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그럴 수만 있다면 (13)
“술 안 마실 거면 담배라도 주랴?”
“담배도 피우십니까?”
안 좋은 거라면 전부 하는 마이스터의 인생에 다니엘이 깜짝 놀랐을까. 나는 그의 제안에 잠깐 치열한 갈등을 했다.
“…가지고 있나?”
“어.”
안 그래도 요 며칠 담배 말렸는데… 아니, 그치만 어떻게 끊은 담배를.
“…내 몸이 아니라서 함부로 피우기가 그렇군.”
나는 굉장히 고민한 끝에, 내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아무렴, 내 것도 아닌 남의 몸을 함부로 쓰긴 그랬다. 담배가 백해무익한 존재이기에 더더욱.
「저, 전 괜찮은데…….」
뭐야, 깨 있었나. 하긴 나흘이면 슬슬 깰 때도 됐겠지.
나는 눈치 보는 꼬맹이를 두고 미련을 시원하게 접었다. 역시 애 앞에서 담배 피울 수는 없다.
“난데없이 폭풍 안으로 끌어들인 녀석인데, 설마 이런 걸로 뭐라 하겠냐?”
“딱히 뭐라 하진 않겠지만, 도의적으로 할 짓도 아니라 본다.”
“하여간 쓸데없이 피곤하게 산다니까.”
“쓸데없이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때 다니엘이 나를 지원사격 해 주었다. 혼자 술을 따라 마시던 마이스터의 눈동자가 우리 둘을 쓱쓱 훑고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신 없이도 수사원에 들어갈 새끼들…….”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호구 새끼란 뜻이지만 다르게 보면 청빈하고 정결하게 살고 있단 뜻도 되니까.
해서 다니엘도 ‘신이 없다’라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집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청렴하게 살고 있다는 뒷말에 집중해야 하는 건지 갈팡질팡했다. 뭐, 기분 좋게 대화하자고 만든 자리이니만큼 결국 뒤쪽에 수긍하고 넘기긴 했다.
“아, 맞다. 이거 받아 가라.”
여튼간에, 우리에게 질린 표정이던 마이스터가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꾸러미였다.
“이건…….”
나는 겉을 둘러싼 가죽을 차차 풀었다. 그러자 손수건이니 머리쓰개니, 별의별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전부 내게 도움받았던 자들이 내게 준 것이었고, 도망칠 당시의 내가 마이스터에게 떠넘겼던 추억들이었다.
“아직도 가지고 있었군.”
“내 물건이라면 모를까,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릴 순 없잖아?”
“…순 잡동사니투성이인데도?”
“글쎄다…….”
나는 그 사이에서 녹색기가 도는 흰 실팔찌도 발견했다.
“확실히 전부 여행에 불필요한 잡동사니긴 했지. 근데 그걸 모를 네가 아님에도 그것에게 계속 공간을 할당했다는 건, 결국 그만큼의 공간을 낭비할 만한 감정적 가치가 그것들에게 있었단 소리 아냐?”
한때 사라졌다 생각했던, 그러나 기어이 내게 돌아온 것들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것들을 가만 보다가, 하나하나 더듬어 가며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건 타타라에서 받은 거고, 이건 해적을 나포할 당시 구함받았다던 인질과 모험가가 준 거고, 또 이건 자크라티에서 받은…….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적당히 쓸 곳이 생긴다 싶으면 정리하고. 그렇게 줄이고 줄였는데도 남은 것이 이렇게나 많다.
나는 넣어도 넣어도 줄지 않는 듯한 잡동사니에 공현히 실팔찌를 매만졌다. 남을 구하고 받은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정말 오묘한 기분이었다.
달그락.
그러다 단검 하나가 내 무릎 아래서 미끄러지려 들었다. 탁. 내가 잡기 전에 다니엘이 먼저 손을 뻗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다.”
나는 그것을 받아, 제대로 쥐었다. 날이 엉망인 걸 보니 내가 무기로 쓰던 단검은 아닌 것 같고.
이건 어디서 받았던 거더라.
「아…….」
P. B.
새겨진 이니셜이 눈에 들어온 찰나, 아이가 탄식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너, 이거 아는 거지.’
이니셜이 새겨진 단검. 처음엔 조금 헷갈렸으나, 아이의 탄식을 듣고나니 알겠다. 이거 그 망가진 오두막에서 발견한 거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추억을 회상하는 표정이 아니라, 바짝 굳힌 안색으로 단검을 쓸어내리니 뭔가 이상했나 보다. 두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나와 관련된 거야?’
나는 그들에게 손을 잠깐 들어 보인 후, 파우스트를 재촉해 보았다. 「…아니요.」 주저하던 아이가 어렵사리 답을 내놓았다.
「당신께서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물건이에요.」
‘…당장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신경 쓸 물건은 아니지만, 아이가 탄식할 만한 물건.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내가 빙의하기 전, 아이가 벌였거나 겪은 사건에 연루된 물건이다.
‘다만, 이것이 어떤 문제의 시발점이 될 것 같다면… 짧게라도 나중에 설명해 줘야 해. 알았어?’
이것이 당장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설명은 급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터지면 그때야 화가 좀 나겠지만.
그것을 감안하여 유예 시간을 주니,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느릿하게 뱉었다.
「아… 니요. 지금, 지금 말할게요.」
‘억지로 말 안 해도 돼.’
「아뇨. 지금 말해야 해요.」
떨림을 벗고 조금 강경해졌던 목소리가 잠깐 침묵했다. 「이건, 저분과도 연결점이 있는 물건이에요.」 저분.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졌다.
“…왜 그러십니까.”
내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진중해진 다니엘이 보였다. 나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게 됐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전해도 될까요?」
‘…무슨 말이야.’
「저번… 귄터 형과 직접 대화한 것처럼요.」
그거 한번 했다고 수명 한 달 날아갔다는 소리를 들은 상황이다. 그걸 또 하겠다는 말에 나는 들고 있던 단검을 부술 뻔했다.
‘내가 말 전해 줄 수 있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통하는 것과 제가 직접 하는 사죄는 다르잖아요. 전… 전 저분께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어요. 그때 이후로 줄곧… 줄곧 생각했던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제법 고집이 있었다. 강단도 쓸데없이 있었다.
‘안 돼.’
「제발요.」
‘내가 전해 줄게.’
「이건 제가 직접 전하고 싶어요.」
난 아이가 최대한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도망칠 거라 생각했건만… 자기 수명만 날리면 되는 문제에서 아이는 정말 과감했다. 나한테 진실을 전하기까지 일 년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수준의 용기였다.
정말이지 도가 넘칠 정도로 감연한 기개였다. 이런 거엔 좀 뒤로 빠져 있어도 될 텐데.
“…진짜 문제 생긴 거 아니지?”
“그, 혹시 악마가……?”
“…악마는 아니고, 몸의 원래 주인이 잠깐 말을 걸어왔다.”
“그럼…….”
“이 물건이… 그대와 조금 관련이 있다는군.”
내 말에 다니엘이 들고 있던 안주거리를 떨어트렸다.
“…저와, 말입니까.”
“해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와… 그때의 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사죄를 직접 하고 싶다고 내게 간청해 왔다.”
“엥. 뭐야. 걔도 너랑 교대되냐?”
“…그렇습니까.”
다니엘의 표정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마이스터는 언제나처럼 태평하게 안주를 씹고 술을 마셨지만.
“다만, 문제가 있다.”
“……?”
“먼저 내가 그 간청을 들어줬을 때, 내가 받는 불이익은 없다. 악마가 문제 되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대신 몸 원주인의 수명이 깎인다. 정확한 원리를 모르기에 확신할 수는 없으나… 두 시간에 대략 한 달분 정도.”
“오.”
“…한 달.”
더 복잡해졌다. 다니엘이 눈을 찡그리듯 구겼다가 주먹을 몇 번 쥐락펴락했다가, 짙은 숨을 뱉었다. 차마 말 붙이기 힘든 표정이었다.
“해서 나는 내가 말을 전달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은데… 그대가 바란다면 교대해 주겠다. 이건 그대와 이 존재 사이의 일이니까. 어떻게 하길 바라나.”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나는 그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몇 마디 덧붙였다. 기어이 다니엘의 손이 마이스터의 술잔을 뺏어 들었다.
벌컥벌컥벌컥, 쾅.
술잔의 아랫면이 소파의 팔걸이와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졸지에 술을 빼앗긴 마이스터가 흘긴 눈을 했으나 그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남의 수명 깎아 가며 듣는 건 좀 그렇군요.”
“그런가.”
“…관련도 없는 당신의 입을 빌리는 것 역시 꺼림칙하긴 매한가지입니다. 당신이 죄가 없다는 건 알지만…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감정을 주체할 자신이 없는지라.”
“이해한다.”
“그러니 그냥… 나중에. 당신이 돌아가고 그가 몸을 되찾았을 때. 그때 이야기 듣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
술 한 잔을 비운 다니엘의 표정은 그래도 아까보단 후련해져 있다.
「그, 그렇지만…….」
‘눈치 보지 마. 이 정도 배려는 받아들여도 돼. 사실… 네가 원해서 저지른 죄도 아닐 거잖아. 네가 그에게 미안해할 수는 있지만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어.’
나 또한 끼인 상태에서 벗어나, 한결 편한 마음으로 안줏거리를 들어 올렸다. 헤비한 건 별로 먹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 택한 건 말린 생선포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내가 그에게 속죄하라고 했던 건 그냥… 네 죄책감을 정리하고 상황 정리해서 말할 용기를 되찾으라는 의미였어. 그 모든 일이 너의 탓이라고 책망한 게 아니라.’
「…….」
‘오해할 수밖에 없는 단어를 고른 건 내 잘못이야. 미안해. 하지만 파우스트, 진심으로 말하는데… 우리가 겪은 모든 불행은 너의 죄가 아니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분노가 배라먹을 새끼인 거지, 네 잘못은 거의 없어.’
아, 정확히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를 모르니 확고하게 위안 주기가 좀 어렵다. 나는 내가 아는 다니엘의 사정을 떠올렸다.
내가 그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은 ‘말이 오락가락하고 검은 불을 다루는 악마에게 부모님을 잃었다’뿐이다. 오락가락이라고 한 시점에서 분노랑 파우스트가 주도권 다툼 하다가 그의 부모님이 휘말려 돌아가셨구나- 하고 추정한 거고.
물론 파우스트에게 다니엘의 부모를 고의로 살해할 이유가 없고, 그럴 성향도 못 된다. 하니 모든 원흉은 역시 분노일 거다.
‘그러니까 파우스트, 너도 결국 피해자 중 하나일 뿐이니까. 저 악마가 모든 일의 원흉이고 넌 그저 휘말린 사람 한 명에 불과한 거니까. 우리에게 사과하겠답시고 너무 저자세로 나오지 마. 그러지 않아도 돼. 우리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팠을 거잖아.’
나는 그 가설을 기반으로 아이를 조용조용 다독였다. 이게 맞는 일인지는 글쎄. 내가 전직 심리 상담사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그저 긍정적 효과를 가져와 주길 바랄 뿐이지.
[흐응. 그렇구나아… 근데 애송아, 그거 아니? 라텔도 잠깐 정도는 영혼을 담을 수 있다는 거?]
근데 시발, 이 미친 분노 새끼가.
콰득.
내가 순간적으로 빡쳐서 생선포를 가루로 만들었을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또 사기 치는 거 같은데.」
[이건 순전히 호의에서 비롯된 말인데.]
「못 미더워.」
[…그레첸 빡치라고 꺼낸 말이긴 해. 그렇지만 라텔이 잠깐 정도 영혼을 담을 수 있단 건 진짜야. 이름 걸고 맹세할까?]
「부작용도 없다고 같이 맹세하면.」
[네가 라텔로 옮겨 갈 때 일시적으로 압력을 받게 될 테니, 그때 좀 수명 새는 것 빼곤 정말 없어. 여기서 새는 수명의 수준은 네가 영혼체로 바깥에 나갈 때와 동일하고. 아! 라텔에 3시간 이상 머물면 정상적이지 않은 육체로 인해 영혼이 계속 튕겨 나가려 하는데, 이건 부작용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부작용이 아니라 주의점에 가까우니까. 하니 이 이외의 ‘부작용’은 없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 자, 봤지?]
「으으으음…….」
[아, 왜! 이름도 걸었잖아!]
신임을 못 받는 건 네 평소 행적을 돌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와중에 나 빡치라고 꺼낸 말이란 건 또 뭐야. 이 씨… 배라먹을 새끼 진짜.
“이번엔 뭐야.”
“뭡니까.”
“…악마 새끼가 9년 뒤에야 지옥으로 꺼진다니 너무 괴롭군.”
“뭐라 지껄였길래.”
“아이에게 안 좋은 걸 가르쳤다.”
“…성수라도 뿌려 드릴까요.”
“…악마 새끼만 성수를 맞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나까지 타격받는 게 문제네. 젠장. 나와 다니엘이 동시에 안타까워했다.
「…해도 될까요?」
‘…이것도 수명 샌다잖아.’
「그, 그렇게 많이는 안 새요. 거기에 라텔로 옮겨갈 때만 샌다니까 많이 새 봤자 분 단위밖에 안 될 텐데… 진짠데…….」
아니, 수명 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곤 생각 안 하는 거니. 나는 이마를 짚었다.
「지, 진짜 빨리 말하고 들어갈게요. 제발요…….」
‘…잠깐, 쟤랑 상담 좀 하고.’
한 달분 수명이 샌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지만, 분 단위 소모는 뭐라 막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안 막기도 좀 그렇고.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니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다니엘도 한 달 단위에서 분 단위로 줄어든 소모량에 굉장히 갈등하는 눈치더니 기어이 로사리오까지 꺼내 들었다.
“신이시여, 저의 삿된 마음을…….”
분 단위로 줄어들자마자 고민된다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마이스터가 ‘그 정도면 그냥 들어라, 좀.’이란 얼굴로 우리를 꼬라보았다.
“한 달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분 단윈데 그냥 허락해 줘라.”
“그, 그렇지만 수명인데…….”
“걔도 9년이나 사과 못 하고 있으면 불편할 텐데, 그냥 듣지? 나 같으면 9년 답답하게 묵힐 바에야 수명 10분 날리고 고백한다.”
“그, 그런…….”
“그걸로 쌓인 스트레스가 수명 더 깎아 먹을 거라고, 이 답답이 새끼들아.”
하나 마이스터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여 다니엘과 나는 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오늘 한 번만 허용해 주고 다신 허용해 주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하시죠.”
“그거 괜찮군.”
내가 봐 온 파우스트라면 수명 소모량이 적으니 남발해도 된다 여길 가능성이 크다. 하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랬다간 얘 수명이 엄청나게 깎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고려하여 건 제약을 건 조건부 타협을 제안했다.
「네에…….」
파우스트가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제약 안 걸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좋아. 들어와라.”
나는 나흘 내내 등불걸이로 써먹었던 라텔을 회수하여 바닥에 내려 두었다. 뿅 하고 내 손에서 튀어나온 파우스트의 영혼이 도도도 점프하여 라텔 속으로 들어갔다.
꿈틀. 찹살떡 형태의 라텔의 표면이 요동치더니 곧 부풀어 오르며 하나의 형태를 띠었다.
「…됐나요?」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듯한 소년이 눈동자 없는 눈을 껌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