 순간 목이 막혔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죽음으로 반쯤 잊고 있던, 가끔 떠올랐어도 도저히 오래 생각할 수 없던 남은 가족들이 떠올랐다.
군야 형과 삼촌, 숙모, 친하게 지낸 이웃들…….
소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얀 애송아, 네 이름이 뭐니?]
그들마저 죽음에 이르게 할 순 없다. 그들마저 가족들처럼 무참히 살해당하게 만들 수는 없어.
소년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에 덜덜 떨며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렸다. [아가.]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소년을 끝없이 재촉했다.
지옥이었다.
* * *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던 것마저 막히는 순간,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악마의 말을 따르는 게 정답이 아니란 건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고작 그뿐이었죠. 그건 제게 답이 될 수 없었어요.」
* * *
이름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도 그의 고향이 안전해지진 않으리란 직감 탓이었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의 정신은 또다시 한계에 다다랐는데, 언제 또 몇 주간 정신을 잃을지 모르는데. 이대로 버티기만 하는 게 맞는 걸까?
소년은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에서 정처 없이 걸었다. 이 미로에 진정 출구는 있을까. 그조차도 확신하지 못한 채.
* * *
「…그러다 한 무리의 사제들을 발견했어요. ‘피하는 게 좋겠는데.’ 악마는 몸에 깃든 이래, 처음으로 그런 조언을 했고요.」
* * *
그 순간, 소년은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가 드는 걸 본 사람처럼 다급해졌다. 악마가 피하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악마에게도 저들이 위협적이란 게 아닐까?
* * *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죠. 도시 안에서 몰이를 당할 때조차 가소롭다는 듯 그저 웃기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고작 그들을 가지고 위협으로 받아들일 리 없는데… 그때의 나는 그걸 미처 생각 못 했던 거야.」
* * *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 * *
「편해지고 싶은 마음에 급급해서, 가장 중요한 걸 놓쳐 버렸어…….」
* * *
“제발 죽여 주세요.”
소년이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고 있기만 하다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건 별문제가 없다. 그 대상이 사제라면 소년 안의 마기를 느끼고 그쪽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아무튼 바로 일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그 점을 이용해 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아이가.”
“물러서, 악마의 계략일지도 몰라!”
“하, 하지만.”
“제발, 저 좀 죽여 주세요.”
“…저 앤 대니보다 어려.”
이단심문관들은 소년을 경계하고, 또 의심했지만 동시에 머뭇거렸다. 부부로 보이는 두 명의 이단심문관은 특히 그러했다.
무거운 마기를 앞에 두고도 그들은 기어이 인내와 도량을 베풀었다.
“전 괜찮아요! 제발, 제발 죽여 주세요!”
“…잠깐, 진정하고 사정을 말해 주세요. 당신은 악마입니까? 그도 아니면…….”
“악마가 제 몸을 멋대로 지배해요. 지금은 제가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 풀려날지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그것이 참 고맙고 또 힘겨웠다. 소년은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이에게 절박한 시선을 마주했다. 나이가 지긋한 이단심문관은 그를 애달픈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제님, 제가 이 이상 죄를 저지르게 하지 말아 주세요.”
“…신전으로 가면, 악마를 정화하거나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뇨, 사제님.”
소년은 그 시선이 꼭 부모님의 것 같아 고통스러워졌으나, 어떻게든 버텨 냈다. 신께서 만일 자비를 베푼다면, 사후에 그들을 만날 수도 있을 거란 믿음이 그때의 소년에겐 있었으므로.
“언제 제가 못 버티게 될지 몰라요. 신전까지 갈 자신 없어요.”
“어린 형제여…….”
“무엇보다 사제님, 저는 이 악마로 인해 가족들을 잃었고 무고한 사람들을 휘말려 죽게 만들도록 했어요. 이런 제게 삶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저는 이제 편해지고 싶어요…….”
“…….”
“악마는 끈질겨요. 그러니 단칼에… 최대한 힘을 담아서 죽여 주세요.”
그러므로, 소년은 순순히 목을 내밀었고 그들은 기어이 응해 주었다.
“부디 신의 품에서는 평안히 지내기를.”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최고위 사제가 칼을 들기 전, 마지막으로 이단심문관 부부가 소년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신이시여, 이 가련한 영혼에게 구원을.” 눈을 질끈 감은 사제의 칼날이 신성력을 머금고 소년에게 내리꽂혔다.
* * *
「…지금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이 몸을 한 번에 죽이려면 용사님 정도 되는 분이 신성력을 응집하여 단번에 불태우는 것밖에 수가 없어요. 그런 몸이었어요.」
* * *
소년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그건 이 정도 타격으로는 죽을 수 없으며 도리어 몸만 뺏기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라.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번엔 그래도 20분은 기절해 있었는데.]
또한 악마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소년의 정신력이 악마의 예상보다 더 뛰어나단 것이었다.
“죄송해요…….”
아마 악마가 노렸던 것은 죽음의 충격에 소년이 혼절하고, 그 틈을 노려 마음껏 육체를 지배하는 광경이었으리라.
하나 죽음이 그의 몸을 쉬이 씹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소년은 더는 죽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쉬려 들지 않았다.
“난, 난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찰나간 정신을 잃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기대가 무너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빠르게 악마를 몰아냈다. 다시 육체의 지배권이 소년에게 쥐였다.
“이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마저도 이미 늦은 것이 되었다. 소년은 엉망이 된 사방을 두고 엎어진 채 몇 시간을 오열했다. “아아…….” 또다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어. 나 때문에 죽어 버렸어. 소년의 짙은 눈물방울이 절망과 좌절을 담고 떨어져 내렸다.
“죄송해요…….”
그들이 마지막까지 소년에게 보인 상냥함과 친절함이 여즉 생생하기에 그 감정은 더욱 처절했다. 소년은 꺽꺽대며 울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기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악마는 참으로 교활하고 자비가 없어서, 그가 마음 놓고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흐…….”
마음 같아선 이곳에 남아 하염없이 죄를 빌고 또 빌고 싶다. 그렇지만 이다지도 많은 수의 사제가 죽었으니, 끊긴 소식을 두고 분명 주변 도시에서 수색대를 보낼 터. 이곳에 남아 있다간 그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아니, 마주칠 거다. 반드시.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그리고 그들과 마주친다면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이번엔 소년이 빌지 않더라도 그쪽에서 먼저 칼을 들 것이며, 그 격전 끝에서 악마는 또다시 깨어날 테니까.
“다신, 다신 죽여 달라고 빌지 않을게요…….”
죽고 싶다. 여전히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마 죽을 수가 없다. 그 스스로의 시도도, 남의 손을 빌린 시도도 결국은 악마에게 막힐 것이므로.
그것을 자각한 소년은 엉엉 울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로 끔찍한 순간이었다. 이렇게나 선한 사람들을 죽이고 달아나야 한다는 게, 정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 *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다니엘은 소년의 고백을 들은 순간 허탈해졌다. 그런 거였구나. 그때의 일은, 그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던 거구나.
「제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신들께선 죽는 순간까지 한 아이를 구원하고자 했던 거야.
「정말 죄송합니다…….」
악마가 아니라 그저 한 아이를… 가엾은 영혼을 구제하고 싶었던 거라고.
“…저는.”
다니엘은 먹먹해진 목소리로 파들거리는 입술을 떼었다. 그의 정면에 선 소년은 소파 위에 웅크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간신히 보이는 뺨에는 그 어떤 것도 흐르지 않는다.
“저는, 역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겠지. 형태가 인간일 뿐, 결국 저것은 악마의 뼈로 만들어진 거짓된 육신에 불과하니까. 삶도 생명도 찰나밖에 깃들 수 없는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니까…….
“예.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다니엘은 무릎을 꿇었다. 울고 싶어도 더는 울 수 없는 소년 앞에 무릎 꿇었다.
「네, 네. 전, 전 용서받을 가치가…….」
“애시당초, 용서란 건 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걸요.”
「……!」
아, 신께 기도하나이다. 이 차가운 뺨이 피가 흐르는 살로 돌아올 수 있기를, 딱딱한 살갗 대신 부드러운 피부와 근육이 존재하는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당신에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감히 용서를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그 어떠한 잘못도 한 게 없으므로, 응당 그러할 겁니다.”
당장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서로를 안았을 때 각자의 온기라도 전달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다니엘은 그런 기도를 올리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육신이 그의 체온을 받아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저, 저는.」
“지금껏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만을 원망해서, 당신만 탓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전 당신의 사과를 받을 자격이…….」
“당신은 많은 시간을 홀로 고통받아 왔는데…….”
「전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다만 이 온기가 바깥 면에만 머물지 않고 소년의 마음에까지 번져 줄까? 다니엘은 부디 그러길 바라며 눈물 없이 우는 소년을 강하게 안았다.
“아뇨. 당신은 그래도 됩니다.”
「저는, 저 때문에…….」
“악마라는 거대한 악에게도 굴종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온 당신에겐, 그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금속처럼 딱딱한 몸체는 안기가 정말 불편했으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올바른 선택의 증명 같아 후련했다.
“정말로… 잘 견뎌 주셨습니다.”
데워진 소년의 온기는 더 이상 서늘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