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그럴 수만 있다면 (14)
“…생각보다 더 작군요.”
「…그, 죄송해요. 이, 이렇게 변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과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라텔에 들어간 파우스트는 내가 심상 세계에서 봤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 육체를 기준으로 어깨에 정수리가 겨우 닿고, 제복에 가려진 팔다리는 가늘었으며 손은 내 것과 비교하기 무색할 정도로 조그맸다.
얘가 이 몸으로 자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혹시 이게 진짜 모습입니까?”
“영혼은 신체보다 정신적인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더군. 무의식이 정의하고 있는 본질에 따라 형태가 바뀐다던가. 어린 모습인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다.”
더불어 라텔은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물질이니, 자연적으로 심상체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간 게 아닐까.
나는 내 추론을 가볍게 설명했고, 마이스터와 다니엘의 표정이 각기 다르게 변했다. 마이스터는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다니엘은 생각보다 더 어리단 사실에 입술을 깨무는 식이었다.
전체적으로 내가 파우스트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내가 내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일단,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앉는 것이 좋겠군요.”
한참을 고민하던 다니엘이 멀뚱멀뚱 서 있던 파우스트를 소파에 앉혔다. 지금껏 그가 앉아 있던 소파였다.
「어?」
“나는 의자를 가져오지.”
다른 방을 뒤져 보면 스툴 비슷한 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나는 잠깐 방을 나서, 다른 방을 뒤져 보았다. 다행히 건너편 방 문이 열려 있어서 멀리 떠날 필요는 없었다.
“앉아라.”
소파는 부피가 너무 커서 가져오기 좀 그렇고, 화장대 앞에 의자가 하나 있길래 그걸 가져왔다. 한 뼘짜리 등받이가 달려 있고, 세공이 화려하며, 앉는 부분에 꽃무늬 원단을 쓴 의자였다.
은은한 광원 속에서도 유달리 튀는 디자인에 다니엘이 잠깐 머뭇거렸다.
“그, 감사합니다.”
그래. 사실 나도 이건 좀 그런가 싶어서 다른 의자를 찾아봤다. 근데 괜찮다 싶은 건 죄다 들고 오기 좀 과한 부피더라고…….
“신기한데… 육신이 아닌 사물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다니. 심지어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영혼의 형태를 반영한다는 건…….”
「저, 저 손은 좀…….」
“어떤 원리로 소리가 나는 거지? 성대도 구현한 건가? 하지만 구현했데도 재질이 따라 주질 않을 텐데─”
다니엘과 내가 뻘쭘하게 자리 잡는 사이, 마이스터는 소아과 의사처럼 파우스트의 팔을 조물락거렸다. 맥이 잡힐 리 없음에도 맥을 잡아 보고, 뼈와 근육의 형태를 찾아보는 식이었다.
“연구는 나중에 해라.”
흰자위밖에 없는 눈인데도 당황함이 보이잖아. 나는 마이스터의 목 뒤쪽 옷깃을 잡아당겼다. “1분만, 아니 10분만……!” 마이스터가 강제로 소파에 등을 붙이게 됐다.
“…이제 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가 마이스터를 붙잡고 있는 사이, 다니엘은 드디어 파우스트와 제대로 마주했다. 마이스터로 인해 당황했던 소년의 표정도 그제야 담담해졌다.
“아까 그 단검이… 저와 관련이 있다는 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직접적으로 관계된 건 아니에요.」
소파에 앉은 파우스트가 조금은 떨리는, 그러나 끊김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로 눈꺼풀을 내렸다.
「다만 사건이 연결될 뿐이지.」
언젠가 보았던 아득한 피로감이 소복하게 쌓여 올라갔다.
“…연결된다.”
그것을 눈치챈 건 나뿐이 아닌지, 마이스터가 몸부림을 멈추고 다니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회색 머리카락 아래 눈동자가 음울한 빛깔로 끝없이 침잠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서부터 이야길 하면 당신들이 쉽게 이해할까요?」
반면 소년은 최대한 가볍게 속삭이려 들었다. “이해…….” 다니엘이 깍지 꼈던 손을 꿈틀거렸다.
“…괜찮다면, 처음부터도 가능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예. 이… 모든 일의 시작점부터.”
다니엘의 부탁에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처참한 과거를 토로하는 것이 힘겨워서 거절하고 싶은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가늠되지 않았다.
재질로 인해 대리석처럼 희기만 한 눈이 우리를 가만 응시했다. 주로 향하는 쪽은 내쪽이었다.
「그레트헨, 께선 안 들으시는 게.」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것이 있거나 내게 숨기고 싶은 게 있나.”
「그런, 건… 아니긴 한데…….」
그런 게 없다고? 그럼 왜 굳이 듣지 말란 권유를……? 나는 새삼 주저하는 소년을 이해할 수 없어, 잠시 그 이유를 고민했다. 딱히 짐작 가는 건 없었다.
“듣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같이 듣겠다.”
나중에 일이 터져서 따로 시간 내야 하거나 하는 것보단 그냥 기회 있을 때 들어 두는 게 훨 낫지. 파우스트 입장에서도 자신의 과거를 발설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알았어요.」
그렇게 듣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니, 아이가 결국 수락했다.
「시작은 아버지가 온 줄 알고 달려 나간 여동생이었어요…….」
전말의 개막이었다.
* * *
악몽이 끝나기를 바랐으나, 소년은 결국 악몽에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서 소년이 하나의 사실─악마가 몸에 들어왔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반발이 심하네.]
“허억, 헉.”
깨어난 이래 멈추지 않고 숲을 걸었다. 이것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소년이 배운 건 성벽을 끼고 악마를 상대하는 법이지, 숲에서 도구 없이 길을 찾는 법은 아니었다.
“흐윽.”
또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모조리 죽은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운 적이 없다. 악마가 몸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여 소년은 눈물을 꺽꺽 삼켜 가며 그저 움직였다. 해가 뜨거나 지는 방향을 피해 아마 남쪽일 곳으로, 아마도 남쪽일 곳으로.
[졸리니? 졸리면 자도 돼. 이번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정말이야.]
다만 생전 처음 겪는 환경에서 소년은 새로운 것을 참으로 많이 학습했다.
“우웨에엑.”
[저런, 독이 들어 있었나 보네.]
“아, 아…….”
[죽진 않을 거야. 그렇지만 조금 힘들어 보이네. 잠이라도 자는 건 어떨까?]
“으우… 엄마아…….”
예컨대, 숲에는 생각보다 먹을 것이 많고, 생각보다 먹어도 되는 것이 적다는 것.
크르르르.
“아, 아……!”
[이런… 어깨가 베였구나. 그 상태로 저 표범을 상대할 수는 있겠니? 정 못 하겠다면 내가 잡아 줄 수 있는데.]
물가에는 먹잇감을 노리고 모여드는 맹수들이 꽤 많고, 물가가 아닌 곳에도 시시때때로 존재한다는 것.
“흐악, 흐아악!”
[벌레들 때문에 괴롭나 보네. 내가 다 태워 줄까? 태워 주게 해 줄래?]
나무 틈 사이에서 자다 보면 독충에게 물릴 때도 있다는 것.
“잠깐, 여기에 아이가 쓰러져 있는데─”
[아, 이제야 쓰러졌네.]
“응? 일어났─ 으아악! 불이, 불이!!”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눈감거나 도망치는 순간,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아, 더 자도 돼. 제발 더 자 줄래?]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한때는 사람이었던, 하나 이제는 약간의 재뿐이 남지 않게 된 존재 앞에서 소년은 엉엉 울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너무 졸렸어. 조금만이라도 푹 자 보고 싶었어… 아, 엄마 아빠, 어디 있어요. 나 정말 힘든데… 너무 괴로운데…….
제발 나 좀 구하러 와 주세요…….
[오, 아가.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구하러 올 수 없다.
무릇, 죽은 사람은 현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니 포기해. 넌 영원히 나와 함께하게 될 거야.]
그것을 온전히 깨달은 날, 소년은 그의 부모님을, 그의 형제들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소망도 결국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는 법이었다.
* * *
「사람과 마주치면 위험하니까, 가능한 숲 안쪽을 전전했어요. 쓰러져서 악마에게 주도권을 내주더라도, 숲 안은 그나마 피해가 덜했거든요. 사람이랑 마주칠 일 자체가 적었으니까.」
“…그랬습니까.”
「사실, 어딜 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떠올리기도 했어요. 신전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족들이 너무 쉽게 당한 걸 봐서 그런가. 그 무엇도 이것을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심리적 공포로 인한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이 제대로 된 사고를 이어 나가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이지. 도리어 그 정도 판단이라도 하며 움직인 게 놀라운데… 아무튼, 그래서?”
「…중간에, 주 단위로 정신을 잃은 적이 있어요.」
* * *
온갖 고통을 마취제 없이 인내하고, 제대로 먹거나 자지 못한 채 얼마간을 버텼나.
반쯤 정신을 놓았기에 시간을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하나 해가 지고 뜨는 걸 못해도 스무 번은 넘게 본 듯하니, 그렇게 짧은 시간 또한 아니었으리라.
크르르르.
“아…….”
그렇지만 그렇게 견디는 것도 결국 한계에 달하는 시기가 왔다.
“…엄마.”
[…아. 드디어?]
“아빠…….”
기존의 상처는 곪고, 잘못된 식사로 배앓이까지 하던 날. 맹수의 습격까지 받으며 소년은 기어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평상시에는 기절하더라도 기묘한 불안감과 함께 얼마 안 가 깨어났는데, 그렇게 몸을 장악하려는 기운을 떨쳐 내고 다시 육체의 지배권을 가져왔는데.
그땐 그것조차 못 할 만큼 깊게 혼절하고 만 것이다.
“…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들었던 상태였기에 소년은 흐른 시간을 쉽사리 인지하진 못했다. 그러나 한결 상쾌해진 정신과 명징해진 이성으로 보건대, 그렇게 짧은 시간일 것 같지도 않았다.
소년은 자신의 상태로 하여금 그런 가설을 도출했다.
[더 자도 돼.]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혹적인 제안을 해 왔다.
[편하지? 아늑하지? 더 자면 계속 그것들을 누릴 수 있어.]
솔직히 말하면,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오랜만에 누린 잠은 실로 달콤하고 안온했으니, 깨어났을 때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곳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꺼져!”
하지만 소년은 그것에 취해 다시 잠드는 대신, 영혼을 옥죄는 끔찍한 기운으로부터 저항했다.
“꺼져, 꺼지라고!”
[애송이가……! 저항하지 마!]
“이건 내 몸이야!”
이미 몸을 장악하고 만 것에게서 도로 빼앗아 오는 건 보통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나 그 고역 속에서도 소년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살라고 했어. 어머니가 내게 살라고 하셨다고!!”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으렴.』 그들의 희생은 소년이 이곳에 멈춰 서는 결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잉걸불의 자식은 패배하지 않아!!”
소년은 기어이 악마에게서 다시 주도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아.” 높은 탑 지붕에 걸린 달이 보였다.
* * *
「눈떠 보니 도시 안이더군요. 심지어 뒤편에선 사람들이 저를 막 발견하고 다가오는 중이었고요.」
“악마가 어떻게 도시 안으로…….”
“…그것에겐 커다란 페널티를 떠안는 대신, 일시적으로 마기를 숨기는 능력이 있다. 아마 그것을 쓴 듯하군.”
“그런…….”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겁이 났어요. 귓가에는 악마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고, 신체 내부에 억눌려 있던 마기는 악마의 통제가 사라지는 순간 멋대로 터져나와서…….」
“…통제되지 않은 기운이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면 몸에 이상이 생겼을 텐데? 심지어 그게 마기면…….”
「아… 그때 피부가 터지고 코나 눈에서 출혈이 일긴 했어요. 그게 그것 때문이었나 봐요.」
“아하.”
“아니, 그걸 무슨 생채기 난 것처럼 말을… 마이스터 당신은 또 왜 아하입니까.”
“뭐. 그럼 과거의 일을 두고 이제와서 걱정해 주리?”
“인성 참…….”
“넌 옆에서 왜 지랄이야.”
「그… 싸우지들 마시고요…….」
* * *
소년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악마에게 또 몸을 뺏기면, 그땐 저 사람들이 다치겠지.
“아, 악마!”
소년은 다가오는 사람 중 일부가 칼을 뽑는 걸 보며 표정을 헝클어트렸다. 도망가야 해. 소년의 발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기다!”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곳곳에서 피어오른 횃불이 더 커졌을 때, 소년은 뒤돌아 도망쳤다. 모르는 길, 모르는 도시였지만 망설이는 것은 애초에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소년은 횃불이 없는 곳으로, 동시에 최대한 외진 곳으로 달렸다.
“아, 잠깐. 잠깐만─”
다행스럽게도, 모인 사람들을 따돌리는 행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역겨운 악마가 이 몸에 들어온 후 소년의 신체는 일반적인 경지를 벗어난 까닭이다.
가족들을 잃고 악마와 동거까지 하게 된 대가치고는 사소하나, 그래도 당장의 고난을 넘기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소년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마기다. 마기가 느껴져!”
“악마가 도시에 들어왔다!”
“안 돼…….”
이제 남은 문제는 사제들이었다.
소년은 신성력으로 자신을 추적하는 이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도시를, 도시를 나가야 해.’
그렇지만 어떻게? 소년은 숲에서 길을 찾는 방법이나,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 따윈 몰랐지만 도시에서 집단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았다.
그 집단이 단순한 뒷골목 깡패들이 아니라 훈련된 병사와 사제들이라면 고된 것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아무렴,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추살해 낸 범죄자가 몇이고 악마가 몇인데 그걸 설마 모르겠나? 자격이 안 되어 어깨너머로 지켜본 것이 다였대도 설마 그것의 난도 하나 눈치 못 채겠어.
‘생각해, 생각해야 해.’
이대로는 잡힐 수밖에 없다. 소년은 그것을 자각하는 즉시 최대한 사고했다.
『자, 파샤. 겉보기엔 절대 안 뚫릴 것 같지? 아니야. 철저하게 대비하고 대비해도, 반드시 틈은 생겨. 그리고 그 틈을 찾는 게 우리의 일이고.』
『얀마, 경계가 반드시 뚫린다니. 그게 소성주 앞에서 할 말이냐?』
『뭐 어때요, 티야. 이건 당신도 동의하는 바잖아요?』
문득, 소년은 자신의 친형과 피는 이어지지 않았을지언정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어린 그를 데리고 성의 개구멍을 찾던 도중 떠든 대화였다.
『…뭐, 맞는 말이긴 해. 특히 우리 도시는 보석이 많이 나잖아. 이렇게 귀한 특산물이 있는 도시는 규율의 엄격함과 상관없이 반드시 밀수 루트가 생긴단 말이지.』
『거봐요. 파샤, 너도 들었지? 그러니까 순찰을 돌 땐 그걸 고려해서…….』
그들은 후일 기사가 되겠다는 소년을 위하여 종종 그들의 순찰을 경험시켜 주었고, 그중에는 성벽의 빈틈을 찾는 방법도 있었다.
‘…찾아야 해.’
물론 생전 처음 보는 도시와 소년이 평생 살아온 도시가 온전히 같지는 않을 터였다. 하나 매달릴 수 있는 곳이 얼마 없다.
소년은 그때의 대화에 의존하여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마기가 성벽 밖으로 나갔다!”
“잡아, 잡아!”
이런 처참한 불운 속에서도, 악운만큼은 소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소년은 그렇게 그 도시에서 도망쳤다. “악마를 놓쳤어……!” 다친 곳은 많지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는 부서진 것처럼 괴로웠다.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 * *
「그 뒤로 다시 숲을 전전했어요. 사람과의 접촉은 최대한 줄여 가며… 어떻게든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했죠. 결과적으론 잘 안 됐지만…….」
“혹시… 그다음 일이…….”
「…아니요. 그건 조금 남았어요. 그 일은… 그 사건은 제가 마음대로 죽는 것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벌어졌으니까.」
“…그 무슨.”
「그 도시를 떠난 후에도, 제게 휘말려 죽은 사람들은 꾸준히 나왔어요. 제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을 땐 사람과 접촉해도 괜찮았지만… 조금만 흔들려도 악마가 튀어나왔으니까요. 그렇게 아마… 다섯 정도가 살해당한 것 같아요.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고요. 악마의 불꽃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고작해야 한 줌의 잿가루밖에 흔적이 남지 않거든요. 그래서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어요.」
“뼈는 어지간한 불꽃에는 안 타는데 말이지.”
「그러니까요. 참 쓸데없이 강한 악마죠… 정말 쓸데없이…….」
“…….”
「아무튼… 그렇게 휘말려 죽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
* * *
소년은 세찬 강물 앞에서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피해 입혀 가며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자. 죽음으로써 이 악마로부터 도망치자.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하지만 당신들도 제가 이렇게까지 살아남는 걸 바라진 않았을 테니까.
“사랑해요.”
소년은 홀로 남겨졌을 어떤 남청색을 떠올렸다. 미안해. 닿지 않을 사과와 함께 소년의 발이 바로 앞 허공을 밟았다.
보고 싶어.
소년의 몸이 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