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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20화 (320/389)

320화 그럴 수만 있다면 (6)

“그는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주 대행을 맡고 있는 소성주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무례라면 나름의 무례였으나 아크메이지는 개의치 않았다. 잘못한 쪽을 먼저 고르라면 약속 없이 찾아온 그녀가 더했다.

“자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예민한 기감을 가진 자들은 낯선 기척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종종 잠에서 깨어나지 않습니까.”

확인하는 행위마저도 휴식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그냥 쪽지 남기는 것으로 대체했다며 소성주는 가볍게 설유했다.

“필요한 편의가 있으면 침대 옆 종을 울리라 적어 두었으나… 아직까진 울렸단 보고를 못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아크메이지는 애석함에 고개를 숙였다. 겨우 낸 시간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아쉬움보다는 악마기사에게 해야 할 말이 늦어졌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뭐, 어느 쪽이든 그녀가 아까워할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한데 그는 왜 찾으십니까?”

“…별건 아닙니다. 그저…….”

아크메이지는 밤새 일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기고 눈이 부은 소성주를 보며 말을 주저했다.

이걸 지금 말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나중에 말할수록 도리어 문제 되는 사항이긴 한데…….

“…어제 일부 인사들이 몰래 모임을 가졌더군요.”

말하지 않고 넘기기엔 도시의 주인에게 중대한 사항이고, 속 편히 말하기엔 상대가 너무 피곤해 보인다.

그 아슬아슬함 속에서 아크메이지는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표현했다. 모임 가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소성주가 최대한 덜 충격을 받았으면 해서였다.

“아, 그랬습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아크메이지는 살짝 머뭇거렸다. 혹시 소성주는 이렇게 될 걸 미리 예측하고 있었나?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도시에 널리고 널린 게 제게 불만을 가진 작자들이니까요. 예상보다 많이 이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예?”

“아닙니까?”

…예측은 했으나 다른 쪽의 예측이었나 보다. 아크메이지는 시니컬한 자조에 목소리를 살짝 흐렸다.

“그… 아닙니다. 그들은 악마기사의 처우를 두고 불만을 가진 채 모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군요. 다시 한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소성주의 어조가 갑작스레 뾰족해졌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따분함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크메이지는 날 선 소성주의 눈매로부터 의문을 느꼈다. 왜 화를 내는 것 같지? 그런 의아함이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보고를 안 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착실히 요약한 사정을 전달했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소성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마지막 가서 풀렸다.

“시간이 나자마자 저를 찾아오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소성주의 표정으로 하여금 그의 결심을 읽어 낸 아크메이지는 생각했다. 회의에 참여했던 놈들은 다 작살나겠군. 별로 동정심은 안 들었다.

“그래서… 그를 보고자 하신 것은 해당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약식으로 정해진 결과라도 일단 전해 주는 것이 그가 지내기에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정식으로 공표될 때까지 좌불안석하는 것보단, 약식 결과라도 들고 있는 게 심신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다. 적어도 아크메이지의 의견은 그랬다.

“다만 소성주님께선 바쁘시고, 다른 이들은 그를 껄끄럽게 여길 것이니, 안면 있는 제가 전하는 게 가장 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긴, 그렇겠군요.”

이 또한 아크메이지만의 개인적인 견해였으나, 소성주는 쉽게 수긍했다. 그 앞에 산처럼 쌓인 보고서도 그의 동의에 제법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가 해 주고 싶었는데.”

소성주가 살짝 아쉬운 눈을 했다가, 끝내 피로하다는 양 눈꺼풀을 내렸다.

“…긴 휴식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거르는 것은 건강에 안 좋겠지요. 모든 병사도 포식하고 있는 마당에 말입니다. 하니 집사를 시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동안 대화 나누시지요.”

“감사합니다… 아, 그. 소성주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이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는 육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하니… 식사에 육고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모쪼록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대신 저 또한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일 그가 대화를 거부한다면 강요하지 마시고 다음을 기약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부탁까지 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양해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는 잠드는 대신 꾸역꾸역 일을 처리했다. 조건부 허락이었지만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아크메이지는 쉽게 수용했다.

“소성주님께선 그에게 전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대신 그녀는 악마기사와 무언가 교감이 있어 보이는 소성주에게 약간의 배려를 제공했다.

“…대화는 나중에 나눠도 늦지 않으니, 편히 쉬라는 말만 전해 주십시오.”

머뭇거리던 소성주가 끝내 거절했다. 아크메이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점심 준비까진 좀 걸리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잎으로 우린 차만 미리 올려 줄 수 있겠나?”

“그러하겠습니다.”

그녀는 어지러운 집무실을 탈출하며 시종을 불렀다. 그녀가 나오자마자 보고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들어가고, 시종이 찻잎 주머니를 받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그녀를 안내해 줄 하인 한 명이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군.”

아크메이지는 하인을 따라 이동하면서도 끝없이 수심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무리한 것과 별개로 이 선택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만약 악마기사가 아직까지도 자고 있다면 어쩌지? 그가 그녀와의 만남을 바라지 않는다면 또 어떻고?

소성주 앞에서야 안면이 있다는 핑계로 제가 나을 것이라 자신했으나, 진실은 좀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은 최악에 가까웠고, 그 전 관계도 정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보단 초면인 주교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 층인가?”

“예. 저기 끝 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하면 여기까지 하고 자네는 가게. 나 혼자 갈 수 있네.”

“괜찮으신지…….”

“괜찮네. 가 보게.”

물론 다른 이들의 말로 추측하건대, 악마기사는 그녀에게 적대감까지는 갖고 있지 않을 거다. 사과하고 싶다는 발언으로 보아, 싫은 감정도 아마 최악의 수준까진 치닫진 않았겠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면 사과할 생각도 안 했을 테니까.

“…후.”

하지만 증오하지 않는다는 게 유감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악마기사가 유감을 가질 만한 조건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먼저 대현자란 칭호가 우스울 만큼 그의 상황을 개선시켜 주지 못한 것. 그가 상담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신뢰감을 주지 못한 것. 어려운 상황의 그에게 끝까지 지지를 보내 주지 못한 것. 인퀴지터를 막지 못하여 결국 둘이 마찰을 일으키게 만든 것. 사과하러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미룬 것…….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힘들었다. 아크메이지는 결국 문을 열지 못한 채로 그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이 문을 열 자격은 그녀에게 있을까? 평생 쌓아 온 경험은 그녀의 간절한 물음에도 답이란 걸 내려 주지 않는다.

“…….”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녀는 고요한 복도와 방문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녀가 온 것에 대해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정말 깊게 자고 있거나 그녀와 마주치기 싫음을 무언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역시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사위가 적막하면 적막할수록 강렬해지는 욕구는 자기 합리화의 핑계답게 정말 유혹적이다.

그녀의 발이 몇 번 떼어졌다가, 다시 제자리에 붙었다.

“용건이 있다면 들어와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그러나 그녀의 모든 가설은 기어이 들려온 말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내가 온 걸 알고 있었구나. 아크메이지의 손이 그녀도 모르게 기도하는 것처럼 모였다.

“…그래도 되겠나, 악마기사?”

한데 알았는데도 지금까지 반응하지 않았던 건 역시 무언의 거절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도 그녀가 눈치 없이 계속 미적거려서 결국 불러 준 게 아닐까?

말 한마디 뱉는 순간에도 불안감이 켜켜이 쌓였다.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래.”

더는 물러날 곳이 없기에 그 우울감은 더 심했다. 아크메이지는 망설이다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들어가겠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햇빛이 비치는 자리, 의자에 앉아 몸을 숙이고 있는 악마기사가 보였다. 그는 깊은 고뇌에 잠긴 사람처럼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팔로는 얼굴을 짚어 표정을 가리는 중이었다.

“힘들다면 나중에 대화해도 되네.”

“그대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귀중한 것이다. 할 말이 있다면 해라.”

정말이지, 나중에 오는 것이 정답이었겠군. 아크메이지는 또 실수했다는 괴로움에 침음을 삼켰다. 악마기사가 저리 말한 이상 물러날 수도 없다는 게 그녀에게 자괴감을 더했다.

“…배는 고프지 않나?”

차라리 신전과 마탑이 내놓은 답만 어서 말해 주고 가자. 아크메이지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그녀의 입은 반대로 행동했다. 지금껏 먹어 온 나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별로.”

“그, 그런가.”

반쯤 폐인이 되었던 인퀴지터가 세상에서 제일 대하기 힘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아크메이지는 그녀의 편협한 경험을 정정하며 깍지를 더욱 세게 꼈다.

“…그래도 식사를 거르진 말게. 먹어야 힘이 나지 않겠나.”

와중에 입에선 왜 계속 궁색한 발언만 나오는지. 악마기사가 불편하지 않도록 어서 용건만 말하고 가야 하건만, 정신머리가 도통 일이란 걸 하질 않는다.

“억지로 먹으란 의미는 당연히 아닐세. 그러니까, 내 말은 조금이라도 드는 게─”

아크메이지는 반쯤 백지가 된 영혼으로 입을 움직이다가, 말이 꼬이는 걸 느끼자마자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미안하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손이 서서히 풀렸다. 들린 시야에 이제 보이는 건 마찬가지로 허리를 막 펴고 있는 미묘한 얼굴의 악마기사다.

“정말로… 미안하네.”

“…그대가 왜 사과하지.”

아, 설마 그는 사과조차 기대하지 않고 있던 건가? 아크메이지는 순간 떠오른 어떤 것을 두고 입을 벙긋거렸다. 『이해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녀의 오랜 상처가 울컥 피를 토했다.

“…사과조차 기분이 나쁜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대가 사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지금껏 내가 자네에게 범한 실수가 이렇게 많은데도?”

“글쎄…….”

아크메이지는 관대함과는 사뭇 결이 다른 표정 앞에서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것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나.”

이건, 결코 너그러움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굳이 정의한다면 체념, 포기, 대강 그러한 것들이 기어이 자아낸 결과물이지.

“차라리 화를 내게.”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크메이지는 한없이 슬퍼졌다. 『난 그저 네가 날 응원해 줬으면 했을 뿐이었는데…….』 영원히 과거에 머물러 있을 그 사람과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이 겹쳐지며 방울진 슬픔이었다.

“대현자 주제에 뭐 이리 무능하냐고, 왜 자네에게 신뢰 하나 주지 못해서 자네가 도망가야만 하게 만들었냐고. 그렇게 화라도 내 주게.”

실망은 기대에서 나온다. 미움도 꺼림도 의식하고 있기에 생긴다. 강렬한 원망은 그만큼 곱씹기에 유지되며 증오는 사무치기 때문에 증오라 불린다.

“…제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모든 걸 포기하지 말게.”

결국 그런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도 상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버거운 삶이지 않았나.”

하므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일 수밖에 없다.

“초연하기엔 너무 지독한 세상이지 않았나…….”

그래. 그래 줄 것이라는 신임도, 과연 그렇게 해 줄까? 하는 기대도 내걸지 못하게 단념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체득된 포기와 반복된 체념이 이뤄 낸 무념이야말로…….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그렇게 모든 것을 절념한 채 끝에 이르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가장 섧었던 기억을 매만지며 조용히 눈꺼풀을 내렸다. 주르륵. 그녀의 눈앞 머리로부터 투명한 이슬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하얀 털에 가려 겉으론 드러나지 않을 낙루였다.

“…왜.”

하지만 어떤 낙루는 그렇지 않았다.

“왜 그렇게 말하지?”

하늘 몰래 흘러내린 빗방울이 소리 없이 턱으로 턱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뭉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작고 옅어서 흘러드는 빛에만 겨우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는 그대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악마기사.”

“그대들은 그대들의 사명을 다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소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악마기사…….”

“또한 그대들이 내게 저지른 실수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곳엔 나의 과실이 있으니.”

“…….”

“그런데 내가 어찌 그대들을 원망하겠나?”

아,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고 가장 거대한 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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