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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17화 (317/389)

317화 그럴 수만 있다면 (3)

“…너, 너 정말…….”

파우스트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의 귄터를 보며 눈꺼풀을 흐리게 접었다. 미안해요, 저만 살아서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전해도 부족할 진심은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는 천수 앞에 도로 삼켜지고 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시간이 많지가 않아요.”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영원했다면 파우스트는 이 꿈 같은 시간을 같은 말만 반복하며 보냈을지도 몰랐다.

“무, 무슨 말이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아니, 애초에 넌 정말…….”

그렇지만 그래선 안 된다.

소년은 너무도 관대하고 너무도 상냥하여, 소년 같은 존재에게도 기회를 준 이를 떠올렸다. 그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만든 주제에 이 이상 실망시킬 수는 없어. 강박과도 같은 마음이 소년에게 힘을 주었다.

파우스트는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자신이 할 말을 골랐다.

“형,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일단 제 말부터 들어 주세요.”

물론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귄터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겠지. 하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소년의 가족이 악마의 눈에 들고, 그들이 습격받아 모조리 죽거나 제물이 된 시점에서 피할 수 없게 된 운명이란 말이다.

“모든 질문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들어요. 들어 줘요, 형.”

하여 소년은 울듯 웃으며 귄터의 팔을 잡고 자신의 사정을 토해 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의 악몽을, 그 악몽이 괴로워 그가 범하고 만 죄악을 혀끝에 매달았다.

“우리는, 우리는 그날 악마에게 살해당했어요.”

아, 너무도 늦은 고백의 시간이었다.

* * *

“아빠?”

시작은 아버지가 온 줄 알고 달려 나간 여동생이었다.

“아빠가 왔나 봐!”

새해에 받은 용돈과 입학 기념으로 받은 용돈을 합쳐 사 준 원피스 자락이 팔랑거렸다. “아빠!” 참으로 눈부시게 흰 모습이었다. 마치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온 햇볕처럼.

“이리나!”

하지만 그 눈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모습이 아버지와 사뭇 다르단 걸 깨달은 순간, 아이가 얄팍한 소리를 내었다.

“아?”

일곱 살. 그 자그만 몸 한가운데서 장미꽃이 피었다. 이리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이에게 그런 뚜렷한 색은 정말로, 정말로 안 어울렸단 말이다.

“안 돼!”

하지만 이미 피었다. 꽂혔다.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까만 칼날이, 아니 마기가 농후하게 둘린 검날이 그렇게 꽃을 피웠다.

털썩. 아이의 조그만 몸이 쓰러지고 가장 가까이 있던 형이 뛰쳐 나갔다.

[넌 아니야.]

하지만 형은 검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 실력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아니면 쓰러지는 막내의 모습에 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려서?

모든 것이 정답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짜 답은 아니었다. 실력이고 뭐고 상대의 검은 너무도 빨랐을 뿐이므로 답이 될 수 없었다.

“컥.”

형의 목에 혈선이 그어지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엎어지던 모습이 참 눈에 선명했다.

“아서!”

쨍그랑. 형의 검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 떨어트린 머핀 쟁반의 금속음이 겹쳐지며 메아리를 일으켰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메아리였다.

“이 개자식이!”

그리고 그 속에서 누나가 달려 나갔다. 맹세컨대, 나는 누나가 이다지도 격정적으로 언성 높일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 알았다. 그 눈에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아니고.]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사실을 절대로 믿지 않았겠지. 사실 누나나 형이 죽는다는 것도 그랬겠지.

내 안에 있어서 두 사람은 언제나 무적이었으니까.

“도망가, 어서!”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나를 뒤로 당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쓰러지는 누나에게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했다. 누나의 가슴팍에 꽂혀 바닥까지 이어지는 그 칼날이 마치 꿈 같았다. 믿을 수 없다.

“파샤, 가!”

그렇지만 어머니가 식탁 근처에 있던 식칼을 쥐고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무언가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형제들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해도 당장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함을 말이다.

“나도 기사야!”

어떤 순간에도 무기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 두지 마라.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나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안 돼, 너라도 도망가!”

[이것도 아니야.]

하나 그건 이미 늦은 행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끌어당겼다. 하나 기묘하게 휘어 버린 검은 기어이 어머니의 배를 꿰뚫었다. “아악!” 내 팔도 함께였다.

[아.]

“무슨 일이야!”

[찾았다.]

칼에 찔린다는 건 이렇게 아픈 일이구나. 나는 순식간에 뽑혀 나간 칼날과 관통흔이 남은 팔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비명 사이로 들려왔으나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은 너무도 강렬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칼에 찔린 어머니도 한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아팠다. 너무 아팠다.

“어서 도망가, 요한나! 파우스트를 데리고 가!”

[뭐야, 넌.]

“나는, 나는 늦었어. 그러니 파우스트, 가렴. 너라도 몸을 피하거라.”

[방해하지 마.]

그런데도 당신께선 끝까지 나를 챙겨 주셨으니.

“사랑하는 내 아가, 어서 가!”

어머니는 찔린 배를 한 손으로 압박하는 한편, 내 등을 계속해서 밀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나는 팔이 찔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배를 찔리셨던 당신은 어떻게.

“도망가, 파우스트!”

멍하니 그 말을 따랐다. “사랑해.” 차라리 거기 남아 있었다면 당신들이랑 같이 죽기라도 했을 텐데. “살아.” 절박하게 말하는 그 말을 도저히 어길 수 없어서. “살아남으렴.” 피처럼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 말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안, 돼. 안 돼요.”

엉엉 울며 뒷문으로 달렸다. 마을로 달릴 수는 없었다. 적이 쳐들어온 앞문 방향이 하필이면 마을과 연결된 탓이다.

그러니까, 마을로 가려다가는 도리어 적과 마주칠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애꿎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옮길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형과 누나를 한순간에 죽인 칼날이 주민들에게도 향했다면 그들이 저항할 방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니 그쪽을 고를 수는 없다. 나는 확신할 수 없는 가능성을 대신해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성벽으로 가야 해. 그곳에서 마법사들을 찾아 본성에 연락해야 해. 그것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퍼어엉!

하지만 거대한 기운이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을 때, 나는 무언가를 직감한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구 형태로 퍼지는 불꽃과 순식간에 전소되며 남는 게 없어진 그 대지를 그저 목도했다.

[젠장, 인간 주제에 쓸데없이 강해서…….]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다.

[젠장, 몸이 붕괴하잖아. 빌어먹을, 이래서 마기를 아껴야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을 볼 수 없겠구나.

[라텔.]

절망이 눈물처럼 흐르고, 좌절이 새싹처럼 솟아 나를 감쌌다. 하얀 액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마치 슬라임처럼 내 몸을 감싸며 손과 발을 묶었다. 저항 따윈 꿈도 꿀 수 없었다. 그것은 내 덜 여문 육신보다 단단하고 또 질겼다.

[인간들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해…….]

그리고 그 흰 액체가 기어이 내 시야마저 덮었을 때, 나는 반쯤 정신을 잃었다.

사사사사삭. 반쯤 가려진 시야에는 나와 인간을 삼킨 액체가 대지 위를 스멀스멀 기는 중인 게 보였다. 아주 빠르게, 정말로 은밀하게. 마치 밀 사이를 스쳐 가는 바람처럼.

[…여기까지 왔으면 괜찮겠지.]

직후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다만 노을로 붉게 물든 성벽이나 그것을 조용히 넘어가던 백색의 무언가, 이윽고 펼쳐진 컴컴한 숲 따위는 분명히 보았다.

밤의 숲 사이로 은근하게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

[신이 주시하길래 뭔가 했는데,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너, 정말로 좋은 그릇이구나.]

그쯤 되어 나는 다시 사고란 걸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수준은 아니었다. 여름날의 얼음처럼 녹아 가는 인간이 시야 한 귀퉁이에 보이는데 그게 설마 정상일 리는 없으므로.

[뭐, 신이 널 눈여겨본 이유는 네 그릇이 아니라 네 영혼이 이다지도 거대해서겠지만…….]

그러나 환상과도 같은 그 인간은, 자신이 녹아내리건 말건 스스로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 올렸다. 그러자 인간의 붕괴가 좀 더 빨라졌다. 마치 검에게 모든 걸 빼앗기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 중요한 건, 그리도 거대한 영혼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네 육신이니까. 그렇지?]

아니… 그건 정말 검이었을까? 나는 검처럼 보이는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잠결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몽혼하여 판단이 잘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러려 노력했다.

[이름을 말해 주렴, 아이야.]

아, 검이 아니라 사람이구나. 한참의 집중 끝에 진실이 눈에 닿았다.

[너는 좋은 그릇을 가지고 있고, 너의 영혼은 제물로 쓰이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 분명 최고의 패가 되어 줄 거야.]

검처럼 보이는 그것은 사실 검이 아닌 가느다란 팔이었다. 새까만 옷에 둘러싸인 팔. 다만 가시처럼 뾰족한 본질 덕에 붙잡는 족족 베고 찌를 그런 것.

[그러니 내게 이름을 주렴. 내가 너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그저 달콤하게 말할 줄만 아는, 숨길 줄은 모르는 악의.

[응?]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런 존재에겐 뭐라고 해야 할까.

“…요.”

군야 형과 아탸 형은, 앨랴 누나는 뭐라 했을까.

“갈빗대 순서 바꿔 버리기 전에 나잇값 좀 처하세요, 쥐 밥알 같은 새끼야…….”

[…….]

나는 순찰 나간 그들이 했던 말을 간신히 떠올린 후, 다시 까무룩 잠들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멍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 이름을 빼앗지 못한 채로 몸을 차지하면 위험한데…….]

아, 부디. 다음에 일어났을 땐 이 악몽이 끝나 있기를.

[모르겠다. 애새끼인데 괜찮겠지.]

물론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다.

* * *

“버티려고 했어요. 버티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

귄터는 쏟아지는 고백 앞에서 망연히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저는 결국 그 악마와 계약을 맺었어요. 이기적이게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해 버렸다고.”

그의 가족과도 같았던 사람들의 실종에는 이런 사정이 얽혀 있던 거였구나.

“그래선 안 됐는데…….”

물론 누군가는 말하리라. 정말로 이 존재의 말을 믿는가?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증거도, 신뢰할 단서도 없는데? 하물며 신전 사람들은 이이를 칭할 때 대악마의 마기가 느껴지노라 했는데?

“그분을 도와주세요. 형, 부탁해요.”

하지만 귄터는, 한때 파샤란 동생을 가졌던 군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믿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믿었다. 증거가 없어도, 실증이 없어도 그의 동생임을 알 수 있었기에 그저 신뢰했다.

“내 모든 말이, 그리고 이 모습 자체가 악마의 기만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아무렴, 형이 동생을 믿지 않으면 누가 그를 믿어 주겠는가? 그의 동생이 이렇게 말하는데, 형인 그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어.

“그분은 이곳에서 이런 일을 당할 분이 아니에요. 절대로 이런 악몽 같은 곳에서 고통받아선 안 될 분이란 말이에요.”

다만 이 결정을 그의 기사들이, 주민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최소한 칭찬은 아닐 것이다. 소성주란 직위는, 앞으로 성주가 될 사람의 자리는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되는 법이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부탁만 하는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형밖에 없어요. 형은 신전에도 발언권이 있으니까…….”

“…파샤.”

그러나 그들의 지탄 따위가 두렵지는 않다. 애시당초 그가 처음부터 줄곧 말해 오지 않았던가.

그는 소성주로서 적합한 인재가 아니고, 소성주가 되고 싶은 사람도 아님을. 그저 한 사람의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고, 그 때문에 기사의 꿈을 꿨던 사람이며, 다만 그러지 못한 사람일 뿐임을. 그는 줄곧 외쳐 왔단 말이다.

“그분은 나를 위해 9년을 버티겠다고 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최소한 그 9년은 편하게 보내실 수 있게… 그 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그 9년만은 편을 들어 주세요. 그분이 더는 고통받지 않게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요.”

“파샤.”

“제발, 형…….”

“파우스트.”

그러므로. 그러했으므로.

“그럴게.”

그는, 귄터는 자신의 직함을 내버린 채 더 이상 소년이라 부를 수 없는 그의 동생을 끌어안았다.

“반드시 그래 줄게.”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았지만 영원히 가족이라 부르짖을 그 애를 품에 넣었다.

“난 널 믿어. 네가 하는 말도, 부탁하는 것도 전부. 그러니까 파샤… 뭐든 다 해 줄게. 뭐든 다 해 줄 거야.”

“……!”

“난 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다신 놓쳐선 안 될 온기였다.

“…형.”

“뭐든 해 줄게, 전부 해 줄 수 있어…….”

그는 우는 아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닿아 온 체온이 미적지근하여 서러웠으나,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어린 동생이 살아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파샤 제발. 제발 다신 사라지지 말아 줘.”

이것이 다신 사라지지만 않으면, 그는 정말 그걸로 충분했다…….

“너희가 없는 시간이 너무 괴로웠어… 너무 괴로웠다고…….”

“…군야 형.”

아, 이 순간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가지 마. 다신 떠나지 마.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제발 내 옆에 있어 줘…….”

귄터는 몸만 커졌을 뿐인, 여전히 그 시절 그 과거에 박제된 소년을 끌어안은 채 빌었다.

부디 이게 그의 헛된 망상이 아니기를, 네가 내게 돌아와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부디 내가 만든 환상이 아니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 미련 없이 바칠 수 있으니.

“…그건 안 돼요. 전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네게 왜 자격이 없어!”

그러나 그의 절실한 바람에도 원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네게 왜 자격이 없는데!”

그는 보석이 되지 못한 재를 붙잡은 채 절박하게 외쳤다. 그건 일종의 발악과도 같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몸부림, 인생의 의미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발버둥. 대충 그러한 것들.

“네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왜……!”

“형, 형…….”

하나 그 간절함을 두고 소년이 울듯 웃었다. 어딘가 달라졌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악마가 떠나기 전까지, 저는 멋대로 육체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어요.”

“왜, 왜……!”

“많은 이유가 있지만… 형이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마 이것 하나겠죠.”

참 가볍다 싶을 정도로, 맑고 고운 웃음.

“제가 이렇게 나와 있으면, 전 얼마 안 가 죽어요. 봐요, 지금도 코피가 이렇게 흐르잖아요. 수명이 쓰이고 있다는 증거예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과 주르륵 흐르는 코피는 이다지도 무거운데.

“어째서, 어째서…….”

“…그러니까, 어차피 그분에게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저는 그분의 뜻대로 따르고 싶어요. 지금도 염치 없기만 한데, 여기서 그분의 거취까지 제가 멋대로 정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나는 네가…….”

“…미안해요, 미안해요, 형.”

귄터는 소년의 사과를 두고 온전히 깨달았다. 나는 네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겠구나. 또다시 너는 나를 떠나겠구나. 나는 다시 혼자가…….

“…괜찮아.”

하나 그는 또 하나의 진리를 자각했다.

“괜찮아. 네가 살아만 있으면, 난 다 괜찮아…….”

생사조차 모르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돈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냥, 살아만 줘. 살아만 줘, 파샤…….”

그래, 그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일도 아니었다…….

귄터는 그저 고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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