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그럴 수만 있다면 (7)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겪지 않을 일이었는데…….”
나는 넘실거리는 감정을 외면한 채 최대한 담담히 뇌까렸다. 아크메이지에게 하는 말이고, 나에게 전하는 외침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나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두고 원망하지 말자.
이 모든 일의 출발점을 따져 보면 결국 내 컨셉 플레이가 있고, 게임에서 이 지랄을 떨 정도로 깊게 남아 버린 미련이 있으니. 그것들을 죄라고 할 바에야 차라리 그냥 모든 게 하나의 해프닝이었던 걸로 하자.
피치 못할 오해가 결국 죄였다면, 그것들도 그른 것이 되니까 차라리 무효로 하자.
내가 그 컨셉으로 하여금 저지른 죄도, 잃어버린 무언가도, 여전히 너희를 속여 넘기는 일조차도… 그저 어쩔 수 없었단 미명하에 서로 넘어가 주자.
제발 그런 걸로 하자.
“내가, 내가 어떻게…….”
나는 그런 타협 끝에 드는 감정을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억울함에 사로잡히면 안 돼. 해소할 수 없는 원망에 발목 잡혀 주지도 마. 그렇지 않는다면 담배 연기보다 매캐하고 독했던 그 시절을 또 반복하게 될지 모르니까.
외면한 감정이 울렁거릴 때마다 그 사실들을 되새기면 마음은 다시 가라앉는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슬픔을 삼켰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항상 후회했네. 난 왜 그때 그 사람을 안아 주지 않았던 걸까? 품 한번 빌려주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하나 내가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기 전, 따끈한 온기가 내 손을 잡았다. 도무지 떨쳐 내고 싶지 않은 온기였다.
“나이를 먹은 지금에서야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네.”
그 상태 그대로 그것은 나를 끌어당겼다. 의도는 선명했다.
“우리는 너무 이성적이기만 했던 거야. 가끔은 감성적이어도 좋았는데. 논리와 근거를 내버린 채 그저 울고 탓하고 원망하고 용서하며 살아도 되는 거였는데, 그땐 그저 이성적인 것이 최고라고만 여겼던 게야.”
밀어낼까? 아니면 이대로 가만히 있을까.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시 몸을 굳혔다.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은근한 방관하에 아크메이지의 품이 나를 감쌌다. 매끄러운 천과 천 사이로 빠져나온 털이 마치 하나의 요람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인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게. 누가 먼저 잘잘못을 저질렀는지도 고려하지 말고, 어느 쪽의 죄가 더 깊은지도 따지지 말아.”
눈물이 나올 만큼 따뜻했다.
“다만 그냥 말해 주게. 자네가 쌓아 온 모든 슬픔을.”
나는 애써 생각했다. 거절해야 해. 그녀는 관련 없어. 이분이 내 모든 것을 감당할 이유는 정말로 없어.
“내가 그대의 편이 되어 모든 걸 받아 줄 테니.”
그렇지만 무작정 안아 주는 온기가 너무 그리웠던 것이라서. 그저 편들어 주기만 하는 말이 애타게 간절했던 것이라서.
『당신의 처지가 남보다 낫다 하여 모든 고초를 감내하려 드는 것도 하나의 오만입니다.』
하필이면 그런 말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하루라서.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결국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어깨를 기어이 적셨다.
“…이게 다 걔 때문이야.”
사실, 이 이상 참기엔 너무 서러웠다.
* * *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직감했다.
억울함 쪽을 툭툭 건드려 보는 것도 글렀군. 크게 기대는 안 했으나 혹시나 싶긴 했던 계획의 몰락이었다. 그녀의 심기가 괜히 불편해졌다.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겪지 않을 일이었는데…….
가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역시 그녀의 불편함을 더했다.
멍청이, 어떻게 그게 본인 잘못이지?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레트헨의 사고 회로는 도통 이해가 안 갔다.
남을 깎을 수 없으니 대신 나 스스로를 깎아 버리자, 라니. 대체 어떤 사고를 거쳐야지만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단 말이다.
『친애하는 이여, 꼭 복수하시오.』
하물며 작금의 그는 참아야만 하는 상황인 것도, 뒷받침해 주는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 뼈와 살 위에서, 반드시 해내시오.』
그녀는 자신의 뼈 가면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언제부턴가 쓰기 시작하여 이젠 본질이 되어 버린 가면은 언제나 그랬듯이 서늘하기만 했다.
촤륵.
그러다 팔이 조금 과하게 들렸을 때, 팔에 걸쳐져 있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행동을 제약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녀가 모든 계약을 무시하고 육체로부터 탈출하려고 했던 그때 생긴 사슬들이다.
[하, 최악이야…….]
영혼이 깨진 소년이 항상 골골대는 병자가 됐다면, 그녀는 심상의 수인이 되어 버렸다. 원한다면 외부로 영혼체를 끌어낼 수는 있으나 구경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점에서 별 의미 없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처지에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차라리 오래된 마법을 남용하게 만들었어야 했나? 아니, 아니야… 그건 멈추는 게 맞았어.]
메피스토펠레스는 가면을 만지던 손을 그 안쪽으로 옮겼다. 입가와 가면 사이의 틈 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은 보통 사람의 것보다 길어 금방 이마에 닿는다.
이름을 통째로 뜯어내며 만들어진 흉이 두툴두툴 닿았다.
[빌어먹을…….]
따각. 손톱 끝이 흉 한가운데 박힌 돌조각을 건드렸다. 이따끔 그녀의 기억을 먹고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거래 과정에서 오래된 마법의 존재감에 영향받아 변질된 것이기에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최대한 억제하며 사는 것 외에는 대응 방법이 없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것에 괜스레 화가 났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시간이 없다고 무턱대고 몸에 들어갈 게 아니라, 어떻게든 애송이에게 이름을 듣고 몸을 뺏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지난 몇 년간 끝없이 후회한 사항을 또 한 번 곱씹으며 손톱으로 돌조각을 몇 번 긁었다. 뗄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지만, 그래도 화풀이였다.
[타락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타락하지 않는 인간은 분명 없다. 없지만, 이렇게까지 역치가 높은 인간이 오리란 걸 예상 못 한 것 또한 그녀의 패착이 맞으리라.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지점에서 몇 번이고 분개하다가, 기어이 이마에 상처를 냈다. 재와 불꽃이 넘실거리다가 도로 복구되었다.
[…썩을.]
금방 낫기야 낫지만, 재와 불이 살갗을 타고 흐르며 눈에 닿는 건 불쾌하다. 해서 그녀는 얼굴로부터 손을 떼었다.
그 대신이랄지 딱딱 튕기는 손가락 위에 얹히는 건 그녀가 적당히 숨기거나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차라리 그때 다 말해 줬어야 했나……?]
이것들을 언제 써야 효과적일까. 언제 개봉해야 그레트헨의 한계를 깨부술 수 있을까.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이 고민에 잠겼다.
[말해 줘 봤자 내게만 화내거나 급발진해서 자기 살해 하려 들까 봐 입 닫았던 건데…….]
기실, 그레트헨이 그녀에게 들은 진실은 절반에 불과하다.
예컨대, 그레트헨이 지극한 법도에 선택을 받은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만들어진 필연이다.
[아니야… 역시 그땐 말하지 않는 게 맞았어.]
알맞은 인간이 없으면, 개입하여 알맞은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일부 조건에만 부합하는 인간이 있다면 무언갈 더해서 완전히 적합하게 만든다. 그것이 오래된 마법이다.
없으면 새로 제작한다, 라는 게 그것에겐 얼마든지 가능하단 소리다. 조건에 맞는 성품과 재능을 가진 인간을 골라, 게임 형태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생존 능력에 방점을 찍어 준 것처럼.
[망할, 개복치도 아니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왜 자기 살해를 먼저 떠올리는 거야? 스트레스가 쌓이면 바깥으로 표출하려 드는 게 당연한 결론 아니냐고.]
물론 정보를 게임 형태로 제공한 건 메피스토펠레스, 그녀가 오래된 마법을 설득한 결과물이긴 했다.
하다못해 게임과 이 세계를 조금씩 어긋나게 만들어, 그 간극으로 하여금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게 유도하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게임과 이 세계가 완전히 일치하면 여기가 게임인지 현실인지 혼동할 가능성이 크고, 게임이 갇힌 사람이 흔히 떠올리는 탈출법은 보통 엔딩을 보는 것이며, 게임 영웅전설의 클리어 조건이 사탄 살해라는 극악의 행위이므로 게임과 혼동하게 만들면 사탄 잡다가 죽을 수 있으니 그건 조건에 어긋난다… 라는 설득 끝에 만들어진 것이 이 어긋남이란 거다.
파우스트가 오래된 마법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걸 몰랐기에 가능했던 뒷공작이었다. 알았다면 아마 필사적으로 반대했겠지. 소년은 그레트헨이 끝까지 이 세계를 게임으로 여기길 바랐으니까.
뭐, 결국 몰라서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정신이 안정돼 버릴 텐데…….]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그녀에게 유리한 건 아니다. 아니, 사실 많이 불리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한계에 달한 지금도 악착같이 원형을 유지하는 그레첸의 인내심을 떠올렸다.
몰아붙이고 떠밀어서 만들어진 지금도 이 정도인데, 정신이 도로 안정되면 그땐 답도 없어지리라.
[역시 죽여야 하나?]
하므로 무언가 수는 필요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심상에 비치는 바깥 광경을 가만 살폈다.
─다만 그냥 말해 주게. 그대가 쌓아 온 모든 슬픔을.
저게 죽으면 그레첸은 스스로를 원망하는 대신 바깥을 증오하는 쪽으로 무너져 내릴까?
[…모르겠네. 하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니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는 애써 여유를 가졌다. 그녀가 아는 ‘남은 시간’이 그레트헨이 아는 것보다 더 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9년이 지난 후, 계약의 허점에 의해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그레트헨이 얼마나 분노할지 궁구해 보았다.
잘 가늠은 되지 않았으나 악에 받칠 것이란 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이제 그것이 안으로 향하느냐, 밖으로 향하느냐였지.
[친애하는 그레트헨… 그대가 나를 친애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까?]
하면 이제 그녀가 해야 할 것은 그 방향이 반드시 밖이 되도록 하는 것이리라.
[뭐, 그 전에 그대의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도록 해야겠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육신에 걸어 둔 통역 마법과 입술에 걸어 둔 착시 마법을 일시적으로 회수했다.
* * *
사실 사람 같은 거 죽이고 싶지 않았어. 괴물이랑 싸우는 것도 싫어. 내가 왜 싸워야 해? 내가 왜 목숨 걸어 가며 싸워야 해. 나도 무서운데,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왜.
이게 다 꼬맹이 때문이야. 그 애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는데. 그 애가 자기 힘들다고 날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괴로울 일은 없었다고.
근데 시발, 하필이면 애라서. 아이라서 화도 못 내고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왜 탓하기도 어려울 만큼 어리냐고. 내가 말만 꺼내면 눈치 보고 뭐만 하면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는 애가 왜 원인이냐고…….
이러면 편하게 원망도 못 하잖아. 내 어깨도 못 넘을 만큼 작으면, 그렇게 동글동글한 뺨이나 가지고 있으면 정말 화내기도 어렵잖아…….
심지어는 빌어먹을, 몸까지 공유하는 바람에 제멋대로 욕도 못 해. 왜 나였냐고 화내고 싶고 왜 이딴 짓을 저질렀냐고 속 시원히 외치고라도 싶은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 욕이라도 내뱉으면 속이 조금은 편해질 텐데.
염병, 내가 행동하는 모든 걸 지켜보고 있어서, 내가 화내고 욕하면 고스란히 다 들을 게 분명해서. 분명 다 듣고 머리 박으며 울 게 명백해서. 나는 이에 대해 울고 화내는 것도 못 한다고.
차라리 눈치라도 안 보고 적반하장 구는 새끼면 대놓고 욕이라도 할 텐데 왜 염치 아는 애새끼여서, 왜 죄책감을 아는 애여서… 왜 미련할 정도로 요령 안 부리고 내게 사과만 하는 애여서…….
망할 애새끼가 진짜…….
악마 후레새끼도 마찬가지야. 악마라서 인성을 못 가진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속성이 하필 분노일 건 뭐야? 그 새끼가 모든 일의 원흉인데 왜 화내면 걔 좋은 꼴이 되냐고. 내가 뭐라 지껄이건 귓등으로도 처듣지 않는 상황만 해도 난 충분히 빡치는데…….
시발, 시발 다 좆같아. 다 좆같다고.
피해자는 난데 그 애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도, 그 애가 마음 놓고 원망할 만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진짜 원흉은 화내도 낄낄 처웃기만 하고 도리어 내 쪽만 문제 생긴다는 것도… 존나 억까야. 억까라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먼저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것에만 ■■하면 어떡해? 나도 잘 ■■주고 싶었는데, 나도 ■■히 ■■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나를 먼저 ■■■■ 하는 바람에 ■■ 풀지도 못하고 계속 ■■ 잡은 ■■만 ■■해야 했잖아.
나도 ■■■ 싫은데, 지금도 계속 ■■야만 하는 게 괴로운데, 완전히 ■면 또 ■■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아도 날 ■■할 것 같아서…….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야.
* * *
“다 당신들 때문이라고…….”
아크메이지는 한번 터진 순간 속사포로 쏟아지는 말 앞에서 조용히 악마기사의 등을 두드렸다.
중간중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가 들려오곤 했으나 그러려니 넘겼다. 악마기사의 말은 너무 빠르고 눈물에 뭉개져서 본래 존재했던 단어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냥 못 알아들은 것이겠거니 여겼다.
“당신들이 좋아. 좋은데, 당신들의 다정함과 상냥함을 사랑하는데… 그래도 그 철벽같음은 정말 미워. 최고로 싫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한 면만 정해 놓고 보려고 해.”
하여 그녀는 그 못 들은 말에 집착하는 대신 악마기사가 차곡차곡 쌓아 왔을 상처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게 조금 낯설긴 했으나 괜찮았다. 정말 아픈 상처 앞에선 아이도 어른도 결국 같아지는 법이다.
“당신들이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차라리 그랬다면 그 일면만을 보는 맹목이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또한 그렇기에, 정말 아픈 상처 앞에선 모두가 평등했기에.
“내가 ■■■만 안 했으면 해결될 일이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 속에서나마 ■■하고 싶었던 게, 그렇게 커다란 죄는 아니잖아…….”
“그래, 그 말이 맞네.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정말 힘들었는데…….”
“자네가 이렇게 된 것엔, 절대 자네 잘못이 없어.”
아크메이지는 고통에 허덕이는 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도, 나도 악마기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
“자네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
너무 오래 돌아왔지만, 그래도 이제 그들은 맞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