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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24화 (324/389)

324화 그럴 수만 있다면 (10)

처음엔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먹다 보니 그릇 대부분을 비웠다.

나는 새삼 이 육신의 위장 크기에 감탄하며 후식으로 나온 차를 홀짝였다. 과식으로 소화가 힘들 걸 고려한 건지, 묵직하기보다 가볍고 상쾌한 느낌의 차였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가십니까?”

다만 차를 다 마시기도 전, 시간을 확인한 아크메이지가 깜짝 놀라며 엉덩이를 뗐다. 급한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던 사람 같기도 했다.

“아직 일이 남았으니 말일세.”

하나 뒷말을 들어 보면 바로 이해가 간다. 아무렴, 아직 도시 복구 일이 남아 있는 형편 아니던가.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나는 마시던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물었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 받았겠다, 가만히 있어 봐야 나오는 이득도 없겠다. 차라리 뭐라도 할까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 자네는 그냥 여기서 푹 쉬게.”

그렇지만 그런 내 의지는 아크메이지가 단번에 쳐 냈다. 엄하다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괜찮네. 자네는 쉴 자격이 충분해.”

“…그래도 가만히 있기는 좀.”

내가 대악마를 잡는 데 가장 큰 활약을 보였다곤 하나, 그건 인퀴지터도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그쪽은 아직도 일하고 있을 거고.

그러면 나도 일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내 특수성 때문에 좀 꺼려지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돕기는 좀 그렇겠군요.”

하긴… 생각해 보면 나와 인퀴지터는 처지가 많이 달랐다. 그쪽은 치유나 정화 같은 범용성 높은 스킬이 많지만, 나는 오롯이 전투 계열 몰빵이니까 말이다.

하니 써 봐야 경비병이나 순찰병 대체 인력 정도인데… 그 경우 신전이 자극받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난 존재 자체만으로 그들의 불쾌감을 일으키는 편이니까.

“긁어 부스럼 꼴이 나느니 대기하는 게 맞겠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다. 나는 그것으로 내가 여기에 박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다. “아니…….”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혹시 내가 쉬라고 하는 이유를 일어날지도 모르는 신전과의 마찰 때문… 이라 이해했나?”

“…아니었습니까?”

어, 그게 아니었어?

내 답변에 아크메이지가 정색했다.

“내가 자네에게 쉬라고 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세. 자네가 쉬어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쉬라고 한 거지.”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정말 쉬어도 될까? 내 머뭇거림에 그녀는 골치 아픈 사람처럼 머리를 짚었다. 그러곤 내게 다가와 나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쪼르르륵. 다 마셨던 찻잔에 냉차가 리필되었다.

“자. 자네는 아까까지 벼랑 끝에 내몰려 있던 사람이었고, 그걸 간신히 벗어난 게 지금이네. 외상으로 따지면 전신 골절에 내장 파열까지 일어난 상태인데 거기서 붕대랑 약만 좀 바른 상태란 걸세.”

“그, 그 정도는…….”

“다물고 듣게.”

아크메이지는 친절하게도 리필된 차를 들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양손으로 꼭 붙잡게 해 주는 것이 마치 내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난 자네의 상냥함이 좋네. 다정함도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힘든데 남에게 손 뻗는 성정은 더욱 아름답다 생각하지. 세상에 그런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드르륵. 그녀는 책상도 좀 옮겼다. 내가 일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책상을 밀어야 하는, 책상과 의자 사이에 갇히게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게 잘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네. 스스로를 깎아 남을 돕는 지금은 더욱 그래.”

심지어 그녀는 후식으로 준비된 과일과 과자 그릇도 내 앞에 끌어다 두었다. 누가 보면 내가 혼자 다 먹으려고 욕심 부리는 거라 생각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는 것이고, 나 스스로를 세워야 타인을 지탱할 수 있게 되는 법이라고.”

그렇지만 이것들을 거절하기엔 마주친 두 눈이 너무 따스했다.

“그런데 내가 보는 지금의 자네는 스스로조차 세우지 않은 채 타인을 위하고 있어. 그건 정말 좋지 않아.”

“…….”

“하니 나는 그대가 쉬었으면 하는 게야. 자네는 지금껏 너무 많은 걸 희생해 왔고 또 감내해 왔으니까. 이번만은 오롯이 자네를 위해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란 말일세.”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크메이지가 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건 종이 다발이었다.

“그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지.”

“…아셨습니까?”

“직접 본 적은 없네.”

데스브링거가 얘기하는 걸 들었을 뿐이라며, 아크메이지가 종이 다발 위로 가진 펜을 올렸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건, 사람을 시켜 책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읽건… 오늘 하루는 편하게 보내게. 자네는 목욕도 즐기니 탕을 부탁해서 들어가도 되겠지.”

“…너무 과한 호사 같습니다만.”

“과한 호사가 아니라, 너무 늦은 대우인 걸세.”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종을, 내 손 닿을 만한 위치에 밀어 두었다.

난 그것을 힐끗 보았다가, 이미 손에 쥐여 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냉차가 담긴 찻잔은 시원했다.

“아, 아니면 이 빈 종이에 차마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을 기록해도 되네. 아니, 꼭 해 주게.”

“…글쎄요.”

“싫다면 뭐 어쩔 수 없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대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걸세. 남 돕지 좀 말고.”

남을 돕지 말고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라, 인가……. 나는 생각지 못한 지시에 눈을 껌뻑였다. 스윽. 찻잔에서 떨어져 나온 왼손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 다발을 쓸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그리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내 답에 아크메이지가 안도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 * *

“어떻게든 됐나…….”

악마기사가, 아니 모험가가 머무는 방에서 나온 아크메이지는 짐짓 안도했다. 각오했던 최악의 결말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괜찮은 흐름으로 상황이 흘러가 준 까닭이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엔 결국 모험가가 많이 인내하고 더없이 관대하게 나와 준 것이 있지만…….

“으음.”

아크메이지는 아팠다는 걸 겨우 인정한 이를 두고 고뇌에 빠졌다. 마이스터나 다니엘과 대화하며 눈치챈 사항이긴 했지만, 그는 정말 위험한 상태였다. 새삼 다가온 사실이 쓰라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더 괴로운 것은 그런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단 것이었다.

아무렴, 억지로 끌려온 그에게 세상 어떤 것이 의미가 있겠는가? 금은보화도, 명예도, 권력도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순간 다 무용지물이 되는데.

하물며 마이스터의 추측에 따르거든, 제자리로 돌아간 그를 찾아 보답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놈 아무래도 이 세상 출신이 아닌 것 같던데요? 이 세상에 없는 지식을 쉽게 거론하는 걸 보면.』 다른 세상까지 찾아가 보답하는 건, 필요성 이전에 기술상의 어려움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모험가의 소망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 준다? 글쎄, 그에게 소망이라 할 만한 게 있긴 할까? 그의 영혼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 정도가 최선 아닐까?

한데 영혼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건 사실상 보은보다는 당연하게 해 줘야 할 일에 가깝다. 그가 9년을 편히 보내는 데 한 손 보태는 일 또한 그렇다.

그 모든 것은 본래 그들이 ‘해 줘야 마땅한’ 일에 속했다.

“9년…….”

문제는 그 해 줘야 마땅한 일을 해 주려 들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싸우는 게 괴로웠다는 말을 들은 이상, 그녀는 더 이상 그를 파티에 끌어들일 의향이 없다. 하나 그걸 과연 신전에서 인정할까? 신전에서 인정해도 북쪽의 성주나 일부 마탑이 가만히 있어 줄까? 대악마의 그릇을 용인하는 대가로 인류의 수호에 한몫 보태라 나오는 건 아닐까?

“…아니야,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그땐 이쪽 불만분자들을 설득할 때와 같은 논리로 상대하면 그만이긴 하다. 하니 따지고 보면 그 정도 고난은 꽤 괜찮을지 모른다. 아니, 사실상 제일 낫다.

“그가 나선다고 하면 그땐 설득할 방도도 없을 테니…….”

남의 불행에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결국 괴로움을 참고 나설 가능성에 비하면, 그건 차라리 설득이라도 될 테니 훨씬 나을 거란 말이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착해도 문제라고 하는 거군. 그녀는 한을 조금 풀어내기가 무섭게 남을 신경 쓰던 모험가를 떠올렸다.

그것만 생각하면 괜히 속이 쓰리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모험가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랬다.

“결국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인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가 나선다고 하면 아무도 말리지 않을 터. 하다못해 아크메이지 자신도 그가 나서지 않길 바라는 한편, 나서려는 그를 열렬하게 막을 자신은 정작 없다.

몰염치하다 손가락질받을 건 아나 하릴없다. 대신전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큰 지금, 모험가가 가진 강대한 무력은 차마 놓치기 아까운 것이었다.

하니 아크메이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이 정도다.

모험가가 진즉 누렸어야 할 휴식을 제대로 누리게 해 주는 것. 그가 받아야 할 사과들을 마땅히 챙겨 전해 주는 것. 그를 더는 의심하지 않고 그의 모든 걸 받아 주는 것.

그가 한 일에 비하면 이딴 건 보답 축에도 못 드는 걸 앎에도.

“신이시여, 부디 가여운 자를 굽어 살피소서… 제발 방관만 하지 말고 그쪽에서 일 좀 해 주소서.”

하므로 그녀는 전이라면 품지 않을 불경한 기도를 올렸다. 신이 그녀에게 천벌을 내릴 건 밀 한 톨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렴, 세상엔 그녀보다 더한 모독을 하는 자가 가득한데 설마 그녀가 1등으로 신벌을 받겠는가?

그녀가 신벌을 받게 될 때쯤이면 세상은 악마도 없고 범죄자도 없는 깨끗한 세상이 되었을지니.

그럴 수만 있다면 아크메이지는 제가 불경한 발언으로 벌을 받게 돼도 좋았다. 아니, 제발 그렇게라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한테만 일을 다 맡기지 말고.

“후…….”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해 주지 않겠지. 아크메이지는 모험가가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며 한탄했다. 와중에 그녀의 걸음은 그녀가 목적했던 곳에 거의 도달한 채다.

“오셨네요.”

“상황은 어떤가?”

일단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차차 고민하자. 그녀는 도시 복구에 한 손 보태기 위해 성심껏 일하는 자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필요한 일이었다곤 하나 늦은 오후까지 빠져 있었던 만큼 더욱 각근히 일할 의향이었다.

“정화 구역이 확정되고 격리가 완벽히 이뤄진 지금, 순차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해 가며 정화 구역만 늘려 가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인원 파악을 위해 행정가들과 마법사들이 갈려 나가고, 격리 작업을 위해 병사들이 밤잠 설쳤으며, 정화 및 치료를 위해 사제들이 뼈 빠져라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아크메이지는 차근차근 우선순위대로 일만 하면 된다는 소식에 살풋 웃었다.

“더불어 외부와의 교신도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아마 내일 중으로 외부에 대한 소식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런가…….”

다만 뒷소식은 조금 달랐다.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단번에 근심으로 물들었다.

“어떤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군.”

악마의 노림수로 요청하기도 전에 파견된 지원 병력이야 있다. 하니 이 도시 앞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들이 바삐 알리지 않아도 분명 오고 있는 지원군이 있을 테니까.

“별 탈 없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상황을 뒤집어 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아크메이지는 외부 어디에서 파멸적인 소식이 들려올지, 당최 어떤 규모로 들려올지 걱정했다. 아닐 가능성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심증만으로도 확신되는 일은 세상에 분명 있었다.

“그렇지, 그, 일행분께서 아크메이지님께 상담할 것이 있다 말하셨는데…….”

“일행……? 마이스터 얘긴가?”

“아뇨, 그 대리자분께서… 아, 급한 일은 아니니 나중에 시간만 내주시면 된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음, 일단 알았네.”

인퀴지터가? 아크메이지는 인퀴지터가 자신을 찾을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고민했다. 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고작해야… 인퀴지터 역시 활약했음에도 휴식 없이 일하는 상태란 것 정도?

도무지 뺄 수 없는 힘의 소유자라 용인하고 있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그녀도 푹 쉬게 해 줘야 하리라. 우직한 인퀴지터가 설마 그걸 가지고 그녀를 불렀을 것 같진 않지만.

“저는 그분께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까……? 저는, 저는…….”

“저, 저도, 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날 모든 일을 마치고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를 마주했을 때, 아크메이지는 그녀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았다.

그들이 모험가에게 잘못한 일 중에는 단순히 그의 일면만을 보고 판단한 것뿐 아니라, 그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 것도 있었다. 아크메이지의 손바닥이 그녀의 안면을 찰싹 후려쳤다.

“…일단, 두 사람은 한동안 그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가해자에 속하지만, 인퀴지터와 달리 직접적으로 죽이려 든 적은 없다. 거기에 그녀가 빠지면 모험가에게 쉬라고 해 줄 사람이 마이스터나 다니엘 이단심문관밖에 안 남는다.

하나 그들에게 어떻게 이 일을 맡긴단 말인가? 성정이 적합한 다니엘 이단심문관은 사정 때문에 차마 맡기기가 그렇고, 마이스터는 성향이… 아무래도 가능은 할까 싶은 지경인데.

아크메이지는 뭐만 하면 함정이 있는 상황을 허탈하게 응시하며, 나름 최선이라 여기는 판단을 제시했다.

“언젠가 만나서 사과는 해야겠지만… 아직 그도 두 사람도 준비된 상황이 아닌 듯하니 말입니다.”

그녀는 이게 옳은 판단인지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그들의 만남을 늦췄다. 부디 이것이 긍정적인 미래를 불러오기를. 아크메이지는 일도 안 하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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