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그럴 수만 있다면 (8)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꽉 막혀서 내 목을 조르고 있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싶었을 때는 이미 차 향이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익숙하고, 또 좋아하는 향이었다.
“…이제 좀 후련한가?”
글쎄. 이걸 후련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덜어진, 그러나 여전히 나를 옥죄는 감정의 무더기를 두고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조금은.”
너무 울어서 쉬어 버린 목이 따끔거렸다.
“그래…….”
내 반응에 아크메이지가 아쉬운 듯, 그럴 수 있다는 듯 오묘한 반응으로 나를 이끌었다. 소파의 앞면이 무릎에 닿자, 그 목적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녀의 바람을 따라 기존에 자리한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가죽이 내 몸을 지탱했다.
드르륵.
내가 소파에 기대는 사이, 아크메이지는 문 근처에 놓여 있던 트롤리를 끌고 왔다. 그 위에는 고급스러운 다기와 다과 따위가 드문드문 놓여 있다.
방 안에 맴도는 향의 출처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까 집사가 문 앞에 두고 갔네.”
그럼 집사도 내가 우는 걸 봤다는 건가? 나는 순간 쪽이 팔렸다가, 곧내 포기했다. 체면을 챙기기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아크메이지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한 시점에 더욱 그랬다.
‘나중에 컨셉질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지…….’
내 마음이 매우 심란해졌다.
[걱정 마. 그대가 생각 없이 발설한 컨셉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든 블러 처리했으니까.]
하나 내 불안은 이어진 분노의 말에 끊겼다.
‘블러 처리?’
[그대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잖아. 글은 우리가 번역해 준다고 쳐도 회화는 그게 안 되니까, 대충 통역 마법 같은 걸 걸어 놨거든. 그대의 입술 모양과 들리는 게 다르단 걸 모르도록 착시 마법도 좀 더해 놨고……. 아무튼 그래서 그것들을 중간중간 해제함으로써 적당히 걸러 듣게 해 줬어. 잘했지?]
분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깊은 안도감과 미묘한 허탈함 그리고 농밀한 짜증이 허탈해진 마음을 채웠다.
아무렴, 내가 뭣 모르고 컨셉질 하게 된 이유가 누구 때문인가? 애초에 이 새끼 때문 아닌가.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병만 주는 것보단 낫잖아.]
나는 중지를 치켜든 이미지를 강렬히 상상했다. 말뿐 아니라 이미지도 전달이 되나 궁금했으나 아쉽게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서 확인은 불가능했다.
쪼로로록.
한편, 내가 현타를 맞이하건 말건 아크메이지는 차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옥처럼 맑은 색과 향기로운 냄새. 나는 그 차가 무엇으로 우려낸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저건 대삼림에서 내게 한가득 챙겨 준 것이자, 한때 아크메이지가 나에게만 우려 주던 그 찻잎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차를 주어도 괜찮겠나?”
다만, 그녀는 찻잔에 따라 낸 것을 두고 잠시 머뭇거렸다. 왜일까. 이유는 크게 따져 볼 것도 없었다.
나는 언젠가 금이 가 버렸던 찻잔을 떠올렸다.
“…당연히.”
다행스럽게도, 새 찻잔에는 더는 금이 없다. 나만 조심한다면 새로운 금이 생길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잔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윽한 향이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훨씬 좋았다.
호록.
난 그 향을 잠시 감상하다가, 입을 대어 찻물을 마셨다. 혀를 델 수준의 뜨거움은 없었다. 끓기 전 물로 적당한 시간 우려낸 찻잎은 입안을 감미롭게 흔들고 내려갔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좀 더 말해도 되네.”
그렇게 기어이 잔 하나를 비웠을 때, 아크메이지가 말했다. 조르르륵. 빈 찻잔에 새로 부어지는 찻물은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다.
“…그건.”
나는 그 따스함을 두고 조금 망설였다. 방금 내가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 얼마나 심하게 말했는지 어느 정도 기억하는 상태기에 그 주저함은 더 컸다.
“따른 물이 흘러넘치는 건 보통 잔이 담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겼을 때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더는 따르지 않고, 더는 넘치지 않아도 잔은 가득 차 있는 법이네. 그것을 비우지 않는 한, 영원히 그러하겠지.”
“…넘치지 않는다면, 굳이 비울 필요가 없지 않나.”
“글쎄… 가득 찬 잔은 조금만 건드려도 흐르고, 조금만 더 집어넣어도 넘치지. 그런데도 정녕 비울 필요가 없다 생각하나?”
방금 쏟아 낸 감정은 일말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사양하려 했으나, 아크메이지는 의견이 달랐다.
건너편에 의자를 두는 대신, 어깨를 같이하도록 나란하게 앉은 그녀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어지간한 접촉은 꺼리는 편임에도 그 손길만은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네. 나는 자네보다 나이가 많고, 나의 여유는 남에게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해. 거기에 나는 자네에게 속죄할 일까지 따로 있지.”
“…….”
나는 속죄할 일이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마주친 눈을 두고 관두었다.
“그러니 난 괜찮네. 하나 자네도 그런가? 정말 괜찮아졌나?”
아니, 이건 관둔 건가? 말이 막혀 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나는.”
나는 한풀이를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말 중 일부를 더듬어 보았다. 경황이 없어서 마구 떠넘겼던 잘못 중 몇 개를 떠올렸다.
“난…….”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아.”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건 그들이 사과할 일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론 아닐 수 있어도 감정적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그들에게 상처를 준 만큼, 그들도 내게 상처를 줬으니까. 분명 그랬을 테니까.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렇게 되지가 않아.”
그래, 인정하자. 나는 사실 그들에게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아니, 받은 것 같다가 아니라 진짜 받았다.
“너무 아파.”
나는 그 사실을 드디어 긍정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라도 그들의 오해가,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한 강요가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음을. 악마라는 존재로 인해 믿기 힘들 수 있음은 아나, 해명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올곧음이 정말 미웠음을… 내가 먼저 실수한 게 원인이더래도 그게 참 서러웠음을 드디어 진실로 받아들였다.
“너무 아팠어…….”
그러자 걷잡을 수 없이 쌓이기만 했언 응어리 하나가 풀렸다.
이다지도 후련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 * *
“내가… 자네의 진실된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내 표정을 보고 마음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던 것인지, 아크메이지가 약간의 기다림을 두고 질문했다.
“자네를 계속 악마기사로 부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묻는 걸세. 말하기 싫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네.”
나는 부은 눈을 껌뻑이며 조금 고민했다.
“…말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말할 수 없다. 악마가 이름을 들으면 곤란해지니까.”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알겠네.”
마음 같아선 나도 이름을 내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악마가 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상 어딘가에 박혀 있을 악마를 떠올리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내가 그대를 무어라 불러 줬으면 좋겠는가?”
“…글쎄.”
친구들이 부르던 별명을 내줄까? 아니야. 그걸 들으면 분명 친구들 생각이 계속 날 거야.
나는 그리움을 지워 내기 위해 가장 좋은 선택지를 지웠다. 칠성, 별, 군성 등 기존 별명에서 파생되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모험가라 불러라.”
그러자 딱히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다. 나는 필명이라도 댈까 하다가, 그 이름을 대면 정말 개고생하게 될 것 같아서 다른 쪽으로 드리프트했다.
모험가.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칭할 때 가장 흔히 나오는 명칭이었다.
“모험가… 말인가?”
“여행자가 낫나?”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조금 난처해졌으나 하릴없다.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사전이나 작명 사이트 없이 이름 짓는 것에는 자신 없는 편이었다.
“…일단, 알았네.”
결국 아크메이지도 그 흔해 빠진 명칭에 납득했다.
“대신, 나중에 좀 더 제대로 된 별명을 정해 보게나.”
당장만 수긍해 줬다.
나는 그녀의 ‘나중’이란 단어 선택에 괜히 눈을 데굴 굴렸다. 신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그 나중이 우리에게 올 수 있을까?
“…내가 말 안 했나?”
그 의문을 적당히 정제해 전달하니, 그녀가 곤혹스러워했다. “아, 말할 틈이 없었지.” 오래가는 곤혹은 아니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네.”
아크메이지는 그녀와 마이스터가 얻어 낸 협상의 결과를 내게 전달해 주었다.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지만, 확정이 됐다니 참으로 기뻤다.
이것으로 나는 당당히 인간들 속에 섞여 지낼 수 있다. 이들과 함께하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아… 그리고 곧 식사가 올 것인데… 소성주께서 아침을 거른 걸 알고 직접 당부한 것이니 부디 들어 주게나.”
“…그랬나.”
“그래. 자네를 도시의 은인으로 여기며 이것저것 신경 써 주시더군. 대화는 나중에 나눠도 늦지 않으니, 편히 쉬라는 전언도 하셨네. 하니 자네도 이곳에 머무는 것에 괘념치 말고 푹 쉬게나.”
나는 잊고 있던 소성주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히 대응했다. 파우스트가 소성주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나, 악마가 잘 끝났다고 한 건 기억하는 까닭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육체의 안위만큼은 끔찍이 챙기는 녀석이니 설마 헛말을 하진 않았겠지. 아니더라도 뭐, 당장 할 수 있는 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런 믿음 아닌 믿음하에 소성주 쪽 일을 잠깐 치워 두기로 했다. 쌓여 있던 감정이 해소되니 이런 것도 매우 안정적으로 사고가 굴러갔다.
“하면… 다시 물어도 되겠나? 그간 힘들었던 것이나… 서운했던 것이나…….”
다만 식사 얘기 나오니까 배가 갑자기 고파 왔다. 털어 낸 감정의 빈자리가 허하여 더욱 그리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손도 대지 않고 있던 다과에 팔을 뻗었다. 와작. 입에서 바스라지는 쿠키는 설탕을 아낌 없이 넣었는지 참 달았다.
“물론 나도 사과할 일을 마음에 항상 품고 있긴 했네만, 내가 미처 모르고 넘긴 일이 많을 것 같아 그러네.”
“…딱히.”
와작, 와작. 나는 부스러기가 튀지 않도록 입을 가리고 먹으며 눈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딱히’였다.
“…사과하기엔 너무 늦었나?”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다. 단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을 뿐이다.”
차곡차곡 쌓인 설움을 차마 토로할 곳이 없어, 그저 ‘어쩔 수 없음’이란 라벨만을 붙여 왔다.
그리고 지금, 다니엘과 아크메이지의 연타로 그것이 틀렸음을, 토로하는 게 더 나을 것임을 깨달았다.
“곱씹기엔 너무 아파서 애써 외면해 온 감정들을… 단번에 분류할 능력은 내게 없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뗀 라벨에 바로바로 이름을 붙이는 게 되나? 심지어 어떻게든 인내하고자 외면하고 무시해 온 것들인데? 그렇게 켜켜이 얽히고설키며 뒤섞인 응어리인데?
…함부로 들쳤다간 내가 저지른 실수까지 단번에 직시하게 될 텐데.
“아… 내 배려가 부족했군. 미안하네.”
“달리 사과하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나는 우물쭈물 과자를 씹었다.
“…나도 미안하다. 그대의 호의를 거칠게 거절해 왔던 것이나… 무례하게 굴었던 많은 행동을.”
“그건 자네가 바라서 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그에 상처받았을 수는 있으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대체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하는 건지 가늠도 안 되는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나.”
“그 명목 앞에서 그래도 상처받았을 수 있으니 사과한 건 자네가 먼저네만.”
“…….”
그렇… 네? 나는 돌아온 말에 도저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다시 과자를 입에 넣었다. 바삭. 입에 넣은 후에 안 건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크메이지가 빈 접시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자네가 무례했다고 여긴 적이 별로… 음, 없진 않지만 그래도 그것에 상처받은 적은 없으니 괜찮네. 사과 안 해도 돼.”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거든,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 주게나.”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를. 내 반응에 아크메이지가 살풋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말투도 좀 부드럽게 바꾸면 좋고.”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농담 같았다. 지금껏 내가 선보인 싸가지를 생각하면 진심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들어주면 좋고 안 들어줘도 상관없는 농짓거리 정도의 말.
“그러지. 아니… 그러지요.”
그렇지만 이 기회, 놓치지 않겠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고치는 척 높임 표현을 썼다. 2초 뒤, 웃고 있던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 2초 뒤인가. 그건 머리가 순간적으로 정지해서 못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다.
“그, 그, 그, 그러게.”
근데 어쩔 거야. 말투 바꾸라고 한 건 당신이 먼저였는데.
나는 고장 난 아크메이지를 보며 흡족해진 마음으로 차를 들이켰다. 속이 뜨끈뜨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