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그럴 수만 있다면 (11)
그림을 세 장 그렸다.
하나엔 별생각 없는 낙서를, 또 하나엔 보고 싶은 얼굴들을, 또 하나엔…….
“…이래도 되나.”
북북북.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는 풍경 위로 선을 몇 번이고 그었다. 아크메이지 말대로 푹 쉬고 싶은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앞으로 기울었던 몸이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푹신. 값비싼 펠트소파가 내 몸을 단단히 지탱했다. 불편하면서도 편한 게 참 묘한 느낌이었다.
“…책이라도 읽을까.”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비척비척 일어나 그림 말고 다른 것을 찾았다. 방의 주인이 읽던 책이 있어서 사람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것이 검술 서적임을 확인한 뒤, 재미 삼아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나쁘진 않았으나 사고가 중간에 새는 건 그림 그리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방에 있던 책을 전부 뒤적인 끝에 독서도 때려치웠다. 검술 서적이고 귀족 족보고 동화고 무엇 하나 몰입되는 게 없었다.
“…이상해.”
대신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만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발각될 수 있다는 불안함도, 위장 스킬로 인한 제한 시간이 가져다 주는 초조함도, 사제들이 지나갈 때마다 들던 조바심도 없었기에 더욱 찝찝했다.
거의 처음 주어지다시피 한 온전한 평화는 너무 낯설고 기묘했다. 적응되지 않는다.
“정말 이래도 되나……?”
하물며 밖에선 원치 않아도 들려오는 비명이, 우는 소리가 너무 많다.
나는 그 괴리감에 더욱 속이 언짢아졌다. 나는 이렇게 평온한 세계에 있는데, 이 벽 바깥에는 대악마가 남기고 간 절규와 비탄이 가득하다.
딸랑.
결국 머뭇거리다가 종을 흔들었다. 요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것도 아닐진대 얼마 안 가 노크 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그대의 주인께 전할 말이 있다.”
아크메이지는 쉬라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애당초 타인을 돕는 게 왜 나를 깎는 일이란 말인가? 저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나 자신을 잃는 일일 텐데.
“하니 지금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안내를 부탁할 수 있겠나?”
“…잠시간 기다려 주시지요. 소성주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과하게 돕지는 않을 거다. 나는 소소하게 도울 만한 일이 뭐 있을지 고민하며 자리에서 기다렸다.
[호구 새끼…….]
‘응, 등신.’
분노의 말을 맞받아치고 있자니, 곧 불균형한 발소리가 곧 귀에 박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각, 쓰윽, 또각, 쓰윽. 한 걸음 걷고 발을 슬슬 끄는 걸 반복하는 발소리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나?”
허락을 구하는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상관없다.” 나는 답변을 하던 도중 그 정체를 깨달았다.
잠긴 목소리랑 한쪽 다리를 저는 발소리. 두 개 다 소성주의 특징이었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따르는 사람 없이 혼자 찾아온 소성주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내가 너무 커서 아래쪽에 위치한 시선이 나를 잠깐 동안 직시했다.
“파샤가 아니군.”
아, 파우스트가 불렀다고 생각한 건가? 나는 그의 중얼거림에 눌러쓴 후드를 매만졌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그쪽은 자고 있다.”
“…그런가.”
하여간 방에 찾아온 손님을, 심지어 다리까지 다친 사람을 오래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소성주에게 의자를 가리켜 보인 후, 그를 대신하여 문을 닫았다.
달칵. 잠긴 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척은 달리 없다.
“제게 하실 말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소성주씩이나 돼서 존대? 나는 소성주의 말투를 두고 의아함을 느꼈으나 굳이 문제를 제기하진 않았다. 몸뚱이는 아는 애인데 속 알맹이가 남이면 거리감이 심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깊이 생각하기엔 좀 귀찮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울 의향이 있다. 그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 원래 이렇게 건조한 어투로 말하던가?
“…도울 일이 없나?”
“없진 않지요, 아무래도.”
입장이 변했다곤 하나, 첫인상과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나는 그만큼 지친 건가 하며 떨떠름하게 그를 살폈다. 피곤해 보이긴 하는데 그게 태도 변환의 모든 원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쉬시지요.”
“…난 도와도 괜찮다.”
그사이, 내가 그를 살피는 것처럼 그 또한 나를 살폈다. 그늘이 진 탓인지 머리 색보다 더 짙게 느껴지는 눈이 가늘어졌다.
“안 됩니다.”
“어째서?”
“파샤가 부탁했으니까요.”
“…그 애가?”
“예.”
그 시선을 뭐라 분류할 수 있을까. 최소한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정확히 어떤 부탁을 했지.”
“9년간 당신을 지지해 달라고 했습니다. 편의를 봐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고도 했죠.”
“그걸 그대는 들어줄 생각이고?”
“당연하죠. 그 애가 부탁했는걸요.”
나는 그의 깊은 감정에 손을 담그는 대신 조용히 반보 물러났다. 쏴아아. 하나 농밀한 감정은 최대한 물러났음에도 끝의 끝까지 몰려와 내 발끝을 희미하게 적시고 만다.
“…증거도 없으니만큼 믿기 힘든 일일 텐데, 그대는 그 아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증거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거니와… 전 그 아이의 형이니까요.”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 앞에서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질투심이 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론 그저 안심하는 마음만이 들었다.
“제가 그 아이를 믿지 않으면, 누가 그 아이를 믿어 주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파우스트에게도 돌아갈 곳은 있었다.
“…그거 다행이군.”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소성주가 나를 믿어 준다거나, 그리함으로써 뒷배가 생겼다거나 하는 안도감은 절대 아니었다.
“정말로 다행이야.”
굳이 따지자면… 이건 책임에서 풀려났을 때의 후련함과 가장 닮았다. 나도 힘든 와중에 강제로 떠맡게 된 아이를 드디어 다른 곳에 보낼 수 있게 됐다는, 진짜 보호자를 찾아 돌려보낸다는 그런 유형의 해방감 말이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대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거다.”
“…제가?”
“그래.”
내가 모든 걸 해내지 않아도 나 대신 해 줄 사람이 생겼다는 건 어찌나 개운한 일인지.
“아무래도 그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자신은 내게 없으니까.”
나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마음의 짐 하나를 내려 두었다. 내가 떠난 후 남겨질 파우스트가 하릴없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속이 확 풀렸다.
“아니…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럴 자신도 없고, 그럴 의향도 없다에 가깝겠지. 그 애를 마냥 위하기엔 나도 그 아이에게 쌓인 감정이 많거든.”
“…그 아이가 당신을 끌어들였다는 건 들었습니다.”
“그래. 하면 긴 말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그 애를 당장 유기한단 소리는 아니다. 그건 도리가 아니니까.
다만… 그냥 대안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까보다 나아진 마음으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죄송합니다.”
“……?”
한데 느닷없이 일어선 상대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찰나의 기쁨이 바로 당혹감에 젖었다.
“왜 그대가…….”
“저는 그 애의 가족이고, 보호자니까요.”
그러나 소성주는 쉽게 무릎을 펴지 않았다. 다친 상처가 과도한 행위에 터지기라도 했는지, 바지에 살짝 얼룩이 졌다. 안쪽에서부터 물드는 얼룩이었다.
“상처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다급하게 일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그 애의 잘못은 제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가능한 선에서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
그러지 못한 건 속사포로 쏟아지는 말의 절절함 때문이었다.
뻗어 가던 손이 멈칫 허공을 맴돌고, 소성주가 빠르게 나머지 말을 뱉었다.
“용서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아이에게 욕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게 화내고 욕해도 되니까, 그 아이에게만은 참아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는 몸이 무너지지 않게 땅을 짚느라 구부러진, 그리하여 좁게 보이는 어깨를 힐끗 보았다. 이상하게 그 어깨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 애가 잘못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입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그 점을 봐서라도 선처해 주십시오. 그 아이에게 욕하고 화내지만 말아 주십시오. 풀지 못한 원망은 제가 감당할 테니, 제발.”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일어나라.”
그렇지만 지금 비는 기도는 결코 절박하고 괴로운 마음에서 잉태된 게 아니니. 그리움이 만든 간절함은 분명 있지만, 당신들이 없어서 숨을 못 쉬겠다는 고통스러움은 없다.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서 당신들의 품을 찾아 헤매야 하는 갈급도 없다.
“상처가 덧나면 파우스트가 슬퍼할 거다. 일어나라.”
“…당신.”
왜냐면, 미안하다고, 화내도 된다고 하는 사람이 이제 생겼으니까. 가진 서운함을 모조리 적어 전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먹은 식사가 정말로 훌륭했으니까.
“그러기 위해 선 자리다.”
나는 허공을 맴돌던 손에 힘을 제대로 주고 뻗었다. 망설이며 끈 시간이 무색하게, 소성주가 단번에 끌어 올려졌다.
“다만 소성주. 나는 그 아이에게 기회를 베풀 생각이나, 그 아이가 그것을 잡을 거란 보장은 없다.”
물론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진 않는다. 나는 소성주를 의자에 앉힌 후, 나도 다시 소파에 기댔다. “그 말씀은……?” 내 말뜻을 이해한 소성주가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그 애는 자기 자신을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해. 그 생각이 탄생하는 데 나 또한 일조한 게 있을 테니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묵은 감정 일부를 해소한, 조금은 냉정해진 머리로 돌아보니 깨달은 게 있다.
지난 며칠간, 내가 유난히 아이를 탓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는 것. 심지어 거기에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는 것. 이 두 개였다.
“…제가, 어떻게, 해야.”
“글쎄.”
기실 내가 아이만 탓한 건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다. 아이가 만만해서 화낸 게 아니라, 반대로 분노에게 화낼 가치조차 못 느껴서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그쪽을 버린 쪽에 가까우니까. 내가 화내면 그쪽에게만 이득이라는 것도 제법 한몫했고.
하나 그 복잡한 사정은 아이의 시점에서 자신만 책망받는다 느껴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니 그 부분은 분명 내 잘못이다.
“일단, 난 그 애에게 살아 보라고 꾸준히 말해 줄 예정이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결국 악마고, 파우스트는 그것에게 휘말려 죄를 범했을 뿐, 또 한 명의 피해자인 건 맞으니까.”
그러니 그 지점만큼은 바로잡아야겠지. [그레트헨, 그대는 항상 나만─] 나는 욍알거리는 파리를 외면한 채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게 그 아이의 마음을 바꿀지 아닐지는 확신할 수 없어. 하므로 그 뒤는 그대가 어떻게든 해야 할 거다. 그 아이가 살고 싶게 만들든, 죽으면 안 될 의미를 쥐여 주든… 그건 그대의 몫이라는 거다.”
내가 파우스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거기에 난 9년 뒤 돌아갈 예정이니, 내가 떠난 후엔 파우스트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나는 그것을 소성주에게 확실히 했다. 멍청한 사람 같진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각설하고, 이것으로 보호자와의 상담은 진짜 끝났다.
“그래서, 정말 도와줄 일은 없나?”
나는 어쩌다 보니 상담으로 흘러갔던 대화의 주제를 본래 궤도로 돌려보냈다. “예.” 아쉽게도 상대는 여전히 철벽이었다.
“당신을 부려 먹을 만큼 몰염치하진 않거니와, 알면 파샤가 절 미워할 텐데 그러겠습니까? 얌전히 있으십시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사태는 이 도시의 일입니다. 급한 일이 전부 끝난 지금, 계속해서 외부인의 도움에 의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지원군도 거절하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애써 딴죽을 삼켰다. 저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 당신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다만 그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나는 말문이 잠시 막혔다. 이걸 이렇게 돌려준다고. 그가 알고 물은 건 아니겠으나 아주 훌륭한 공격이었다.
“거취를 정하지 않았다면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셔도 괜찮습니다. 이 도시의 신전은 당신을 적대하지 않을 테고, 이 도시의 사람들도 당신을 반길 테니까요.”
“…내가 누군 줄 알고?”
“도시를 구한 사람이고, 제 동생이 신세를 진 사람이지요. 더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만 말하면 좀 이상하잖아. 나는 팔짱을 유지한 채 한 손만 들어 뒷목을 쓸었다.
“…난 도주한 전적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베뮈르헨 사태를 간략히 정리하여 설유했다. 진작 말했어야 할 이야기였는데 어쩌다 보니 말하는 게 늦어졌다.
“그래서 함부로 의탁할 수는 없다. 그대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니, 그 이전에 소성주는 내 전적을 아직도 못 들었던 건가? 이 도시 사람들이야 모를 수 있다 쳐도, 외부 인력이 꽤 많이 온 상태잖아. 설마 아무도 안 알려 준 거야?
“아… 그게 당신이었습니까?”
그러나 내 설명이 끝났을 즈음, 상대는 오히려 안심한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답했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이 도시의 신전은 이미 당신을 용인했습니다. 아니면, 아크메이지님께 아무 이야기도 못 들으신 겁니까?”
“…협상이 잘 풀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들으셨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이곳 신전에서 결정을 내린 이상, 다른 곳에서 뭐라 하든 알 바 아닙니다.”
아니, 그, 너무 긍정적인 사고 회로 아니야……? 다른 도시에서 뭐라 하면 어쩌려고…….
“다른 곳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로 많은 피해를 봤다곤 하나 뮌문트는 기사 여럿을 두고 있는 도시고, 또 최전방을 감당하고 있는 전열입니다. 그들이 감히 우릴 압박할 순 없습니다.”
내 소심한 걱정은 이어지는 말에 잘려 나갔다. 뭔가 멋있었다. 이게 옳게 된 권력자인가……? 아니, 동생을 위해서 도시 전체의 위험을 감수하는 거니 옳은 권력자는 아닌가?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마음 편히 의탁하시길. 제가 협조하는 이상, 당신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니, 그…….”
“아. 물론 시선이 있으니 9년 내내 놀고먹게 해 드리겠다는 보장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장담드리죠. 당신이 어느 도시를 가든, 이 도시만큼 가장 좋은 대우를 주는 곳은 없을 겁니다.”
그거야 파우스트에게 가장 우호적인 사람이 우두머리로 있으니 당연하지.
나는 소성주의 보장에 괜히 멋쩍어져서 한마디 툭 뱉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난 파우스트가 아니다.”
“압니다.”
다행히 상대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당신이 보고 느끼고 겪는 모든 것을 그 아이도 고스란히 전해 받을 것 아닙니까.”
“그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육신이 파우스트의 것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나는 당신의 평온을 바랍니다.”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거였다. 기어코 할 말이 없어진 내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나는…….”
“강요는 아니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은 마시길. 다만 달리 갈 곳이 없다면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
“그럼 어디 갈 생각 말고 여기서 푹 쉬십시오. 저는 일이 많아서 이만.”
그사이 내게 폭탄을 떨군 이는 유유히 몸을 일으켜 방을 떠났다.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양가감정이 참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